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책 - 당신이 쓰는 모든 글이 카피다 카피책 시리즈
정철 지음, 손영삼 이미지 / 허밍버드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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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이 물론 어떤 상품을 광고하기 위해 말을 만드는 직업이기는 하지만, 범위를 넓혀 생각한다면, 카피라이터의 카피 만들기 노하우는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도 적용할 기회가 많다. 사람과 사람과의 의사 소통과 지식전달은 주로 말과 글로 이루어지니까 그렇다. <한 글자> 및 <내 머리 사용설명서>를 읽고 정철을 놓아하게 돼서 생각없이 책을 읽었는데, 저자가 마지막에 강조한 것처럼 카피는 광고 속에만 놓여있는, 카피라이터의 전유물이 아니며, 일상을 유쾌하게 만들고, 세상을 더욱 따스하게 할 수 있다. 명함과 청첩장, 연하장, 자동차 뒷유리에 붙이는 초보운전 표시, 간단한 상품평, SNS 와 문자 메시지에 올리는 일상 풍경 등 모든 것이 카피가 될 수 있다. 


정철은 확실히 말과 글을 요리조리 비틀고 분해하고 조립하여, 글자들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논다는 인상을 준다. 책에는 그가 맡았던 광고 카피의 구체적인 예를 통해 효과적으로 상품에 대한 카피를 만드는 방법을 35가지로 분류하여 말해준다. 35개의 각각의 주제는 풍부한 예시가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광고 카피의 실례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 이미 수도 없이 듣고 보고 해서 거의 생활 속의 하나가 된 카피들을 분해하여, 그것들이 어떻게 소비자들을 감동시켰는지 혹은 외면받았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은 흥미로왔다. 


카피라이터가 만들어내는 일은 시인들이 시어를 고르는 것과 비슷하다. 순수한 시를 상품을 팔기 위한 불손한 광고와 비교하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겠으나, 시가 주는 감동과 감동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와는 달리 카피는 메시지 전달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을 어떻게 이룰 것이냐 하는 문제가 바로 카피라이터가 어떤 단어들을 통해 소비자의 닫힌 마음을 뚫고 들어가느냐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기억에 남는 몇가지 규칙들을 들어보면 이렇다. 


구체적으로 쓴다. 

'서울보다 훨씬 저렴한 파격 분양가!' 대신 '용인에 집 사고 남는 돈으로 아내 차 뽑아줬다'가 구체적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뚫을 것이고, '연필심이 금방 닳지 않아 오래 쓰는 연필' 대신 '연필 한 자루로 팔만대장경을 쓰다, 연필깍이는 타임 캡슐에 넣어두세요(학생들 작품)' 같은 카피가 구체적이다. 


낯설게 불편하게 조합한다. 

닳고 닳은 편안한 조합의 문장은 눈길을 끌지 못한다. 어딘가 불편해야 눈이 모인다. 8월의 크리스마스, 살인의 추억, 우아한 거짓말, 성실한 나라의 엘리수, 거북이 달린다, 너나 잘하세요 같은 조합이 그렇다. 


쪼개 쓴다.

짧게 썰어 쓰면 흥미, 통일, 단순, 강조, 설득을 녹여놓고 싶다면 짧게 쓴다. 긴 문장은 두 문장이나 세문장으로 쪼갠다.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고,

더하기는 평이한 문장에 흥미로운 단어를 더한다. '사장님을 대머리로 만드는 방법' 뭔가 아쉬운 문장에서 대머리 앞에 홀랑을 집어넣는다. '충남도민은 이 사람의 재선을 당근이라고 말한다'에서 말한다 앞에 짧게를 넣는다. 이것이 더하기이다. 빼기의 예는 '행정, 도민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 농업, 전문가와 경쟁력을 키웁니다 / 교육, 학생이 행복한 학교를 꿈꿉니다 / ...'로 이어지는 카피의 모든 행에서 압축적으로 중간 단어들을 제거하여 ' 행정, 듣습니다/ 농업, 키웁니다/교육, 꿈꿉니다/... 처럼' 만드는 것이다. 이 때 더하기가 '밖에서 쓸만한 놈을 데려와 쑤셔넣는 일이라면 곱하기는 곱하기는 그 문장 안에서 찾는 것이다. 앞의 대머리 카피의 경우는 '사장님을 대머리으로 만드는 방법'이 되고,  '공부보다 중요한 것을 공부합니다'가 된다. 나누기는 헤드라인과 서브헤드로 나누는 걸 말한다. '(헤드) 밥입니다. (서브) 쌀로 만든 삼양 쌀라면, 든든한 한 끼가 됩니다' 와 같이


말과 글 가지고 장난을 친다. 

반값 등록금 집회 현장에 사용된 피켓에는 '반값습니다'라고 적었다. '넌 못해/ 넌 못할거야./ 넌 못할 줄 알았어//가슴에 못을 박는 말입니다./ 못은 가슴이 아니라 벽에 박는 물건입니다' 못한다는 단어에서 벽에 박는 못이라는 단어를 이끌어내었다. (아재 개그가 카피의 소재가 된다)


인기, 유행, 관심을 훔쳐온다.

세상에서 주목하는 이슈에서 멀어지면 광고 역시 주목받지 못한다. 싹스탑이라는 양말 광고는 온 나라가 남북정상회담에 주목하여 시끌버끌할 때 '백두에서 한라까지 양말부터 통일하자'는 센스있는 카피를 썼다. 


힘을 뺀다.

불필요한 느낌표, 물음표, 따옴표, 쉼표, 말줄임표는 군더더기이다. 감동은 강요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친근한 언어를 사용한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1956년 카피라는 개념도 없을 때, 대선당시 정권과 맞선 민주당은 후보 신익희는 이 전설적인 구호를 처음 썼다.골목을 뛰어다니던 똥개도 이 구호를 짖고 다닐 정도로 온 나라를 휩쓸었던 구호인데, 안타깝게도 신익희 후보는 선거를 열흘 압두고 유세하러 가던 호남선 열차 안에서 급사했다고 한다. 정권 교체의 열망이 그렇게 무너져갔다. 저자는 이 구호를 살려서 2010년 민주당 카피에 이렇게 활용했다. 


1. 못살겠다 갈아보자

4대강 삽질 때문에 딱 죽게 생긴 개구리가 말했다. 

2. 못먹겠다. 갈아보자

무상급식 반대하는 권력에게 숟가락이 말했다

3. 못보겠다 갈아보자

권력의 시녀들이 방송국을 접수하자 리모컨이 말했다.

4. 못믿겠다 갈아보자

청년실업에 두 손 놓은 권력에게 청바지가 말했다. 


이 광고 역시 빛을 보지 못하고 묻혀버렸다. 버스 광고로 만들어진 이 광고가 버스에 붙여지자, '버스운송사업조합인가 하는 곳에서 서울 시내 버스는 정치 광고를 하지 않기로 결의했다는 난데 없는 공문이 내려왔다는 것이다. 누가 이를 주도했는지 심증만 있었을 뿐 물증을 갖지 못했다고.


리듬을 살린다.

있다/없다. 길다/짧다, 켜진다/꺼진다와 같은 대조되는 리듬을 살린다. 'VTR을 켜면 어학 고민이 꺼진다.', '기름은 없다. 기술은 있다(S-OIL), 정치는 짧고 교육은 길다(강금실 후보), 기업의 높이보다 기술의 깊이를 생각합니다(금호건설), 잘 벗어야 잘입는다(LG트롬 스타일러).등 수도 없이 많은 예가 대조적 리듬을 사용했다. 그 중 북녘에 나무보내기 운동본부의 카피는 울컥한다. '사람이 못가면 나무가 갑니다 /  북녘땅에 내 아이 이름표를 단 나무를 심어주세요' 두줄짜리 헤드라인 역시 갔네/가네, 했다/한다와 같이 반복적 대조적 문구로 리듬을 살릴 수 있다. 2012년 대선 때 안철수, 문재인이 우여곡절끝에 가까스로 단일화했을 때 하루만에 만든 카피도 이를 잘 활용했다. '같은 꿈을 꿉니다 / 같은 곳을 봅니다 / 같은 길을 갑니다' 쯧 아직도 씁쓸한 그 때의 단일화. 마지못해 한 단일화, 마지못한 표정.... 


꽝 하고 마무리.

반전도 좋고 행동을 유도해도 좋다. 마지막엔 쾅 하고 심금을 울려야 한다. 짠~한 공익 광고 하나가 마음을 적셨다. 비싸서도 못입지만 이 글을 보니 절대로 밍크를 입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루살이는 하루를 삽니다.....밍크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삽니다. 


뚱딴지같은 헤드라인

헤드라인이 엉뚱하면 궁금해서 바디를 읽어보게 된다. 예를 들어 '택시요금 2,500만원' 이런 헤드라인을 보면 대체 무슨 소리인가 궁금하게 된다. (낛시를 하려면 미끼를 잘 던져야.) 헤드라인이 엉뚱할수록, 뚱딴지 같은 수록, 말이 안될수록 소비자 시선은 그 광고에서 쉽게 도망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시된 것 중  '박원순은 박원순이 아니다' 역시 시선을 끌었다. 바디가 긴데, 그 중 일부를 옮겨오면 '...박원순은 대한민국을 더는 한나라당에게 맡겨둘 수 없다는 분노의 합집합니다. 박원순은 내년 더 큰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의 합집합이다...'


말을 채집하라.

타깃이 초등학생이면 초등학생의 언어를 알아야 하고, 우주인이 타겟이면 우주인의 언어를 알아야 한다.  정철은 그들 속으로 들어가라고 충고한다. 떡볶이 햄버거를 사주며 그들 이야기를 귀 아프도록 듣고 그들 언어 습관을 통채로 훔쳐오라는 것이다. 그러면 학습지 회사가 돈 싸들고 달려와 제발 우리 학습지 카피좀 써달라고 조를 것이라고. 보청기 광고를 따려면 경로당으로 가서 박카스를 따드리고 어깨를 주물러드린다. 증권회사 카피의 예로 '상한가로 모십니다/당신의 능력을 굿모닝증권에 상장하십시오' 가 있다.


집착과 선점, 단어 하나를 내 것으로 만든다. 

SK는 고객이라는 단어에 집착하고, 풀무원은 바르다라는 단어에 집착한다. 그 단어는 이미 그들의 것이 되었기에, 같은 가치를 가진 다른 회사는 다른 단어를 써야 한다. 고객이라는 단어는 이미 SK라는 회사에 연결되어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덜컹, 꽈당, 비틀.. 의성어나 의태어를 쓴다. 

(벌)벌벌벌, 한 벌 가격으로 두 벌, 세 벌!, (낙지)발발발 발짜르게 움직이면 돈을 번다. (망치)쾅쾅쾅 가격, 내려치고, 내려치고 또 내려쳤다. 이것은 아크리스 백화점 세일 광고였다. 김치냉장고 김치톡톡은 톡톡을 브랜드로 썼다.



휴머니티는 영원한 크리에이티브의 테마

자신의 일로 닥쳐버린, 집단 이기주의로 보일수도 있었을,  초고층 스포츠센터 건립 결사 반대 현수막을 저자는 이렇게 썼다. '아이들이 햇볕을 받고 자랄 수 있게 한 뼘만 비켜 지어주세요'


스토리텔링

전어가 예전에는 기름져서 버리는 생선이었는데 '집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생선'이라는 스토리텔링이 한몫했으리라는 저자의 추측이다. 


라이벌을 공격하라

쌈은 구경하는 재미, 은근히 라이벌의 헛점을 잡아 공격의 도구로 씀으로써 자신의 홍보 효과를 거두는 작전도 좋다. 이에 대해 저자는 제품만 들여다보지 말고 시장을 함께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제품이 시장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에 따라 소비자에게  말 거는 방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레스토닉이라는 듣보잡 침대회사가 넘버원 침대 회사 에이스를 상대해야 할 때, 넘버원에게 시비를 걸었다. '침대가 침새를 용서합니다./ 이제부터라도 레스토닉 매트리스 기술을 따라와 주십시오' 여기서 에이스가 말려든다면 스프링 논쟁이 불붙을 것이므로 시비를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포카리스웨트는 2%를 공격하는 광고를 했다. '...부족할 때 마셨는데 왜 여전히 목마른 걸까?' 사장이 부들부들 신문을 내던지는 모습이 상상된다. 한 아이스크림 회사는 조안나라는 아이스크림을 공격하기 위해 '원유가 아닌데도 좋았나?'라고 광고했다. 내 이야기만으로 비교우위를 알리기 어려울 때 상대를 끌어들이는 전략이다.  삼성 에어컨을 상대해야 했던 LG 듀얼 에어컨의 카피는 '한 개는 한계가 있습니다'다. BC카드 카피도 시원하다. 'BC 건설 있습니까? / BC 제과 있습니까? / BC 생명 있습니까? / BC 전자 있습니까?' BC는 카드에만 매달리는 거의 유일한 기업으로, 삼성카드, 현대카드들의 약점을 찌른다. 


소비자를 겁주라.

광고에서는 이를 위협도구라고 한다고. '의사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47가지 방법'과도 같은 타이틀의 제목에 혹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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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원전 완역판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9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박용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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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은 역설적이다. 오래된 것이라는 의미가 단어에 이미 들어 있지만, 막상 읽고 나면 새롭고 신선하다.  김영하는 <읽다>에서 "지금 읽어도 새로운 것은 쓰인 당시에도 새로웠을 것입니다. 그들 역시 당대의 진부함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고전은 당대의 뭇 책들과 놀랍도록 달랐기 때문에 살아남았고 그렇기에 진부함과는 정반대에 서 있습니다"라고 썼다. 당대에는 새로왔다 할지라도, 이후 생겨난 작품들이 그 새로움에 영향을 받으며 변화해 왔으므로 지금 다시 보면 그 새로움은 진부함으로 변했을 수밖에 없을 터인데 지금 읽어도 새로운 건 무얼까.


내가 생각해낸 이유는 이렇다. 귀에 닳도록 어릴 때부터 접해왔던 고전들이 가진 그 컨텐츠의 '새로웠던' 요소들 중의 일부가 넓은 영역에서 소비되어 오는 동안, 우리는 마치 작품을 읽었던 것 같은 착각을 한다. 읽었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다 아는 줄 알았는데 막상 '다시' 읽어보니 그동안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로 가득찬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탈로 칼비노의 고전에 대한 정의(“고전이란, 사람들로부터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제로 그 책을 읽었을 때 더욱 독창적이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 창의적인 것들을 발견하게 해주는 책이다.(<읽다 - 김영하>에서 재인용)"는 매우 적절했다.


<걸리버 여행기>의 경우는 어린이용 동화나 그림책으로도 수없이 개작되어서 왔고, 우리에게는 거인국과 소인국에 대한 환상이 어릴 때부터 <걸리버 여행기>의 이미지로 고착화되어 있다. 특히 주인공이 릴리푸트 왕국에 도착해서 실같이 가는 소인국 나라의 밧줄로 꽁꽁 묶여, 바늘처럼 날아오는 화살을 맞는 장면은 <걸리버 여행기>를 집집마다 걸려있는 가족 사진처럼 각인시킨, 어린 시절 읽은 세계 문학 동화를 대표하는 시각적 이미지다. 그뿐인가, 원작의 소인과 거인 나라 이야기에서 차용한 수많은 컨텐츠들이 영화, 만화, SF나 판타지 소설의 주요 소재로 이용되어 왔다. 


알려져있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조너선 스위프트가 쓴 원저의 1부와 2부, 소인국과 거인국에서 일부 내용을 가져온 것들이다. 원전은 4부까지 있다. 이 소설이 새로운 이유는, 우리에게 고정된 소인국과 거인국의 모험이라는 이미지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이 많은 의미와 상징, 시대와 인류에 대한 풍자와 새로운 시대에 대한 혁명적인 통찰을 풍부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영국 식민 상태의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활동했다. 스위프트가 태어난 해는 1667년이고, 이 책이 쓰여진 시기는 1721년과 1725년 사이로 보이는데, 초판이 출간된 해는 1726년이다. 명예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일랜드를 떠나 영국으로 간 스위프트는 외교관인 템플 경의 비서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네덜란드 왕자인) 영국 왕에게 충고하는 기회를 갖는 등 정치적  경험을 쌓으면서 당쟁을 조정하려고 노력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이후로도 아일랜드의 정치에 관여하면서 영국의 식민 제도에 꾸준하게 비판한다. 런던에서 출간된 초판은 1주일만에 매진되었으며 책에서 상징하는 사상에 대해서는 그때부터 시작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 천공의 섬 라퓨타와 그 주위의 여러 환상적 섬들을 엮은 3부가 가장 재미없는 이야기로 간주되었다고 하는데, 나는 가장 재미있게 읽혔다.


소인국의 판타지는, 판타지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반향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거기에서 스위프트는 왕을 만나고, 전쟁을 도우며, 두 나라 사이의 외교에 관여하면서, 영국과 아일랜드가 처한 외교 관계와 식민 사상에 대해 우아하게 풍자함으로써 시대를 뛰어넘어 영원한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도착한 나라는 릴리푸트인데, 그 나라는 영국에서 그랬듯이 내부적으로는 70년에 걸쳐서 트라멕산당과 슬라멕산 당이 싸움을 벌이고 있었으며, 외부적으로는 지난 36개월동안 블레푸스쿠 제국과 끊임없이 전쟁을 해왔다. 여기서 이 책에서 무수히 많이 등장하는 스위프트의 깨알같은 냉소와 해학을 처음 경험하게 되는데, 그 분열의 원인이 신발굽의  높이 차이에 따라 나뉘어지고, 두 나라의 충돌이 계란을 깨는 방식의 차이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계란을 수십년간 요리하면서 살았으나 두꺼운 쪽과 얇은 쪽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도 못하지만, 릴리푸트 왕국이 계란을 깰 때는 두꺼운 쪽을 깨는 게 쭉 이어온 전통인데, 선대왕(조부)이 손가락을 다치게 되면서, 모든 국민에게 얇은 쪽으로 깨어야 하며 위반하면 엄벌하도록 포고령을 내렸고, 이에 분노한 국민들이 블레푸스쿠의 역대 황제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고 제압되고 그쪽 나라로 망명하는 일이 되풀이되는 것으로 나온다. 


이 소인국 편에서는 경전에 나온 계란 깨기에 대한 양국의 시각차를 비롯한 당시 벌어지고 있던 종교적 갈등과 분열, 쓸모없는 종교적 논쟁으로 무고한 희생자만을 계속해서 낳는 소모적인 전쟁 , 그리고 한 나라를 예속시키려고 하는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스위프트의 냉소적 시각을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낸다. 불이 나서 다 타버리게 생긴 궁궐에 오랫동안 참아온 오줌을 싸서 껐는데, 그로 인해 엄청난 재산상의 손실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궁정 안에서 소변을 보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률 조항을 근거로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되는 웃지 못할 상황을 비롯해 엉뚱하고 기발한 유머 코드가 곳곳에 배치되어 꽤 두꺼운 책임에도 지루할 새 없이 읽을 수 있었다. 


매번 이상한 섬에 도착하여 그 고생을 하고도, 역마살이 끼었는지 그는 집으로 돌아오면 무슨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새로운 항해를 시작한다. 처음엔 선상 의사로 다니다가, 나중엔 항해 경력을 바탕으로 선장에까지 오르지만 매번 항해에 성공하지 못하고 계속 해적을 만나거나,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엉뚱한 섬에 도착하는 것이다. 두번째 섬인 대인국 브로브딩낙에서 인상적인 것은 그가 하나의 인형이나 애완용 동물처럼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릴리푸트 섬에서 느낀 것과는 반대로 덩치가 큰 사람들 속에 아주 작은 존재인 이유만으로도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그들에게 하찮은 존재가 될 것인지와, 그렇지만 그렇게 큰 사람들이라고 해도 다시 또 그들이 자신만큼 작게 보일만한 더 거대한 존재들을 마주치게 될 가능성을 생각하며 우주의 법칙에 대해 통찰한다.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완벽하게 다른 문화와 문명을 가진 두 나라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면서 자신이 믿고 있는 최선이라는 것이 다른 관점에서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서도 경험한다.


크기가 작다는 것의 취약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온갖 혹사와 괴로움을 경험하고  가까스로 왕비에게 구조되어 또 그 작은 크기가 자극하는 보호본능에 의한 혜택을 받게 된다. 작은 존재로 산다는 것은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원숭이나 설치류 심지어 파리떼들까지 그에게는 엄청난 괴물인데, 마침 궁에 함께 살던 난쟁이는 그를 괴롭힌다. 그러나 그를 괴롭히는 것은 그와 그가 살던 나라를 설명하면 할수록 궁궐의 많은 대신들과 왕들에게 지속적으로 하찮은 존재, 하찮은 문명으로 무시당하는 것이다. 그는 영국의 우수한 의회제도를 비롯하여 교;육, 행정, 사법 제도 전반에 걸처 우수성을 강변하는데, 그들의 질문은 그의 허를 찌르고 그것은 다시 영국식 제도가 맞닥뜨리는 현실적 문제들을 비꼰다. 


"나의 조그만 친구여, 자네는 조국에 대해서 칭찬을 했네(...) 제도가 시작은 훌륭했지만 결국에는 부패로 인해서 비이 바랜 걸로 보이네. 자네가 말한 것으로 볼 때 어떤 사람이 어떤 지위를 얻는 데는 그 방면의 학식으로 얻는 것 같지도 않고, 귀족들은 훌륭한 인격 덕분에 귀족이 되는 것 같지도 않고(....) 자네 나라의 인간들은 자연이 이제껏 이 지구상에서 기어다닐 수 있게 만들어준 벌레들 중에서도 가장 고약한 벌레들이라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네(2부-6장)".


그는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사는 나라 사람들의 취약점을 인식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거인국 사람들의 인간에 대한 무지는 가령 이런 것이다. 애국심에 대해서 그들은 애국심이라는 것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화약의 위대함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곳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 악마같은 존재들이라면 그러한 무서운 장치를 만들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며, 심지어는 그에게 그러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태연하게 말하는 것에 분노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저자의 시각은 냉소로 가득하다.


3부에서는 천상의 섬 라퓨타와, 그의 수도들을 두루 여행하고, 4부에서는 말들의 섬에 도착한다. 1부와 2부가 영국의 부조리와 모순을 풍자한 것이라면 3부와 4부는 인류 자체를 풍자했다. 3부 천공의 섬에 도착한 그는 17세기 18세기 문명을 주도한 과학과 무능한 관리들을 풍자하고, 마법의 섬에서는 역사책에 나와있는 모든 궁금한 사람들과 역사적 순간의 진실을 만나게 된다. 이를 통해 독자는 편견과 오해와 거짓으로 날조된 역사관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또 승자에 의해 다시 씌여진 역사가 계속해서 순환되고 재생산되는 과정을 성찰하게 된다. 4부는 말의 나라에 도착해서 말의 시각으로 인간을 보게 되는데, 이 부분이야 말로, 스위프트 고유의 위대한 성찰이자, 독자들이 그동안에 유사한 컨텐츠를 통해 만나지 못했던 새로움이 가득한 부분이다. 말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동물이다. 문명을 가진 말이 야만인을 보았을 때, 그들의 본성적인 탐욕, 본성적인 폭력,  본성적인 시기와 미움과 질투 등을 고발하는 역할을 하는데, 결국 저자(화자)는 말의 나라에 동화되고, 그곳에 남기를 희망하지만 어쩔 수 없이 구출되어 돌아간 후에도 다시 악취나고 위선적인 인간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 안에서도 가족들과 가까이 하지 못하며 고립된 생활을 이어가는 이야기로 맺는다. 


문학은 시대를 읽는 거울이다.  그 거울 속에서 독자들은 시대 속의 나, 인간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다. 고전을 읽는 것의 즐거움, 유쾌함을 알게 해준 값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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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0-11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당선작 예정!~^^

CREBBP 2016-10-11 15:36   좋아요 1 | URL
호호 유레카님 말씀만으로도 이미 당선작 받은 것만큼 기쁘네요. 격려 감사합니다. ~~

2016-10-13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4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4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4 1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4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4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그게 내가 살면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던 사람들을 보고 느낀 결론이다. 그사람이 타고난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변했다는 게 있다면 그건 사람이 변한 게 아니라 그사람의 환경이 변했고 그런 환경에 적응한 것 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내가 매일매일 조금씩 변했으면 한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고 싶고 뭔가 바꾸고자 이것저것 노력해 보지만 늘 제자리 거기에 서 있다. 변하고 싶다고 해서 변해지는게 아니다. 바꾸고 싶다고 해서 바꾸어지는 게 아니다. 달라지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인생일지도 모른다. 나를 내 뜻대로 내가 변하게 할 수 없는데 남이 바뀌기를 바란다는 것은 헛된 희망이다. 유전자에 화석처럼 박힌 그 어떤 본질은 인간이 유행처럼 번지는 긍정의 심리학으로 바꿀 수 있을까. 조금 달라졌다면 살기 위해 적응하고 있고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닐까.

왜 나는 원하는 내가 되지 못할까. 나란 것이 환경에 지배를 받고, 유전자에 의해 어떤 부분은 프로그래밍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주 간단한 것들조차 우리는 우리의 습성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식단 바꾸기, 운동하기, 가족에게 상냥하게 대하기, 말 많이 하지 않기, 체통 지키고 살기, 엄마에게 전화 자주 하기, 공과금 제때 내기, 깨끗하고 정돈된 환경을 유지하기, 카드 사용내역 검토하기, 이런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좀처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위대한 계획가지만 형편없는 실행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자기계발서들이 수십년간 그렇게나 많이 쏟아져 나왔고 여전히 그리고 더욱더 거세게 콸콸 쏟아져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해서 나올 책과 주제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의 흐름이 출판가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건 그 책들이 사람들을 혹 하게 할만큼 매혹적이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뜻이다. 즉 책들은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다는 게 된다. 왜서일까. 책은 책대로 실행은 실행대로 그 둘이 따로 놀기 때문이다. 책은 읽어 지식으로 쌓이지만 그 지식이 행동이 되지 않고 오히려 죄책감이 되어버린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못하는 형편없는 인간으로 전럭해가며 점점 더 자신을 포기하게 되고 또다른 자기계발서들을 찾아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를 원한다. 그것이 작심삼일의 실행을 가져올 뿐이라는 걸 부정하면서 말이다.

코치 서비스라는 게 미국에서는 하나의 고급 서비수 산업으로 자리잡았나부다. 저자는 변화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응 고객의 동료, 부하, 상사, 가족, 친구들의 다면평가를 통해 진단하고 그 실행까지도 책임진다. 그가 컨설팅 비용을 받을 때에는 코칭을 통해 고객이 확실히 변화되었는가의 결과에 따라 비용을 지급받는 듯하다.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뵨화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여 그 사람이 발전할 수 있도록 코칭하는 것이 이 사람의 직업이다. 미국인이라면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대기업의 CEO들도 직접 코치했고 이미 많은 것을 이룬 상태임에도 모자란 부분을 캐치하여 부족한 부분을 메워준다.

인간을 변화시키기는 복잡하지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게 이 책을 통해 마셜 골드스미스가 주장하는 내용이고, 그의 고객들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어 알려준다. 이런 류의 책이 자기계발서들이 대부분 그렇긴 하지만, 주장이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고, 설득력있어 혹한다. 더욱이 세부적인 고객의 실제 예를 다루고 있어 팔랑귀가 된다. 당장 내일부터 당장 실천하고 당장 내일부터 새로운 인간이 될 기세다.

트리거(trigger)는 총의 방아쇠로, 어떤 일의 계기가 되는 사건이나 행동을 말한다. 변화를 일으키는 도화선이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변화하지 못하는 트리거들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변화를 저해하는 요소를 제거하고 변화를 불러오는 트리거를 당기면 변화는 온다. 이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 책을 읽어보면 자세히 나와있다. 좋은 말들이 많지만 책이 지금 없는 관계로(여행중) 생각나는 것만 적어보면, 매일 스스로에게 변화하고자 하는 질문 몇가지를 만들고 그것의 성취도를 점수로 매기라는 내용이 있는데, 거기까지는 평범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질문하는 방법이다.

여기서는 능동적 질문이라고 표현하는데, 내가 무엇을 했는가? 라고 질문하지 말고 무엇을 하기 위해 노력했는가 라고 질문하라는 것이다. 전자는 핑계거리를 만들어주고 실패의 원인을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나 어쩔 수 없는 환경탓을 하도록 함으로써 변화를 막는 트리거를 제공한다. 탄수화물 섭취를 제한하는 다이어트를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실패에 대한 핑계는 수도 없이 생긴다. 회식이 있어서, 누구와 함께 먹는 자리를 피할 수 없어서, 생일이어서, 기타등등 하지만 탄수화물의 섭취를 제한하도록 노력했는가로 질문을 바꾼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 숱한 방해 를 뚫고도 평소보다 조금이라도 덜 먹었다면 우리는 당당하게 100덤 만점의 10점이라도 점수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매일 기록하다보면 조금씩 성취도가 올라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울 것이다.

또 한가지, 저자로서는 지나가면서 한 말이지만 내게는 퍽이나 깨달음을 준 구절이 하나 있었는데,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다. 그 중에서는 매번 자신의 의견만 고집하는 고집불통인 사람도 만나고 먹을 때마다 쩝쩝거리는 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자신의 잘못은 눈꼽만큼도 못보고 남의 탓만하는 사람도 있다. 모임의 멤버 하나는 어디 뭐 목으러 가면 맛없다고 타박을 하는 데 난 또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너한테 맛있는 집이 어딨냐 라고 한마디씩 하는데, 이런 서로간의 지적질이 서로에게 혹은 관계 속에서 좋을 일이 없다. 저자는 이에 대해 변해야 될 사람은 자기 자신이며,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짜증내고 스트레스받는 일은 의자가 의자이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의자는 필요할 때 앉기만 하면 된다. 거기다가 대고 넌 왜 의자냐 하고 화를 버럭버럭 내봤자 의자가 침대로 변할 수 없다. 침대를 원하는데 의자밖에 없다면 침대를 원하지 말거나 침대를 새로 사거나 해야겠지. (저자는 의자 얘기만 했는데 내가 너무 멀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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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6-10-0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공감가는 글입니다.

CREBBP 2016-10-07 14:29   좋아요 0 | URL
고양이라디오님 방문과 댓글 모두 감사합니다. ^^
 
파미르 노마드 - 당신이 미처 몰랐던 그곳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다
김무환 글.사진 / 책과나무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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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한다. 떠나면 잃어버린 자아라도 찾을 수 있을 것처럼 여행을 꿈꾸고 여행을 동경한다. 누구든 어떤 이유로든 여행은 일상에서 탈출이다. 많은 것을 보고 싶어서 떠나든, 자연을 가까이 느끼고 싶어 떠나든,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떠나든, 만끽할 무엇을 향해 떠나든 여행은 현재의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에서 떠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손에는 왕복 티켓이 쥐어져 있다.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며, 그렇다면 왜 떠났었나 라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있어야 그 여행은 가치있는 것이 된다. 떠날 때 두고 가는 모든 것들과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고, 모든 것들은 두고 간 상태 그대로 원래 있던 그 자리에 있기를 기대하는 이유는 애당초 떠나는 것의 목적에 내가 두고 갔던 것들과 다른 모습으로 해후하길 원했기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매일 반복되던 일상의 질서를 깨고, 골치아픈 문제들을 잊는다. 낯선 장소 낯선 문화 낯선 사람들과 마주친다. 낯선 언어들은 원시적 커뮤니케이션만을 허락한다. 정교한 언어적 소통 없이 읽어내는 몸짓과 표정, 그리고 아주 짧은, 말 배우는 아기 수준의 몇마디의 현지어를 통한 의사 소통은 오히려 삶의 본질과 핵심을 마주하게 할 지 모른다. 왜 하필이면 중앙아시어일까. 중앙 아시아는 소련의 해체시 생겨난 대륙의 가장 안쪽 깊숙히 들어앉은 이름도 비슷비슷한 ~스탄 돌림으로 된 나라들이다. 구소련이 기세등등할 때 기초교육을 받은 세대에게 구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어리둥절하게 독립한 신생(?) 독립국들은 더욱 낯설 수밖에 없다. 가끔 오락 프로그램들을 보면 요즘 대세가 남미로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아프리카로 원시힘을 찾아서, 그리고 북극이나 남극 근처로 오로라를 찾아 멀고 먼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이인 것 같은데, 중앙 아시아는 별로 보지 못했다. 저자는 파미르 고원,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그 이름도 비슷한 나라들을 가이드 없이 홀로 , 그리고 두 발로 여행했다. 이 책은 그 여행의 기록이다.

여행의 8할은 묵을 장소를 찾아 물어 물어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 책을 읽으면 언어가 통하지 않는 제3국가를 걸어서 여행한다는 일이 여행 그 자체보다도 얼마나 숙소를 찾고 이동과 비자 등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일인지 알 수 있다. 넓은 땅 위에 띄엄띄엄 사람들이 사는 저개발국가에서 시설좋은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를 기대할 수 없다. 공무원들은 말단 하급직원에서 최고참까지 끝을 알 수 없는 부패로 얼룩진 장기 독재의 나라의 영사관에서 다음 여정을 위한 비자를 수월히 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또 멀고 먼 오지까지 대중교통 수단이 존재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이러한 무수한 난관을 부딪치며 때로 이슥한 시간까지 여정을 위한 교통 수단을 알아보다 이슥한 길에서 강도를 당하고, 썩어빠진 공무원들에게 강탈을 당한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덜 침입한 파미르 고원 오지에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환대하고 가장 좋은 자리를 양보하며 재워주고 후하게 먹을 것을 챙겨준다. 이런 일이 굉장히 자주 있어서 댓가를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여행자를 위한 상업용 시설이 아닌 다음에는 말 한마디만 섞어도 집에 초대하고 차와 음섹을 내놓고 그를 대접하고 작은 보답도 받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 곳곳에 있음에 놀랐다. 그런 오지에서 대가족을 이루며 가축을 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그리 많이 있을까만은, 그러한 현지인들의 친절이 불손한 의도를 가진 나쁜 여행자들에게 혹시나 잘못 이용당하지나 않울까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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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기호 지음, 박선경 그림 / 마음산책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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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만년이라도 아무 변화없이, 영원히 아무 기쁨도 없을 것 같이, 고단하고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도 문득 문득 그런 순간을 마주할 때가 있다. 어떤 순간의 스냅 사진 속에서 포착되는 난데없는 진실, 밀려오는 폭풍 감동 같은 것 말이다. 오래전 일이다. 학생이었을 때였다. 버스를 집어타면서 운전기사님에게 'XXX가요?'라고 물으며  차비를 넣는데 내 손을 가로막으며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xx번을 타라며 알려준 적이 있다. 그 때 그 버스 기사님이 선사한 하루는 말하자면 뻔한 일상에 훈훈한 생기를 주었다. 그 작은 즐거움은 버스비가 굳어서 생긴 공돈 때문만은 아니다.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다 그렇듯, 도시의 일상은 늘 내게 날을 세운다고 생각했고, 그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알지 못하는 타인에게는 언제나 단단하게 무장한 채 벽을 만들고 다니는 것을 철학쯤으로 여기던 때였다. 예기치 않은 타인에게서 발생한 작은 친절이 넓게 원을 그리며 파동처럼 퍼져나갈 수 있음을 알아내던 순간이었다. 사소한 일상의 아주 작은 일들은 준비할 틈도 없이 갑작스레 작은 변화를 만들어낸다. 


두껍지 않은 페이지의 단편집에 40개의 소설이 담겨져 있다면 소설들이 얼마나 짧은지 짐작할 수 있다. a4 용지로 2~3장 정도의 분량의 이야기들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힘겹고 나른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청년들과 오늘날 우리의 일상의 단면을 여러 방향으로 베어내어 가볍고 경쾌한 문체를 통해 언뜻 언뜻 스치는 진실들을 포착한다.  대한민국의 구석구석을 잠식해가고 청년 실업과 빈부 격차의 문제, 노인 문제, 인터넷과 SNS로 변화되는 우리의 생활 등 다방면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포착하지만, 마냥 무겁고 어둡게 다루지는 않되 또 그것을 무심한 시선으로 지나치지 않으면서, 잘못탄 버스비를 받지 않던 버스 기사의 아주 작은 친절만큼이나  훈훈한 이야기들을 포함한다.  <그녀와 마주친 어느 오후>, <낮은 곳으로 임하다>, <비치보이스>, < 미드나잇 하이웨이>, <아파트먼트 세르파>, <초조한 또띠아 레시피>는 모두 우리의 청년들이 오갈데 없이 오롯이 마주하고 있는 남루한 실업상태를 그린다.   


<그녀와 마주친 어느 오후>에서 만날 사람도 없이 나른하고 무료한 청년 실업자는 심심풀이 수작으로 약속한 여성 보험 판매 스팸 마케터가 아이와 통화하는 소리를 목격한다. 타인일 때의 그녀는 직장도 없이 빈둥거리는 루저가 상대할 유일한 심심풀이었지만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아이를 어쩌지도 못하고 전화로 달래는 개인으로 대면하는 순간, 생활 전선에서 분투하는 여성의 막막한 현실은 어떻게든 남자의 마음을 건드린다. 


<낮은 곳으로 임하다>에서 한끼조차 부담스런 실업자에게 친구가 제안한 고향집 방문은 맛나게 차려주는 한 끼 밥상이라는 미끼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일만큼 삶이 피폐하지만, 막상 긴 여행을 통해 도착한 시골에서 친구는 자신을 방패로 부모에게 사업자금을 벌리려는 수작이었음이 드러나고, 배반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배추수확을 돕자고 제안하자 일당이 얼마냐고 물을 수 밖에 없는 친구는 몸도 마음도 자존심까지도 모두모두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는 청년 실업자의 자세를 반영한다. 


<미드나잇 하이웨이>는 더욱 절망적인 인간을 등장시킨다. 생활고와 빚, 더는 사는 일을 감당할 수 없어 자살하기로 결심한 남자는 번개탄을 사들고 자동차 틈새를 테이프로 꼼꼼히 마감한다. '오베라는 남자'도 아닌데 막 자살의 성공적 실행을 눈앞에 둔 찰라, 커다란 트럭을 옆에 주차한 기사가 자꾸 문을 열고 뭘 물어보고 뭘 부탁하고 담배불까지 빌려달라고 하면서 자살을 방해하는 것이다. 자살을 막기 위해 트럭 운전사가 보여주는 작은 마음 나눔의 등불이 비록 자살희망자의 상황을 변화시키지는 못하지만, 그의 따스함을 알아챈 순간 다시 조금은 더 살아갈만한 동력이 되어주기를 나는 바랐다.


<아파트먼트 세르파>는 시급이 센 치킨 배달 알바를 구한 남자가 알고 보니 고층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이용이 배달부에게 금지당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상황을 그린다. 세상 최강의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아파트 주민은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며 배달부의 엘리베이터 탑승을 금지한다. 치킨집 사장은 치킨 배달을 해야 치킨을 팔아야 먹고 살 수 있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한 번이라도 이용하면 CCTV로 지켜보고 있던 관리소에서 바로 알람이 온다. 그러나 이 짧은 소설이 향한 곳은 그 이기심의 공간에서도 한 개인의 별거 아닌 아주 티클만한 배려다. 고층아파트까지 치킨 배달을 하기 위해 그 힘겨운 계단을 올라야 하는 배달부에게는 그 작은 제안이 삶의 에너지가 되기를 나는 바랐다. 


<초조한 또띠아 레시피>에서는 밤을 새며 먹방을 보는 한국적 상황과 무능하고 무력한 개인이 만났을 때의 작은 용기와 그 용기가 부딪히는 절망을 절묘하게 그렸다. 웃기면서도 슬픈, 자책하는 청년들의 자화상이 아닐수 없다. 세프들에게는 그렇게나 초간단한 레시피가, 이 무기력하고 가엾은 청년에게 그 무엇이라도 해보려는 엄청난 용기를 끌어모아야 했던 행동이었음을 오밤중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부엌에서 어리둥절해진 그의 노부모는 알 턱이 없다. 먹거리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대한민국, 먹는 일에 그토록 에너지를 쏟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  


<개굴개굴>은 삼형제를 키우는 맞벌이 부부의 남자에게 어느날 툭 떨어진 아이돌보기 하루가 가져다주는 웃지 못할 해프닝을 통해, 양육의 힘듬을 몸소 경험하는 남자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말처럼 쉽지않네>는 마을에 하나 뿐인 폐교를 막으려고 조기 축구회를 조직해 소도 논도 밭도 다 방치하고 하루 종일 운동장에서 뛰는 시골 친구를 두고 영문을 모른채 도시에 사는 친구들이 하는 뒷담화들로 이야기가 풀어나간다. 중년과 노인에 대한 시선은 더없이 따스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무참함을 보여준다. 


<봄비>에서 노모를 업고 논두렁을 걷는 아들의 모습은 눈시울을 젖게 한다. 치매로 요양원에 모셔다 드렸지만 계속되는 실종, 그 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 무덤가에 와 계신 것이다. 봄비내리는 어느 날 다른 날처럼 아버지 무덤가에서 어머니를 찾은 주인공은 한 손으로 우산을 잡고, 한 손으로는 흘러내리는 어머니를 업은 채로,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택시 운전사였던 아버지에게 우산을 가져다 주러 회사를 가던날, 어머니가 급히 아들을 가린 투명한 비닐 우산 밖으로 아들의 눈에 들어온 장면은 아버지가 사장에게 뺨을 맞는 장면이다. 그 때, 아들은, 어머니가 우산으로 시야를 가린 것은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의 시야였다는 것을 살면서 깨닫는다. 우산으로 보호하고자 한 것은 '아들이 아버지가 맞는 장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맞다가 행여 아들을 볼까봐' 그런 것이었다는 걸 말이다. 


아버지가 맞다가 행여 아들을 볼까 봐, 그러면 정말 아버지가 못 견딜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렇게 한 거겠지. 그는 생각했다.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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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6-09-28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임스 서버 단편선 글들은 A4 2장도 안 될 정도로 엄청 짧은데 피식거리며 웃다가도 그 통찰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더라고요. 이기호 소설가 책도 제목만 알았지 읽어본 적이 없는데 조금 궁금해져요. 일상을 포착한 짧은 글에 훈기와 씁쓸함을 담았나 봐요. 어찌 보면 뻔할 수도 있는데 그런 아이러니들이 모여 삶을 구성하는 거란 생각도 들고요.

CREBBP 2016-09-28 19:44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단편을 길이로 판단할 수는 없죠. 에드거 알렌 포 소설도 2~3쪽 짜리 으스스한 것들도 있고, 디킨스, 모파상 등도 짧으면서 위대하다 싶은 글들이 많더라구요. 허버트 조지 웰스든가, SF 작 중에서도 정말 2~3쪽 안되는 소설을 영화화한 것들도 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