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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베첸토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최정윤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평점 :
삶이 곧 음악이다.
얇지만 묵직한 여운을 주는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노베첸토'는 버지니아 호에서 태어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책 속에 어우러지는 많은 선율을 직접 귀로 듣지 않아도 리드미컬하게 문장 속에서 음율이 느껴진다. 선원 대니 부드먼이 버지니아 호에서 레몬 상자에 들어있는 아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의 부모가 누구인지, 어떤 이름인지 조차 모를 무명의 아기가 버지니아 호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발견한 이와 상자 속에 든 문구와 선원들의 뇌리 속에 멋있을 것 같은 단어들이 직조되어 만든 이름 대니 부드먼 T.D. 레몬 노베첸토. 그렇게 이름이 탄생되었다. 태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육지에 발을 디딘적이 없는 사내. 배 안에서 갑자기 사라졌다가 마치 신이 내린 재능으로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치며 연주하는 팀과 호흡을 맞춰 나간다.
대형 호화 여객선인 빅토리아호에서 그의 연주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은 육지에 발을 디디자 마자 배에서 연주한 노베첸토를 이야기한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들은 그의 이야기는 부풀려지고, 때때로 그와 함께 연주했던 이들의 일화를 더해 그를 피아니스트의 전설로 만들어 놓는다. 육지에 발을 한 번도 디딘적도 없는 그의 일화가 눈덩이 같이 벌어지고, 그와 함께 연주했던 연주자의 입으로 전해듣는 노베첸토의 삶은 하나의 시처럼 음악처럼 들려온다. 그의 명성에 힘입어 많은 이들이 그를 배에서 내려 육지로 내려가 그의 피아노 솜씨를 마음껏 펼치라고 말한다. 누군가에게 떠밀리기도 하고 스스로 배에서 내려가고자 했으나 그는 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다.
누군가는 그를 탓한다. 왜? 왜? 배에서 내려오지 못하냐고. 그는 말한다. 배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바다를 건너 돌고, 도는 인생이 아니라 육지에 발을 딛고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와 맞붙어도 지지 않는 너의 음악을 무한하게 연주 할 수 있다고 했으나 그는 끝내 선택 할 수 있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무한한 바다 속에서 그는 그 자체로 음악을 즐겼고, 자신의 생애 속에서 빅토리아 호와 함께 시작과 끝을 함께 했다. 다른 이들이 생각 할 수 없는 저 넓은 세계 속으로.
누군가에게는 빅토리아 호가 우물 안의 작은 공간으로 느껴져 더 넓은 세계속으로 걸어가라고 종용하지만 그는 반대로 육지가 우물 안이라고 느꼈다. <노베첸토>는 연극을 보는 것처럼 그의 독백과 그와 함께 연주를 하며 트럼펫을 연주하는 팀의 일원인 그의 친구의 시선으로 그의 삶을 관조한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의 원작인 <노베첸토>는 특정한 곡명을 쓰지 않아도 전해지는 음율 속에서, 삶이 곧 음악이 된 한 남자의 곡진한 이야기가 마음 속 깊이 남았다. 세상에는 그의 탄생과 죽음에 대해 그 어떤 서류 조차도 남아있지 않는 무명의 사람에게.
바람처럼, 파도처럼, 기나긴 수평선을 바라보며 끝이 없는 바다처럼. 그는 그렇게 전설이 되었다. 한 편의 시처럼, 음악처럼 읽혀지는 노베첸토의 이야기는 연극을 보듯 그의 삶이 때때로 현미경을 보듯 자세하게도 보이지만 때로는 시간여행을 하듯 빠르게 걸어나간다.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거스트 러쉬'가 생각났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으며 음악 속으로 걸어간 한 소년의 이야기와 닮아있다. 그 소년이 그러하듯 노베첸토 역시 자연과 닮아있다.
누군가는 그에게 삶을 개척하지 않은 이라고 하겠지만 한 발을 디디는 것 조차 세계와 세계를 가르는 무서움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쉬운 일이지만 누군가는 넘기 어려운 산인 것 처럼. 그가 멋지게 차려입고 배의 계단을 하나 둘 내려갔다가 다시 멈추어 섰을 때의 그 순간을 이입하며, 그의 선택에 대해 깊이 동질감을 느꼈다. 다른 세계에 대한 두려움, 헤세의 책 <데미안>에서 말하는 그 세계를.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는 그의 이야기를 그는 뒤집어 그가 직조한 세계 속으로 함께 걸어갔는지도 모르겠다. 많은 이들은 깨야 한다지만 그 속에서 그는 누구보다 더 넓은 세계 속에서 음악을 연주했는지도 모르겠다. 전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가 영원히 우리의 가슴 속에 남는 것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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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이 움직이는 감옥에 갇혀 지내는 거야? 하느님 맙소사, 계속 이렇게 바다를 오가며 바보처럼 살 수는 없잖아······· 자네는 바보가 아닌데, 자넨 위대한 사람이야. 세상이 바로 저기 있다고. 빌어먹을 저 계단만 내려가면 되는데 뭐가 그리 어렵다고, 겨우 몇 계단만 내려가면 완전히 딴 세상인데, 다른 세상이라고. 여길 청산하고 내려가지 않는 이유가 대체 뭔가. 딱 한 번만. 그 한 번도 힘든가. 노베첸토······대체 왜 내리지 않는 거야?
왜?
왜? -p.46~47
진실은 모든 것이 끝이 보이고 있으며 더는 할 게 없다는 것이었다. 일어나야 했던 일이 이제야 일어나고 있었다. 대니 부드먼 T.D. 레몬 노베첸토는 2월 어느 날, 뉴욕 항구에 도착하면 버지니아 호에서 내릴 것이다. 32년을 바다 위에서 살다가 바다를 보려고 육지에 발을 디딜 것이었다.
(오래된 발라드 음악이 흘러나온다. 배우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증기선의 탑승 사다리 맨 꼭대기에서 노베첸토의 차림새를 하고 다시 나타난다. 캐멀 코트, 모자, 큰 가방, 잠시 그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가만히 정면을 응시한다. 뉴욕을 바라본다. 잠시 후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계단을 내려온다. 그때 음악이 뚝 끊기고 노베첸토는 그 자리에 멈춘다. 배우는 모자를 벗고 청중을 향해 몸을 돌린다) - p.66
그 도시 전체에 끝이 보이지 않았어/
끝 말일세. 대체 그 끝은 어딜 가면 볼 수 있나?/
시끌벅적했지/
그 빌어먹을 사다리에서······ 모든 게······ 무척 아름다웠지. 그리고 코트를 입은 난 근사했어. 끝내줬다고.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 내가 내려가리라는 것은 기정사실이었으니까. 문제 될 건 없었어/
(생략)
피아노는 생각해봐. 건반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어 우리는 모두 그게 88개라는 걸 알지. 건반은 무한한 게 아니야. 당신, 당신은 무한하고 그 건반들 속에서 무한한 것은 당신이 만들어내는 음악이야. 건반은 88개이고 당신은 무한해. 난 이런 게 좋아. 사람은 무한하게 살 수 있지.
(생략)
길만해도 수천 개인데, 그 중에 어떻게 하나를 선택하지/
어떻게 한 여자/
집 한 채, 땅 감상할 풍경, 죽는 방식을 선택하지/
그 세상 전부/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는 그 세상/
이 넓디넓은 세상/
그 광대함을 생가하는 것만으로도, 단지 생각만으로도 산산조각나는 게 두렵지 않은가? 거대한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 - p.76~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