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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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공산주의자로서 스스로에 대해 추호도 사상적 의심을 않을 뿐더러, 국가와 노동에 대한 높은 충성심과 마르크시즘에 대한 높은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는 루드비크는  사석에서는 장난과 비아냥거림을 좋아하여, 사정표에는 '개인주의적 잔재' 라는 비판을 붙이고 다니지만, 이것 역시 누구나 하나쯤은  관례적으로 가지는 속성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융통성 없는 여자친구 마르케스가 발산하는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에게 매력을 느끼나, 남자친구보다 당이 우선인 그 순박하고 우둔한 충성심에 심한 질투를 느낀 그는 자신이 없어도 매사에 만족하고 행복해 보이는 합숙 정치 교육중인 그녀를 당황케 하기 위해 엽서에 이렇게 쓴다. "낙천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 따윈 바보스런 것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비크,"

고삐는 모두 단절되고 말았다. 공부도 혁명운동의 참가도 일도 친구와의 교류도 단절되고 말았다. 사랑도 사랑을 추구하는 일도 단절되었다. 인생에 있어서의  모든 중요한 과정에 단절되고 만 것이다. 내게 남은 것은 시간 뿐이었다 82


어느 나라에서건 공산주의 사회라면,  사생활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일은 체제 유지의 기본 강령인 듯하다. 이 점에 대해서라면, 자유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겐 마르고 닳도록 알려진 상식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열성적인 당원인 루드비크가 인지하지 못했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저 그렇게 별 생각 없이 가볍게 말로 하던 농담을 글자로 남겼던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이것은 우리가 가까이 있는 북한이라는 나라를 통해 알고 있는 공산주의라는 체제 하의 사회라는 것의 실체가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완전하고 완벽한 획일적인 체제내에서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 체제 하의 인간이라는 것이 아무리 경직된 체제 속에 이념화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개인이 다르게 부여받은 수많은 유전자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그 고유한 특성들을 쓰윽 지워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님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치른 그 어마무시한 피의 대가가, 사실은 평균 70~80 평생의, 우주적인 의미에서는 찰라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겨우 30~40대에 마련한 지식의 토대위에서 이루어진 거대한 실험이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리석은 실험들은 사실 다른 방식의 피와 땀을 훔치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루드비크는 자아비판대에 서서 자신의 앞날에 펼쳐질 어두운 그림자를 응시하고 나서야, 그런 농담을 함부로 했던 자신을 후회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농담이었으며, 자신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제마네크 서기관이라면 유리하게 무마해줄 것을 기대한다. 

새로 서기장에 선출된 제마네크는 루드비크와 친분이 있을 뿐더러, 융통성 없는 마르케스에게 하는 짓꿎은 농담을 거들기까지 하던 친구다. 그러나 그는 루드비크를 학교에서 제명시키고, 강제 퇴교시키는데 앞장선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시덥지않은 농담은 루드비크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며, 그의 운명을 바꾸어놓는다. 당에서 제명되고, 학교에서 내쫓기고, 병역 유에의 특전을 잃은 후, 체제의 적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가는 강제 노동 수용소, '검은 견장을 단 징벌대'로 보내진 것이다. 

나의 인생은 영속성을 잃어 끊어지고 말았으며, 내가 지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장소에서 정신적으로 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서서히 길들여져 갔다84

가장 젊은 시절은 그 시커먼 광산에서 두들겨 맞으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아무 희망도 없이 그렇게 흘러가지만,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가치체계에 반대되는 수용자들과 거리를 두고 혼자 지내지만 차츰 하나 둘 씩 친구들을 만들어가고 그의 확고했던 공산주의 신념도 희석되어 간다. 그 곳에서의 생활에도 어느 정도 적응하고 외출에서 만난 루체와의 애정을 쌓아가지만, 그녀에 대한 그의 집요한 욕망과 그녀의 '막판 거부'는 한 편의 아슬아슬한 코미디 같이 이어지고, 결국 목숨을 걸고 몰래 빠져나와 집까지 빌려 계획한 둘 만의 시간동안, 허락되지 않는 루체의 육체에 루드비크는 분노하고 폭력적 언어로 파경을 맞는다. 

20세기 중반, 혼전 순결이라는 이상한 정조 관념이 여성에게만 강요되던 사회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거의 모든 사회가 당연하다는 듯 혼전 섹스에 따른 책임을 여성에게 불리하게 전가하는 구조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드비크를 거부하는 루체의 방식에는 무언가 석연치않은 구석이 있었다. 루드비크를 너무 사랑해서, 외출과 면회가 허락되지 않는 병영의 철책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러 먼 길을 찾아오던 그녀를 가둔 어떤 두려움이 그토록이나 그녀를 원하는 그를 거부하게 만들었을까. 어쨌든 거사를 치르지 못한 분노한 남자의 그 분별없는 말실수로 그는 또다시 그녀를 영원히 떠나보낸다. 


15년이라는 모진 세월을 이고, 이제 중년의 남자가 된 그는 우연히 방송국에서 취재온 기자 헬레나가 오래 전 자기를 제명하는 데 앞장섰던 제마네크의 아내인 것을 알아내고,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녀를 꼬여낸다. 무언가가 계획대로 차질없이 너무 착착 풀려나갈 때는, 계획 자체를 다시 점검해보아야 한다. 제마네크가 사랑하는 그의 아름다운 아내를 훔쳐와서, 그를 철저히 망가뜨리고 가정을 깨고 그렇게 수십년 전의 일들을 복수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는 그 기나긴 불의의 시간들을 보상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에게는 역겹게 느껴지는 살찌고 늙은 그녀의 육체를 찬탄하며 헬레나에게 최고의 황홀한 밤을 선사하지만,  헬레나는 이미 남편 제마네크에게 배신당해 애정을 갈구하는 초라한 여성이었던 것인데, 이 사실을 젊은 새 애인과 함께 걷던 제마네크와 만나면서 알게 되는 코메디같은 장면이 이 책의 절정이 아니다. 그가 신봉하던 마르크스주의가 퇴물이 되고 사회가 서서히 자본주의적 속성을 받아들여 자유로움이 표출되는 변화가 진행되는 동안 제마네크 역시 이에 적응했다. 그리고 루드비크와 헬라나의 모습을 보자, 쿨하고, 쾌활하게 둘 사이를 축하해준다. 이로써 그의 골치거리였던 현아내와의 관계를 루드비크가 깨끗하게 청산해줄 것이다. 


한편, 그 도시에서 그는 환상의 연인, 순결을 지키기 위해 이별을 택했던, 15년간 그리던 루체를 우연히 이발소에서 만난다. 그녀는 그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녀의 행방을 알려준 친구가 알고 있다. 루체는 그가 알고 있던 루체가 아니다. 루체는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그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순결하지 않음이 들통날 것이 두려워 그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루체는 자신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헬레나를 통한 제마네크에 대한 복수가 물거품일 뿐만 아니라, 코미디같은 짓이었음을 알게 된 루드비크는 헬레나에게 이별을 선언하는데, 이에 충격을 받은 헬레나가 조수의 주머니에 두었던 수면제를 털어 넣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루드비크는 자신의 무모한 복수심이 죄없는 한 사람을 죽일만큼 깊은 상처를 준 것을 후회하면서, 그녀를 백방으로 찾아다니다가 화장실에서 찾아낸다. 그녀는 살아있다. 알고 보니, 수면제라고 쓰여진 약통의 약은 설사약이었던 것이다. 죽으려고 복용한 한통의 수면제는 설사약 한통이었고, 그만큼의 설사를 뿌지직뿌지직~.. 헬레나는 화장실에서 그들 모두에게 꺼지라고 소리친다. 헬레나를 사랑하고 있던 조수도 그에게 꺼지라고 한다. 



역사도 또한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흔히 풋내기인 네로의 무대, 역시 풋내기인 나 플레옹의  무대, 그리고 열에 들뜬 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무대가 되니까, 따라서 어린 아이들이 가진 흉내에 대한 정렬과 유치한 역할이 진짜 파국적인 현실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133



이 소설은 한편의 매우 유쾌한 농담이지만, 그 속에 담긴 역사성은 많은 시사를 던져준다. 비틀린 역사는 히틀러, 스탈린과 같은 비틀린 인간에게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역사의 무대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 행하는 장난과 농담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동감하며 아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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