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 원전 완역판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9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박용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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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은 역설적이다. 오래된 것이라는 의미가 단어에 이미 들어 있지만, 막상 읽고 나면 새롭고 신선하다.  김영하는 <읽다>에서 "지금 읽어도 새로운 것은 쓰인 당시에도 새로웠을 것입니다. 그들 역시 당대의 진부함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고전은 당대의 뭇 책들과 놀랍도록 달랐기 때문에 살아남았고 그렇기에 진부함과는 정반대에 서 있습니다"라고 썼다. 당대에는 새로왔다 할지라도, 이후 생겨난 작품들이 그 새로움에 영향을 받으며 변화해 왔으므로 지금 다시 보면 그 새로움은 진부함으로 변했을 수밖에 없을 터인데 지금 읽어도 새로운 건 무얼까.


내가 생각해낸 이유는 이렇다. 귀에 닳도록 어릴 때부터 접해왔던 고전들이 가진 그 컨텐츠의 '새로웠던' 요소들 중의 일부가 넓은 영역에서 소비되어 오는 동안, 우리는 마치 작품을 읽었던 것 같은 착각을 한다. 읽었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다 아는 줄 알았는데 막상 '다시' 읽어보니 그동안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로 가득찬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탈로 칼비노의 고전에 대한 정의(“고전이란, 사람들로부터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제로 그 책을 읽었을 때 더욱 독창적이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 창의적인 것들을 발견하게 해주는 책이다.(<읽다 - 김영하>에서 재인용)"는 매우 적절했다.


<걸리버 여행기>의 경우는 어린이용 동화나 그림책으로도 수없이 개작되어서 왔고, 우리에게는 거인국과 소인국에 대한 환상이 어릴 때부터 <걸리버 여행기>의 이미지로 고착화되어 있다. 특히 주인공이 릴리푸트 왕국에 도착해서 실같이 가는 소인국 나라의 밧줄로 꽁꽁 묶여, 바늘처럼 날아오는 화살을 맞는 장면은 <걸리버 여행기>를 집집마다 걸려있는 가족 사진처럼 각인시킨, 어린 시절 읽은 세계 문학 동화를 대표하는 시각적 이미지다. 그뿐인가, 원작의 소인과 거인 나라 이야기에서 차용한 수많은 컨텐츠들이 영화, 만화, SF나 판타지 소설의 주요 소재로 이용되어 왔다. 


알려져있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조너선 스위프트가 쓴 원저의 1부와 2부, 소인국과 거인국에서 일부 내용을 가져온 것들이다. 원전은 4부까지 있다. 이 소설이 새로운 이유는, 우리에게 고정된 소인국과 거인국의 모험이라는 이미지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이 많은 의미와 상징, 시대와 인류에 대한 풍자와 새로운 시대에 대한 혁명적인 통찰을 풍부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영국 식민 상태의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활동했다. 스위프트가 태어난 해는 1667년이고, 이 책이 쓰여진 시기는 1721년과 1725년 사이로 보이는데, 초판이 출간된 해는 1726년이다. 명예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일랜드를 떠나 영국으로 간 스위프트는 외교관인 템플 경의 비서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네덜란드 왕자인) 영국 왕에게 충고하는 기회를 갖는 등 정치적  경험을 쌓으면서 당쟁을 조정하려고 노력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이후로도 아일랜드의 정치에 관여하면서 영국의 식민 제도에 꾸준하게 비판한다. 런던에서 출간된 초판은 1주일만에 매진되었으며 책에서 상징하는 사상에 대해서는 그때부터 시작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 천공의 섬 라퓨타와 그 주위의 여러 환상적 섬들을 엮은 3부가 가장 재미없는 이야기로 간주되었다고 하는데, 나는 가장 재미있게 읽혔다.


소인국의 판타지는, 판타지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반향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거기에서 스위프트는 왕을 만나고, 전쟁을 도우며, 두 나라 사이의 외교에 관여하면서, 영국과 아일랜드가 처한 외교 관계와 식민 사상에 대해 우아하게 풍자함으로써 시대를 뛰어넘어 영원한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도착한 나라는 릴리푸트인데, 그 나라는 영국에서 그랬듯이 내부적으로는 70년에 걸쳐서 트라멕산당과 슬라멕산 당이 싸움을 벌이고 있었으며, 외부적으로는 지난 36개월동안 블레푸스쿠 제국과 끊임없이 전쟁을 해왔다. 여기서 이 책에서 무수히 많이 등장하는 스위프트의 깨알같은 냉소와 해학을 처음 경험하게 되는데, 그 분열의 원인이 신발굽의  높이 차이에 따라 나뉘어지고, 두 나라의 충돌이 계란을 깨는 방식의 차이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계란을 수십년간 요리하면서 살았으나 두꺼운 쪽과 얇은 쪽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도 못하지만, 릴리푸트 왕국이 계란을 깰 때는 두꺼운 쪽을 깨는 게 쭉 이어온 전통인데, 선대왕(조부)이 손가락을 다치게 되면서, 모든 국민에게 얇은 쪽으로 깨어야 하며 위반하면 엄벌하도록 포고령을 내렸고, 이에 분노한 국민들이 블레푸스쿠의 역대 황제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고 제압되고 그쪽 나라로 망명하는 일이 되풀이되는 것으로 나온다. 


이 소인국 편에서는 경전에 나온 계란 깨기에 대한 양국의 시각차를 비롯한 당시 벌어지고 있던 종교적 갈등과 분열, 쓸모없는 종교적 논쟁으로 무고한 희생자만을 계속해서 낳는 소모적인 전쟁 , 그리고 한 나라를 예속시키려고 하는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스위프트의 냉소적 시각을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낸다. 불이 나서 다 타버리게 생긴 궁궐에 오랫동안 참아온 오줌을 싸서 껐는데, 그로 인해 엄청난 재산상의 손실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궁정 안에서 소변을 보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률 조항을 근거로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되는 웃지 못할 상황을 비롯해 엉뚱하고 기발한 유머 코드가 곳곳에 배치되어 꽤 두꺼운 책임에도 지루할 새 없이 읽을 수 있었다. 


매번 이상한 섬에 도착하여 그 고생을 하고도, 역마살이 끼었는지 그는 집으로 돌아오면 무슨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새로운 항해를 시작한다. 처음엔 선상 의사로 다니다가, 나중엔 항해 경력을 바탕으로 선장에까지 오르지만 매번 항해에 성공하지 못하고 계속 해적을 만나거나,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엉뚱한 섬에 도착하는 것이다. 두번째 섬인 대인국 브로브딩낙에서 인상적인 것은 그가 하나의 인형이나 애완용 동물처럼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릴리푸트 섬에서 느낀 것과는 반대로 덩치가 큰 사람들 속에 아주 작은 존재인 이유만으로도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그들에게 하찮은 존재가 될 것인지와, 그렇지만 그렇게 큰 사람들이라고 해도 다시 또 그들이 자신만큼 작게 보일만한 더 거대한 존재들을 마주치게 될 가능성을 생각하며 우주의 법칙에 대해 통찰한다.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완벽하게 다른 문화와 문명을 가진 두 나라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면서 자신이 믿고 있는 최선이라는 것이 다른 관점에서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서도 경험한다.


크기가 작다는 것의 취약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온갖 혹사와 괴로움을 경험하고  가까스로 왕비에게 구조되어 또 그 작은 크기가 자극하는 보호본능에 의한 혜택을 받게 된다. 작은 존재로 산다는 것은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원숭이나 설치류 심지어 파리떼들까지 그에게는 엄청난 괴물인데, 마침 궁에 함께 살던 난쟁이는 그를 괴롭힌다. 그러나 그를 괴롭히는 것은 그와 그가 살던 나라를 설명하면 할수록 궁궐의 많은 대신들과 왕들에게 지속적으로 하찮은 존재, 하찮은 문명으로 무시당하는 것이다. 그는 영국의 우수한 의회제도를 비롯하여 교;육, 행정, 사법 제도 전반에 걸처 우수성을 강변하는데, 그들의 질문은 그의 허를 찌르고 그것은 다시 영국식 제도가 맞닥뜨리는 현실적 문제들을 비꼰다. 


"나의 조그만 친구여, 자네는 조국에 대해서 칭찬을 했네(...) 제도가 시작은 훌륭했지만 결국에는 부패로 인해서 비이 바랜 걸로 보이네. 자네가 말한 것으로 볼 때 어떤 사람이 어떤 지위를 얻는 데는 그 방면의 학식으로 얻는 것 같지도 않고, 귀족들은 훌륭한 인격 덕분에 귀족이 되는 것 같지도 않고(....) 자네 나라의 인간들은 자연이 이제껏 이 지구상에서 기어다닐 수 있게 만들어준 벌레들 중에서도 가장 고약한 벌레들이라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네(2부-6장)".


그는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사는 나라 사람들의 취약점을 인식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거인국 사람들의 인간에 대한 무지는 가령 이런 것이다. 애국심에 대해서 그들은 애국심이라는 것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화약의 위대함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곳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 악마같은 존재들이라면 그러한 무서운 장치를 만들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며, 심지어는 그에게 그러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태연하게 말하는 것에 분노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저자의 시각은 냉소로 가득하다.


3부에서는 천상의 섬 라퓨타와, 그의 수도들을 두루 여행하고, 4부에서는 말들의 섬에 도착한다. 1부와 2부가 영국의 부조리와 모순을 풍자한 것이라면 3부와 4부는 인류 자체를 풍자했다. 3부 천공의 섬에 도착한 그는 17세기 18세기 문명을 주도한 과학과 무능한 관리들을 풍자하고, 마법의 섬에서는 역사책에 나와있는 모든 궁금한 사람들과 역사적 순간의 진실을 만나게 된다. 이를 통해 독자는 편견과 오해와 거짓으로 날조된 역사관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또 승자에 의해 다시 씌여진 역사가 계속해서 순환되고 재생산되는 과정을 성찰하게 된다. 4부는 말의 나라에 도착해서 말의 시각으로 인간을 보게 되는데, 이 부분이야 말로, 스위프트 고유의 위대한 성찰이자, 독자들이 그동안에 유사한 컨텐츠를 통해 만나지 못했던 새로움이 가득한 부분이다. 말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동물이다. 문명을 가진 말이 야만인을 보았을 때, 그들의 본성적인 탐욕, 본성적인 폭력,  본성적인 시기와 미움과 질투 등을 고발하는 역할을 하는데, 결국 저자(화자)는 말의 나라에 동화되고, 그곳에 남기를 희망하지만 어쩔 수 없이 구출되어 돌아간 후에도 다시 악취나고 위선적인 인간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 안에서도 가족들과 가까이 하지 못하며 고립된 생활을 이어가는 이야기로 맺는다. 


문학은 시대를 읽는 거울이다.  그 거울 속에서 독자들은 시대 속의 나, 인간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다. 고전을 읽는 것의 즐거움, 유쾌함을 알게 해준 값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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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0-11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당선작 예정!~^^

CREBBP 2016-10-11 15:36   좋아요 1 | URL
호호 유레카님 말씀만으로도 이미 당선작 받은 것만큼 기쁘네요. 격려 감사합니다. ~~

2016-10-13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4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4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4 1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4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4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