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아워 2 -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2013-2018 골든아워 2
이국종 지음 / 흐름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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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에겐 더 이상의 비상구는 없었다.


 귀순한 북한 병사가 그에게 치료를 잘 받고 다른 병원으로 전원했다는 소식을 끝으로 그와 이국종 교수의 이야기는 더 이상 언론에서 다루지 않았다. 그 이후 중증외상센터에 대한 열악한 현실이 노출되어 많은 국민들에게 관심을 받았고, 그에 다른 국가의 예산도 지원되었다고 했으나 국민들의 많은 성원과 달리 현장에서는 여전히 바뀐 없다고 했다. 작년부터 그의 책이 출간되기만을 기다렸던 나는 그의 이야기를 올해를 넘기지 않고, 그의 책이 출간된 것을 기뻐했으나 그가 써내려간 비망록은 처참했다.


매일 매일 전투를 치르는 것처럼 그와 그의 동료들은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조차도 아껴가며 환자를 구해내고 수술하며 그들을 다시 재건시켰지만 돌아오는 것은 비난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라의 수장이 바뀌어도 그들에게는 달라지는 것이 없었고, 오히려 시간이 지나 그들을 든든하게 받쳐주었던 이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물러나 그 어떤 것도 지킬 수 없는 시간들이 도래했다. 활자를 읽으면 읽을수록 먼 바다의 심해속으로 빠져드는 듯 계속해서 몸이 착 가라앉는 것 같다. 현장에서는 고군분투하지만 위에서는 나 몰라라 하며 그들의 일을 그저 별난 짓이라 생각하는 그들의 이야기들이 눈이 따갑도록 가슴을 친다.


중증외상센터는 특정 누군가에게만 필요한 시스템이 아니다. 누군가 길을 가다가 큰 사고가 났을 때, 일을 하다가 추락하거나 큰 외상을 입었을 때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신고를 하면 의료팀은 응급환자에게 필요한 기구를 싣고 환자에게 빠르게 달려간다. 1분 1초가 급한 상황 속에서 골든아워 때 도착한 의사가 환자의 환부를 보고 그에 맞는 대처를 한다면 환자가 살 수 있는 확률은 급격히 높아진다. 영국이나 미국, 일본은 전국 어디서나 중증외상센터의 시스템이 정착되어 있어 환자에게 필요한 골든아워의 순간에 그들을 구조하여 보다 빨리 환자의 목숨을 살려낸다. 살릴 수 있는 목숨을 살려내는 것. 의사라고 조용히 의자에 앉아 환자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의사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면 헬기를 타고, 레펠을 타고 내려와 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이 의사의 할 일이자 중증외상센터가 필요한 이유다.


그가 걸어온 길은 처음이라 척박하고, 도무지 내 딛을 수 없는 길을 만들어 걸어왔다. 그의 진정성 어린 행동과 열정이 그를 둘러싼 사람들 속에 이루어 졌지만 걸어오지 않는 길을 만들어가는 만들어가는 자의 숙명처럼 동료들의 비난과 수술을 하면 할수록 기준을 넘어선 의료 숫가와 무전기, 헬기, 의료진등 무엇도 정착되지 않는 지원들이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 정책은 뜬구름처럼 떠 있고, 국민의 성원으로 모금된 돈은 현장까지 도달하지 않는 상황과 그를 비롯해 그의 팀들은 잠과 휴식, 먹는 것 조차 제대로 먹지 않아 탈진하고 쓰러지고, 유산하며, 급기야 눈이 실명 위기까지 오르는 상황이 반복. 반복. 반복되었다.


이국종 교수의 <골든아워>는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배를 타고 가는 것처럼 그가 외과의사로서 일을 하는 그날까지만 이 시스템을 끌어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칠 것 같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를 점점 더 옥죄어 올 뿐 어느 곳에서도 돌파구를 찾을 수 없는 한국에서의 중증외상센터는 그의 업일뿐, 그 누구도 이 시스템을 정착시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가 내는 수 많은 세금이 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이 곳에 미치지 못하는지 이해 할 수가 없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내가 될 수 있고, 네가 될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그들의 안전과 그들의 일, 그가 그토록 뿌리 내리고 싶어하는 센터 하나 조차도 나라에서 지켜주지 못한다니. 누구라고 이야기 할 것 없이 날아오르는 헬기의 프로펠러의 소리에 시끄럽다며 민원을 넣는 이들의 이기심과 먹는 것도, 잠을 자을 자는 것도 하지 못한 채 힘을 들여 헬기를 타고, 레펠을 타고 내려와 수십 시간 수술을 하고도 깨어난 환자에게 욕을 먹는 상황들. 더 이상 이 시스템이 진전 가능성이 없다는 그의 시니컬한 이야기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이국종 교수와 중증외상센터의 팀원들, 전담 간호사들, 소방구조대의 파일럿들의 희생과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구조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함께 그들의 고단함과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1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석해균 선장의 일화를 담았다면 2권은 세월호와 귀순한 북한 병사의 뒷 이야기가 세밀하게 그려져있다. 기울어진 배에 관한 이야기는 도무지 시스템이라고는 작동되지 않는 그 누구도 '알수없다'는 답변만이 그를 울분에 차게 했고, 북한병사의 이야기는 연일 떠들어내는 언론만 시끄러웠을 뿐 그들에게는 더 이상 진전된 행보를 나아갈 원동력을 손에 넣어주지 않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동력을 잃고 계속 끝을 맞는 동료들의 뒷모습을 이야기한다. 그가 외과의사로서 끝을 맞았을 때 그는 그이처럼 홀가분하거나 다른 일을 향해 내달리는 그들처럼 달려 갈 수 있을까. 그가 손을 놓았을 때 다른 후배의 의사가, 또 다른 후배들이 이끌어줄 중증외상센터의 앞날을 기대했으나 그것마저도 진정성을 느끼지 못하는 수 많은 이들이 그들의 도전을 '무모하게' 받아들이고 마는 것은 아닌지 진정 걱정이 된다. 바쁜 와중에도 기록만이 그들이 걸어왔던 길을 화석처럼 남길 수 있어서 글을 썼다는 글이 아프게 다가온다. 멀리서나마 그와 의료진에게 응원을 보내는 나에게도 부끄러워 얼굴을 들이밀 수 없을 만큼 치부가 느껴지는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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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해야 한다, 더 잘해야 한다, 버텨라······. 서광욱의 말은 내게 하는 말이자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 헐겁게나마 쌓아오던 모든 것이 허망하게 붕괴되는 한복판에서 나는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 침몰하는 배 위가 내 자리였다. - p.212


수술방 안의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서로를 도왔다. 죽음으로 가득 찬 칠흑 같은 장막 속이었다. 그 안에서 몇 안되는 사람들이 한줄기 여린 빛을 향해 버티며 나아가고 있었다. - p.217


일부 정치인들이 특별히 생각하는 노동자들 대부분이 몸을 써서 먹고살았고, 몸으로 먹고사는 노동자들은 일하다 사고로 으스러져 죽어가곤 했다. 이런 이들에게 선별적 의료 혜택을 주려면 중증외상 분야를 보완해야만 했다. 그러나 말로 먹고사는 이들은 몸으로 먹고사는 이들의 삶을 깊이 알지 못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끼리 말의 잔치만 벌이며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을 논했으므로, 그들이 만들어내는 정책은 실제 노동자들에게 가닿지 않았다. 부서지고 찢겨져 죽어나가는 노동자들을 눈앞에서 보는 나는 그렇게 느꼈다. - p.224


결국 정책이나 국사 사업은 같은 방향을 보며 의지를 가지고 집요하게 좇는 이들에 기대어 살아남는다. 살아남는다고 해도 무수히 뜯기고 휘둘려 종국에는 유명무실해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보건복지부 내에서 중증외상센터 설립 사업에 힘을 쏟던 손영래와 응급의료과의 현수엽, 공인식도 떠났다. 나만 홀로 덩그러니 남았다. 국가적으로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을 만들어보고자 발버둥쳤던 의료인 출신 관료들은 사라졌고, 중증외상센터 사업은 통상적인 정부 사업 중 하나가 되었다. 사랑에서 밀려오는 물살에 부서진 조각들이 발끝에 채는 광경에 나는 무참해졌다. - p.227


수술방은 피바다였다. 바닥에 쏟아진 피가 더 퍼져나가지 못한게 둑처럼 막아둔 시트들이 붉게 물들었고, 환자가 누웠던 자리는 피에 깊이 젖어 흥건했다. 수술대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러 떨어져 내렸다. 핏방울이 바닥에 고인 핏물에 떨어져 닿을 때 작은 핏물결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 발 받침대에 주저앉았다. 붉은 피바다 한가운데 위치한 수술대가 전쟁 중 해상 위에 뜬 항공모함과 같아 보였다. 그 아래로 수 없이 쓰고 버린 일회용 수술기구 포장지들이 돛단배마냥 핏물 위를 떠다녔다. 실바람조차 불지 않는 수술방 안에서도 그것들은 끊임없이 부유했다. 내 인생도 그 피바다 위에서 끝없이 표류하고 있었다. - p.245

한 지방자치 단체에서 1,800억 원을 들여 대규모의 안전체험테마파크를 지어놨다. 하루 평균 입장객은 350여명, 연간 적자 규모는 15여억 원이라고 했다. 1,800억 원이면 중증외상센터 전체 건립 비용을 상회하며, 소방항공대 두세 곳을 창설 할 수 있는 금액일 것이다. 세월호와 중증외상에 대한 이슈가 붉어진 이래로 안전과 외상을 테마로 수많은 것들이 벌어지고 있으나, 나는 그 핵심가치를 알 수 없었다. - p.256


최선을 다한다. 그 말의 허망한 실체를 잘 알고 있었으나, 나조차도 그 말에는 달리 할 말이 없는 상황에 계속 빠져들었다. 제대로 된 장비조차 가지지 못하는 난 왜 이 일을 하고 있나······. 갈수록 자괴감은 무겁고도 깊게 나를 짓눌렀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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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아워 1 -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2002-2013 골든아워 1
이국종 지음 / 흐름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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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어보기를...


 작년 11월, 한 북한군 병사가 공동경비구역( JSA)내 군사 분계선을 넘어왔다. 북한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져 있는 것을 우리나라 부사관들 2명이 구해와 미군 더스트오프 헬기로실어 아주대학교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의식을 잃은 군인을 아주대학교 병원 외상외과 과장이자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장인 그가 직접 집도하여 어린 북한군 병사를 살려냈다. 한동안 그의 이름을 모를 정도로 뉴스와 신문의 모든 헤드라인이 그 북한군 병사와 그를 집도한 이국종 교수에게 집중 되었다. 그때 나도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

여러 발의 총탄은 맞고 사경을 헤메는 북한병사를 더스트오프팀과 아주대병원 의료진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데려와 처치했고, 다행히 그들의 노력히 헛되지 않게 살려냈다. 꽤 오랫동안 그들의 이야기가 미담으로 전해졌지만, 한 국회의원의 말이 불씨가 되어 그들을 집어 삼켰다. 외상외과의 수장인 그는 정면으로 날아오는 화살에 분노했고, 그 어떤 가치보다 '생명'이 가장 우선임을 이야기 했다. 더불어 풍전등화처럼 언제 꺼질지 모르는 중증외상센터의 민낯을 알렸다.

유튜브에 가면 2012년에  M본부에서 스페셜로 했던 '골든타임'은 있다 외상외과, 그 한달간의 기록이라는 부제로 쓰인 프로그램과 2013년에 했던 EBS 명의가 올라와 있다. 작년 이맘 때즘 이 두 프로그램을 한 달 내내 봤던 것 같다. 처음에는 이토록 급박하고, 피 튀기는 현장의 모습에 아연실색했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의 손길에 '중증외상센터'라는 곳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 순간도 긴장을 놓칠 수 없는 순간. 내가 알고 있는 의사의 모습과 달리 그는 어느 시간, 어느 날씨를 불문하고 환자가 있는 곳이면 헬기를 타고 날라갔다.

어렵게 데려온 환자의 상태는 시간이 갈수록 의사의 손길과는 멀어지고, 그 환자를 보는 의사는 애가 탄다. 우여곡절 끝에 그가 근무하고 있는 병원에 데려와 수술을 하지만 환자의 징후는 좋지 않고, 수술전 보호자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며, 보호자를 안심시키는 말 한마디를 지키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만다. 고개를 숙이며 비통한 마음으로 연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를 외치는 의사 선생님. 나는 이런 의사를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환자는 몸이 아파 병원을 찾지만 병원은 환자의 아픔도, 시간의 편의를 봐주지 않는다. 환자가 오롯하게 긴 기다림을 몸으로 체득한 후에야 의사를 맞닥들인다. 기다린 시간보다 의사를 마주 한 시간은 고작 몇 분. 대부분의 의사가 그렇지 않겠지만(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다) 어떤 의사들은 환자의 얼굴조차 보지 않고 모니터 화면만 보고 질문을 하고 답을 내어 놓는다. 병이 나서 왔지만 이런 병원과 의사라면 더 나아지지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온 적이 많이 있다. 인술과 의술이 맞닿아 떨어지면 좋겠지만 수 많은 환자에게 같은 물음과 같은 대답을 듣는 의료진은 어쩌면 무딜 수 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서로의 편의상 마주 보아야 하는 의사와 환자 사이는 그렇게 먼 거리인 동시에 가까운 존재가 아닐까 싶다.

현대에 올수록 우리는 몸이 편한대신 사고가 일어나면 대형 사고로 번지다 보니 인명피해가 크다. 사고가 일어나면 환자의 생사를 결정지을 수 있는 사고발생 후 수술과 같은 치료가 이루어져야 하는 시간은 최소한의 시간은 보통 1시간 이내라고 한다. 이국종 교수는 이것을 골든아워라고 하는데 그를 모델로 한 드라마의 제목이 '골든타임'으로 정해지다보니 모든 언론들이 골든아워 대신 잘못 표기된 이름으로 계속 쓴다고 지적한적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책이 나왔다고 했을 때 '골든아워'라는 제목의 이름의 낯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국종 교수라면 으레 이런 제목으로 그의 이름을 대신하여 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권에서는 2002년부터 2013년까지의 기록을 담았는데 그가 아주대학교 병원에 몸담아 외상외과를 전공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과 외상센터를 건립하기까지의 혹독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외국에서 무엇을 배워오고, 중증외상센터를 건립하여 어느 누군지 간에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살리려는 그의 노력은 강했으나 이 좋은 취지를 위에서, 옆에서, 아래에서, 저 먼 곳에서 들려오는 야유와 화살은 그를 더 밑바닥으로 가라앉게 만들었다. 

2011년 그는 갑작스럽게 아덴만 작전에 의해 부상을 입은 석해균 선장을 치료하러 길을 나섰고, 다행히 그를 구해낸다. 그에 대한 일화는 뉴스를 통해 많이 들어왔지만 실상 그 일의 진실은 더 혹독했다. 정부의 지원으로 차출된 의사가 환자를 실어나를 수 있는 에어 엠블란스가 없어 어마어마한 금액이 들어갈 서류에 사인을 하고서야 겨우 이송을 할 수 있었던 일. 다행히 그 이송에 대한 값은 정부가 지원했지만 이처럼 현장에서 필요한 손길과 지원은 야박하기만 하다. '영웅'이라는 칭호 보다는 그는 의사에 대한 사명감과 철저한 직업의식으로 하루하루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그의 일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그의 땀과 노력이 수반되고, 희생을 하면서도 중증외상센터를 건립하고 시스템을 정립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이토록 어려운지 모르겠다. 누군가 이 일을 하는 이가 없다면 외국에서 사람을 데려와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장치에 대해 논의하고 외국의 좋은 시스템을 정착시켜야 할 판국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안전 펜스를 버리고, 개인의 희생만을 강요하고 있다. 그의 일은 마치 전쟁을 하는 군인과 같아서 최전선에서 가까스로 온 몸을 다해 버티고 서 있는 수장같다. 내일을 기약 할 수 없고, 저녁이 없는 삶을 사는 그들에게 우리는 과연 어떤 이야기로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담장 너머로 그를 존경하고 응원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많은 이들의 손길이 갔다는 이야기도 언론을 통해 들었으나 정작 그들이 시급한건 정부의 직접적인 예산이 현장에 가 닿는 것이나 그들은 점점 더 운영비가 부족하고, 인력이 부족하여 쓰러지고, 또 쓰러졌다는 기록들이 빼곡히 남을 뿐이다. 그가 너무도 좋아해 여러번 반복했다는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 역시 왜 그가 그토록 읽고 또 읽었는지 알게 되었다. 책 속의 이순신 장군의 혹독한 이야기가 김훈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21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의 글 속에 흠뻑 묻어난다.

그래서 혹 김훈 작가의 필치가 묻어나올 수 있다했지만, 글을 읽어보니 글의 느낌이 깊이 베어나오지는 않았다. 그의 책을 읽고 나니 마음이 더 헛헛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사회적인 시스템이 이것 밖에 되지 않았나 하는 회의감이 몰려온다. 매일마다 안전을 부르짖지만 사고는 연일터지고, 터진 사고를 메꾸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제대로 보여주는 에세이가 아닌가 싶다. 그의 시니컬한 표정과 깊은 한숨이 절로 이해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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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환자에게 가까이 접근할수록 환자를 살릴 기회가 많아질 거야(The closer you get to the patient, the more chances you'll save the patient).

어떤 환자라도 조건은 같고 환자는 언제나 상황에 우선한다. 원칙이 흔들리지 않았다. 의료진은 원칙대로 환자에게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더 빨리, 더 가까이 가려고 애썼다. - p.51


한국의 환자 이송 시간은 평균 4시간으로,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전투 지역과 다르지 않다.*


* 미국 독립전쟁 때 현장에서 다친 병사를 야전 병원까지 데려오는 데 걸린 시간은 72시간, 제 1차 세계대전 때는 8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제 2차 세계대전 때는 현장에서 후방 외상센터까지 4시간이 걸렸고, 한국전쟁에 이르러서는 1시간 30분, 베트남전쟁 때는 30분으로 단축시켰다. 헬리콥터를 사용한 덕분이었다. 선진국에서는 이것이 그대로 외상 시스템에 들어와 지켜지고 있으며 의료진이 직접 사고 현장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출동하기도 했다. - p.52


사지가 으깨지고 장기가 부서져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실려 온 환자들은 외상외과적 수술과 집중치료를 받아야 산다. 수술은 한번에 끝나지 않는다. 필요한 생명유지장치와 약품의 수는 너무 많다. 치료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데 자동차 보험, 산업재해 보험, 각종 사업체 주도의 공제조합들과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는일반 환자 기준에 맞춰 진료비를 지급했다. 투입된 비용에 턱없이 모자란 진료비만 병원에 지급되므로, 병원에는 심각한 손실이 발생했다. 초대형 병원은 중증외상 환자를 수용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정규 환자 부족에 시달리는 종합 병원들은 이런 부담을 안고서라도 교통사고나 추락사고 등으로 발생한 외상 환자들을 유치하려 애쓰고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중증외상 환자 이송 체계'가 존재하기란 아예 불가능했다. - p.57


'받아야 하는 돈'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의 원인이 모두 내게 있었다. 나는 틈틈이 심평원에 사정하는 글을 써 보냈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 약품과 장치들을 기준에 비해 초과 사용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함을 적었고, 교과서의 내용을 통째로 복사해 첨부했다. 그럼에도 삭감된 진료비 회수율은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사유서는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누군가가 읽었다 해도 정상참작은 요원했다. 심평원 내 심사위원 중 외상외과를 전공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내가 세계적으로 쓰이는 외상외과 교과서의 표준 진료 지침대로 치료했다는 내용의 자료를 수백 번 제출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환자마다 쌓여가는 삭감 규모가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에 이르렀다. 결국 교수별 진료 실적에 기반을 둔 ABC 원가분석이 더해져, 나는 연간 8억 원이 넘는 적자의 원흉이 됐다. - P.60


나는 더욱 부끄러웠다. 인생에서 시한부 같은 보직을 가지고 있는 내게 무엇이 남을지를 생각했다. 일상이 반복될 때마다 내 앞을 등록되어 올라가는 환자 명단만이 내 삶의 의미를 더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해가 지날 때마다 새롭게 추가되는 200명 정도의 새로운 환자 명단과 협의 진료 실적이, 내가 세상에서 일을 하면서 존재했다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 P.194~195


떨어지는 칼날은 잡지 않는 법이다. - P.222


외상외과의 특수성은 어디에서도 헤아려주지 않았다. 그동안 병원에서 해오던 통상적인 진료 이외에 해야만 하는 것들은 많았지만 그것들을 하기 위해 한 발만 앞으로 내디뎌도 길을 보이지 않았다. 윗선과의 자리에서 지원에 대해 흘러나오는 좋은 말들은 그 자리를 벗어나면 없는 것이 되었다. 의료계와 관료들의 사회는 고도의 정치판이었고 앞뒤 면상이 판이하게 달랐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웃는 얼굴들이 좋은 옷을 입고 맛난 것을 먹으며 화려한 말의 향연을 벌일 때, 현장에서는 비행복 한 벌 신발 한 짝이 없어 몸을 떨었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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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
엔도 슈사쿠 지음, 송태욱 옮김 / 포이에마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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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문호가 들려주는 문학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

 엔도 슈사쿠의 대표적인 작품 <침묵>(2003,홍성사), <깊은 >(2007,민음사),<바다와 독약>(2014,창비)을 읽어 본 적이 없음에도 일본의 대문호인 엔도 슈사쿠의 강의를 들어보고 싶었다. 일면식이 없는 작가인 동시에 그가 천착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문학은 그야말로 내가 문학을 읽는 데 있어 가장 취약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정 종교를 믿지 않을 뿐더러 종교와 관련된 책이라면 질색을 하는터라 책을 읽지 않는데 그의 문학 강의는 종교는 있지만 웃음과 해학이 있어 그가 들려주는 문학강의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에도시대 기리시칸의 후미에와 마찬가지로 전쟁 중 우리 역시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여기는 신조, 동경하는 삶, 그런 것을 흙 묻은 신발로 짓밟듯이 살아야만 했습니다. 전후前後 사람들이나 요즘 사람들 역시 많든 적든 간에 자신의 '후미에'를 갖고 살아왔을 겁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후미에를 밟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 p.17


그는 에도 시대 기리시칸의 후미에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동판)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것이 밟느냐, 밟지 않느냐를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밟고 살아 갈 수 없는 시간들을 이야기 한다.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교에 관한 구원에 대한 목소리는 깊이 전달하지도, 전달받지 않았으나 그가 읽고 들려주는 문학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간다. 그의 작품들과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테레즈 데스케루>, 그레이엄 그린의 <사건의 핵심>, 쥘리앵 그린의 <모이라>,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은 각기 다른 작가의 문체이지만 서로 닮아있다. 남녀의 이야기를 다뤘지만 신이라는 존재가 그들에게는 벽이 되고, 그들이 벌인 행동의 심판이 되어 그들의 죄를 더 깊이 논하기도 한다.


강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그의 글은 작품을 읽지 않는 이들 또한 공감할 수 있도록 작품을 짤막하게 소개했으나 아쉽게도 프랑수아 모리아크와 그레이엄 그린의 작품은 번역되지 않았거나 번역되어 있어도 선택의 폭이 작다. 키스를 할 때 눈을 감는 이들과 달리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테레즈 데스케루>의 주인공 테레즈는 눈을 뜨고 키스를 하는 상대방의 얼굴을 지켜보는 여인이다. 그의 눈동자에 깃든 감정을 느끼는 여자인 동시에 그의 남편인 베르나르를 심중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 몸이 상한 그가 극약 처방을 받아 비소를 약하게 한 두방울 넣어 먹던 그에게 알면서도 그가 약을 먹었던가 하는 물음에는 침묵하여 그가 다시 약을 먹게 만든다. 다시 약을 먹은 그는 고통스러워하며 구토를 하게 되고, 쓰러지지만 테레즈는 약제사를 속여 약을 구입해 다시 남편에게 극약을 먹인다.


남편을 죽일 마음은 없었으나 일상이 나른하고, 한번만 더, 한번만 더라고 마음 속으로 외치는 그녀의 마음은 자신 조차도 왜 남편을 죽일 생각까지 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다행히 베르나르는 목숨을 건졌고, 후에 그는 테레즈에게 왜 그렇게 행동을 했는지 물어본다. 그녀의 대답은 그의 예상과 달리 "아마 당신 눈에서 불안과 호기심의 빛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그녀를 보고 그녀의 남편은 분노하며 테레즈 곁은 떠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모리아크는 과연 테레즈의 행동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걸까.


엔도 슈사쿠는 테레즈의 행동에서 그녀를 구원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의 해석과 모리아크의 작품 이야기가 너무 재밌게 읽혀 그가 말하고 있는 신과 구원의 문제는 그의 작품을 비롯해 그가 소개하고 있는 여러 작가의 작품들을 관통한다. 선과 악, 신과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그는 청중들과 독자들에게 잘 버무려내는 동시에 우리가 갖고 있는 꿈과 사랑, 동경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어 빚어 놓는다. 처음 접하는 소설들이지만 그의 글을 통해 전해듣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종교적인 작품인 동시에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야기이고, 두 사람의 관계의 간극을 때로는 신과 구원의 문제로 풀어가는 작가들의 동성애와 관련이 있는 것도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접하지 않았던 작품 속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이 말하고 있는 주제와 끝내 구원할 수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가 재밌게 읽혔다. 아직도 종교에 관해서라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나 그 부분을 관통하지 않고, 이야기를 끌어갈 수 없음에도 문학적인 해석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좋아 제법 얇은 책인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공들여 읽었던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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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 일상, 그리고 쓰다
박조건형.김비 지음 / 김영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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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을 그리는 남자와 쓰는 여자의 이야기


 삶은 저마다 결이 다른데 일상적으로 주고 받는 인사말에 상처를 받을 때가 많다. 그저 보기에는 단순한 인사말인 것 같아도 인사말의 범주에 들어서지 않는 이들에게는 어딘가 그들의 인사말을 피하고 싶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모르는 이라도 한 두마디 말을 거쳤다면, 시작되는 호구조사들. 나이는 몇살이냐, 결혼은 했느냐, 아이는 있느냐, 둘째를 가져야지 등등의 인사말이 끊임없이 쏟아진다. 같은 레일을 돌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곤혹스러운 말이지만 그 모든 것을 뚫어내고 자신만의 색깔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특별하다.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는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생활 밀착형 노동자인 남편과 글을 쓰고 번역하는 아내의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담은 책이다. 남편이 그들의 생활을 찰칵하고 찍어 놓은 듯한 한 페이지를 그림으로 그리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살짝 곁들여 놓으면 아내는 조근조근 남편의 생각과 그날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 한다. 평범한 일상이 별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평범한 일상이야 말로 가장 평범하면서 편안하고 안온한 하루를 만들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우리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두 사람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가다가 우연히 서로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함께 살면서 '우리'라는 이름 속에서도 각자 너와 나의 개성을 존중하며 살아간다.


무조건적인 희생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애정과 마음, 결핍, 밥벌이에 대한 녹녹찮음을 책 속에 담았다. 책 속에는 부부의 단란한 일상과 나를 이루는 가족들의 모습과 함께 웃음과 위로를 주고 받는 이웃들의 모습이 있다. 하하호호 깔깔거리며 서로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해주는 지난 날의 찰나 순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짓게 하다가도 무더운 여름 날, 혹은 추운 겨울날 마주 하는 극한의 노동은 사람을 얼마나 기진맥진하게 하는지 그의 표정과 손짓, 몸 여기저기에 난 생채기들이 지난한 시간들을 말해준다. 


투박하지만 섬세한 그림은 그들의 일상을 옆에서 보는 것처럼 색채를 드러내고, 그림 후에 덧붙이는 아내의 글은 잔잔하면서도 긁힌 상처를 덮을 수 있을 대일밴드처럼 그의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한다. 그림도 좋았지만 잔잔한 글들이 더 마음에 와닿았다. 아무래도 나는 그림보다 문장을 더 좋아하나 보다. 좋은 날에 좋은 일들만 이야기한다면 좋겠지만 남편인 박고건형은 25년간 우울증을 앓아왔고, 때때로 그 우울증 때문에 움츠러들기도 했고, 일을 하면서 겪는 차별에 분노하기도 했다.


노동을 한 만큼 돈을 받는다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몸은 축나고, 안전을 대비하는 장치없이 저렴한 임금으로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회사의 이야기는 화가난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짊어지며 평범한 일상을 꾸려 나간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묻는 안부의 인사와는 다른 삶의 결로 삶을 살아가면서. 남편은 아내를 그리고, 아내는 남편을 글로 보듬으며 서로 사랑하며, 살아간다. 이것이야 말로 별것도 아니지만 별것이기에 더 인내하고 예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품을 완성하면 원고를 제본해 가장 먼저 신랑에게 건넨다. 책이 나와도 제일 먼저 신랑의 이름을 적고  신랑에게 건넨다. 신랑이 아니었다면 나는 소설을 쓰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황당한 수사라는 걸 알지만 나에게 문학은 이 사람이고, 이 사람을 만난 일이다. - p.54


한 가정의 모든 구성원이, 부부는 물론이고 아이들까지도 모두 본인이 해야하는 집안일이 있어야 하며, 힘들고 서툴더라도 끊임없이 배워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집안의 모든 일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힘을 모으는데 예외는 없다. 그것이 바로 부부이고 가족이다. 공존이며 또한 함께 살아남는 방법이다. - p.96


'산복 도로'는 산의 배, 즉 '산의 중턱을 지나는 도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부산에는 유독 이리저리 꼬인 골목이 많은데, 산 중턱에 능선을 따라 많은 집이 다닥다닥 붙은 광경을 자주 목격한다. 그중에 몇몇 마을은 관광지로 개발되어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산복도로 둘러보기를 추천한다. 몇 년 전에 <부산의 바깥>이라는 부산의 외곽 동네들을 둘러보는 여행기를 짧게 연재한 적이 있었는데, 산복 도로뿐만 아니라 부산 곳곳에는 아름다운 골목과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삶에 불편을 끼치지 않도록, 항상 조심스러운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은 기본. - p.153


노동과 사람이 어우러져 성장해야 할 텐데, 그건 그저 꿈같은 이상에 불과했다. 신랑이 몸담던 곳이 소규모 업체라 더 그랬다. 왜 우린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며, 미래를 그리고 꿈꾸어야 하는 걸까? 그게 정말 꿈꿀 만한 미래인가? - p.182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지 모르지만, 몸은 끊임없이 변한다. 우린 젊고 보기 좋은 몸만을 기억하고 떠받들며 살아가지만, 우리가 말해야 하는 몸의 일생은 훨씬 더 길고 복잡하지도 모른다. 주름진 손과 발은 고귀하다고 추앙하면서, 우리는 얼굴의 주름 하나조차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한 사람의 살아온 일생의 자서전은 차고 넘치지만, 몸의 자서전은 또 다른 이름으로 쓰이고 또 읽혀야 하리라. - p.24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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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기타노 다케시 지음, 이영미 옮김 / 레드스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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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식 사랑


 요즘 영화감독이 쓴 소설들이 대세인가 보다. 이와이 슌지, 고레에다 히로카즈, 기타노 다케시, 신카이 마코토등 일본 감독들이 쓴 작품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영화감독이었을 때 그들이 만든 작품은 각각의 색다른 색채감을 나타내서 그의 이름만 들어도 영화의 제목이 술술 나올 정도로 명작을 만들어 냈다. 그야말로 아무런 수식어가 필요없는 감독들의 글을 책으로, 문장으로 만난다면 어떤 느낌일까. 영화감독을 하기 전에 극본을 쓰거나 스텝이 되어 경력을 쌓아가다가 마침내 영화감독의 길을 걸어가는 감독들의 이야기를 많이 봐왔다. 그렇기에 영화감독이 글을 쓰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들이 만들어낸 스크린 속 이야기와 달리 책은 뚜렷한 색채를 내기 보다는 잔잔한 이야기들을 많이 담았다.


기타노 다케시의 <아날로그> 역시 무색소 저염식이라는 순애소설이라는 글귀에 눈길이 갔다. 보통 음식에 표현되는 문구를 순수한 사랑이야기를 저렇게 표현 할 수 있구나 싶기도 하고. 건축 디자이너인 사토루의 하루 일과는 그야말로 무미건조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컴퓨터나 휴대폰을 즐겨 사용하지 않고, 오직 사무소의 일과 요양원에 홀로 있는 어머니 생각 뿐이다. 젊은 날 아버지를 잃고, 노모는 홀로 아들을 키웠다. 사토루는 젊은 남자들이 즐기는 것에 흥미를 보이지도 않고, 오직 낙이라면 오랜 친구와 함께 한 잔 하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는 것이 유일한 일탈이라면 일탈이었다.


그런 그가 우연히 카페 피아노에서 미유키를 만난다. 상대방을 만나면 당장 전화번호를 물으며 그 사람과 직접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는 10자리의 번호도 주고 받지 않은 채, 언제, 어디서 , 만나기로 약속을 하며 그렇게 헤어진다. 아날로그식 만남은 기다림을 전제로한 만남이다. 서로 정확하게 약속을 정하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을 대비하지는 못한다. 10자리의 번호도 주고받지 않았기에 그 어떤 설명도 할 수 없다. 그 흔한 이메일도, 집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그들은 과연 그 약속을 오랫동안 지켜올 수 있을까.


사토루는 미유키에게 점점 마음을 열어가지만 그 사이 어머니의 죽게되고 한동안 그녀와 만날 수 없었다. 그렇게 카페에서 여러번 미유키와 만나면서 사토루는 엄마의 정을 느끼며 미유키에게 빠져버린다. 사랑하는 만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전하던 사토루는 청혼을 하려 했으나 미유키가 갑작스레 사라져 버리고 몇 년 후에 다시 재회한다. 서로의 연락처를 바로 알고, 매일 같이 연락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순도 높게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사토루처럼 남들이 연락을 취하는 방식이 아닌 고전적인 만남이 그녀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요즘처럼 개인의 전화가 흔하고, 너무나 쉽게 연락을 하고, 기다림 없이 상대방을 만나며 가볍게 즐기는 사랑을 보다 '아날로스'식 사랑을 하는 그들이 색다르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가 느끼고 싶은 순수한 애정 소설의 순도를 깊이 끌어 당겼다거나, 애절한 느낌이 아닌 정적인 느낌의 온도가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더 깊은 맛을 우려내기 보다는 그저 느릿느릿한 느낌의 작품이라 기대를 갖고 읽은 작품 치고는 아무 것도 마음에 남아있지 않아, 개인적으로 아쉽게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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