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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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사소한 것이 있을까? 사소한 게 있다면 어떤 것이 사소한 것일까? 사소한 일들은 외면하고 무시하면서 살아가도 되는 것일까? 돌이켜보면 내가 눈에 띄는 성장을 이루고 무언가를 쌓아 올리면서 결과물을 만들어 내며 뿌듯함을 느끼게 해주었던 일들은 모두 각각의 사소한 일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그리고 나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치열했던 20~30대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일을 마치고 학원으로 달려가 외국어와 다양한 기술 등을 배우려고 노력했었다. 그때의 짧은 시간과 아무것도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하루가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주인공 펄롱또한 사소해 보이는 일상에서 가정을 이루며, 아내와 힘을 합쳐 다섯 명의 딸을 키우고 이만하면 행복한 삶이라고 자기 자신에게 말한다. 그는 아버지 없이 가사 일꾼으로 일하던 열여섯 살의 어린 엄마에게 태어났지만, 개신교도로 큰집에 혼자 살면서 일꾼 네드와 펄롱의 엄마, 그리고 펄롱에게 따뜻한 집과 음식, 일 등을 제공한 미시즈 윌슨의 도움으로 자기의 가정을 꾸리고 지켜나갈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평범한 아이들보다 못한 가난하고 힘겨운 일, 무시 당하는 삶의 연속이었지만, 미시즈 윌슨의 도움으로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어린 펄롱은 누구나 어휘를 갖춰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 미시즈 윌슨 덕분에 맞춤법 대회에서 1등을 하였고,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라고 칭찬해준 그녀로 인해 마음과 정신이 성장할 수 있었다. 사람이 태어나 오롯이 존재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수많은 사람에게 도움과 가르침을 받게 된다. 누구나 좋은 어른을 만날 수 있어야 하며 그들로 인해 어려움을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도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없이 태어난 펄롱이 교육을 받고 일을 하며, 가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어른들이 옆에서 함께 해주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볼품없고 가난한 펄롱이 성장하여 살아가는 일상의 소소한 모습을 물 흐르듯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는 일이 고되지만, 할 일이 없어 새벽부터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자들의 무리에 들지 않는 것에 감사한다. 그는 집안일은 물론 다섯 명의 딸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자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나가는 부지런하고 다정한 아내가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자기의 몫을 다하며 건강하게 자라나는 딸들을 보면 저 애들이 과연 나의 자녀인지 의심이 갈 때도 있다. 힘들었던 지난 시간을 지나 이제 행복한 날만 기대하며 살아가도 될 것 같은 자신인데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으로 헛헛하고 무력하다. 과연 이런 것을 인생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 이게 다 무엇 때문일까? 펄롱은 생각했다. 일 그리고 끝없는 걱정. …… 똑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 뭐가 중요한 걸까. ……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을 수가 없었다.

 

…… 똑같은 일이 날이면 날마다 여름 내내 반복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44.p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무엇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의 삶이 어떠하든 약간의 심리적 동요는 생길 수 있으나 자신과 자기 울타리 안의 사람들이 평안하게 잘 살아간다면 만족과 기쁨을 느끼며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수 없는 것 같다. 어쩌면 나 아닌 타인을 긍휼히 여기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창조 될 때부터 인간 유전자 안에 심어져 있는 것처럼. 펄롱 또한 실체를 맞닥뜨리기 전까지 자신을 둘러싸고 엄습해 오는 불안과 무기력한 마음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 선한 목자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갔다가 방치된 채 노동에 시달리는 소녀들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그것을 방관했다는 것을 깨닫고 괴로워한다. 그리고 다시 아기를 빼앗기고 차가운 마룻바닥에서 울며 고통스러워하는 소녀를 마주하게 되고, 자신의 아기를 찾아 달라며 펄롱에게 도움을 구하는 소녀의 말에 괴로워한다. 가난하고 힘없는 어린 소녀의 아픔은 이제 그에게 넘어왔다. 소녀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 잘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자신에게 돌아올 수많은 불이익을 감수하며 그 소녀를 도와줄 것인가 선택해야 한다. 물론 소녀를 외면했다고 해서 비난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소녀보다는 조금 나은 환경에 있지만, 펄롱 또한 녹녹지 않은 삶이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왜 소녀를 도와주기 위해 결정을 내리고 자기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때까지 힘겨워하고 스스로 수치심까지 느껴야만 했을까? 나는 외면하고 돌아서지도,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나서며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도 그저 함께 아파하고 애통해하는 모습을 통해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 마음속에는 사소해 보이지만 타인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그것이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을 사랑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혼자 서 있을 수 없다.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신경들로 이어져 있나 보다. 그래서 내가 보고 마주친 사람들이 고통에 처해 있는데 그를 외면하면 나도 아프고 괴로울 수밖에 없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 줄 수 없지만, 내 옆에, 내 눈에 들어온 사람에게 마음 한쪽과 손을 내밀 수 있는 것, 그것이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세상을 지탱하고 계속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힘이 아닐까. 내 옆에 있었고 현재와 앞으로도 존재해줄 그들에게 감사하며, 나 또한 누군가의 천사라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천사가 뭐 대단한 사람인가. 따뜻한 마음과 손을 내밀어주면 그가 바로 천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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