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라이시의 자본주의를 구하라 - 상위 1%의 독주를 멈추게 하는 법
로버트 라이시 지음, 안기순 옮김 / 김영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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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억압의 또다른 이름이다. 부자들에게 자유는 가난한 자들의 몫을 빼앗을 자유이다. 재벌들에게 규제철폐는 재벌들이 일반인들의 몫을 충분히 약탈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시스템을 통해 합법적으로 강도질할 자유를 뜻한다.  민주주의와 함께하는 '자유'의 개념은 탐욕적 자본주의의 프레임에 갇혀, 재벌과 소수 권력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을 가질 권리가 되었다. 우리가, 국가로부터 보장받아야 할 자유란 막대한 자금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서  가뜩이나 성장도 않는 국가 경제 시스템의 부를 쥐어짜 더욱 큰 부를 획득하는 그 탐욕적 지배 시스템으로부터의 자유다. 


누군가 했던 말인데, 우리 세대는 근대화 이후 자식이 부모보다 못사는 첫번째 세대가 될 것이다 라는 말에 두려움과 함께 수긍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이제껏 우리 세대가 어릴 때 어른들에게 귀가 아프게 들어왔던 말들의 거꾸로된 버전의 말들이 쏟아져나오게 될 것이다. 아 그 땐 먹을 게 귀해서 반찬 투정할 여유가 어딨어 굶지만 않으면 풍족한 거였지 그러던 말들은, 아 그 땐 먹을 게 흔해서, 한상 가득 올려놓고 먹다 남으면 다 버렸어. 음식물 쓰레기가 하도 많이 나와서 골치거리였다니까. 뭐 이런 식으로 회상하게 될까. 농민들이 쌀값 수매를 앞두고 투쟁하는 모습을 이런 식으로 농민들에게 희생이 집중된다면  언젠가는 모두들 농사를 그만둘 것이고, 수입농산물들의 가격 정책에 온전히 먹거리를 저당잡혀 쌀값이 훗날 금값만큼 올라도 사지 못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기업은 국가의 '배려'로 농업의 희생과 맞바꾼 수출과 기업 이윤 모두를 국가의 주인인 국민과 공유하지 않고, 갑질에나 열을 올리고,  주식인 쌀 수매가가 30년간 오르지 않은 채로 저렇게 몰살될 수 밖에 없는 정책에 내몰리면, 우리의 아이들이 후대에 밥은 먹고 살려나.


과거에 비해 생산성이 어마무시하게 높아진 사회에서 여전히, 혹은 더욱더 가난한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삼척동자도 다 안다. 모든 부를 거머쥔 탐욕스런 부자들이 세상을, 정치를, 경제를, 문화를, 매체를 심지어 동네 구멍가게까지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을 돈으로 정치적으로 후원하고, 그 댓가로 기업활동에 유리하고 대부분의 공동체에게는 불리한 정책들을 입안하도록 기업활동에 방해가 되고 공동체에 이득이 되는 법들을 깨뜨려 없애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우리의 정신까지도 지배한다. 정신 지배의 결과가 쏟아져나오는 자기계발서들을 믿고, 이 불평등은 자신의 무능과 불성실에서 나온 것이라는 엉터리 생각을 끊임없에 주입되고 소수의 부자들에 강탈당하게 될 산업 시스템에 강제 헌신하기 위해 영혼이라도 팔 준비가 되어 있다. 


오늘날 부를 차지하는 극소수들은 여당이고 야당이고 할 것 없이 정치후원금으로 1%의 부자들이 더 많은 부를 획득하는 사회를 견고히 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계속해서 점점 심화되고 가속화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 전에 듣고 놀라 까무러쳐서 알고 있던 숫자들은 이미 그보다도 더 높아져있다. 가령 2015년 최상위 부자 1% 부자들은 국가 전체 사적 자산의 42%를 소유한 반면, 국가 부 중 1%는 나머지 국민 절반이 차지한다. 퍼센트로는 표기도 안될만큼의 극소수 400명의 부는 하위 60%의 재산을 모두 합친것보다도 많다.(P212). 미국 얘기다. 우리나라가 위의 수치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부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져서 그런 게 아니라, 이건희가 래리 페이지보다 돈을 적게 벌기 때문일 거다. 


자주, 가난하면 루저로 취급받는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주 가난한 사람을 실패한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가난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부자들이 더욱 더 부자가 되는 시스템을 이루는 요소일 뿐이다. 2008년 국가 사회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약탈적 초대형 은행들은 납세자들의 세금을 이용해서 구제받았지만, 대기업 은행의 임원들은 상상을 초월한 수백 수천억원 규모의 보너스를 받았고, 초대형 기업의 CEO들은 스톡옵션과 성과급 주식의 형태로 수천만달러씩 받는다. 그들이 받는 상여금은, 직원을 해고해서 주가를 끌어올린 대가다. (IBM은 1990년대부터 직원을 해고하고 거액의 채무를 끌어들여 자사주입을 매입하여, 총수입은 그대로인데도 주가를 끌어올렸다.  그기간동안 CEO는 2억 5천만달러 규모의 성과급을 지급받았다.  휴렛패커드도 애플도 마찬가지. 애플은 170억 달러를 빌려 주식환매에 사용, CEO인 팀쿡은 7천만달러를 스톡옵션으로 받아 환매가 최대가치일 때 현금화했다고 추측된다(p144).이렇게 'CEO들은 자사를 아주 훌륭하게 망가뜨리고 나서도 수백만 달러를 거머쥔다(p146). 기업의 CEO들은 후원금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스톡옵션과 주식을 성과급으로 받는 경우 세금을 안내도록) 정책을 바꿨으므로 그 어마어마한 규모의 수입에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에 국가 수입에 생긴 거대한 구멍은 일반 납세자들의 차지가 된다. 


미국 얘기인데, 남의 말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선가 누군가에 어떤 수치가 나오더라도 믿을 수조차 없다. 말해야 입아프다. 투표 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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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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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공산주의자로서 스스로에 대해 추호도 사상적 의심을 않을 뿐더러, 국가와 노동에 대한 높은 충성심과 마르크시즘에 대한 높은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는 루드비크는  사석에서는 장난과 비아냥거림을 좋아하여, 사정표에는 '개인주의적 잔재' 라는 비판을 붙이고 다니지만, 이것 역시 누구나 하나쯤은  관례적으로 가지는 속성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융통성 없는 여자친구 마르케스가 발산하는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에게 매력을 느끼나, 남자친구보다 당이 우선인 그 순박하고 우둔한 충성심에 심한 질투를 느낀 그는 자신이 없어도 매사에 만족하고 행복해 보이는 합숙 정치 교육중인 그녀를 당황케 하기 위해 엽서에 이렇게 쓴다. "낙천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 따윈 바보스런 것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비크,"

고삐는 모두 단절되고 말았다. 공부도 혁명운동의 참가도 일도 친구와의 교류도 단절되고 말았다. 사랑도 사랑을 추구하는 일도 단절되었다. 인생에 있어서의  모든 중요한 과정에 단절되고 만 것이다. 내게 남은 것은 시간 뿐이었다 82


어느 나라에서건 공산주의 사회라면,  사생활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일은 체제 유지의 기본 강령인 듯하다. 이 점에 대해서라면, 자유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겐 마르고 닳도록 알려진 상식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열성적인 당원인 루드비크가 인지하지 못했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저 그렇게 별 생각 없이 가볍게 말로 하던 농담을 글자로 남겼던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이것은 우리가 가까이 있는 북한이라는 나라를 통해 알고 있는 공산주의라는 체제 하의 사회라는 것의 실체가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완전하고 완벽한 획일적인 체제내에서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 체제 하의 인간이라는 것이 아무리 경직된 체제 속에 이념화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개인이 다르게 부여받은 수많은 유전자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그 고유한 특성들을 쓰윽 지워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님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치른 그 어마무시한 피의 대가가, 사실은 평균 70~80 평생의, 우주적인 의미에서는 찰라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겨우 30~40대에 마련한 지식의 토대위에서 이루어진 거대한 실험이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리석은 실험들은 사실 다른 방식의 피와 땀을 훔치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루드비크는 자아비판대에 서서 자신의 앞날에 펼쳐질 어두운 그림자를 응시하고 나서야, 그런 농담을 함부로 했던 자신을 후회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농담이었으며, 자신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제마네크 서기관이라면 유리하게 무마해줄 것을 기대한다. 

새로 서기장에 선출된 제마네크는 루드비크와 친분이 있을 뿐더러, 융통성 없는 마르케스에게 하는 짓꿎은 농담을 거들기까지 하던 친구다. 그러나 그는 루드비크를 학교에서 제명시키고, 강제 퇴교시키는데 앞장선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시덥지않은 농담은 루드비크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며, 그의 운명을 바꾸어놓는다. 당에서 제명되고, 학교에서 내쫓기고, 병역 유에의 특전을 잃은 후, 체제의 적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가는 강제 노동 수용소, '검은 견장을 단 징벌대'로 보내진 것이다. 

나의 인생은 영속성을 잃어 끊어지고 말았으며, 내가 지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장소에서 정신적으로 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서서히 길들여져 갔다84

가장 젊은 시절은 그 시커먼 광산에서 두들겨 맞으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아무 희망도 없이 그렇게 흘러가지만,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가치체계에 반대되는 수용자들과 거리를 두고 혼자 지내지만 차츰 하나 둘 씩 친구들을 만들어가고 그의 확고했던 공산주의 신념도 희석되어 간다. 그 곳에서의 생활에도 어느 정도 적응하고 외출에서 만난 루체와의 애정을 쌓아가지만, 그녀에 대한 그의 집요한 욕망과 그녀의 '막판 거부'는 한 편의 아슬아슬한 코미디 같이 이어지고, 결국 목숨을 걸고 몰래 빠져나와 집까지 빌려 계획한 둘 만의 시간동안, 허락되지 않는 루체의 육체에 루드비크는 분노하고 폭력적 언어로 파경을 맞는다. 

20세기 중반, 혼전 순결이라는 이상한 정조 관념이 여성에게만 강요되던 사회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거의 모든 사회가 당연하다는 듯 혼전 섹스에 따른 책임을 여성에게 불리하게 전가하는 구조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드비크를 거부하는 루체의 방식에는 무언가 석연치않은 구석이 있었다. 루드비크를 너무 사랑해서, 외출과 면회가 허락되지 않는 병영의 철책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러 먼 길을 찾아오던 그녀를 가둔 어떤 두려움이 그토록이나 그녀를 원하는 그를 거부하게 만들었을까. 어쨌든 거사를 치르지 못한 분노한 남자의 그 분별없는 말실수로 그는 또다시 그녀를 영원히 떠나보낸다. 


15년이라는 모진 세월을 이고, 이제 중년의 남자가 된 그는 우연히 방송국에서 취재온 기자 헬레나가 오래 전 자기를 제명하는 데 앞장섰던 제마네크의 아내인 것을 알아내고,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녀를 꼬여낸다. 무언가가 계획대로 차질없이 너무 착착 풀려나갈 때는, 계획 자체를 다시 점검해보아야 한다. 제마네크가 사랑하는 그의 아름다운 아내를 훔쳐와서, 그를 철저히 망가뜨리고 가정을 깨고 그렇게 수십년 전의 일들을 복수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는 그 기나긴 불의의 시간들을 보상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에게는 역겹게 느껴지는 살찌고 늙은 그녀의 육체를 찬탄하며 헬레나에게 최고의 황홀한 밤을 선사하지만,  헬레나는 이미 남편 제마네크에게 배신당해 애정을 갈구하는 초라한 여성이었던 것인데, 이 사실을 젊은 새 애인과 함께 걷던 제마네크와 만나면서 알게 되는 코메디같은 장면이 이 책의 절정이 아니다. 그가 신봉하던 마르크스주의가 퇴물이 되고 사회가 서서히 자본주의적 속성을 받아들여 자유로움이 표출되는 변화가 진행되는 동안 제마네크 역시 이에 적응했다. 그리고 루드비크와 헬라나의 모습을 보자, 쿨하고, 쾌활하게 둘 사이를 축하해준다. 이로써 그의 골치거리였던 현아내와의 관계를 루드비크가 깨끗하게 청산해줄 것이다. 


한편, 그 도시에서 그는 환상의 연인, 순결을 지키기 위해 이별을 택했던, 15년간 그리던 루체를 우연히 이발소에서 만난다. 그녀는 그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녀의 행방을 알려준 친구가 알고 있다. 루체는 그가 알고 있던 루체가 아니다. 루체는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그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순결하지 않음이 들통날 것이 두려워 그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루체는 자신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헬레나를 통한 제마네크에 대한 복수가 물거품일 뿐만 아니라, 코미디같은 짓이었음을 알게 된 루드비크는 헬레나에게 이별을 선언하는데, 이에 충격을 받은 헬레나가 조수의 주머니에 두었던 수면제를 털어 넣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루드비크는 자신의 무모한 복수심이 죄없는 한 사람을 죽일만큼 깊은 상처를 준 것을 후회하면서, 그녀를 백방으로 찾아다니다가 화장실에서 찾아낸다. 그녀는 살아있다. 알고 보니, 수면제라고 쓰여진 약통의 약은 설사약이었던 것이다. 죽으려고 복용한 한통의 수면제는 설사약 한통이었고, 그만큼의 설사를 뿌지직뿌지직~.. 헬레나는 화장실에서 그들 모두에게 꺼지라고 소리친다. 헬레나를 사랑하고 있던 조수도 그에게 꺼지라고 한다. 



역사도 또한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흔히 풋내기인 네로의 무대, 역시 풋내기인 나 플레옹의  무대, 그리고 열에 들뜬 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무대가 되니까, 따라서 어린 아이들이 가진 흉내에 대한 정렬과 유치한 역할이 진짜 파국적인 현실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133



이 소설은 한편의 매우 유쾌한 농담이지만, 그 속에 담긴 역사성은 많은 시사를 던져준다. 비틀린 역사는 히틀러, 스탈린과 같은 비틀린 인간에게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역사의 무대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 행하는 장난과 농담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동감하며 아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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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스퀘어 을유세계문학전집 21
헨리 제임스 지음, 유명숙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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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남자를 사랑하는 부잣집 딸과 그 부모와의 갈등은 우리나라 일일 드라마의 넘버 원 클리쉐다. 요즘은 살기가 팍팍해지고 개천에서 용나는 일이 드물게 된 데다 끼리끼리 어울리는 문화가 대세여서, 드라마 바깥 세상에서 실제로 큰 부자와 엄청나게 가난한 사람 둘이 만나서 좋아하게 될 계기가 생기기나 하는지 의문이지만, 가난한데다가 직업도 없고 성실해보이지도 않는다면, 어느 부모도 자식의 결혼을 탐탁하게 생각지는 않는다. 물론 서상사(태양의 후예, 나의 싸랑했던 진구)만큼 성실하고 강하고 멋지고 훌륭한 남자를 사랑한다면야, 대위의 딸이건, 그 딸이 서상사보다 계급이 훨씬 높건 반대하는 애비의 마음을 이해는 하면서도  신분의 차이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그들의 로맨스에 훨씬 감정이입하면서 둘을 응원하겠지만,  모리스는 다르다. 그가 가진 건 반반한 얼굴 뿐이다. 가진 재산은 이미 탕진했고, 애가 다섯이나 되는 누이의 집에 얹혀 살면서도 직업을 갖지 않고 빈둥빈둥거린다. 캐서린이 반해 버린 그의 아름다운 용모와 번지르한 언변은 부자의 남편이 되는 방법으로 방탕한 생활을 유지할 수단 말고는 가치가 없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고, 작품 전체의 내용이 그 소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에도 작품이 새롭게 읽히는 이유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겠다. 글자를 툴툴 털어 내며 막 걸어 나올것 같이 생생하고 독특한 캐릭터와 통통 튀는 대사들이 압권이다. 누구에게나 존경받고 재치있고, 의사로서 인정받고 성공한 아버지가 성공하지 못한 게 하나 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의 식구들의 병을 고치지 못했다는 점이다. 남의 병을 고치는 동안 캐더린 산후 갑작스레 일어난 아내의 죽음과 살아있었다면 똑똑하게 자랐을 것이 틀림없었을 어린 아들을 잃는 일을 막지 못한 것이다. 딸을 낳고 죽어버린 아름다운 아내에 비해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은 딸 캐서린은 아버지가 눈에 매력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좋게 말하면 평범한 얼굴에 천성적으로 건강한 몸을 지닌, 아버지를 하늘처럼 존경하는 선하고 착한 딸인데, 그게 아주 좋게 돌려서 말하면 그렇다는 거지, 뛰어난 학식과 지성과 재치와 유머 감각을 겸비한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큰 부를 모은 의사 아버지에게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물려 받은 것이라고는 유산과 이름 뿐인 캐서린은 그저 머리가 나빠 순종하는, 교태라고는 모르는 아둔하고 눈치없는 딸일 뿐이다. 반어법과 은유법을 즐겨쓰는 호탕하고 지성적인 아버지와 우둔한 딸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의 대화는 100년을 넘어선 시대의 갭을 훌쩍 뛰어넘어 웃음을 선사한다. 


두번째 재미는 그 가여운 딸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택한 맹목적 인내와  기다림의 작전이 만들어내는 서사의 희극성이다. 딸(의 유산)을 지키려는 아버지와 캐서린(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결혼하고자 하는 모리스 사이에서 심각하지만 웃을 수 밖에 없는 코믹한 대립을 만들어내는데, 그 웃음은 자신에 대한 존경심을 믿는 아버지와 자신에 대한 사랑을 믿는 모리스가 상상하지 못할 캐서린의 둔감함과 우직함에서 비롯된다. 그들의 작전이 번번히 실패에 부딪히면서 작은 사건들을 뭉쳐 캐서린의 가치를 오히려 하얀 거품처럼 풍성하게 만들어낸다. 여기에 오갈 데 없어 얹혀 사는 고모가 캐서린과 모리스 사이에, 그리고 캐서린과 아버지 사이를 주책스럽게 휘젓고 다니며 오빠에게도, 캐서린에게도 모리스에게조차 점점 더 일을 더 그르친다. 모리스를 반대하는 오빠의 의사에 반하여 번번히 모리스와 캐서린 사이에 자처해서 다리가 되어주고, 제발 둘 사이에 끼어 들어 일을 그르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캐서린의 뜻에 반하여 모리스에게 온갖 이야기를 전하며, 또한 모리스를 위해 작전을 세운다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모리스의 의도를 거스르게 하는 것이다.  


"저 아이는 저기 숄 꾸러미 정도의 지적 수준을 갖고 있는 게야.” 이런 생각을 한 의사는 캐서린이 숄 꾸러미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숄 꾸러미는 가끔 행방불명이 되기도 하고 마차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하지만, 캐서린은 항상 있어야 할 자리에 굳건하고 넉넉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의사도 틀렸고, 모리스도 틀렸고, 고모도 틀렸다. 말로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에 서툴었던 캐서린은 숄꾸러미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마치 연수입 8만불 되는 사람처럼'  옷을 입었다는 아버지의 반어법이 놓친게 있다면 그렇게 화려하고 튀는 옷이 숄꾸러미와는 달리 말로서 표현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표현의 한 수단이라는 점이다. 그녀가 착하고 무던하고 무감각하고 무표현적인 것은 맞지만, 의사는 자신과는 다른 캐서린의 성격상의 차이를 성격상의 결함으로 여긴다.  때문에 딸을 마음대로 제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가 생각하는 그 무언의 무저항의 인내로 대표되는 결함이 그녀를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무기가 되는 걸 알지 못한다. 모리스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만큼 캐서린에게 관심도 애정도 없는 그는 단지 자기의 언변에 그녀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녀의 착함, 온순함이 오히려 그가 하려는 고모와 짜고 수행하는 작전마다 번번히 실패하게 된다. 아버지의 가장 큰 패배는 딸이 자신을 향해 가졌던 잴 수 없는 크기의 어마어마한 존경을 잃었다는 점이다. 또한 그녀가 중년이 되고 아비가 늙어 죽기 전, 이미 까마득히 잊어 다시 만나자고 간청을 한대도 만나주지 않을 모리스를 끝내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지 않음으로서  아버지가 딸에게 자신의 유산을 증여하는 것도 실패하게 만들었다.  딸에게는 어차피 필요없을, 모리스가 사위가 되었다면 필요했을 돈이었다. 캐서린 고모의 말에 휘둘려 비밀 결혼을 하고 도망을 치네 어쩌네 하던 모리스는 비밀결혼시 캐서린이 잃게될 아버지 몫의 유산의 가치와 자신의 지성과 외모로 인해 얻게 될 잠재 가치를 저울질 하다가 결국 캐서린(의 유산)을 포기한다. 


상처와 배신으로 얼룩진 캐서린은 한층 성장한다. 캐서린에 대한 평가에 대해 아버지가 틀린 건 중년이 되기까지 많은 남자들에게 청혼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그녀가 가진 환경과 성격으로서 존중받을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면을 고려해서 좋은 사람을 만나라고 결혼을 반대한 것이었다는 건 알겠지만, 숄꾸러미와 결혼하겠다는 남자들의 조건이 변호사에서부터 사회 각층에 골고루 퍼져있었다는 점과 그녀가 그 화려한 드레스 코드와 온화한 성격으로 많은 사람들을 알면서 지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어쩌면 그 상처와 배신의 사건은 그녀가 일생중 한 번쯤 치러냈어야 할, 알깨기와 같은 성장 단계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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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예술 속 수학 지식 100 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수학 지식 100 시리즈
존 D. 배로 지음, 강석기 옮김 / 동아엠앤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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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 이전으로 돌아가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언어만이 존재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어떤 형태의 언어가 될까. 인간은 과연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떤 언어가 소통의 수고와 오해에서 오는 고통을 말끔히 해결하고 명료하게 의사 전달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만일 그런 언어가 있다면 인간의 사고 자체가 변형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언어는 기호이고, 수학적 기호도 일종의 언어이다. 그런데 수학의 언어는 오해의 여지가 남겨놓지 않는다.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둘 중 하나다. 만일 말로 설명 불가능한 세상의 이치를 명료한 공식으로 수학적으로 밝히고 그걸 수학적인으로 완벽하게 이해한다면 왜 인간이 진실을 알기 위해, 혹은 진실을 알기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할까. 


하지만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감정을 기호로 표시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컴퓨터 인공지능이 펑펑 울고, 까르륵 웃는 날이 될 것이다. 그 사이에 인간은 세상의 모든 진리를 터득했기에 삶이 시시해져서 벽면하고 있을까. 어쨌든 수학적 언어는 명료하지만, 기호가 내포하고 있는 뜻을, 복잡함을, 평범한 사람들의 머리로는 따라갈 수 없기에 궁극적인 언어가 될 수는 없다.


예술과 수학은 동시에 양립할 수 없는 것 같은데, 예술은 감정을 다루고 수학은 이성을 다루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음악을 생각해보면 예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수학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음악을 표현하는 기호들은 다분히 수학적이다. 명료하고 거짓이 없다. 적혀진 대로 테크닉을 연마하면 기본은 된다. 


강석기님이 옮긴 책이 나와서 읽는데, 동시에 존 베로의 시리즈로 된 책이 같은 출판사에서 쏟아져나왔다. 이 책은 <일상적이지만 예술 속 절대적인 수학지식 100>인데, 예술 대신 생활과 스포츠 두 권이 더 있다. 대중에게 수학 대중서는 수학 언어를 일상 언어로 번역한 걸 뜻하는 경우가 많다. 수학적인데, 수학 공식은 경기나게 싫고, 은유나 비유를 통해 그 속에 있는 통찰을 읽고 싶은거다. 이것이 윤리적이고 저것이 도덕적이고 떠 이런 것은 불공평하고 저런것은 자유를 빼앗고 그런 시대에 따라 갈대처럼 변하는 정신적 요소들 말고 영원히 우주 끝까지 가도 변하지 않을 어떤 진리가 명료함의 언어로 전하는 것을 일상 언어로 읽고 싶다는 욕망.. 그것은 살아있는 동안엔 결코 충족되지 않을 것임을 알지만 이런 책이 나오면 자꾸 미련을 가지게 된다. 


100가지 주제를 다루는데, 350여 페이지니까, 한 가지 주제당 그리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지는 않는다. 깊이가 충족되지 않을 것 같겠지만, 너무 깊어 혹은 너무 충실한 설명이 가볍게 수학을 일상 언어로 읽으려 했던 불찰을 깨닫게 해준다. 세상에 그런 건 없거든!!! 얼마나 더 깨져야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텐가. 그래도 주제들 자체는 재밌다. 미루기가 바람직한 경우는 언제일까? 하고 콕 집어서 문제를 내면 뭐 대략  A = D+(A X 2^-D/18)이라는 공식을 더럭 내민다. 물론 설명을 잘 읽어보면 이해가 안될 것도 없다. 그러나 걱정 마시라 계산 대한 답은 일상 언어로도 나와있으니까. 일을지연시킴으로써 효과를 보는 대형 프로젝트들의 경우, 시작을 미룬다면 일의 양을 필요한 시간으로 나누는 것으로 정의되는 생산성이 훨씬 높아진다. 무슨말이냐. 때로 일을 미뤄도 된다. 라는 뜻이지만 끝까지 읽어봐야 한다. 끝나는 일이 현재 26개월보다 적게 걸리는 일이라면 지금 당장 시작하는 것이 최선이다. 내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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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와 인간의 대결에서 기계에 지고도 인간이 할 말은 많다. 그 중에서 인간이 기계에게 가장 우월한 점은 기계는 주어진 어떤 한 가지만을 잘하지만 인간은 만능이라는 점이다. 모든 기계들은 인간의 특정 능력을 모방할 때 각각의 기능은 인간보다 뛰어나지만 총체로서 인간 개체 하나를 능가하는 기계는 아직 없다. 인간의 손 인간의 발 인간의 눈 인간의 코 그 각각의 감각 기관을 흉내내는 각종 센서들로 움직이는 기계는 그 센서들이 인간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지만 인간의 아주 작은 어떤 특정한 지적, 신체적 능력의 아주 일부 기능을 하나씩 정복해 나가고 있다.


체스 기계(알고리즘)가 체스 시합에서 인간을 이긴다. 바둑  기계가 이제 바둑 시합에서 인간을 이긴다. 기계가 음악을 작곡하고 그림을 그린다.  기계가 제퍼디의 우승자를이긴다. 들쑥날쑥하게 자연상태로 주어진 자료를 바탕으로 논리를 가진 일련의 이야기를  기계가 만들어내고 그것을 쓰는 속도가 인간보다 수백배나 빠르고 문법적 오류가 전혀 없다.  기계가 한 사람의 뇌 용량에 갇힌 경험과 기억의 감옥에서 탈옥한 무한한 지식의 바다에서 의사가 되어 정확한 진단을 내린다. 기계가 무한에 가까운 자원과 용량을 지불해 자연과학의 법칙을 발견한다. 아인슈타인의 통찰보다 무작위의  시도와 우연적 발견이 만날때까지 반복해서 알아낸 자연법칙이 뛰어나다면 인간은 더 이상 천재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인공지능 분야는 20세기 초 이래로 여러 번 가장 과대평가되어왔고 또 과소평가되어 온 분야이기도 하다. 때로 우리는 우리가 현재 너무나 광범위한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기술마저도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던 반면 당연히 현재 시간쯤이면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리라 생각했던 부분은 어떤 바틀넥 같은 상황에 막혀 한 세기전에서 단 한발작도 나가지 못하기도 했다.


1930년데쯤 쓰여진 SF 단편들 중 로봇과 관련된 소설 몇 개를 읽어보았다. 그 때 미래였지만 지금은 현재 혹은 과거가 된 시점에서 혹은 먼 미래에서 가까운 미래가 된 시점에서 오래전에 상상한 로봇은 실제 모습과 많이 다르다. SF에서 로봇은 대개 다정다감하거나 무미건조한 모습으로 복종하지만 자주 섬뜩한 반전을 보여준다. 인간이 스스로 창조해낸 로봇이 인간의 지적 능력 이상으로 진화해가면서 더 이상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고 상상가능한 세계가 아닌 전혀 다른 완전한 다른 곳이 될 것이라는 믿음(혹은 이론)이 특이점이다  이 특이점은 때로 새로운 종교처럼 받아들여져 많은 추종자들과 이색적 동교 의식을 낳기도 하고 사이비 과학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하지만 IT의 거물들 중에는 이를 믿는 사람이 많다  콕 찝어서 삼사십년 이내에 그 특이점이 올 것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에서부터 그것에 대한 교육과정이 탄생되기도 했다. 


특이점이 언제 올지, 혹은 오지 않을지 모른다. 확실한 것은 모른다는 점 뿐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일반인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차들이 스스로 운전한다면 레알자동차라고 불러야 할까. 그 무어라 부르던 그런 시대가 오면 운전이라는 고강도의 노동은 필요없어지고 운전을 해서 생계를 꾸려가던 많은 직업적 운전사들이 뭔가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까지 기계가 인간을 대신함으로서 사라진 수많은 일자리들을 차고 넘치게 보아왔다. 대체로 사라진 일자리들은 새로운 일자리가 그 사라진 일자리들의 생활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자동화에 따른 자동생산에 따라 사람들은 풍족해졌고, 이제 물건을 만들던 사람들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것을 해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 서비스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단연코 서비스 제공 인간이 서비스 수혜자 즉 돈을 지불하는 사람에게 없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합법적으로 그 지식을 제공할 수 있는 사회적 자격증 같은 것들이 있을 때이다. 변호사, 교수, 의사, 작가, 예술가 등등. 그런 직업이 늘어나고, 점점 더 전문화된 분야에 지식을 쌓은 사람들이 더욱 전문화된 서비스를 종사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로봇이나 자동화기기에 일자리를 빼앗길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곤 했다. 인공지능 분야의 발전은 IT의 다른 분야에 비해 지지부진 했고 매번 벽에 부딪혔고, 특히나 인간의 뇌나 뭐 그런 걸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로봇이 고작 흉내내는 것은 인간의 뇌의 지극히 일부분일 뿐이고 그것 역시 인간에 의해 프로그램되어야 한다고 믿어졌다. 그리고 여러 번의 침체기 끝에서 바라보니 참으로 많은 것이 변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인공지능은 IBM의 왓슨이 퀴즈 프로그램 제퍼디에서 우승한 이후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형국이다. 


의사는 의료지식이라는 아주 오랜 기간의 시간 투자로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부여받았지만 왓슨은 단순히 이제까지 인간이 이룩하고 쌓아놓은 모든 지식에 단순히 접속함으로써, 단번 및 의사 보조자가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들쑥날쑥한 데이터베이스에서 문맥을 찾아 환자의 증상과 맞는 병명을 찾아내고, 가장 적당한 의료 행위를 추천하고, 약을 처방한다. 이렇게 되면 한 사람의 의사에게 갇혀있던 경험과 지식이라는 한계에서 숱한 실수와 경험 부족에 의한 실수들은 사라지고, 지구상의 모든 의사들에게서 나온 지식에 접속해서 가장 근접한 병명을 알아내어 가장 적당한 치료법을 알려주는 한편 용량과 부작용에 따른 인적 의료사고는 거의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사는 무엇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을까. 시술 수술과 같은 물리적 의료행위들은 이미 로봇에게서 많은 자리를 내어주고 있으므로 의사들의 역할은 줄어들 것이고 시간이 많이 필요로되는 환자 면담과 같은 일들은 의사 자격이 없고 월급이 적은 단순히 컴퓨터 조작만을 함으로써 로봇에 의한 진료가 가능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원격진료와 같은 형태로 이미 도서지역 등지에서 시행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상상하는 SF 소설을 읽을 때에 우리는 그 상황을 두 가지 다른 시점이에서 성찰할 수 있다. 과거에 예견된 미래가 이미 도래했거나 지나갔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던 비관적 상상이었기에 안심하거나 아직 닥치지 않은 먼 미래의 일이기에 상상력의 차원에서만 체험하는 일이어서 걱정 역시 허구가 되거나다. 로봇이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걱정은 오래전부터 해 왔지만 여전히 사람이 필요한 곳은 있었고 서비스업은 더욱 세분화되어왔다. 그래서 그러는 동안, 응 로봇은 바보야. 단순 노동 밖에는 할 수 없거든 한가지 기능말고는 행 수 없거든. 사람을 대신해주지는 않을거야. 이렇게 믿는 사이에 로봇의 기능은 아주 조금씩 조금씩 야금야금 로봇의 기능은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있었다. 인공지능 알파고가 이길건가 인간지능 이세돌이 이길거냐의 문제가 주는 알레고리는 인류의 미래에 적신호를 주고 있는걸까. 예상을 깬 로봇의 승리는 앞으로 벌어질 인간과 로봇의 대결에서 로봇의 승리라는 상징성을 예고하는 것일까. 완전한 승리 대신 허를 보인 한번의 패배가 완전한 인간의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이 대결은 인간과 로봇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


두 책은 IT 기술과 경제 라는 두 가지 면을 동시에 매우 심도있게 다룬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로봇시대,인간의 일>이 <로봇의 부상>보다 훨씬 잘 읽힌다. 그리고 국내 상황을 반영한다. 국내 저자의 책이 질적으로 아마존에서 판매하는 글로벌 책에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구본승 저자의 책이 더 좋은 면이 있는데, 더 중립적이고, 좀 더 사색적이라는 점이다. 로봇의 부상이 미래의 직업에 대해 비관적이라면 로봇시대 역시 비관적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기술문명의 폭발적이고도 혁명적 발전에 수반되는 윤리적 사회변화에 대해 더욱 통찰력있는 자신의 시각을 제시한다. <로봇의 부상>을 읽고, 아 어떻게하나 우리의 예쁜 아들 딸들은 미래에 뭘 해먹고 살건가 라는 걱정 밖에 안드는데, <로봇의 시대, 인간의 일>은 그 변화 과정에서 나타나게 될 흥미로운 현상들을 생각해보는 유익한 시간이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다. 


분명 차가 스스로 운전하는 것은 멋진 신세계다. 그 멋진 신세계가 실현되는 동안, 세계의 몇 퍼센트에 해당하는 모든 운전자들은 모두 직업을 바꾸어야 하는 사실을 마지막에 섬뜩하게 제시하는 <로봇의 부상>에 비해 <로봇시대, 인간의 일>은 그와 더불어 그러한 자동차가 스스로 데리러 와서 데려다 주는 동안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고 책을 읽을 수 있는 그러한 신세계가 가져올 위협, 원격 해킹으로  인한 차량 통제권 상실 혹은 서버의 오류로 인한 대형 사고, 사고에 대한 책임 소재의 문제, 무엇보다도 위험한 상황에서 누구를 희생시킬 것인가 하는 도덕적 윤리적 문제 등과 같이 우리가 미처 생각지 않고 무턱대고 좋은 기술을 받아들였을 때 생기게 되는 문제점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가장 큰 차이는, 빠른 로봇의 발달로 인한 일자리의 현황과 전망에 대한 데이터가 국내 데이터를 기반으로 했으므로 더욱 현실성이 있다는 점이다. 미국을 알면, 곧 한국을 알게되겠지만, 디지털 정보의 독점화가 가져오게될 가속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 역시 한국이 미국보다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덜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도 변함은 없지만, 그래도 한국과 미국은 다르다.  사회 구조가 다르고, 서비스 산업의 양상이 다르고, 아이들이 추구하는 것이 다르고 생활방식도 다르다. 한국 사회를 보려면 국내 책을 선도하는 미국을 통해 글로발한 양상을 보려면 미국책을. 하지만 둘 다 다보는 것도 좋다.


 IT 기술이 가져올 경제적 파급효과에 대해 말할 때, IT 기술 자체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는 경우는 드문데, 두 저자들은 여러가지 분야의 인공지능들이 어떤 원리로 동작하고 있는지 그 기술적 동작 방식에 대해서도 상세히 말함으로써 독자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었다. 대개 인공지능이 미래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장미빛 전망을 하는 것과 달리 두 책 모두 매우 어둡게 미래를 전망하고 있다. IT 분야 단독으로만 보면 장미빛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경제와 실업, 일자리 같은 부분과 함께 통찰될 때, 기술이 가져올 어둡고 두려운 전망이 도사린다. 


자동화된 생산 설비로 척척 차가 만들어지는 장면을 보고 포드사의 사장 포드가 노조 위원장에게 거만하게 말한다. 이 로봇들은 월급을 줄 필요도 없고, 파업도 하지 않을 거라고, 노조위원장은 말한다. 이 차들을 이 로봇들에게 팔 수 있을 거 같나교. 소비가 가능한 사람들의 집단이 있어야 경제가 돌아가는데, 현재의 거대 자본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은채 로봇과 인공지능 알고리즘들에게 일을 시키게 된다.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실제로 통계에 의하면 전세계의 일자리는 수십년동안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으며, 실업률은 높아가고, 또한 가계 소득 역시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부자들의 부의 편중 현상이 심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장미빛으로 다가오는 이 모든 자동화, 로봇, 인공지능이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 거대 자본이 이 아름다운 알고리즘과 인공지능과 로봇을 차지하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그리 달갑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구본승은 <정보의 유효기간이 단축되는 지식반감기>라는 멋진 소제목의 챕터를 통해, 우리의 미래를 살아가게될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지식의 수용에 대한 현실적 인식을 제시한다. 디지털 세상에서는 계속 학습하지 않으면 이내 낡은 지식과 권위에 의존하는 구세대가 된다. 이는 우리의 아재 세대들을 통해 이미 학습된 터이다. 모든 정보는 절대지식이 될 수 없고 유효기간과 반감기를 지닌 가변적 지식이라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직업에 관련해서, 오래전 이미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없어졌지만, 로봇이 약사, 변호사, 의사 등의 전문가의 일까지 대체하기에 최적화된 시대에 한 분야의 지식을 십여년간 교육받아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평생 직업이라는 개념도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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