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도미난스 - 지배하는 인간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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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에렉투스가 사라져가던 쓸쓸한 풍경을 생각해본다.  최초로 아프리카를 떠나 대륙으로 퍼져갔던 그들은 호모사피엔스가 출연한 이후 열등한 개체로서 추상적 사유와 언어와 도구들이 만들어내는 힘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한 채 유전자만을 전달해주고 멸망했다. 새로운 유전자로 명민함을 얻은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우주를 정복하고, 더는 정복할 것도 뭐도 없다면 이제 무엇을 바랄까. 생존경쟁에서 유리한 조건이 무언가를 차지하고 뺏고 가지려는 정복 욕망이라면, 자연을 정복하고 우주까지 이해한 우리가 눈길을 돌릴 곳은 이제 인간이다. 다른 사람의 몫을 쉽게 차지할 수 있는 능력. 그게 무엇이건 그것을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질 것이고 생존에 유리해지고 더 많이 번식할 것이다. 그 능력을 갖지 못해 빼앗기고 정복된 비능력자들은 호모 에렉투스이 사라져가던 날들처럼 조금씩 수가 줄고 멸종의 날을 기다리게 될 지도 모른다.  작가는 새로운 유전자를 가진 초능력자들이 호모 사피엔스들을 대체하게 되는 시간을 상상했다.  


초능력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조정할 수 있다면 어디까지 가능할까. 오른쪽 손으로 왼쪽 눈을 파내. 네 아이의 목을 졸라. 자신의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도 명령만으로 그런 끔찍한 방법의 폭력과 살인이 가능한 것은 그 보이지 않는 힘이 타인의 의지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능력까지 부여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한쪽 눈을 파내고 어린 자식을 죽이는 끔찍한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흰원숭이들이라 불리우는 초능력자들의 한계 없는 막강한 파워를 잘 보여준다. 몸이 알아서 죽을 방법을 찾아내고,  침착해지는 방법을 찾아낸다. 숨쉬지 마. 명령을 들은 소년들은 숨을 참고, 죽어간다. 


명령은 자기 자신을 제어하는 데도 유용하다. 의지만으로는 절대로 되지 않는, 충동사라는 초능력을 이용한 자살은 끝없는 욕망의 충족이 얼마나 덧없고 허망한 것일지를 짐작하게 한다. 칼을 들고 덤비던 사람도 말 한마디에 무릎 꿇릴 수 있는 신적 능력은 오히려 삶을 권태와 무기력으로 몰아가고, 삶의 의지를 갑작스럽게 박탈한다. 죽어. 이 한마디면 쉽게 자신의 몸을 죽음으로 바꿀 수 있다. 이 얼마나 새털처럼 가볍고 쉬운 죽음인가. 가지고 가지고 또 가져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 권태는 인간이 꿈을 품고 하나씩 이루며 살아가는 것의 즐거움을 빼앗기는 종류의 것을 말할까.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끝없는 절망과 끝없는 충족은 결국 죽음의 충동으로 만날 수 있다는 발상이  충족되지 않는 나약한 자아를 위로한다.


초능력이 인류에게 해가 될 것임을 알고 개인을 구속하고 정보와 조직을 독점하고자 하는 백원단, 악의 세력을 초능력의 힘으로 뿌리 뽑고 가난과 폭력으로부터 제3 세계를 지켜내고자 하는 저우환우와 그 둘의 계승자들은 모두 공동선이라는 목적을 가졌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은 다르다. 반면 철저한 개인주의자 천슈란은 백원단도 저우환우도 못마땅하다. 그녀에게 백원단의 활동은 정의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자신의 파워를 약화시키는 악으로 읽히는 것이다. 행동주의자인 방바재단 측에게도 백원단의 활동은 위협이다. 악인으로 등장하는 천슈린이지만 개인의 파워를 제한하기 위해 정보를 독점하는 일에 반대하는 입장은 묘한 설득력을 갖는다. 

숨쉬지 말라는 명령에 스스로 숨쉬지 않아 발생한  죽음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공공의 선을 위해 개인의 파워를 무력화하고자 했던 백원단의 철학은 가치있는 것일까. 파워를 이용해 마약조직들을 무력화시킨 것이 더 옳을까, 그런 선의의 초능력 사용마저도 장기적 관점에서는 인류의 위협으로 보고 약화시키려 했던 백원단이 옳을까. 참으로 많은 질문들을 던진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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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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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적으로 흐르는 시간은 불연속적인 조각의 기억으로 개인에게 남겨진다. 흐르던 시간 중에서 어떤 순간의 조각이 선택되고 남겨졌느냐에 따라 개인의 역사는 달라진다. 얇은 조각의 단서만으로 변형되고 윤색된 기억들은 그 개별적 인간의 역사가 된다.  남겨진 조각은 전체 맥락을 이해할만큼 충분히 많지 않으며,  순서 없이 섟이고 때로 부정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은 과거로 가는, 과거를 보는 유일한 수단이다.


삶 자체가 누군가의 기억이라면 어떨까. 달이 뜨지 않는 그믐날 밤 우주의 어딘가에서 날아온 미세한 '우주 알'이라는 입자가 남자에게 묻는다. 들어가도 도 돼?  응. 우주알을 받아들인 대가로 선물처럼 주어진 능력은 시간 사이를 맘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힘이다.  책장을 펼치듯 삶의 어느 지점으로도 순간이동할 수 있다면 나는 과거의 어떤 한 때로라도 돌아가고 싶을까? 바꿀 수도 없다면 무엇이 과거로 돌아가게 만들 수 있을까. 추억이라면 기억이 더 아룸답지 않은가. 후회할 과거는 바꿀 수도 없고 다가올 미래도 별에 새겨진 운명같이 피할 수 없는데.가까이 다가올 끔찍한 죽음을 안다면, 바꿀 수 없는 숙명을 어찌하면 좋을까.


용서했지만, 용서하지 않았고, 용서하지 않았지만 또 용서했던 모순 갈피갈피들이 세찬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스러질듯 부서질듯 위태롭게 죽은자의 어미의 삶을 지탱하게 하지만, 그것은 이미 죄값을 치른 남자에게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듯한 형벌었을 것이다. 끝내 자신의 죽음을 덤덤히 수용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본능적 모성애의 굴레만이 남아있을 뿐.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죽음이 덤덤할 수 있었던 이유가 속죄였을까 체념이었을까. 그 어떤 미물이라 하더라도 생명은 소중한 것이기에 벌을 받아야 했던 남자를 지켜보지만. 자식을 죽인 살인자에 대한 집착으로 남은 생을 살아가게 하는 유일하게 에너지를 얻어가는 어미를 이해하면서도 그 집착이 혐오스러웠다. 


살인자를 사랑하는 여자가 기억하는 기억의 조각은 진실과 떨어져있다. 가해자에게 가해의 역사는 없다.  피해만 남아있는 여자는 피해자다. 애초의 살인이 교내 따돌림과 폭력에서 기인했지만, 살인자를 사랑하는 여자가 실은 그런 학교 폭력의 가해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같은 충격이었다. 여자는 부정하지만 친구는 이를 재확인시켜준다. 맞어. 너 그랬어. 내가 누군가에게 인생을 바꿀만큼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은 퇴색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그것은 나의 역사가 아닌 피해자만의 역사가 된다.  죽은자의 어미도 일진이었던 아들 형수를 사랑스러운 아이로만 기억한다. 


그러나 남자가 보는 과거의 시간은 기억이 아니다. 일부만 남겨진 윤색된 이미지가 아니다.  제본이 잘려 낱장 낱장 흩어진 책의 페이지처럼 선명하게 인쇄된 삶의 자락이다.  자신을 괴롭히던 일진을 죽여 죄값을 치르고 나니 이제 일진의 엄마가 그를 쫓는다. 그 앞에 놓려진 미래는 더 슬프다.  사랑을 향한 바람은 죽음과 함께 흩어질 것이다.  시간이 알고 있는 진실은 오로지 하나 뿐이지만 기억에 새겨지는 진실은 강렬한 감정을 일으킨 순간 뿐이기에 미래를 알고 있는 남자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 직전에 여자를 떠남으로써 여자에게 남겨질 남자에 대한 기억을 공포애서 구해낸다. 더욱 슬픈 건 일진 엄마의 자신을 위한 복수를 합리화시켜주기 위해 취한 행동이다. 스스로를 죽음에 내 맡기고도 모자라 사람들에게 거짓 기억을 심어 놓다니. 이것이 속죄였을까. 이렇게까지 철저히 자신을 버려야 했을까. 


기억 속의 어떤 일은 삶의 문맥 속에서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인지를 구분하지 않는다. 이 모든 끔찍하고 힘겨운 순간을 살아내고도, 다시 돌아가서 다시 또 삶을 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이유가 있다고, 남자는 생각한다. 살인자라고 낙인 찍힌 그 힘겨운 삶을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 그것이 사랑인 것이다. 우리는 기억이 모두 필터링 하고 남겨 놓은 그 마지막 조각 그것만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만일 진실된 과거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기억과는 다른 진실과 마주해야 하는 부담을 갖게 된다. 돌아가게 된다면 무엇이 이유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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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북
이산하 지음 / 양철북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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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강물이 여울을 만나 세고 빠른 물살을 만들어내는 열아홉.  짧은 시간의 선택이 인생 전부의 진로를 결정하고 기회와 고비가 교차하는 무자비한 시간. 우리는 모두 그 시간들을 겪어냈다. 그 여울목 시간 속에 각인된 역사의 풍광은 삶이 만나는 골목 골목 마다 가치가 되어 조용히 앞길을 비춘다. 80년대에 여울목을 만나는 청춘의 강물은 거칠고 빨랐다.  제도권 교육이 단절시켰던 역사와 처음으로 대면하던 그 시간 열병처럼 치러야 했던 성인식은 은폐된 진실과 처음 마주한 폭로의 자리였다.  알 바깥의 세상을 두드리는 젊은 혈기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몸살을 앓았다. 활짝 열린 문 밖에서 추악한 세상을 준비되지 않은 맨 몸으로 맞선 격변의 80년대를 지나는 청춘의 누군가는 피흘리며 역사를 만들었고,  또다른 누군가는 그들의 피값으로 치러낸 민주화라는 열차에 무임승차했다.


알을 깨고 나온 주인공 양철북이 작품 바깥으로 나와 쓴 장편시 <한라산>은  작가 이산하 자신이었다. 고행과도 같았고, 순례의 길과도 같았고, 또한 낭만과 문학적 교감의 길이기도 했던 열아홉 여울목을 건너며 단단한 삶의 가치를 다져왔던 주인공 양철북은 책 바깥으로 알을 깨고 나왔을 때 거침없이 양철북을 두드렸다. 길 위에서 잔잔한 파동을 그리며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고, 스님과 양철북은 익살과 유머로 생을 탐구하듯 철학적 화두를 던진다. 권터 그라스의 <양철북>과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철북과 스님의 여행을 상징하는 주요 알레고리다. 여행은 철북에게 알을 깨고 나와 세상을 향해 양철북을 두드리기 위한 과정이다. 여행이 끝난 후, 작품 바깥에서 책이 아닌 진짜 세상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어간 80년대 역사의 그 현장 속에 생생하게 족적을 남긴 격동의 드라마, 진짜 이야기는 후기라는 형태로 독자들의 궁금증을 해소시켜준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철북은 아직 알 속에 있다. 19세라는 강의 여울목을 건너는 철북은 책으로 세상을 배웠다. 걸핏하면 책의 구절을 인용하며 마치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가 아는 세상은 책이라는 알 껍질 속에 갇힌 작고 보호된 세상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그 알 속에 갇힌 아직 열아홉 소년, 양철북 속의 난장이이기도 하다. 소설 속을 나와 알깨기 신고식을 치르면, 작고 보잘 것 없는 힘으로 세상을 향해 힘껏 북을 두드려 세상 유리창을 부수고 모든 부조리들을 직접 상대하게 될 것이었다.  


둘은 걷고 또 걷는다. 별을 이불삼아, 풀꽃들을 베개삼아 섬진강변에서 야영을 하기도 하고, 힘겹게 오른 깊은 숲 속 암자에 사는 다른 스님의 거처에서 신세를 지기도 한다. 때로 수도원에서 만난 수녀님과 스님의 은밀한 과거의 썸을 상상해 보기도 하지만 특별한 사건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는다. 단지 서로의 과거를 만날 뿐이고, 그 과거의 인연이 현재의 새로운 만남을 맺고 떠나고 울며 다시 그것이 과거가 되는 순환을 경험할 뿐이다. 그리고 그 길속에서 나누는 책 이야기도 종교적 질문도 모두 인생이라는 길 위에 던지는 질문이고 이야기이다. 아웅다웅 티격태격 그들이 걷는 그 길 위에 모든 것이 있다. 


시간이 흐른 오늘, 양철북은 작가이기도 하면서 작가가 만든 허구의 인물이기도 하리라. 작가의 기억 속에 아로 새긴 열아홉 여울목의 경험은 그 이후 감내해야 했던 모진 수모의 시간들을 반추하더라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모으고 붙여 역사를 바꾸게 했던,  개인의 성공과 바꾸지 않았던 소중한 삶의 한 조각이었음을, 아름다운 시절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열아홉 여울의 아름다움이 드라마틱하고 생생했던 격동의 역사 한복판으로 양철북을 데려가지 않고, 다만 후기에 그 일을 언급한 이유일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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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나라 - 제5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이광재 지음 / 다산책방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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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일이다. 전봉준을 알았으나, 교과서에서 배운 한 줄 그게 전부였다. 때로 역사 소설과 대하 드라마에서도 등장했겠지만 사적 감정들과 액션 활극이 난무하는 드라마의 틈새에서 반짝 나타났다 사라졌을 것이다. 오래 전 체게바라가 유행해서, 체게바라 티셔츠를 입고 다니던 시절을 떠올려봤다. 공산주의 혁명의 정신이 낭만이 된 이유는 공산주의가 거의 완전히 몰락했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전봉준은,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은 여전히 현실이고 아픔이다. 지난 100여년간 다른 이름으로 계속되어 온 길고 험난한 여정이었다. 무엇이 남았을까.

 

혼불문학상은 최명희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으로 그가 삶의 마지막과 바꾼 역작 <혼불>의 상징성을 반영한다. 오래 전 그 책을 읽으려고 시도해본 적이 있었는데, 실패했다. 읽기에 실패한 건 독자로서 나의 문제였고, 그와는 별개로 최명희 문학관에 가서 최명희의 삶을 조명해보고, 소설 혼불에 나오는 여러가지 장소와 소설가에 대한 에피소드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작품의 위대함을 체감할 수 있었다. 나는 너무 무지했고(지금도 그렇고)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았다. 한국말인데 무슨 뜻인지 문장 해석이 어려울 만큼 모르는 소리가 많았다. 이 광재의 <나라 없는 나라> 역시 혼불 못지 않게 어려운 단어가 많다. 어려운 단어를 찾아가며 꾸역꾸역 끝까지 읽었다. 끝까지 읽은 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어떤 책이든 끝까지 읽어봐야 한다. 감동은 맨 마지막줄이 끝나야 가시화된다.

 

이순신공을 엄청 존경하지만, 이름 없는 민초들 없는 승리를 상상할 수 없듯, 동학농민혁명의 전 과정이 전봉준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올해 혼불 문학상의 대상 이광재 작가는 평생 많은 시간을 들여 전봉준을 연구한 것으로 보이는 데, 얼마 전 전봉준 평전 봉준이 온다(2012)를 펴내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이 책을 들었을 때 전봉준의 활약에 서사가 집중되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전봉준은 이 소설에서 원톱 주인공도 아니고, 조금 비중 있게 다루어졌을 뿐이다. 풍전등화 같이 스러져가는 조선 말기 정치적 상황과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후에 명명한 사건의 거대한 흐름을 재현한 서사를 축으로 엄청나게 많은 인물들의 개별적인 활동들을 한명씩 비추며 채워간다.

 

물론 교과서를 통해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혁명은 실패했고, 전봉준은 잡혀가서 사형당해 죽었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전봉준을 따르던 자들 왜 무엇 때문에 어떻게 어디까지 일이 진전되었는지에 대해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전봉준을 후원하던 이들, 그 많은 군사들과 무기를 어우를 수 있는 조직력과 리더쉽의 정체가 무엇이었으며, 혁명은 어느 수준이었을까. 레미제라블을 통해 파리의 시민들이 깃발을 휘날리며 바리케이트를 치고 총칼에 맞아 죽어가던 숭고한 자유라는 그 사상적 기반을 흠모하는 동안, 우리는 글자조차 제대로 배울 수 없었던 농민들이 어떻게 신분철폐와 집강소 설치와 같은 혁명적 성과를 이룬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부끄러움을 알게 하는 것도 시대와 역사 속에서 문학이 하는 일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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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 - 진화의 욕망이 만들어가는 64가지 인류의 미래
카터 핍스 지음, 이진영 옮김 / 김영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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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그 자체가 모르는 것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증거가 있어야 성립되는 것이기에 자체적인 틈을 항상 지닌다. 모르는 것을 하나 알게 되었을때 그 작은 앎은 다른 앎의 단서가 되어 앎의 도약을 가져다 준다. 그러니 과학은 완벽할 수 없다. 반면 신의 논리는 증거가 필요없다. 이렇게 꿰어 맞춰도 저렇게 꿰어 맞춰도 말하는 사람 맘대로 그 무엇이라도 진실이라 주장할 수 있다. 반대로 과학은 탐구하는 것 자체가 불완전한 앎을 바탕으로 하므로 과학 내에서의 자체적 공격과 함께 발전이 이루어진다. 토마스 쿤의 말하는 과학혁명과 패러다임의 구조라는 것이 쉽게 말해 그러한 것들이지 싶다. 헛점들이 점점 많아지고 많은 헛점들을 설명하는 새로운 이론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것들 말이다. 자연현상의 아름다운 질서를 정확한 근원적 원리 추구라는 믿음에서 행하는 과학으로서는 참으로 모순되는 현상이지 말이다. 그래도 과학은 과학이다. 증거가 있는 과학은 증거가 없는 것들의 틈새로 계속 의혹을 받지만 애초 처음부터 증거로 측정하지 않고 않고 마음의 힘, 즉 믿음으로 따지는 종교는 아무 지적 호기심 없이도 받아들이기가 훨씬 용이하니 말이다.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은 그냥 비현실적인 것 믿음의 산 위에 올려놓고 절을 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종교라는 것이 모르면 모를 수록 더욱 신비한 것이 되고 더 많은 추종자들을 많이 갖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많이 모르는데 그 모든 것이 창조주의 뜻이 아니라면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조금 아는 것은 위험하다. 더 위험한 것은 믿는 것을 아는 걸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방안에 고양이가 없는데 고양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고양이는 마음속에서 생겨났고 그 마음이 어떤 물질적인 것, 즉 달빛에 비친 커튼 자락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 그림자를 고양이로 착각하여 그 물리적인 현상들을 고양이로 인식할 때 고양이는 마음속에서 생겨난다. 이 때 방안에서 없는 고양이가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고양이는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분명 없지만 그는 고양이 소리를 들었고 움직이는 것을 물질적으로 보았다고 믿고 있으므로 그의 세계 속에서 분명 고양이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고양이는 방안에 있다는 것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믿는 것을 아는 걸로 착각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자신이 아는 것(즉 자신이 믿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착각한 것을 세상의 진리인 양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믿음을 통해 그것을 보라고 말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때때로 혹은 자주 마음의 위안이 되고, 그 위안에 스스로를 먹잇감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방에 함께 있으면 쥐가 사라질 것 아닌가. 고양이는 결코 강아지처럼 내게 다가와 꼬리를 치거나 짖지 않을테지만 그 고양이를 위해 무언가 먹을 곳을 준비해두는 행위가 사회에 만연되었을 때, 인간은 본질을 벗어난 그 무엇이 된다. 


과학의 틈새를 공격하기는 쉽다. 과학은 때때로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복잡한 것이기에 불통의 결과로 알아낸 틈과 헛점이 언제나 풍부한 먹잇감이 되기 때문이다. 사상가 혹은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이 비주류이든 주류이든 과학의 틈새를 비집고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모르는 것을 인정할만큼 용기 있어서가 아니라 모르는 것을 통해 얻어낸 통찰(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더 모르는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을만큼 무식할 수 있어서일 수도 있다. 



철학책이나 사상적 저술들을 읽으면 자주 분개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뭔가를 주장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그게 확실하지 않을 때 그렇다. 이게 이과를 나온 사람의 한계라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다  내가 이과를 간 이유는 먹고 살기에 더 유리한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 하나 뿐. 외우는 걸 공부로 알고 있던 시대에 태어났으므로 암기력이 신통치 않은 나는 숫자들에게도 결코 능하지 않은 점을 그닥 문제삼지 않기로 했던 점까지 고려된 것도 아니다.  뭐 어려우면 지가 얼마나 어렵겠어. 어떤 한계가 생기면 이해의 한계가 도무지 따라갈 수 없을 때 차선으로 암기라도 해야 되는 세계가 이과에도 있음을 깨닫고 난 후에도 나는 문과에 대한 자격지심과 자만심 사이의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뭔가 고매한 것 뭔가 내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들을 그들이 배울지도 모른다능 생각. 그것들을 나는 영원히 모르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그것들은 별로 쓸모없는 것들이라는 생각들이 마구 섞인 어떤 것이었다. 


책의 내용이 과학적인 내용이 아니라면 제목을 과학서 느낌을 주면 안된다는 생각을 우선 한다. 진화론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과학책일 필요는 없다. 과학과 비과학이냐를 따지는 것 자체가 치졸하고 무식한 행위라는 것쯤은 안다. 그래도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진화라면 생물학적 진화를 우선 생각하게 된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문화와 사상과 의식과 영혼의 진화를 말한다. 언젠가부터 나는 인간이 변화하는 과정을 진보라는 어휘로 쓰지 않겠다고 나름 혼자서 결심한 터였다. 진보라는 말, 발전이라는 말, 이런 어휘 속에는 과거보다 나은 현재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그리게 되는데 과연 인류가 인류의 영혼이 발전하거나 진보하거나 심지어 진화하고 있다는 의미를 숨기고 있는 이 말들은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폭력과 억압과 온갖 보이지 않는 구조적 부조리와 불공평함들을 발전의 한 과정으로 인식하게 한다. 한 세기도 지나기 전에 겪은 숱한 홀로코스트 학살과 캄보디아 학살과 여전히 지구인의 1/6이 굶어 죽어나가는 동안,  꼼짝 없이 갇혀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채 꾸역꾸역 배불리 자신을 살찌우는 운명의 소들이 공존하는 세상을 1천년전 2천년전 혹은 문자 이전의 더 더 더 오래전 인류와 비교해서 진화라고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여기까지는 나의 생각이다.  저자는 진화를 문화적인 것, 영혼적인 것, 종교적인 것, 철학적인 것, 그리고 과학적인 것들과 함께 접목한다. 이 두꺼운 저서의 모든 페이지를 통해 책의 저자가 가장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은 '진화는 사실이다'라는 점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에는 진화론과 창조론 사이의 어쩌면 이미 논쟁의 가치조차 없는 해묵은 논쟁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진보와 보수, 자유와 억압, 최대의 부와 최하층민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공존하는 미국 사회에서 창조론이 아직도 굳건히 버티고 있는 이유는 미국 설립이 청교도의 기독교 정신을 반영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유명 고등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않고 대신 창조론을 가르치는 곳이 있을 정도라면, 아직도 논쟁은 가라앉을 기미가 없는 모양이다. 가치가 없는 것에 자꾸 대꾸를 하면 이슈화가 되는데 아마도 이미 유명해진 리처드 도킨스가 자신의 개인적 신념인 무신론을 통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자꾸 건드리면서 점점 더 확대되었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진화는 진보한다기보다는 두서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진행된다. " ... 마이클 머피가 한 말이다. p114


이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무작위성과 복잡성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이다. 저자는 다르게 생각한다. 괴퇴의 "진보는 그냥 일직선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진보와 후퇴가 거듭되는 나선형의 리듬을 따라간다"를 인용하며 역사상 심각한 후퇴나 걸림돌은 진화의 새로운 발전을 위한 배경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처럼 몇억년 동안, 후퇴가 발전의 전조가 된다는 경향이 들어맞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길게 보면 이런 후퇴가 발전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우세했고, 그래서 인간은 지적이고 사색적이며 자의식이 강하고, 도덕적으로 깨어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지적이고, 사색적이고 자의식이 강하고 도덕적으로 깨어있는(솔직히 인간이 도덕적으로 전보다 더 깨어있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삶을 발전으로 본다는 점이다. 이 점이 내 생각과 다르다. 그리고 책은 전체적으로 같은 맥락으로 쓰여졌다. 많은 철학자, 과학자, 영성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저자의 생각, 즉 인간이 어디론가 한 곳을 향해 가고 있다는 그 생각을 발전시킨다. 


켄 윌버, 찰스 샌더스 퍼스 등 저평가되어온 철학자들의 사상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대우주 중심의 사고와 진화적 도덕성은 그들의 생각을 대변한다. 진화적 우주에서,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도덕성도 진화한다는 것이다. 르네상스에 참여한 고작 1천여명에 이르는 혁명적 선택으로 인해 미래의 초석이 된 계몽주의가 생겨났고, 그것이 다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미래의 구조가 되는 1천명에 의해 거대한 미래의 씨앗이 심어지게 될 것이라는 게 윌버의 생각이다. 


저자의 생각은 더 나아간다. 종교적 신념이 왜 진화하는가 라고 묻는다는 것은 이미 종교적 신념이 진화한다고 믿는 사실에 근거한다. 종교적 신넘이 진화한다는 것은 세계관이 변화함에 따라 영적 종교적 경험을 해석하는 방법이 변화하는 것을 뜻하는 듯하다. 그는 종교 vs 과학, 신앙 vs 이성, 믿음 vs 미신, 논리 vs 이성, 초자연주의 vs 자연주의 식의 이분법을 경계한다. 진화와 영성이라는 '두 단어는 신의 유전자 또는 믿음의 본능을 찾으려 하는 종교적 충동의 진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속에서 만나게 되었다'며 새로운 진화적 영성을 정의내릴 때는 과거의 초월적인 상태나 신비로움과 같은 편견을 깨고  의식, 문화, 우주 속에서 궁극적으로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앞으로 움직인다는 것인데, 이러한 새로운 신성은 과거의 보수성에 갇히지 않은 신이며, 미래적이고 세상을 포용하는 신이라고 하는데, 맞게 이해했는지도, 또 그래서 무엇을 주장하려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인간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해답은 미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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