˚우리는 우리가 우연히 만드는 새로운 관계를 기존의 범주에 집어넣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거기에서 일반적이거나 공통적인 것을 본다. 반면 당사자들은 개별적이고 자신들에게 특수한 것만 본다—느낀다. 우리는 말한다, 얼마나 뻔한가. 그들은 말한다, 얼마나 놀라운가!˚


영국식으로 보이는 냉소적 유머와 자의식에 가득찬 주인공 케이시 폴이 젊은 시절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두 딸을 둔 40대 여성과 사랑하며 함께했던 한 때를 회상하는 것이 1장의 내용이다. 방학 중 뒹굴거리던 폴은 부모의 성화에 못이겨 테니스 클럽에 입회하게 된다. 테니스 클럽은 중산층 보수당의 인맥 형성 거점 장소로, 부모들은 폴에게 그들의 입맛에 맞는 낙천적 소유의 멋진 크리스틴이나 버지니아 같은 이름을 가진 또래 여성을 만나 교재하기를 원했던 것인데, 폴은 복식 경기에서 만난 미시즈 수전 매클라우드를 데리고 온다. 이후 젊은 시절 수전과 다니면서 생긴 잘잘한 일화들과 그 일화를 떠올리다 가지를 친 다른 이야기들과 그 때 했던 생각들로 전반부의 내용이 두서없이 서술된다. 

대체 20살도 안된 어린 아이와 사귀는 엄마 나이의 수잔은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 수전의 성격은 폴의  회상 속에서 조금씩 드러난다. 어릴 때는 성추행을 당했고,  전쟁 중에 애인을 잃었고, 참전하지 못한 못난이들과 사귀다 결혼한 남자가 현재의 남편 고든이다. 딸 둘을 기적적으로 낳은 후로 남편과의 사이에는 관계가 없고, 서로 눈을 쳐다본 지도 오래 되었다. 폴은 수잔의 남편이 수잔에게 몸이 냉랭하다고 한 것에 분개하며 그녀를 사랑으로 지켜주겠다고 생각하며 약 12년간 함께한 시간을 현재의 시점에서 뒤돌본다.

1장에는 그 여자의 사랑이라는 자극적 소재만큼 자극적이거나 충격적 이야기가 들어있지 않다. 둘이 섹스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폴은 영국 보수적 중산층 계급의 신물나고 뻔한 모습을 위선적으로 느끼고, 수전의 모든 행동과 대화에서 새로운 기법의 유머와 진실됨 그리고 지적인 충만함, 모험심 같은 것들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이 때의 폴의 나이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콜필드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파울 보이머로, 정신연령과 어른들의 위선에 대한 강한 저항감으로 일탈을 저지르는 농도가 콜필드와 유사하다.

˚나와 수전의 관계는 낡은 규범만큼이나 새 규범에도 거슬리는 것이 되어버렸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서술 도중 자신의 기억과 기억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전하기도 하고 기억의 본질인 왜곡에 대한 사색이 쉴새 없이 끼어드는데, 이러한 의식의 흐름은 작가의 전작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간접적으로 보여준 내용에 불필요한 설명을 얹었다는 느낌이다. 

현재이건 과거이건 어느 공간에서건 유부녀와의 연애는 터부시되어 왔고, 금기였기에, 둘의 연애는 대개 비밀리에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읽다 보면, 이 사람들이 대놓고 연애를 했는가 싶은 상황을 자주 맞닥뜨린다. 폴은 천연덕스럽게 수잔의 집에 방문하여 그 집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고, 수잔의 남편과 이야기를 하고, 때로는 오밤중에 찾아가 그 곳에서 자고 싶어한다. 부모가 찾아와서 데려가기는 했지만, 이런 아슬아슬한 연애를 펼치면서도 둘 중 어느 하나도 죄책감을 느끼거나 발각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폴은 수전의 남편이 수전을 냉랭하다고 비난한 것에 대한 대가이며, 가부장적 분위기를 보면서 부부관계도 전혀 없는 이 가정에서 수잔을 구출해야 겠다는 생각 뿐이다. 수전의 결혼 생활이 폭력으로 점철되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 이후에 폴과의 관계에서 형체를 갖출 그녀의 불행의 원천으로 해석된다.

˚나는 수전과 나 사이에 벌어지는 일은 그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서술의 시점이 1인칭으로 시작되었다가 2인칭과 3인칭으로 옮겨지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읽다가 어느 순간 시점이 너로 바뀌어져 있는 점이 특이해서 찾아보니, 그 이유는 애초에 작가가 스스로 밝히고 있다.  즉 사랑이 1인칭이었던 순간, ‘나‘의 시선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3인칭으로서는 설명이 불가능한 콩깍지 연애 감정의 일화들을 1인칭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첫사랑은 늘 압도적인 일인칭으로 벌어진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압도적 현재형으로. 다른 사람들, 다른 시제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어느 순간 시점은 ‘너‘로 바뀌어있다. 수전과 함께하는 동안, 수전이 겪는, 아니 수전 스스로 자초하는 불행은 폴이 어쩔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반대와 혐오의 시선을 이기고 함께 시작한 삶에서 비록 평탄치는 않을 지라도 행복을 기대했을 폴에게, 수전은 이미 스스로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던 걸까. 나는 그가 수전의 불행을 서술하고, 수전에게서 서서히 멀어져가는 자신을 너라고 지칭하는 시점 속에서 어떤 비난조의 톤이 느껴졌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을 테지만. 나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반려자로 선택해야 했던 그 많은 이유를 설명하지만, 너는 네가 스스로 책임져야 할 그 몹쓸 불장난으로 인한 책임을 스스로 설명하지 못해 타자의 입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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