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은 일본 근대 문학의 아버지인

나쓰메 소세키의 사후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소개할 많은 작품이 있지만,

오늘은 고양이의 눈을 빌려

인간의 삶을 풍자한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소설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100년 전 고양이가 인간을 바라보며 남긴 생각은

참 대단하기도 하지만, 많이 슬프기도 하네요.

^^

   

자세한 내용은 첨부한 이미지를 참고하시거나

원작 소설을 참고하여 주세요.

^^

   

자세한 내용은 첨부한 이미지를 참고하시거나

원작 소설을 참고하여 주세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일기라도 써서, 자기의 참모습을

발산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나,

   

우리 고양이족은

일상생활 자체가 거짓 없는 일기이니

귀찮은 수고를 하며 

자기의 참모습을 보존할 이유가 없다.



태연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깨달은 듯해도 사람의 두 발은

여전히 지면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세상에는 나쁜 짓을 하면서 자기는

끝내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한테 죄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니

순진하여 좋기는 하나,

   

남에게 폐를 끼친 사실은

아무리 순진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옛날부터 지혜로운 사람(비겁한 사람)은

늘 뒷문으로 불의의 습격을 하였다.

신사 양성법 제2권 제1장 5쪽에

그렇게 나와 있다고 한다.

그다음 쪽에는

“뒷문은 신사의 유서遺書이며

그 자신이 덕을 얻는 문”이라고

쓰여 있을 정도다.



스스로 자기의 어리석음을 인지하는 것만큼

훌륭하게 보이는 것은 없다.

   

이를 자각한 바보 앞에서

모든 잘난 척하는 족속은

머리를 깊이 숙여야한다.



지금 세상에 유능하다는 사람을 보면,

허세를 부려 사람을 위협하고,

사람을 꾀어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사람뿐이다.

   

중학생 같은 애송이도

이렇게 해야 한다고 알고 있으니,

부끄러워해야 당연한 것을

신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자는 유능한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부자는 추락하지 않도록

몸조심하라는 속담도 있듯,

   

기꺼이 남보다 뛰어남을 자랑하며 함부로

위험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에게 재앙이 될 뿐 아니라

하늘의 뜻에도 크게 어긋난다.



몇 번이나 말해도 같은 일을 반복한다.

   

‘명령을 받들다 지친다’는 것은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서점가기


알라딘 : http://goo.gl/WU78qk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장소] 2016-03-23 1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흣 ㅡ역시나 귀...귀엽구료!^^

문예출판사 2016-03-24 13:32   좋아요 1 | URL
귀..귀엽죠.^^ 이런 고양이하고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요. ㅎㅎ

[그장소] 2016-03-24 13:45   좋아요 0 | URL
그 냥이 입양하시면 소개좀 부탁드려욧~!!^^

pada 2016-03-23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내서 읽어봐야겠네요. 책소게 고맙습니다.

문예출판사 2016-03-24 13:33   좋아요 1 | URL
^^ 소세키 소설은 읽으면 이득인 것 같아요. 즐거운 독서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미리보기(<-클릭)


■ 출판사 서평 

 

탈정치화의 시대에서 
미학적 감성의 부활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프랑코 비포(Franco Berardi)는 미래란 알려지지 않은 시간인 동시에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적 근대화가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지금, 우리는 미래를 상실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는 모든 공간을 ‘자본주의화’시키며 문화와 인격성의 영역까지 식민화를 진행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타자성의 상실과 함께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키는 또 다른 미래 역시 사라졌다. 
한국 사회와 문학의 접점을 꾸준하게 연구해온 나병철 교수의 새 책, 《미래 이후의 미학 : 유혹사회에서의 보이지 않는 정치와 문학》은 미래를 상실한 지금, 다른 방식의 미래를 말할 시점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모두가 똑같이 부유함과 일류의 삶을 꿈꾸는 이미 정해진 미래가 아닌, 타자와 교섭하며 정신의 식민화에서 벗어나려는 또 다른 길을 찾는 미래가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배수아의 소설과 용산참사를 다룬 《두 개의 문》, 공지영의 《의자놀이》와 5포 세대의 아픔을 그린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통해 지배 권력에 대항하는 미학 쪽의 감성의 정치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유혹의 권력과 죽음정치에 대한 미학적 대응

저자는 우리 시대의 특징을 ‘유혹의 권력’과 ‘죽음정치’라는 개념을 통해 바라본다. 유혹의 권력이란 푸코가 말한 삶권력의 유혹장치가 극에 달한 방식을 말한다. 푸코는 규율에 길들여지는 대가로 삶을 부양해주는 방식을 삶권력이라고 말했다. 노동력은 상품화되었지만 신체 자체는 아직 상품화되지 않은 시대에는 유순한 몸을 생산하는 규율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신체와 감정을 포함한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시대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유혹의 환상 속에서 자발적으로 자본주의에 동화되어 성과의 경쟁에 나선다. 삶권력이 극단화된 유혹사회는 자기계발서나 힐링이 보편화된 사회다. 자기계발을 통해 성공할 수 있다는 거짓된 희망을 사람들에게 심어줌으로써 자본주의의 어두운 절망을 감출 수 있었다.  

 

유혹사회가 우리의 모든 것을 좌우하면서, 쓸모없어져 물건처럼 폐기되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났다. 음벰베(Archille Mbembe)는 신체와 생명을 권력의 처분 아래 놓으면서 유용성이 사라진 사람들을 죽음의 위협에 유기하는 권력을 죽음정치라고 불렀다. 자본주의 체제는 폐품처럼 쓸모없어진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 세상이기 때문에 죽음정치가 더 기세를 부리고 있지만, 도리어 사람들의 눈에는 잘 포착되지 않는다. 유혹의 정치가 다양하게 발전해 죽음정치가 횡횡하는 사회를 은밀하게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 시대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유혹의 권력과 죽음정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선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절망을 안다는 것은 빛의 유혹 앞에서 자신이 실직자이고 파산자이며 비정규직임을 아는 것을 말한다. 공허한 희망만을 보게 하는 유혹의 권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학과 예술은 새로운 감성의 영역에서 정치화를 시도해야 한다. 배수아의 소설 공간에 드리워진 ‘이상한 고요함’, 《두 개의 문》의 ‘망각의 문’, 《의자놀이》의 ‘의자놀이’ 장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성실한 나라’ 등은 모두 유혹의 권력 시대의 감성적 권력 장치들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지배권력에 의해 은밀하게 작동하는 유혹의 장치를 드러내어 직시하게 해준다. 우리는 이러한 작품들을 보거나 읽으며, 한국 사회의 어둠을 눈치채게 된다. 그렇기에 감성의 영역은 탈정치화된 시대에 정치가 가능한 마지막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혐오의 시대에 새로운 미학은 어떻게 맞설 것인가

지금 한국의 현실은 혐오발화가 난무하는 시대다.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에서부터 여성혐오 발언들, 이주노동자를 비롯해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의 언어는 우리 사회가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상실한 사회라는 것을 보여준다. 부의 생산이나 국가, 민족 같은 상상력 동일성을 향한 환상이 커지면서, 이제 사람들이 고통받는 타자를 외면하고 비슷한 계층들을 공격하는 일까지 하게 된다. 유혹사회의 구성원들은 국가권력을 대신해 자진해서 타자들을 배제함으로써 상상적 동일화를 고착화시킨다.


이러한 혐오발화는 단순히 사회적인 분위기를 흐리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혐오발화가 성행하면 아무리 사회 모순이 심화되어도 건강한 저항적 행동이 생성하지 않는다. 이제 고통받는 타자는 보이지 않거나 회피하고 싶은 존재로 보이게 된다. 혐오발화는 이런 방식으로 경계 부근의 타자에게 관심이 멀어지게 하면서 자조감 속에서 절망을 외면하게 만든다.


혐오발화에 맞서 미학적인 감성의 장치는 목적론적 정치와 달리 양가적 방식을 사용한다. 타자에 대한 혐오를 “홍어”, “어묵”, “벌레” 같은 저열한 유동성과 동물성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혐오발화와는 달리, 미학적 은유는 그런 비천한 존재(앱젝트)를 부산물과 유동성의 본체인 생명적 존재로 되돌리며 미결정적인 동요를 생성시킨다. 비천한 신체가 그 자체로서 생명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 모순의 힘으로 상상적 동일성의 영역에 동요가 일어나는 것이다. 저자는 손창섭의 〈포말의 의지〉에서의 금지된 종소리, 황석영의 〈몰개월의 새〉에서의 오뚝이 선물, 김이설의 《환영》에서의 상품화될 수 없는 비천한 신체, 권여선의 《레가토》에서의 상실된 순수기억을 되찾는 이야기들, 이것들이 타자성의 회복을 통해 비천한 신체에게 살아야 할 존재의 이유를 증명해주는 은유들이다.


다시, 미래 이후의 미학을 위해

오늘날은 탈정치화의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감성적 정치가 계속되는 시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잠시라도 미학적 발명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지금 난무하고 있는 혐오발화는 바로 이러한 미학적 직무유기에 대한 역사가 내리는 감성적 경고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미학적 은유는 정치의 귀환을 위해 텍스트를 넘어서 현실로 흘러넘쳐야 한다. 즉 타자에 대한 공감을 회복시키고 흩어진 사람들을 물밑에서 연대시키기 위해서는 정치적 저항에서도 미학적 은유의 형식이 필요하다.


유혹의 권력과 감성의 권력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잘 대응하지 못하며 정치가 실종되었다고 한탄한다. 정치의 실종은 타자의 소멸이자 미래의 상실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타자와 은폐된 절망을 보는 것이며 그 일을 하는 활동이 미학적인 은유적 정치라고 이 책은 강조하고 있다.



■ 차례 

머리말


제1장 보이지 않는 정치의 귀환
1. 길 없는 길 — 미래 이후의 미래
2. ‘길 없는 길’의 행위자로서 특이성과 보이지 않는 타자 
3. 삶권력과 죽음정치 — 유혹의 권력의 두 얼굴 
4. 절망을 껴안고 권력과 동거하기 — 절망과 저항의 양가성 
5. 벌거벗은 생명과 벌거벗은 타자 
6. 저항을 위한 교섭의 위치로서의 벌거벗은 타자 
7. 죽음정치의 시대와 타자를 향한 ‘포말의 의지’ 
8. 죽음정치와 죽음정치적 노동  
9. 존재론적 정치와 에로스 효과로서의 민중봉기 
10. 아직 끝난 게 아니다 — 공감의 유전자와 원효의 존재의 비밀

 

제 2 장 유혹의 권력과 죽음정치에 대한 존재론적 대응
1. 유혹의 권력과 신자유주의 
2. 유혹의 권력 시대의 죽음정치 
3. 쇼크 독트린에 대응하는 트라우마의 기억 
4.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양가성의 진리 
5. 죽음정치와 낯선 두려움, 그리고 식민지의 유민 
6. 식민지적 죽음정치와 기민으로서의 이주노동자 
7. 국가서사의 허구성을 파열시키는 기민/난민의 트라우마의 기억 
8. 트라우마의 기억과 에로스의 기억, 그리고 순수기억
9. 죽음정치의 역사와 디세미네이션의 미학

 

제3장 식민지 시대의 유민의 발생과 은유로서의 디세미네이션
1. 1920년대의 유민의 발생과 디세미네이션 
2. 식민지 민족의 양가성과 디세미네이션의 미학 
3. 집단적 민중의 움직임과 산포된 존재의 네트워크 
4. 식민지 근대에 대항하는 디세미네이션의 미학

 

제4장 산업화 시대의 내부의 유민과 디세미네이션의 미학
1. 개발주의 시대의 유민과 내부의 디아스포라
2. 전태일의 존재론적 저항 — ‘낯선 두려움’에서 ‘마음의 고향’으로 
3. 은밀성의 영역의 난민과 유민화된 민중 
4. 죽음정치적 노동자들의 연대와 존재론적 대응
5. 집을 잃은 사람들의 낯선 두려움과 벌거벗은 타자
6. 초국가적 맥락에서의 죽음정치와 존재론적 대응으로서의 디세미네이션의 연대

 

제5장 삶권력과 자본주의의 존재론적 운동
1. 삶권력과 죽음정치의 관계와 무의식 
2. 자본의 자기갱신운동과 삶권력 
3. ‘은유로서의 화폐’의 무의식과 ‘은유로서의 네이션’의 무의식 
4. 〈운수 좋은 날〉과 두 개의 무의식 — 타자의 위치에서의 동요 
5. 《삼대》의 대화적 무의식과 주체의 동요 
6. 《환영》에 나타난 감정과 성의 상품화 — 후기자본주의의 《자본론》

 

제6장 삶권력과 죽음정치에 대항하는 순수기억의 창조적 존재론
1. 무의식에 작용하는 삶권력과 순수기억의 대응 
2. 습관기억의 억압과 순수기억의 혁명 —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3. 화폐의 무의식과 순수기억의 무의식 
4. 식민지의 죽음정치에 대한 순수기억의 대응 — 백석의 시 
5. 순수기억의 시간과 영화 — 김기덕의 《빈집》 
6. 잉여향락의 공간과 순수기억의 시간 — 김기덕의 《시간》 
7. 순수기억의 정치화 
8. 순수기억과 상처의 기억
9. 베르그송의 순수기억과 라캉의 대상 a 
10. 잃어버린 ‘순수기억’을 찾아서 — 권여선의 《레가토》

 

제7장 유혹의 권력과 미래 이후의 미학
1. 유혹의 권력과 낯선 두려움 
2. 규율사회에서 유혹사회로 
3. 자본의 가속도와 유혹의 권력 — 송경아의 〈엘리베이터〉 
4. 유혹사회의 공간적 폐쇄성 — 배수아의 우울의 미학 
5. 성장 없는 성장소설과 죽음정치에 대한 ‘슬픈 응수’ 
6. 배수아 소설에 암시된 유혹사회 속의 죽음정치
7. 유동체에 대한 열망과 은유 — 베르그송과 마르크스, 그리고 원효
8. 유동체의 회복 — 춤과 참선 
9. 선시와 리얼리즘의 결합 — 송경동의 시 
10. 부서진 디세미네이션과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11. 구조화된 불평등성과 감성의 분할, 그리고 혐오발화
12. 혐오발화와 ‘계급적 인종’
13. 혐오의 은유와 미학의 은유 
14. 물밑에 있는 타자와 은유로서의 정치 
15. 길 없는 길과 미학적 은유 
16. 분노의 계보학 
17. 길 없는 길과 미래 이후의 미학

 
찾아보기 

 


■ 본문 엿보기

 

■ 절망을 시간의 차원에서 말하면 미래의 말소이다. 비판적 담론이 소멸된 1930년대 중반, 작가 이상은 “희망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인다”고 되뇌었다. 오늘날의 절망적인 정치의 해체는 결국 희망의 말소이자 미래의 상실이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미래의 한 쪽이 붕괴된 상황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TV나 신문에서 미래는 주로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의 발전 쪽에서만 말해진다. 미래학자들이란 연성화된 경제전문가들이거나 과학자들이다. 그들은 누구도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비판과 변화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의 개발은 딕셔너리 넘어가듯 계속되지만 그 페이지들에는 또 다른 미래라는 그림이 말소되어 있다. (24쪽)


■ 우리는 이 같은 타자의 상실이 미래의 붕괴의 증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타자에 대한 혐오는 병리화된 미래의 징후이다.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의 발전만을 미래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타자와 사건을 대면할 때의 존재방식 및 사회의 변화의 필연성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미래로 질주하는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가 쏟아낼 신세계의 잉여향락을 타자들이 훔쳐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성장의 둔화와 수출의 감소는 모두 그들 탓이다. 과거에 파시즘은 유대인들이 대중들의 향락을 훔쳐가고 있다고 그들을 혐오하게 만들었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경제성장과 자본주의적 세계화에 걸림돌이 되는 타자들을 혐오하게 만들고 있다. (34쪽)


■ 삶권력과 죽음정치의 구성적 결합은 1920년대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이 시기의 문화정치는 어둠 속의 ‘묘지’였던 1910년대 식민지 자본주의를 빛의 영역으로 이동시킨 삶권력의 전략이었다. 이광수는 《재생》 에서 “연애와 돈이 정신을 지배하는 종교가 되었다고” 말했는데 이는 식민지 자본주의가 지식인과 소시민에게 삶권력적 유혹으로 침투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트랜스내셔널한 권력으로서 식민지 자본주의는 최대의 이윤을 짜내기 위해 농민과 노동자들을 과도한 착취로 죽음에 유기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노동지옥’을 경험하고 있었고 농민들은 소작권을 빼앗긴 채 유이민으로 떠돌아야 했다. 문화정치라는 삶권력은 자본주의적 개발을 전제로 한 것으로 지식인과 소시민에게는 유혹이었지만 노동자와 농민에게는 죽음정치였던 것이다. (43쪽)


■ 손창섭의 우울의 미학은 훼손된 타자가 절망에 방치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타자성을 상실하고 비판담론이 무력화된 당시의 반공주의적 국가주의와 연관이 있다. 우울의 미학은 회복이 불가능한 상처 입은 타자에 대한 폭력의 고발이다. 우울의 미학에도 타자성의 갈망이 있지만 그것이 삶 속에서의 소망으로 표현되지는 못한다. 반면에 슬픔의 미학은 삶 속에서의 타자에 대한 갈망과 교섭의 표현이다. (76쪽)

 

■ 세월호 사건은 화려한 스펙터클에 가려져 있던 우리 시대의 절망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러나 그런 상처와 트라우마를 외면하지 않는 한 우리의 내면에서는 그 고통에 대응하는 에너지로 인해 이미 존재론적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는 셈이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으며 여전히 비슷한 절망이 계속된다. 가시적인 차원에서 보면 어디에도 희망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호에 대한 담론이 많아졌다는 것은 존재론적 에너지가 폭증하며 127 보이지 않는 물밑에서 공감의 연대가 부활하기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그 물밑의 동요가 기적처럼 세상을 바꾸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107쪽)

 

■ 순수기억으로서의 고향은 식민지 자본주의 현실에서 억압된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식민지 자본주의는 도시에서 삶권력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기도 했지만 농촌에서는 사람들을 유민으로 만드는 죽음정치로 작용했다. 백석이 시를 쓴 1930년대 후반은 일제의 파시즘으로 그 죽음정치적 억압이 더 강화된 상태에 있었다. 그 같은 억압된 고통과 아픔, 그것이 ‘나’의 병의 원인일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그 병인을 낯선 두려움(unhomely)으로 살핀 바 있다. 의원의 손길에 이끌린 고향의 귀환은 그런 현실의 억압에서 되돌아오는 순수기억의 약동과 반격을 시사한다. (322쪽)


 

 

■ 지은이 소개

 

나병철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수원대학교 국문과 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 《소설이란 무엇인가》, 《문학의 이해》, 《전환기의 근대문학》, 《근대성과 근대문학》, 《한국문학의 근대성과 탈근대성》, 《소설의 이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 《근대서사와 탈식민주의》, 《탈식민주의와 근대문학》, 《소설과 서사문화》, 《가족 로망스》, 《소설의 귀환과 도전적 서사》, 《은유로서의 네이션과 트랜스내셔널 연대》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문학교육론》 (제임스 그리블), 《냉전시대 한국의 문학과 영화》(테드 휴즈), 《문화의 위치》(호미 바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정치와 문화》(마이클 라이언), 《해체론과 변증법》(마이클 라이언), 《중국문화 중국정신》(C. A. S. 윌리엄스), 《서비스 이코노미》(이진경) 등이 있다.
주요논문으로는 <탈식민주의와 정전의 재구성>, <탈식민 소설과 트랜스내셔널의 전망>, <탈식민 소설과 트랜스내셔널의 전망>, <청소년 환상소설의 통과제의 형식과 문학교육> 등이 있다.


*

서점가기


알라딘 : http://goo.gl/nQZUMf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다갈매기는 수컷과 암컷이
똑같이 생겼다.
먹이를 위한 난투극을 벌이는
새들 중에
암컷도 틀림없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암컷들도 먹어야 하고,
썩은 고기를 먹는
청소 동물의 생활은
가혹하기 때문이다.



3

늑대의 울음과 하이에나의 웃음

테스토스테론과 여성



당신이 소녀인 적이 있었다면, 당신은 소녀가 되기 위해 맨 처음 할 일이 소녀 집단 내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것임을 안다. 그리고 집단을 이룬 소녀들은 별개의 요소들이 모여 만들어진 조니 미첼캐나다 출신의 싱어 송 라이터. 포크 음악을 기반으로 재즈, 블루스, 아방가르드까지 표현해낸다의 선율 같은 것이 아니다. 집단을 이룬 소녀들은…… 뭐랄까, 공격적이다. 그 말이 소년들에게 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고 있긴 하다. 물론 소녀들이 공격적인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살아 있지 않은가. 그들은 영장류이다. 그들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다, 소녀들은 바비 인형을 갖고 놀기를 좋아할지 모르지만, 방향이 다르다. 아가씨, 이런, 여기 쓰레기통에 네 치과 의사 바비 인형이 있네. 벌거벗고 머리가 깎이고 젖가슴에 이빨 자국이 나 있는 인형이 말이야.


당신이 소녀이거나 소녀인 적이 있었다면당신은 소녀들이 공격적이라는 것을 안다이것은 함무라비 법전만큼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이다하지만 캔디랜드 광고에 나오는 소녀들은 전혀 공격적이지 않다사실 그들은 해가 갈수록 더 감상적으로 변하고 있다생물학 이론이라는 초원을 달리고 있는 소녀들도 전혀 공격적이지 않다아니그들은 사회 지향적이다그들은 대화를 나누고상호 작용을 하고관심을 기울이고붙임성 있다그들은 당신이 텔레비전에서 보는 벨체 아기 인형과 함께 사고 싶은 친구들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상냥한 여성성이 유전된다는 사실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진취적이고 공격적인
여성의 모습을 사회에서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1997 네이처에 실린 기사를 보자. 그 영국 연구자들은 X염색체가 둘 있는 대다수 소녀들과 달리 하나만 있는 터너 증후군 소녀들을 연구했다. 그들은 터너 증후군 소녀들의 사교적 능력이 염색체의 출신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매우 복잡한 관찰 결과부터 제시했다. 정상적으로 소녀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X염색체를 하나씩 물려받는다. 터너 증후군 소녀의 하나뿐인 X염색체는 어머니에게서 온 것일 수도 있고 아버지에게서 온 것일 수도 있다. 연구자들은 터너 증후군 소녀 백 명을 연구한 끝에 X염색체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소녀들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소녀들보다 더 상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버지 쪽의 소녀들은 다정하고, 사교적이고, 잘 적응하는 경향을 보인다.


어머니 쪽의 소녀들은 상대적으로 잘 토라지고다루기 어렵고남과 말을 잘 안 하고공격적이거나 파괴적인 행동을 보인다이런 관찰 결과들은 뛰어나고 흥미로우며터너 증후군의 행동 양상을 엿볼 수 있게 했다하지만 연구자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그들은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확장해 소녀들모든 소녀들의 좋은 행동이 선천적인 것인지 여부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다그들은 아버지의 X염색체를 가진 터너 증후군 소녀들즉 사회적으로 적응을 잘하는 소녀들은 소녀다운 소녀들이며어머니의 X염색체를 가진 소녀들즉 공격적이며 사회적으로 적응을 잘 못 하는 소녀들은 더 소년다운 유전형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그들이 교묘하고 난해한 추론 과정을 거쳐 최종 분석 결과라고 내놓은 것은 소녀의 사교성외교적 수완상냥함이 유전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미심쩍은 가설에 따르면, X염색체는 정상 소녀들에게서는 활동을 하지만 정상 소년들에게서는 침묵하고 있는사교적인 매력을 낳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그들은 이런 성별에 따른 발현 차이가 각자에게 진화적으로 유리하다고 보았다이론적으로 볼 때 남성들은 사교적 매력들에 둔감해짐으로써 더 공격적으로 되고위계 질서에서 상위를 차지하게 되고사냥 집단과 군대를 조직해 앞길에 있는 마음 여린 바보들을 정복하게 되었을 것이다소녀들은 더 뛰어난 사교적 능력을 갖게 됨으로써 다른 여성들과 친구가 되고흐름에 맞춰 살아가고어머니 역할을 배우는 일을 더 쉽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그 연구자들 중 한 명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다정한 소녀들은 다정한 어머니가 되고 싶어하죠그리고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해요그들은 다른 여성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 재능을 갖고 있어요.” 


(그러나) 내게 인상적인 것은 그 연구가 빚어낸 보편적인 소녀의,  모습이다그 소녀는 사교적 재능과 친구 집단을 갖고 태어난다즉 말재주를 가진 여성이다(그러나 현실에는) 두목 같은 소녀들병적인 소녀들보통 소녀들꿈꾸는 소녀들지금 계속 만나고 있는 당신의 단짝 친구이자 내일의 이브 해링턴영화 이브의 모든 것에 나오는출세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주인공이 될 소녀들이 있다. 왜 그 현실의 소녀들에 대해선 말해지지 않을까? 당신을 밑바닥에서 정상으로 올려줄 사회적 공증인출세가도를 달리게 해줄 계획자는 어디에 있는가당신이 더러운 일을 직접 맡을 수는 없지 않은가하이에나 소녀들표범 소녀들코요테 소녀들까마귀 소녀들은 어디에 있는가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유일한 소녀들살아 요동치는공격적인 소녀들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진짜 소녀를 말해주지 않는다
갇힌 소녀들은 자신의 공격성을 죽이기 위해
소녀와 소녀가 맞붙는 경기장을 뒹굴고 있다 


우리는 소녀와 여성의 공격성에 관해서는 그다지 말하지 않으며 그다지 들어본 적도 없다. 즉 그런 것이 있으며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공격적인 행동을 남성과 연관지으며, 그런 생각을 고수하고 있으며,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하거나 속삭이거나 소리치지 못한다. 과학자들은 의례적으로 남성과 연관짓는다. 우리 모두는 경험에 비춰 그렇게 연관짓는다. 자신이 현명하며 깨어 있으며, 지겨운 진부한 생각을 벗어 던졌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한다. 


예전에 해변에서 오래된 과자 더미를 놓고 바다갈매기 무리가 싸우는 것을 지켜보다가나는 나이 든 갈매기들즉 더러운 흰색 깃털과 성숙했다는 표시인 부리에 난 붉은 반점을 가진 갈매기들이 갈색 깃털을 가진 더 젊은 갈매기들을 신경질적으로 쪼아대면서 우위를 주장하려 애쓰느라 여념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반면에 젊은 갈매기들은 연장자들을 무시하면서 먹이를 집어삼키는 데 열중했다그 광경을 지켜보면서나는 싸움을 거는 새들이 모두 수컷이라고수컷이 분명하다고 가정했다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나 공격적이었으니까그리고 나는 나이 든 수컷들은 지위에 얽매여 있는 반면젊은 수컷들은 반항적이고 기회주의적이라고 머릿속에서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나중에서야 나는 바다갈매기는 어릴 때는 갈색을나이 들면 흰색을 띠는 것일 뿐수컷과 암컷이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을 기억해냈으며부끄럽게도 그 난투극을 벌이는 새들 중에 암컷도 틀림없이 많이 있었을 것임을 깨달았다암컷들도 먹어야 하며썩은 고기를 먹는 청소 동물의 생활은 가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련을 일으킨다고 무릎을 욕하지 말자우리가 수컷의 공격성에 집착하는 것이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서 남성의 공격성은 코를 부러뜨리는 것처럼 때때로 명확히 드러난다폭력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대부분 남성들이다. 살인자는 90퍼센트강도는 80퍼센트강간은 거의 100퍼센트 남성들이 저지른다공격성의 토대를 이해하고 싶어하는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호기심을 의학적 토대 위에서 정당화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연구비를 얻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남성의 공격성은 병폐를 일으키기 쉽다폭력은 공중 보건을 위협한다남성들은 여성들보다 신체적 폭력이 더 심하며따라서 남성의 공격성은 여성의 공격성보다 과학적으로 더 주목을 받는다더구나 우리는 모두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훨씬 공격성이 덜하며소녀들이 훨씬 더 우호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소녀여당신의 생각이 다르다면우리는 텔레비전을 의무적으로 보게 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당신을 설득하는 일에 나설 것이다.


여성의 공격성을 무시할 때 생기는 문제는 공격적인 우리즉 소녀이자 여성이자 영장류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마치 방정식에서 무언가 빠진 것처럼 자아와 충동을 해석할 때 혼란을 느낀다는 것이다우리는 자신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잔혹성포효하고 싶은 욕구와 충동이라는 덤불 속을 헤매도록 방치되어 있으며화면이나 책이나 생물학 논문에서 그 투쟁이 있다는 증거를 거의 보지 못하면서도 자신을 입증하고 과시하고 가늠하고 자신과 타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서그 잔혹성을 우리 자신에게서 몰아내야 하는 소녀 대 소녀가 맞붙는 경기장에서 뒹굴고 있다한 여성 과학자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왜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아닌지왜 그렇게 많은 것을 원하며 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지 궁금해하면서자신이 오류가 난 변이체가 아닐까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 생물 문화적인금발을 붙인 여성 인형에게 뭔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우리는 우리 공격성의 경계를 탐사하기를 주저한다우리는 공격적으로 보이고 싶어하지 않으며스스로를 공격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남성이든 여성이든 공격적인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공격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화나게 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며우리는 집에서든 가정에서든 머릿속에서든 그들과 함께 있고 싶어하지 않는다우리는 공격성을 단조롭게 철저히 부정적으로 본다우리는 그것을 아내를 때리는 자나 습관적으로 물건을 부수는 자와 관련지어왔다단호하고 결단력이 있는 것은 좋다그것들은 멋지고 정당한 용어이며바쁜 지구 시장 상인인 우리는 그것들을 좋아한다하지만 공격성은 낡은 것이다공격성은 수준 낮은 것이다그것은 사실 패자를 위한 것이다공격성은 진정한 힘을 갖고 있지 못할 때 의지하는 것이다.


약자인 여성의 공격성은 이제 말해져야 한다
그것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약속이다


내가 말하고자 애쓰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공격성은 소녀들을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 차례이다. 공격성은 유행에 뒤진 것이다. 그것은 치료 대상이자 퇴치 대상이 되어왔으며, 여론을 통해 매립장에 내던져졌고, 더 이상 바람직한 형질이나 진정한 인간의 증표로 여겨지지 않는다. 우리는 공격성을 마음 내키는 대로 이용하고 처리한다. 우리는 그것을 복권시켰다가 물러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공유할 수 있다. 우리는 소녀로서 여성으로서 지닌 욕구라는 맥락에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으며, 우리는 공격성이 언제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알 수 있다. 공격적인 행동은 적대적이고 상처를 입히고 싶어하는 것이 될 수 있지만, 창조적이고 약속을 도모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심리학자들은 대개 공격적인 행동을 반사회적이라고 여기지만, 이것은 생명체를 지극히 낙천적으로 보는 실망스러운 관점이다. 순진무구해 보이는 수많은 사회적 행동들의 표면을 긁어보라. 그러면 그 밑에서 공격성이 낄낄거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정도 매우 공격적인 것이 될 수 있다저녁 식사 시간에 걸려 온 간청하는 전화가 지금 뭐 해돈 좀 빌려줘라는 것임이 드러날 수 있듯이 말이다아니면 집에 손님이 왔을 때 흔히 일어나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보자안주인은 손님에게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을 내올까 묻는다손님은 사양한다언뜻 보면 각자의 행동은 공격성과 정반대인 호의적인 것이다안주인은 관대하게 내오겠다고 하고 손님은 사려 깊게 사양함으로써 안주인이 수고를 하지 않도록 배려한다


이런 의사 교환은 매우 간단하고 즐겁고 숨은 의미도 없이 이루어질 때도 있다즉 손님이 막 저녁을 먹고 와서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하지만 그 의례가 공격적일 가능성즉 그 속에서 울리고 있는 역동적인 힘을 생각해보자음식을 내오겠다고 함으로써안주인은 자신이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린다그곳은 그녀의 집이며그들 주위를 그녀의 자원들이 둘러싸고 있다그녀는 줄 것을 갖고 있으며후한 대접을 할 수 있는 지위를 활용해 이익을 얻고 싶어한다그녀는 자신의 조건에 맞게 관계를 정립하고 싶어한다즉 믿을 수 있고관대하고풍족하게 보이고 싶은 것이다그녀는 일시적이라고 해도 그 선물이 받아들여짐으로써 주는 사람에게 약간의 은혜를 입을 손님과 동맹 관계를 다지기를 원한다.


음식을 사양함으로써손님은 일시적인 동맹이나 종속을 거부하며그렇게 함으로써 상황을 주도하는 쪽이 자신이라는 미묘한 의사를 전달한다선물과 일시적인 동맹이 없이도 지낼 수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그러면 안주인은 그 거절에 약간 마음이 상할 수도 있고어색해질 수도 있으며좋아요그러면 친구가 되지 않을 테니까 용건만 이야기하죠 하고 결심할 수도 있다


이유 없이 거절하는 것은 때로 뺨을 때리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모든 사회적 교환은 맥락에 따라 순해지도록 달래거나 적대감을 부추기는 식의 공격 역학으로 볼 수 있다안주인이 오랜 친구이고 아이들이 딸려 있으며 음식을 차리는 데 시간이 걸린다면음식을 사양하는 것은 관대한 행동이다당신이 주말에 부하 직원의 집에 들른 것이라면음식을 거절하는 것은 붉은 반점이 박힌 부리를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과 같다당신은 예기치 않게 나타나 가여운 안주인에게 충격을 주면서그녀가 어떤 것을 마시겠냐고 물으면서 관계를 균형 상태로 돌리려 애쓸 때 그녀의 기를 죽인다결국 당신은 그녀를 격분시키는 것이다마실 것이 필요한 쪽은 그녀이다.


호소처럼 보이는 것도 맥락에 놓고 재구성하면 노골적인 공격성이 드러날 수 있다맥베스 부인은 모두가 좋아하는 여성 혐오자이며당장 나를 남성으로 만들어 다오그러면 왕관에서 발끝까지 무시무시한 잔혹함이 가득 차리라라고 영혼들에게 간청할 정도로 무모한 야심을 가진 여성이었다그녀는 남편이 던컨 왕을 살해하도록 방조하고 교묘히 조종하고는 그 피 속에 자신의 손을 담근다적대적이고 공격적인 계집이라는 말로는 이 귀부인을 제대로 표현했다고 할 수 없다우리의 선입관을 조금만 바꾸면맥베스 부인은 비장함이 담긴 고고한 모습을 띤다맥베스 부인이 북유럽의 여성 족장즉 자기 일족의 수호자라고 하면 어떨까


핀란드 웁살라 대학의 철학자인 페카 니에멜라는 맥베스 부인이 고대 북구 서사시인 오르크네잉가 전설에 나오는 강인한 여성들과 흡사한 바이킹족이었다고 주장해왔다니에멜라는 맥베스의 무대가 서기 1000년 경 스코틀랜드이며당시 스코틀랜드는 바이킹 문화에 지배되면서 기독교인보다 이교도인이 더 많았다고 지적한다바이킹족이라고 보면맥베스 부인은 잔인성을 전혀 잃지 않으면서도 훨씬 더 우리의 동정심을 얻는다


우리는 바이킹 여성들이 잔혹함과 진한 피와 많은 젖에 익숙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바이킹 남성들은 정복을 위해 몇 달이나 몇 년 동안 떠나 있곤 했다바이킹 여성들은 뒤에 남아 영토를 맡았으며삶과 죽음전쟁과 평화에 관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상당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화려하고 꿀이 흐르는 축제를 열 시간이 거의 없었다약탈하는 집단은 언제나 약탈당할 위험에 처해 있으며바이킹에게는 재산과 사람을 보호하는 법도보안관도기마 경찰대도 없었다외부에서 오는 위협에 대항할 유일한 보호 수단은 친족과 일족이었다약한 일족은 동맹을 이끌어낼 수 없었다약한 일족은 갑작스런 습격에 절멸될 수 있었다바이킹 여성은 지위에 개의치 않을 수 있는 사치스러움을 누리지 못했다맥베스는 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스코틀랜드 귀족이라는 지위와 자연스러운 인품을 해외에까지 알릴 수 있었다스코틀랜드 고원 지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의 부인은 여왕의 왕관이 자기 일족을 지켜줄 만큼 강한 보호 수단이라고 보았으며칼 끝을 겨누는 것 외에는 그 왕관을 차지할 방법이 없었다.


맥베스 부인은 모든 여배우들이 꿈꾸는 배역이지만북구 여성의 일상 생활을 연기할 필요가 없다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 그 역할에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의 공격성은 지우기 힘든 오점이라기보다는 즐기는 취향 쪽에 가깝다우리는 여전히 공격성우리의 공격성을 갖고 있으며우리가 그것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만일 우리가 적대감이나 정신적 의상 도착증이성의 옷을 입기 좋아하는 변태적 성향〕 없이 공격성을 바라보고그것의 기원과 토대를 탐색한다면우리는 자신이 원한을 지녔다고 해도 용서할 수 있으며친구들에게 키스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공격성과 호르몬 -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


공격성은 테스토스테론과 이어지고, 테스토스테론의 명성이 너무나 무시무시하기 때문에 당신은 그 탄소 고리들이 철컹거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이다. 잘난 척하는 테스토스테론의 그 작은 눈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공격성의 근원을 생각할 수 없다. 테스토스테론이라는 압도적인 개념은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 사이를 휘젓고 돌아다녔기에 사소하다고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테스토스테론이 공격적인 행동을 매개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그 호르몬이 후보자라는 것은 확실하다. 


테스토스테론은 상대를 지배하거나 공격하려 하고과시하려 하고허세를 부리려 하고방 한가운데에 빨랫감을 수북히 쌓아놓으려 하는 충동 등 공격성이라는 포괄적인 용어 아래 들어가는 모든 형질들과 연관되어 있다. 공격성은 지도자를 만들고 악당을 만들며양자의 구별을 어렵게 만드는 것도 테스토스테론이다테스토스테론은 커다란 쇠망치처럼 섬세하지 못하다테스토스테론은 어릴 때아주 어릴 때인 태아 때 발달하는 뇌에 영향을 미쳐서뇌가 나중에 오만하고 무모하고 서투른 행동을 하도록 길을 들인다고 이야기된다테스토스테론은 젖가슴이 엉덩이를 공격하듯 한다즉 전자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후자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물론 최근 들어 우리는 테스토스테론을 엄격히 말해 남성 호르몬이라고 할 수 없으며 여성도 어느 정도 그 호르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여성은 적게훨씬 더 적게 갖고 있다여성의 테스토스테론 농도는 혈액 0.1리터당 20~70나노그램이다그중 반은 부신에서 만들어지며나머지 반은 난소에서 만들어진다남성은 가장 수치가 낮은 사람이 0.1리터당 300나노그램을 지니고 있으며대다수 남성들은 400~700나노그램을 지니고 있다즉 남성은 여성보다 10배나 더 많은 양을 지니며이 테스토스테론은 거의 대부분 정소에 있는 세포들에서 만들어진다따라서 남성이 더 많은 테스토스테론을 갖고 있다따라서 우리는 남성이 여성보다 더 공격적이라고 생각한다따라서 우리는 설령 테스토스테론이 이른바 남녀의 공격성 차이를 낳는 주요 원인 또는 원흉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그 차이에 어느 정도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또 우리는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정상적인 여성의 농도 범위의 상한에 있고보통 여성보다 더 공격적이고자신의 직업에 더 헌신적이고성적 주장이 더 강하고육아에 신경을 덜 쓰는어머니로서는 빵점인 테스토스테론 과다 여성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여성을 보아왔다이 테스토스테론 과다 여성은 왜 일부 여성들이 정상에서 벗어난 듯한 행동을 하는지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테스토스테론 과다 여성더 정확히 말해 강인하고 날카롭고 야심적인 여성이 테스토스테론 농도 증가의 결과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전혀 없다. 테스토스테론은 리비도 호르몬공격 호르몬지배 호르몬으로서 대단한 권위를 누려왔다하지만 여성이 성욕이나 분노나 기운이 샘솟는 것을 느끼는 등 인생에서 뭔가를 할 때 테스토스테론에 의지해야 한다면딱하게도 그들은 운이 없는 셈이다그들의 테스토스테론은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테스토스테론 과다 여성이라 해도 0.1리터당 70나노그램밖에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남성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낮기 때문에 여성들이 그 호르몬 수치상의 작은 변화나 요동에 매우 민감하다는 주장도 있었다과연 그럴 수 있을까높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테스토스테론은 그다지 활동적인 호르몬이 아니다무게로 비교하면테스토스테론은 에스트라디올보다 생물학적 능력이 훨씬 떨어진다남성은 생활할 때 그것을 다량으로 갖고 있어야 하는 듯하다그렇다면 여성이 남성보다 그 허약한 호르몬을 행동 능력의 원천으로 사용하는 데 더 뛰어나야 할 것이다왜 그래야 할까?


설득력 있는 대답은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우리는 테스토스테론이라는 압도적인 개념에 오랫동안 맹목적으로 경의를 표해왔다남성이든 여성이든실제로 그렇든 희망이든 간에우리는 그것이 모든 통치자들을 통치한다고 생각할 정도까지 숭배해왔다하지만 우리가 지배적인 패러다임에 도전하고 그 생각이 얼마나 우리를 실망시키는지 알고 나면다른 우주가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할 것이다그 우주에서는 바이킹 여성 족장의 뇌 신경 회로가 가까스로 탄 꼴찌상이 아니라 타고난 권리로 받아들여진다.


테스토스테론은 뇌에서 조직화 단계와 활성화 단계라는 2단계로 작용한다고 한다조직화는 태아 때 이루어진다남성 태아의 정소가 테스토스테론 방출을 시작할 때이며이때 테스토스테론은 뇌를 남성화시킨다고 한다활성화는 훨씬 뒤인 사춘기 때 시작된다사춘기가 되면 남성의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높아지고잠재되어 있던 남성적인 패턴들이 모두 발현되며우리는 포춘지가 선정한 최고 경영자 500(그중 남성은 10퍼센트 정도이다)이나 아놀드(슈왈츠제네거)나 노먼(슈바르츠코프)라는 이름의 험악한 인물이 될 기본 재료를 갖게 된다.


반대로 여성의 뇌는 다른 신호가 없을 때 본래 정해져 있는 상태로 발달하는 뇌안정 상태의 뇌이다여성의 뇌는 태아 때 테스토스테론에 노출되지 않는다테스토스테론을 분비하는 정소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여성 뇌 회로의 특징은 존재가 아니라 부재를 통해 확정된다그 회로는 사춘기가 되어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이 쇄도하는 것을 느낄 때 활성화하여 여성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이어서 어떻다고 말하기도 어렵고개인마다 다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모든 것을 금지하는 방식으로 이런저런 행동을 하라는 충고를 받게 된다남성처럼 공격성을 갖지 말며야심을 갖지 말며불쾌한 짓을 하지 말며성에 몰두하지 말라는 등등적어도 뇌의 성적 성향에 관한 표준 조직화/활성화 이론 속에는 그런 가정이 항상 들어 있었다즉 여성의 뇌는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행동 같은 것을 덜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조직화/활성화 가설의 오류와 타당성을 검토할 수 있다첫째테스토스테론은 태아 각인에 그만큼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많은 연구자들은 태아의 뇌에 도달한 테스토스테론 중 상당 부분이 뉴런을 통해 즉시 에스트로겐으로 전환되며이렇게 전환된 에스트로겐만이 뇌의 성적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그렇다그 남성 호르몬은 오직 여성’ 호르몬이 되어서만 뇌를 남성화할 수 있는 것이다그것은 뇌에 성적 성향을 새겨 넣고공격적이고 지배적이며 호색적인 행동을 부여하는 것이 에스트로겐이라는 의미이다


에스트로겐은 여성의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이 호르몬의 측면에서 보면우리는 결핍된 상태로 치부될 수 없다하지만 에스트로겐이냐 테스토스테론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태아의 뇌가 얼마나 많은 스테로이드 호르몬에 노출되는지가 중요하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조직화/활성화 가설을 고수할 수도 있다가령 모체에서 나온 것이든 태아의 난소에서 나온 것이든 간에 태아의 혈액에 있는 에스트로겐이 알파-태아단백질이라는 태아의 몸에 있는 단백질과 결합하면 뇌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하자그리고 남성 태아의 정소에서 나온 테스토스테론은 이 태아단백질과 결합하지 않기 때문에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자그런 다음 에스트로겐으로 전환되어 뇌의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면그렇다면 테스토스테론은 대뇌 피질에 존재하는 것이 되고 원인이 되며여성 태아의 에스트로겐은 그렇지 않은 것이 된다즉 남성 태아만이 몰려드는 스테로이드의 세례를 받는 셈이다반면에 여성의 뇌는 호르몬에 대해 처녀성을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그 가정이 틀렸다는 것이다그 가정을 뒷받침한다고 하는 실험들은 대부분 설치류를 대상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설치류의 알파-태아단백질은 혈액 속의 에스트로겐을 포획하는 능력이 뛰어나다하지만 인간의 태아단백질은 에스트로겐이 뇌로 가는 것을 막지 않는다따라서 모체에서 나온 에스트로겐은 마음대로 여성 태아의 뇌에 영향을 미치며그 태아의 난소에서 나온 에스트로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에스트로겐은 임신 기간 내내 여성 태아의 뇌를 이슬비처럼 촉촉하게 적신다뇌 안으로 얼마나 많은 양이 흘러 들어가며 그것이 신경 회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누가 알겠는가과학자들은 남성 태아의 정소에서 나와 뇌로 홍수처럼 밀려가는 호르몬에 비하면 그 양이 적을 것이라고 가정하면서논리에 체계를 갖추기 위해 저농도의 에스트로겐은 뇌를 여성화하고 고농도의 에스트로겐은 뇌를 남성화하며태아가 분비한 안드로겐이 뇌 속에서 전환되어 생긴 에스트로겐은 고농도라고 본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전혀 없다심지어 설치류에서도 이 산뜻한 이분법 모델은 잘 들어맞지 않는다유전적으로 변형시켜 에스트로겐 알파 수용체를 없앰으로써 정상 생쥐보다 에스트로겐에 반응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생쥐 암컷을 예로 들어보자발달할 때 에스트로겐의 영향을 받지 않는 뇌가 여성성을 띠도록 예정되어 있다면이 생쥐는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교태가 흘러넘치는 미녀들완벽한 여성에 해당하는 생쥐 암컷이 되어야 한다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정반대로 그들은 유별나게 공격성을 보인다때로는 새끼를 죽이기도 한다그들은 다른 암컷의 새끼를 보면 공격한다이 수용체가 없는 암컷은 에스트로겐 수용체가 없는 수컷보다도 더 공격적이다


이 수컷들은 다소 암컷화가 이루어진 듯이 보인다그들은 생쥐 수컷들이 흔히 하는 행동인 공개된 공간을 가로질러 가는 모험을 하지 않으려 한다그들은 암컷과 교미를 하지만 사정을 하지 않는다그들의 뇌도 발달할 때 에스트로겐에게 설득당하지 않았다그들의 정소는 테스토스테론을 만들지만그 테스토스테론은 뇌의 조직화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테스토스테론은 에스트로겐이 되어 활동해야 하는데 에스트로겐 수용체가 묵묵부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인가당신의 염색체가 여성의 것이고 당신이 자궁 속에서 에스트로겐에 반응할 수 없다면당신은 남성화가 된다는 것일까당신이 남성이지만 에스트로겐에 반응할 수 없다면여성으로 바뀐다는 것일까아니면 그와 비슷한 존재나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는 말인가아니면 기존의 이야기들이 틀렸고 여성의 뇌가 기본 설정 상태가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며만일 성별이 어떻든 간에 유전자 이상 때문에 뇌 발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예기치 않은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일까?


여성도 테스토스테론을 지니고 있지만그것을 활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테스토스테론에 의지할 수 없으며아예 그것이 필요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테스토스테론을 남성의 공격적이거나 지배적인 행동과 연결하려는 연구들은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그런 연구들은 혼란스러운 결과를 내놓고 있다일부 연구는 남성 죄수들 중에 더 폭력적인 범죄를 저지른 부류가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더 높다는 결과를 내놓았다반면에 그런 상관 관계를 찾아내지 못한 연구들도 있다. 사춘기 소년들 중 또래들에게 억센 대장이라고 여겨지는 소년들은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높다고 알려져왔다하지만 억센이 억센 운명’ 때문일 수도 있다같은 연구는 어릴 때부터 툭하면 싸움질을 하고 말썽을 일으키는 소년들은 사춘기에 들어서도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매우 낮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테스토스테론과 남성의 공격적이거나 지배적인 행동 사이의 연관성이 혼란스럽다면여성들에게 그것은 냉장고 아래 바닥과 같다즉 아예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여성 운동 선수들은 경기 직전에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증가하지 않으며경기에서 이긴다 해도 증가하지 않는다여성 법정 변호사가 세무 담당 변호사보다 평균적으로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더 높은 축복을 누릴 것 같지도 않다난자가 성숙할 시기에 안드로겐 농도가 최대가 되는 것처럼테스토스테론 농도가 월경 주기에 맞춰 오르락내리락할 때 여성의 공격성도 마찬가지로 오르락내리락하는지 조사한 연구가 있었다


여성 24명에게 점수 뺏기 공격 패러다임이라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게임을 시켰다게임 참가자는 한 단추를 백 번 눌러 자기 점수를 1점 올리거나다른 단추를 10번 눌러 보이지 않는(가상의) 상대의 점수를 1점 뺏거나 선택할 수 있었다. 1점은 10센트에 해당했다그런 다음 참가자의 점수를 주기적으로 1점씩 뺌으로써가상의 적이 그녀를 적대시하고 있는 것처럼 자극했다연구자들은 여성의 상대적인 테스토스테론 농도와 그녀가 자기 점수를 올리기보다는 화가 나서 상대의 점수를 뺏으려 하는 행동 사이에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하지만 연구자들은 월경 전 증후군을 지닌 여성들이 전반적으로 생리 주기 내내 더 호전적이며, ‘가만 안 두겠어라는 단추를 더 많이 누른다는 것을 발견했다즉 테스토스테론 농도에 무관하게 말이다.


테스토스테론은 지나치게 주목을 받고 있다우리는 그것을 너무 많이 생각한다여성 공격성의 뿌리를 이해하려 시도할 때 우리가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나는 테스토스테론이 남성의 행동에 의미가 있는지남성이 개인적 승리를 달성한 뒤에 테스토스테론 농도를 높게 유지함으로써 더 큰 성취를 할 수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남성들은 많은 테스토스테론을 갖고 있으며아마도 그중 일부를 행동을 하는 데 쓸 것이다몸은 원래 그렇다몸은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하고 손을 대본다


그 이용이 경험역사사회적 제약믿고 싶어하는 뇌의 위약(僞藥효과에 깊이 영향을 받고 지나치게 통제를 받을 때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하지만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은 테스토스테론을 지니고 있으며일부 여성들이 배란기에 에스트로겐 농도가 최대에 달할 때 성욕과 오르가슴 능력을 최대화시킬 수 있는 것처럼 남성이 테스토스테론을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반응과 감각을 강화하고 연장시키는 데 사용할지 모른다는 사실은 그 결과와 그다지 상관이 없다다른 방식으로도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으며다른 방식으로도 자유와 초월을 이해할 수 있다우리는 테스토스테론이라는 멍에와 그것 없이 지낼 수 없다는 감정즉 리비도를 설정하는 호르몬이자 공격 호르몬이자 영웅 호르몬을 남성들이 독점하고 있다는 감정을 벗어 던져야 한다그것은 거기에 있지 않다테스토스테론을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암컷 하이에나를 통해 여성 공격성 알아보기
하이에나는 수컷이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더 높다
하지만 왜 암컷이 우두머리가 되는가


계통학적으로 우리의 자매가 되는 존재들을 몇몇 살펴보고, 그들이 여성 공격성의 근원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보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례는 얼룩하이에나이다. 얼룩하이에나는 아프리카 육식 동물이다. 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말은 잘못 됐다. 얼룩하이에나는 다른 포유동물들과 생김새가 다르다. 이 동물은 뒷다리가 앞다리보다 더 짧아, 먼 거리를 더 잘 뛸 수 있다. 매머드처럼 굵은 목과 삼나무처럼 튼튼한 몸통 근육과 강한 턱으로 먹이를 살, 가죽, 뼈 할 것 없이 모조리 부술 수 있다. 얼룩하이에나는 뼈를 부숴 가루로 만든다. 그래서 배설물이 분필처럼 하얗다. 얼굴은 고양이과, 개과, 곰과, 기각류의 얼굴을 섞어놓은 듯하다. 이 하이에나의 습성은 포악함 그 자체이다. 사자 새끼는 눈도 못 뜨고 이빨도 없는 무기력한 상태로 태어난다. 반면에 하이에나의 새끼는 눈을 뜬 채 송곳니가 완전히 자란 상태로 태어나며, 그 즉시 자매의 목을 향해 이빨을 들이댄다. 막 태어난 새끼가 다른 새끼를 물어 죽이는 일도 있다. 첫 유혈 의식을 치른 뒤, 생존자는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새끼들의 보편적인 습성인 재롱떠는 모습으로 변신한다.   


하지만 얼룩하이에나의 진정한 특징은 생식기의 모양과 성적 행동이다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얼룩하이에나는 암수의 외부 생식기가 흡사하다암수 모두 음경과 음낭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하지만 수컷의 생식기가 진정한 음경과 음낭인 반면암컷의 음경처럼 보이는 것은 질과 클리토리스의 조합이며음낭처럼 보이는 것은 음순이 융합된 것이다암컷은 소변을 보고교미를 하고새끼를 낳는 등 모든 일을 그 음경을 통해 한다그 가느다란 터널을 통해 출산하는 일은 고통스럽다첫 출산 때 음경은 새끼가 나올 때 찢겨 나간다첫 분만 때 죽는 암컷들도 많다살아남은 암컷들은 그 이후의 출산을 훨씬 더 수월하게 할 수 있다이 점은 인간 어머니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처음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이르기까지 자연학자들은 얼룩하이에나의 특이한 생식기를 보고서 이 동물들이 암수한몸이라고 오해했다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성별이 둘이라는 것을 깨달은 뒤에도과학자들은 하이에나의 행동과 사회 조직을 보고 곤혹스러워했다얼룩하이에나는 암수의 몸집이 거의 같지만예외 없이 암컷이 지도자가 된다암컷이 우월한 성이다나이가 더 들고 몸집이 더 큰 수컷이라도 더 젊고 더 작은 암컷에게 항복한다이런 암컷의 우월성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언뜻 생각할 때는 테스토스테론이 해답인 듯하다암수 새끼 모두 자궁 내에서 매우 다량의 테스토스테론에 노출된다암컷 새끼가 수컷과 흡사한 생식기를 갖고 태어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테스토스테론은 어미의 독특한 태반에서 분비된다대다수 포유동물의 태반에는 모체의 안드로겐을 에스트로겐으로 전환시키는 아로마타제가 풍부한 반면전구 물질을 테스토스테론으로 전환시키는 효소들은 적게 들어 있다하이에나의 태반에는 이 효소 비율이 역전되어 있다


즉 스테로이드 전구 물질을 테스토스테론으로 바꾸는 효소들은 많고테스토스테론을 에스트로겐으로 만드는 아로마타제는 적다따라서 하이에나 태아의 혈액에는 테스토스테론이 진하게 들어 있으며에스트로겐보다 더 많은 이 테스토스테론은 하이에나의 뇌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에스트로겐으로 전환될지도 모른다하지만 어쨌든 이 많은 테스토스테론은 하이에나 암컷의 특이한 생식기를 만들 수도 있고새끼가 어미의 음경 형태 질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송곳니를 험악하게 딱딱거리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그리고 태어난 지 몇 주가 지나 혈액에서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줄어들면새끼는 더 유순하고 재롱떠는 존재가 된다그 호르몬의 명성에 딱 들어맞는 현상인 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암컷이 어떤 식으로 무엇 때문에 수컷보다 우위에 서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하이에나 새끼 몸 속의 테스토스테론 농도는 암수 똑같이 태어난 뒤에 낮아진다그럼에도 암컷 새끼가 수컷 새끼보다 더 공격적이다청년기와 성년기에는 포유동물 수컷들이 성적으로 성숙할 때 대개 그렇듯이 암컷보다 수컷의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상당히 높아지지만그래도 암컷의 우위에는 변함이 없다얼룩말의 넓적다리를 놓고 다툰다면암컷이 이긴다암컷이 수컷을 누르는 것이다그것은 습성이 되어왔다.


하지만 이 습성이 지배하려는 취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테스토스테론은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얼룩하이에나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모든 하이에나의 뇌가 태아 때 다량의 테스토스테론에 노출되어 모든 뇌가 수컷화했을 것이고암수의 뇌에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추측해왔다하지만 실제로 많은 포유동물 종에서 암컷보다 수컷의 뇌 용량이 더 큰 것처럼 하이에나도 수컷의 뇌 용량이 더 크다성적 행동을 통제하는 뇌 부위도 마찬가지이다하이에나 암컷은 암컷의 뇌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강력한 모권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에나 연구를 통해 안드로스테네디온이라는 스테로이드 호르몬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 호르몬은 테스토스테론과 화학적으로 같은 부류에 속한 안드로겐의 일종이지만그렇게 남성적이거나 자극적인 안드로겐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오히려 정반대였다오랫동안 연구자들은 안드로스테네디온이 테스토스테론이나 에스트로겐으로 전환될 때까지는 아무 의미도 없는 중간 물질이라고 무시해왔다이 물질은 주로 생식샘이 아니라 부신에서 만들어진다고 여겨졌다부신 호르몬들은 난소나 정소의 호르몬에 비해 그다지 성적인 역할을 안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성적 차별에 얽매여 있는 우리의 눈에는 암수의 부신이 별 차이가 없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하이에나는 안드로스테네디온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성년기 암컷은 수컷보다 테스토스테론의 양이 적을지는 몰라도다량의 안드로스테네디온으로 그것을 보충한다


그 다량의 호르몬은 그녀의 부신이 아니라 난소에서 분비된다이유는 모르겠지만하이에나 암컷의 생식샘은 다량의 안드로스테네디온을 만들어낸다임신 기간에는 하이에나의 태반이 이 호르몬을 테스토스테론으로 변형시키며변형된 테스토스테론은 태아의 혈액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하지만 암컷이 임신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난소는 일정하게 안드로스테네디온을 만들어내며이 호르몬이 암컷에게 공격성을 불러일으키는 데 한몫을 할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우리는 알지 못한다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안드로스테네디온이 전보다 훨씬 더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뿐이다


먹이고 보살펴주고 그것에 목줄을 매어라그러면 당신은 포악한 암컷을 상징하는 호르몬 마스코트를 갖게 된다한 연구는 공격적인 10대 소녀들의 혈액에 안드로스테네디온 농도가 높다는 것을 발견했다연구자들은 처음에는 그 결과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소녀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부신이 과도하게 흥분하여 안드로스테네디온을 비롯한 부신 스테로이드들을 과잉 분비한 결과라고 생각했던 것이다이제 연구자들은 그 실험 대상자들이 정말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아 흥분했는지아니면 난소가 안드로스테네디온 폭풍과 그에 따른 행동이나 억양즉 건방지고 과시적이고 뻔뻔스런 말투를 낳은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다얼마나 공격적이든 간에여성들의 혈장에는 테스토스테론보다 안드로스테네디온이 네다섯 배 더 많으며그 안드로스테네디온은 대부분 자유롭다.


즉 혈액 단백질과 결합해 있지 않으며따라서 이론상 뇌에 더 쉽게 들어갈 수 있다안드로스테네디온 농도는 여성이나 남성이나 별 차이가 없다하지만 여기서 여성은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지 않는다여기에는 갖고 놀 진흙이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안드로스테네디온을 너무 중요시하고 싶지 않다과대 평가된 것이 테스토스테론만은 아니다모든 호르몬들은 궁극적으로 과대 평가되어 있을 뿐 아니라제대로 이해되어 있지도 않다하지만 설령 우리가 이 주문을 능숙하게 외운다 해도여전히 우리는 테스토스테론이라는 족쇄에 매여 있으며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새로운 관점을 필요로 한다하이에나는 사슬을 끊는 데 이상적인강한 턱을 지니고 있다.


호르몬에 집착하지 말자
여성호르몬을 대표하는 에스트로겐도
여성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에스트로겐을 잊지 말자. 그 호르몬도 복종하거나 편협한 영혼이 아니라, 당당한 영혼을 부추길지 모른다. 유타 대학의 엘리자베스 캐시던이 여대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혈액에서 에스트로겐, 테스토스테론, 안드로스테네디온, 세 호르몬의 농도가 가장 높은 여성들이 가장 자존심이 세며, 동년배 사이의 위계 질서에서 자신이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나타났다. 


또 그들은 거의 웃지 않았다그것은 자신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매우 불행한 증상에 속한다흥미롭게도 안드로스테네디온 농도가 가장 높은 여성이 설문 조사를 했을 때 친구들이 평가한 것보다 자신이 훨씬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즉 그들은 자신의 힘을 과장하려는 성향을 보였다안드로스테네디온은 그저 마녀가 이것저것 뒤섞어 만든 약일지도 모른다하지만 자기 확신을 과도하게 가질 수가 있는 것일까맞아그래분명해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며과대 망상을 품고 있는 사람을 매우 병적이라고 생각한다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자기 확신이 강하고 반발심이 일 정도로 자화자찬하는 사람이 진정한 불굴의 의지로 힘을 획득할 뿐 아니라그것을 한번 움켜쥐면 놓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왔다여성이 자기 확신을 지나치게 가질 수 있을까안드로스테네디온을 주입해 여성을 오만하게 만들 수 있다면나는 기꺼이 팔을 뻗어 당신이 정맥을 찾을 수 있도록 돕겠다.




*

서점가기


알라딘 : http://goo.gl/KKV97Z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 연재 2화는
여성의 난자에 관한 내용입니다.

 신화에서는 아폴로 같은 멋진 소년들이 
태양처럼 빛나는 전차를 끌고 
모든 생명체를 자라게 한다고 묘사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건 신화의 실수일 수도 있습니다.

소년보다는 여성의 난자가 태양과 닮았기 때문이고,
난자 외의 세포들은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낼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난자가 생명을 만드는 일은 민주적이기도 하죠.
어느 신체 기관 하나 무시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도록 하는 것은
오직 난자만 할 수 있거든요.

이 아름다운 난자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아래 내용을 읽어보세요.
 



2

 

난자의 비밀 풀기 

그것은 완벽한 태양 전지 하나로 시작된다

 




어른 몇 명을 사랑스러운 아기와 함께 방에 놔두어보라. 그러면 한낮의 태양 아래 버터가 담긴 통을 놔두는 것과 같을 것이다. 요람 옆에 다가가는 순간 다 자라서 굳은 그들의 뼈는 부드러워지고 척추는 구부러지기 시작한다. 그들의 눈은 기쁨이라는 백내장에 걸려 부옇게 흐려진다. 그들의 지성은 온데간데없고 그들의 목소리는 카운터테너와 소프라노와 아기 돼지의 소리 같은 새로운 음역으로 뻗어 나간다. 그리고 아기의 손에 시선이 닿는 순간, 그들은 고대의 찬가를 그 손톱에 바칠 자세를 갖춘다. 신생아의 손톱, 그 사랑스럽게 농축된 조숙함보다 어른들의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다. 작은 큐티클 층 밑의 속살, 눈썹 모양의 하얀 각질, 섬세하게 굽은 손톱 면, 저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올 그 손톱 전체의 능률성을 보라. 정말로 제 역할을 하는 듯이 보이지 않는가! 우리는 아기의 손톱이 우리를 우쭐하게 만드는 능력, 말하자면 축소판이면서도 우리 자신의 손톱 모양을 그대로 재현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한다. 호문쿨루스, 즉 축소되어 있는 어른은 허벅지나 눈이나 촉촉한 앵무조개 껍데기 같은 귀보다도 아기의 손톱에 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손톱을 보고 아기의 미래를 확신한다.
말하자면, 나는 난자를 더 좋아하는 쪽이다.
임신 중반기에 접어들 무렵, 내 아기가 딸임을 알았을 때, 나는 두 개의 거울이 마주보고 있는 방에, 말하자면 이쪽 거울에 자신의 영상이 담긴 반대편 거울이 비치고 다시 그 거울에 반대편 거울이 비치면서 무한히 영상이 반복되어 있는 거울 사이에 나 자신이 서 있다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임신 20주가 되자, 내 딸은 체중이 270그램에 못 미치는 바나나만 한 크기로 자랐고, 바나나 같은 자세로 내 안에서 떠다니고 있었다. 마치 내 유전적 미래를 담은 포도덩굴들이 뒤얽혀 있는 것 같았다. 태아 기간의 절반밖에 살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미 당신이 지금 읽는 ‘난자’라는 글자보다 작은 자신의 난소 안에 자신이 지니고 있을 모든 난자들을 갖고 있었다. 내 딸의 난자들은 죽음을 체험한 사람들이 말하는 터널 끝의 빛, 잠재력을 지닌 은색의 점들이다. 아들은 자신의 자랑스러운 ‘씨’인 정자를 사춘기가 될 때까지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내 딸의 생식세포, 우리의 씨는 이미 태아 때 기틀이 잡혀 있으며, 그 솎아낸 염색체, 부모의 역사를 담은 도자기들은 자신의 작은 인지질(燐脂質) 자루 속에 담겨 있다.
우리는 인형 속에 똑같은 모습의 작은 인형이 들어 있는 러시아 전통 인형 마트료쉬카의 이미지를 너무나 자주 사용한다. 나는 도처에서, 특히 과학의 수수께끼들을 묘사할 때 그 이미지가 사용되는 것을 본다. 하나의 수수께끼를 풀고 나면 또 다른 수수께끼와 만난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 비유를 내던지기에 딱 맞는 시기가 있다면 바로 지금, 포개져 있는 모계성의 특성을 묘사하는 시점이다. 원한다면 알 모양의 인형과 그 왕조의 어찌할 수 없는 예측 불가능성과 유동성을 생각해보라. 그 알 모양의 어머니를 열고 알 모양의 딸을 꺼내보라. 그 딸을 열면 다음 알이 어서 깨 달라고 빙긋 웃으며 맞이한다. 그 일이 얼마나 되풀이될지 당신은 미리 말할 수 없다. 당신은 무한히 계속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나의 딸이여, 나의 마트료쉬카여.
방금 전에 나는 내 딸이 태아 중반기에 자신의 모든 난자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그녀는 너무 많은 지원을 해준 양계장처럼 수용 능력을 넘어설 정도로 많은 난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난자와 훨씬 더 많은 난자를 지니고 있었고, 나중에 월경을 시작하기 전에 그 반짝이는 생식 세포들의 대부분을 잃을 것이다. 임신 20주째에 태아가 지닌 난자의 수는 최대에 달해 600~700만 개가 된다. 그 다음 20주 동안에 이 난자들 중 400만 개가 죽을 것이고, 사춘기가 될 때쯤이면 약 40만 개의 난자들이 더 이상 비좁다고 싸우지도 투덜거리지도 않은 채, 공간이 넓어졌다고 몹시 기뻐할 것이다.
속도는 더 느려지지만 그 상실은 여성이 젊은 시절을 거쳐 중년에 접어들 때까지 계속된다. 기껏해야 그녀의 난자들 중 450개만이 배란이라는 초대를 받을 것이고, 그녀가 임신을 해서 배란을 중단한 채 많은 시간을 보낸다면 초대를 받는 난자의 수는 훨씬 더 줄어들 것이다. 폐경기가 되면 난소에는 난자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나머지는 모두 사라진 것이다. 그것들은 몸에 회수된다.
이것이 바로 생물의 기본 원리이다. 생명은 방탕하다. 생명은 헤프다. 생명은 수입 이상의 지출을 함으로써만 살아남을 수 있다. 지나치게 많이 만든 다음 그것을 깎아내면서 나머지는 내던져 죽인다. 뇌는 수많은 세포의 죽음을 통해 형성된다. 뉴런neuron들이 지나치게 들어찬 초기의 충만한 푸딩 상태에서 주름이 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체계를 갖춘 구조로, 뇌엽과 중추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구조로 바뀌는 것이다. 인간의 뇌가 발달을 끝낼 무렵인 유아 때까지 원래 있던 세포의 90퍼센트가 죽으며, 특권을 지닌 소수만이 살아남아 죽음이라는 운명 속에 살면서 힘겨운 일을 해 나간다. 팔다리도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배아(胚芽) 발생의 어떤 시점에서 손가락과 발가락은 그것들을 서로 연결하고 있는 그물에서 풀려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물갈퀴와 지느러미를 지닌 채 양막 수족관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미래가 펼쳐지는 것도 이런 식이다. 



​ 

우리 여성들이 처음에 지닌 몇백만 개의 난자들은 세포 자살apop-tosis이라는, 세포가 본래 지닌 프로그램을 통해 깨끗이 파괴된다. 난자들은 단순히 죽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살한다. 그들의 막이 세찬 바람에 펄럭거리는 속치마처럼 헝클어지면서 그들은 산산조각 나며, 그러고 나서 각 조각은 이웃 세포들 속으로 흡수된다. 멜로드라마까지는 아니라도 우아하게 스스로 떠남으로써, 그 희생적인 난자들은 자매들에게 부화실을 널찍이 쓰게 해준다. 나는 어팝터서스라는 그 단어, ‘팝’ 하고 말할 때의 그 소리를 좋아한다. 난자는 팽팽하게 빛을 반사하며 잠깐 반짝였다가 펑! 하고 터지는 비누 거품처럼 펑 하며 흩어진다. 그리고 내 딸이 내 안에서 성장하는 동안, 그녀의 신선한 작은 난자들은 매일 몇만 개씩 터져 나갔다. 그녀가 태어날 때쯤이면 난자는 그녀의 몸에서 가장 희귀한 세포가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과학자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세포 자살에 많은 관심을 보여왔다. 그들은 암, 알츠하이머병, 후천성 면역 결핍증 등 연구비 지원 기관에 알려진 모든 질병들을, 몸의 일부가 스스로 죽어야 할 때를 통제하는 신체 능력에 이상이 생긴 것과 연관지으려 애써왔다. 임신한 여성의 눈에 주위에서 배가 불러온 여성들밖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과학자들의 눈에는 자신들이 검사하는 모든 환자나 병에 걸린 흰쥐에게서 세포 자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보이며, 그들은 세포 자살을 이해하기만 하면 치료와 완화 측면에서 놀라운 보상이 있으리라고 예상한다. 우리의 목적상 질병이나 기능 장애는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그 대신 우리는 떼지어 죽어가는 무리에게 박수를 보내고 그들의 죽음에 감사의 눈물을 바치자. 그렇다, 그것은 낭비이다. 그렇다, 그렇게 많이 만들어놓고 그 즉시 거의 전부를 파괴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 같다. 하지만 자연이 깍쟁이라면,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자연이 정말로 확실히 그 정도로 지나치지 않다면, 우리가 그 유명한 다양성, 자연이 자신의 옷자락에 단 반짝이는 장식들과 깃털 목도리들을 과연 볼 수 있게 될까? 이렇게 생각해보라. 선택되지 않는 것이 없다면, 선택도 있을 수 없다고 말이다. 달걀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수플레 요리도 있을 수 없다. 솎아내는 과정을 거쳐 살아남은 알들이 둥지에서 가장 멋진 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죽어가는 무리에게 박수를 보내고 

그들의 죽음에 감사의 눈물을 바치자.
선택되지 않는 것이 없다면,
선택도 있을 수 없다고 말이다.

"


따라서 난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그렇게 무작위적인 초라한 존재, 많은 사람들이 하늘에 삿대질(이런, 왜 나란 말이야? 어떻게 해서 그렇게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진 거야?)을 해대는 젊은 시절에 우울해하며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렇게 우연이나 변덕의 산물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존재할 가능성에 다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키질을 겪었는지를 생각할 때, 우리 중 어느 누가 존재할 기회는 존재하지 않을 기회에 비하면 그다지 터무니없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생명이 왜 그렇게 제대로 활동을 하는지, 인간과 다른 동물들이 전반적으로 왜 그렇게 멋진 조건 속에서 배양되어 나오는지, 왜 발달 과정에서 끔찍한 일들이 더 일어나지 않는지 궁금해하곤 했다.

우리 모두는 임신 초기에 자연 유산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우리 모두 그 유산의 대다수는 염색체가 너무 잘못되어 있어서 배아를 제거하는 다행한 제거 과정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하지만 그 시점까지 오기 훨씬 전에, 불완전한 난자와 나쁜 정자가 만났을 때,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하며 활발하게 판단이 내려지면서, 광범위한 세포 자살 사건이 벌어졌다. 너는 아니야, 너는 아니야, 너는 절대 아니야. 세포 자살을 거쳐, 마침내 우리는 좋아하는 말에 다다른다. 그것은 듣기 힘든 말이지만, 그렇게 희귀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말이다.

우리는 모두 승낙을 얻은 자들이다. 우리는 충분한 가치가 있으며, 우리는 검열을 통과했으며, 우리는 대규모의 태아 난모(卵母) 세포 사멸 속에서 살아남았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우리는 존재할 의미가 있다. 그것을 기계정신적mechanospiritual 의미라고 부르자. 우리는 좋은 난자들이다. 우리 각자 모두.

당신의 난자에 문제가 없었다면, 당신의 잉태 능력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면, 당신은 아마 당신의 난자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며, 그들의 중요성, 즉 난자 세포들이 지닌 특수한 능력을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을지 모른다. 당신은 알을 생각할지 모른다. 당신은 음식을 생각할지 모른다. 삶거나, 부치거나, 먹어서는 안 된다거나. 아니면 당신은 뒷마당에서 개똥지빠귀의 알 두세 개가 담긴 둥지를 발견하는 운이 좋은 어린 시절을 보냈을 수도 있다. 너무나 부드럽고 약해 보여 건드릴 생각은커녕 숨조차 멈추었을지 모른다. 불행히도 나는 소녀 때 다른 종류의 동물 알에 익숙했다. 바퀴벌레의 알. 대개 내가 찾아낸 것은 안에 있던 것이 안전하게 빠져나가고 난 빈 껍데기뿐이었다. 그것은 쏘고 난 뒤의 탄피처럼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곤충의 우월성을 더 뚜렷이 보여주었다.

많은 문화권에서 난자의 상징적 의미는 달걀 모양이다. 세계의 알은 우리 속세를 향한 바닥 쪽으로 갈수록 넓어지고, 위쪽으로 가면 하늘을 가리키듯 좁아진다. 중세의 그림이나 성당의 팀파눔〔그리스식 건축에서 합각머리와 돌림띠, 또는 박공 등의 삼각면〕에서 그리스도는 천국의 알 속에 앉아 있다. 세상을 낳았던 그는 세계를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 세상 속으로 태어났다. 부활절에 우리는 재탄생, 부활을 축하하기 위해 달걀에 색칠을 한다. 그 달걀 속에 생명이 있다. 마치 달걀 모양으로 마주 오므린 두 손 사이에 생명이 누워 있는 것처럼. 힌두교의 신인 가네샤와 춤추는 시바는 불꽃들이 만들어내는 달걀 모양의 받침 위에 앉아 있거나 그 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 추상적인 파스텔 마트료쉬카처럼 다른 꽃잎 위로 벌어져 있는 꽃잎들을 그린, 여성 성기를 연상시키는 꽃 그림들을 통해 조지아 오키프는 여성의 생식기가 여성의 출산 능력을 재현하듯이 난자의 이미지를 환기시키고 있다.

닭이나 다른 새들의 난자는 포장의 승리이다. 새의 암컷은 수컷과 짝짓기를 하기 오래전에 생식관 안에 난자 덩어리를 만들어둔다. 그녀는 난자에 배아가 홀로 먹이를 쪼아 먹는 시기에 도달할 때까지 필요한 모든 양분들을 공급한다. 난황(卵黃)에 콜레스테롤이 그렇게 풍부한 이유, 따라서 사람들이 그것을 아슬아슬한 음식으로 보는 이유는 자라는 태아가 어떤 몸이든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의 막을 만들려면 콜레스테롤이 충분하게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새는 난자에 단백질과 당과 호르몬과 성장 인자들을 준다. 찬장이 다 채워진 뒤에야 그 난자는 정자를 통해 수정될 것이고, 몇 겹의 탄산칼슘 함유층으로 된 알 껍데기로 봉인되어, 몸 밖으로 나온다. 새의 알은 보통 계란형이다. 거기에는 공기 역학적인 이유도 있다. 그 모양은 새의 몸에서 산도(産道)에 해당하는 통로인 배설강(排泄腔)을 따라 내려가는 험난한 여행을 훨씬 수월하게 해준다.

여성들은 암탉이라고 불려왔고, 영국에서는 새라고 불려왔지만, 우리 난자를 암시하는 것이라면 그 비유는 어리석은 것이다. 다른 포유동물의 난자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난자는 새의 알과 전혀 다르다. 물론 난자에는 알 껍데기가 없으며, 설령 난자 안의 액상 물질인 세포질이 당신의 손가락을 담글 수 있을 만큼 커서 건드릴 때 약간 난황처럼 느껴진다 해도, 진정한 난황도 없다. 그리고 인간의 난자는 배아를 먹일 양분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또 매달 배란기에 난자 하나가 성숙해져 나온다고 해도, 그것이 곰보 얼굴의 차가운 달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사람의 난자 


머라이어 버스틸로 박사는 정말 인생이 즐겁다는 듯이 이따금 웃음을, 내밀한 웃음을 머금는 키 작고 통통한 40대 중반의 여성이다. 그녀는 풍만하긴 하지만 뚱뚱하지는 않으며, 짧지도 길지도 않은 검은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다. 불임 전문의인 버스틸로는 인간 난자의 수확자이자 능숙한 조작자이며, 음침한 마술사이자, 현대의 데메테르〔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곡물 또는 대지(大地)의 여신〕이다. 그녀는 아기를 절실히 갖고 싶어하는 부부들을 도와주며, 그들에게는 여신이다. 하지만 그녀가 도울 수 없는 부부들도 있다. 그런 부부들은 IVF나 GIFT 같은 약자로 불리는 기도문을 한 번 외울 때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몇천 달러씩을 변기에 쏟아버리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읽고 듣고 다시 읽고 있는 현재 불임 치료의 현실이다. 그것은 아주 비싸며, 그렇게 비용을 들이고도 실패하곤 한다. 그렇지만 버스틸로는 우울한 기색 없이 즐겁게 엷은 웃음을 머금고 있다. 그녀는 활력과 태평스러움을 한꺼번에 보여주려는 듯하다. 직원들은 그녀와 함께 일하기를 좋아한다. 환자들은 그녀의 솔직하고 생색내지 않는 태도를 높이 산다. 나는 그녀를 만나자마자 거의 조건 없이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가 내게 뭔가를 상기시켜준 때가 한 번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의사이다. 듣기 싫은 소리를 재치 있게 돌려 말하는 활달한 목장 소녀이다. 그녀는 질 검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을 때면, 오래전에 자신이 한 교수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능글맞게 들려주곤 했다.

“그는 내게 말했죠. ‘질 치료를 하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배변을 보기 전에 샤워를 하는 것과 같아.’”

그녀는 질은 아주 더럽기 때문에 네 손을 댄다고 해도 거기에 이미 있는 것보다 더 안 좋은 것이 들어갈 리가 없다는 뜻이라고 말했다(이런 식의 구멍 격언은 4장에 나오는 늙은 남편들의 배변 덩어리 이야기이다. 질은 전혀 더럽지 않다. 정말로 부인과 의사의 신성하지 않은 귀에 대고 “선생님, 손 씻으세요” 하고 요구하는 게 너무 과한 것일까?).

나는 난자를 보기 위해 뉴욕의 마운트시나이 의대에 있는 버스틸로를 만났다. 많은 종의 난자를 보았지만, 사진으로 본 것 말고는 나 자신의 난자를 직접 본 적이 없다. 인간의 난자를 보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몸에서 가장 큰 세포이지만, 그래도 지름이 1밀리미터의 10분의 1에 불과하기 때문에 아주 작다. 아기의 머리카락으로 종이에 구멍을 하나 뚫을 수 있다면, 난자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난자는 본래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다른 포유동물의 난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난자는 어둠 속에서 만들어진다. 몇 겹으로 둘러싸인 내장 깊숙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 점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영리하고 살지고 세밀하게 주름이 진 뇌를 가지게 된 것도 어느 정도는 그러한 특성 때문이니까. 체내에서 착상되어 자라는 태아는 보호받으며, 보호받는 태아는 거대한 뇌가 충분히 자랄 수 있을 만큼 오랜 시간 마음껏 빈둥댄다. 따라서 우리는 알머리egghead〔대머리나 지식인을 뜻하는 속어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셈이다. 보이지 않는 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난자에서 튀어나온 전두엽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정자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정자 세포는 난자 부피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정도로 난자보다 매우 작으며, 광고 사진에서 볼 수 있는 형태와도 똑같지 않다. 그렇지만 겉으로 드러나고 공공연히 소비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정자는 기술 관음증의 대상이 되기 쉽다. 3백 년 전 안톤 반 레벤후크는 현미경의 원형을 발명한 뒤에 인간의 사정 액을 유리판 위에 바르고 그것을 자신이 만든 마법의 렌즈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남성들이여, 나는 여기서 접합자(接合子) 위주의 내 편견을 잠시 접어두고, 당신들의 정자가 확대해보면 정말로 장엄하다고 말하려 한다. 우리가 먼 과거에 편모가 달린 원시 생물이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인 정자는 어디로든 즉시 튀어 나가고 맴돌고 요동치는, 격렬하게 날뛰는 채찍 같은 꼬리가 달린 눈물 방울이다. 현미경을 통해 떠나는 매혹적인 모험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정액 한 방울은 학술적으로 더 익숙한 연못 더껑이 한 방울보다 훨씬 낫다.

여성의 몸은 세포 자살을 통해 난자들을 버릴지 모르지만, 순순히 난자를 내놓지는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난자를 볼까? 한 가지 방법은 난자 기증자를 찾는 것이다. 성인이기도 하고 광인이기도 하고 낭만주의자이기도 하고 용병이기도 한 여성,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버스틸로가 ‘건망증의 우유’라고 부르는 마취제의 통제 밑에 놓으면, 그녀는 자신의 몸이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 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베스 데로치는 자신의 배를 두드리면서 낭랑하게 외친다.

“부었다니까요! 호르몬으로 꽉 차 있어요! 나는 남편에게 말하죠. 거기 그대로 있어!”

그녀는 스물여덟 살이지만 5년은 더 젊어 보인다. 그녀는 한 출판사에서 관리 직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편집 분야로 옮기고 싶어한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길고 검고 제멋대로 양쪽으로 갈라져 있으며, 그녀는 다소 입을 크게 벌리고 웃어서 이빨이 다 보일 정도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내 이빨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요. 그것만은 안 돼요. 내 이빨은 정말 약하거든요.”

데로치는 말한다.

“나는 완전히 파산했어요. 약간 창피한 일이긴 하지만 나는 빚에 쪼들리고 있어요.”

그것이 바로 그녀가 이곳 마운트시나이 병원에 있는 이유이다. 그녀는 난자를 기증하기 위해 골반을 부드럽게 하고, 평상시에는 아몬드 크기인 난소를 호두 크기로 팽창시키고, 자신의 코를 건망증 우유에 담그기 위해 튜브를 낀다.

누군가가 번식 능력의 숭배 대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베스 데로치가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머리카락이나 손톱 조각은 성물함 속에 담긴 성인의 머리카락이나 손톱 조각처럼 부적으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난자 기증자로 나선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그녀는 대학원 시절에 두 차례 난자를 기증했고, 매번 29개 정도의 풍작을 거두었다. 지금 그녀는 다시 돌아왔다. 2,500달러의 사례금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여러 이유 중 하나일 뿐이다. 그녀가 난자 기증을 꺼리지 않는, 아니 심지어 즐기기까지 하는 다른 이유들이 있다. 그녀와 남편 사이에는 아직 아이가 없지만, 그녀는 엄마 역할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엄마처럼 군다. 그녀는 그들에게 겨울에 따뜻하게 입고 과일과 채소를 먹으라고 잔소리를 한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을 좋아하고 아기를 안아 재우는 것을 좋아한다. 그녀는 자신의 씨가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의 씨앗이 된다는 생각에 기뻐한다. 그녀는 자신의 생식 세포에 독점권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적 취향의 과학 소설 애독자인 그녀는 로버트 하인라인〔미국의 공상 과학 소설 작가. 공상 과학 소설 자체의 질을 높여, 새로운 가설에 근거한 사색적인 소설의 장르로 만드는 데에 공헌〕이 썼던 이야기를 내게 들려준다.

“그는 ‘당신의 유전자는 당신에게 속해 있지 않다’고 말했어요. ‘그것들은 인류 전체에 속해 있다’고요. 나는 정말 그렇다고 믿어요. 내 난자, 내 유전자, 그것들은 내가 지니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것들은 내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에요. 헌혈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이 관용적이고 거의 공산주의적인 생각에 비춰보면, 우리 모두는 하나의 거대한 유전자 풀에서 수영하는 자이거나 인간의 불멸이라는 강에서 나온 어부이다. 내 낚싯줄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다면, 아마 당신은 자신이 잡은 것을 내게 나눠줄 것이다. 그런 진심 어린 정직한 이유들 때문에 데로치는 자신이 사례금을 받지 않고서도 난자를 기증할 것이라고 말한다.

“세 번까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틀림없이 적어도 한 번은 했을 거예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많은 유럽 국가에서는 여성이 난자를 기증하고 사례금을 받는 것이 불법이며, 난자를 기증하는 사람 또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버스틸로는 최근 열린 한 생윤리학 회의에 참석했을 때, 그곳에 모인 의사, 과학자, 법률가, 지식인들에게 단지 호기심으로 난자를 기증할 사람이 있냐는 질문이 던져졌다고 말했다. 



"

베스 데로치는 난자를 기증하는 것을 헌혈과 같다고 생각한다.
난자가 공유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이 없지만,
난자 기증은 윤리적인 고민을 해야 할 질문이다.

"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죠. 나중에 친척이나 친한 친구에게는 줄 생각이 있다고 말한 사람이 둘 있었어요.”

데로치는 친척이나 친구에게 난자를 기증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난자를 받은 부부를 절대 만나지 않으며, 그 난자에서 어떤 아이가 나왔는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며, 그녀는 그 점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는 결과를 멍청히 생각하고 있지 않으며, 자신의 수수께끼 아이들을 놓고 공상을 하지도 않는다.

“나는 투자했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려 노력해요.”

그녀는 르네상스 시대의 성모 마리아처럼 차분하게 말한다.
나는 버스틸로에게 최상의 난자 기증자들, 즉 30대 초반이나 그보다 젊은 나이로, 번식 능력이 최고조에 달한 여성들이 그 시기에 가장 현금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잘된 일이라고 말한다. 난자 기증자는 피 같은 돈을 몇 푼 번다. 나와 만나기 3주 전에 데로치는 난자 방출 주기를 개시하는 뇌 내의 강력한 화학 물질인 생식샘자극호르몬 분비 호르몬gonadotropin-releasing hormone을 인공 합성한 제품인 루프론을 스스로 투여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동안 그녀는 밤마다 당뇨병에 사용하는, 가느다란 바늘이 달린 주사기로 자신의 허벅지에 주사를 놓았다.

그녀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거의 느껴지지도 않는다고 말이다. 나는 정말, 정말로 어느 누구나, 물론 나를 제외한 어느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우와 하고 감탄했다. 나는 늘 헤로인 중독에서 최악의 일은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거나 AIDS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바늘을 자기 몸에 찌르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으니까.

루프론 투여 뒤가 더 힘들다. 그녀는 이제 난소를 과잉 활성 상태로 만드는 배란 호르몬인 퍼고날과 메트로딘 혼합제를 투여해야 했다(퍼고날은 폐경기가 지난 여성들의 소변에서 우연히 분리해낸 물질이다. 그들의 몸은 월경 주기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 난소로부터 되먹임 작용이 없어서 아주 고농도의 배란 호르몬을 만들어낸다). 이 달콤한 혼합물을 조제하기 위해 그녀는 피하 주사기 속으로 색전증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공기 방울이 섞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집중해서 그 약을 빨아들여야 했다. 이때 그녀는 루프론을 투여할 때보다 훨씬 더 굵은 바늘을 사용해야 했다. 그것은 투여하는 양이 많고 더 고통스럽다는 의미이다. 데로치는 두 주일 가량 매일 밤 자신의 엉덩이 뒤쪽을 겨냥해야 했다. 그녀는 끔찍하지도 괴롭지도 않지만, 매달 하고 싶지는 않다고 시인했다. 이 괴롭지 않은 일이 끝날 무렵이 되면 배란의 마지막 단계를 촉진하기 위해, 데로치는 다시 무시무시하게 큰 피하 주사기를 통해 태반 생식샘 자극 호르몬human chorionic gonadotropin을 한 번 놓았다.

밤마다 주사를 놓는 이 기간에 그녀는 난소의 팽창 정도를 알려줄 소노그램을 찍기 위해 병원에 들락거려야 했다. 그녀는 다량의 액체로 몸이 불어났고 여기저기 뚝뚝 소리가 난다고 농담을 했다. 나와 이야기를 할 때쯤 그녀는 정상 체중을 넘어선 상태였다. 그녀의 두 난소는 지나치게 많이 집어넣은 오렌지 자루 같았고, 오렌지에 해당하는 난자들은 3주 동안의 호르몬 투여로 부자연스럽게 빨리 성숙했다. 정상적인 주기에서는 하나의 난자만이 난소 주머니에서 밖으로 밀려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 무렵 데로치는 올림픽 배란 주기 경기자가 되어 있었고, 난모 세포가 2~3년에 걸쳐 제공할 난자들이 한 달 사이에 몰려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그 2~3년을 상실했다는, 즉 그녀의 임신 능력이 어떤 식으로든 줄어들었다거나 사라졌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우리는 남아돌 만큼 많은 난자를 갖고 있으며, 회기 말에 다 쓰지 못한 예산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생각해보라. 펑! 따라서 전 세계의 의사 데메테르들은 단지 세포 자살을 통해 무(無)로 돌아갈 것들을 떼어내는 것뿐이다.

아무튼 번식 능력 숭배는 데로치의 가족에게 널리 퍼져 있다. 그녀의 자매들 모두 이미 여러 차례 아이를 낳았다.

“아기를 갖는 것은 그저 우리가 하는 일일 뿐이에요.”

데로치는 난소암에 걸릴 위험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일부 전문가들은 임신 촉진제를 사용하면 난소암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주장해왔다. 이 문제에 아직 결정적인 자료는 나와 있지 않으며, 모든 사례들은 난소암이 데로치가 쓴 난포 자극제들보다는 클로미드라는 약과 더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가족 중에 난소암에 걸린 사람이 있다면, 나도 더 염려를 했겠죠. 하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걱정하지 않아요. 어리석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아요.”

그녀는 수술대에 누워 있다. 의사들은 먼저 그녀의 호흡기에 산소를 공급하고 나서 마취제를 섞는다. 그들은 그녀에게 잠이 오는지 묻는다.

“음!”

그녀는 중얼거린다. 잠시 뒤 그녀는 달리의 시계처럼 축 늘어진다. 의사들은 그녀의 다리를 등자에 고정시키고 그녀의 생식기에 요오드를 끼얹는다. 요오드는 생리 때의 피처럼 그녀의 허벅지 안쪽 주름진 곳을 따라 흘러내려 수술대 위로 떨어진다. 버스틸로는 수술실로 달려오더니 손을 씻으며 배변과 질에 관한 농담을 한다. 어쨌든 그녀는 손을 씻는다. 그녀는 수술대 끝, 부인과 의사가 앉는 등자 옆자리에 앉아 몸의 장벽을 쉽게 뚫고 들어갈 준비를 한다. 조수들이 휴대용 초음파 장치를 수술대 위로 밀고 와서 버스틸로에게 딜도〔음경 모양으로 생긴 성구(性具)〕처럼 생긴 초음파 탐지기를 건넨다. 그녀는 탐지기에 탄력성 있는 고무 덮개를 씌운다.

“콘돔이랍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준비된 난자들을 그 주머니에서 빨아낼 장치에 바늘을 끼운다.

버스틸로는 데로치의 질에 그 요술 지팡이를 삽입해 자궁 경부 양편을 주머니처럼 감싸고 있는 질 관의 막다른 끝, 즉 두 개의 질 천장 중 한쪽까지 밀어 올린다. 바늘은 질 천장 벽을 관통해서, 복부의 내장 대부분을 감싸고 있는 기름기 많은 막인 골반 복막을 가로질러, 마침내 난소를 꿰뚫고 들어간다. 버스틸로는 초음파 화면을 지켜보면서 전체 추출 수술을 수행한다. 높은 진동수의 음파 변화를 가시화한 난소의 영상은 흑백으로 보인다. 화면의 위 오른쪽에 바늘의 모습이 나타난다. 난소는 부어오른 검은 난자 주머니, 즉 난포(卵胞)들이 들어 있는 거대한 벌집처럼 보인다. 각 난포는 지름이 2밀리미터쯤 된다. 데로치가 밤마다 성실하게 주사를 맞아 난포들은 모두 성숙한 상태이다. 초음파 화면은 난포들로 가득하다. 버스틸로는 화면에 눈을 고정시킨 채 끝에 바늘이 달린 탐침을 조작해 검은 벌집을 하나하나 찔러 그 난포의 모든 액체를 빨아들인다. 그 액체는 탐침 관을 따라 흘러나와 비커에 담긴다. 그 액체에 난자가 떠 있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것들은 거기에 있다. 난포에서 액체를 추출해내자마자, 그 주머니는 저절로 쭈그러들어 화면에서 사라진다. 몇 분 뒤 주머니는 다시 약간 팽창하는데, 그 안에는 피가 담겨 있다.

푹! 푹! 푹! 버스틸로가 너무나 빠르게 모든 난포를 찔러 진공 상태로 만드는 바람에 그 벌집은 아코디언의 움직임에 맞춰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주머니는 비워졌다가 피가 차면서 다시 불어난다. 푹! 푹! 푹! 그것은 지켜보는 사람에게 대신 상처를 준다. 나는 서 있었지만 불안해서 다리를 꼬고 싶어진다. 한 조수가 이 수술을 받는 여성들 중에는 마취제 없이 하자고 요구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해준다. 그들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 어느 순간 그들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왼쪽 난소의 성숙한 난포들을 깨끗이 비워낸 뒤, 버스틸로는 탐침을 왼쪽 질 천장으로 옮겨서 오른쪽 난소에서와 같은 일을 반복한다. 양쪽 모두 찔러서 빨아내는 데 걸린 시간은 10분 정도이다.

“좋아요, 끝났습니다.”

버스틸로는 탐침을 꺼내며 말한다. 떠나는 군대가 지르는 불처럼 데로치의 질에서 한 줄기 혈액이 흐른다. 간호사들이 그녀의 몸을 닦은 뒤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팔을 흔들어서 깨운다. 베스! 베스! 끝났어요. 다 끝났어요. 다 빼냈어요. 당신 유전자는 이제 공동 수영장에서 떠다니고 있어요. 곧 다른 여성이 그 수영장에 몸을 담그고 아기라는 세례를 받을 거예요.

발생학자인 캐롤-앤 쿠크는 실험실로 돌아와서 그날의 노획물을 분리하고 수를 센다. 스물아홉 개. 전에 베스 데로치가 두 번 했을 때와 똑같은 수확량이다. 이 여성의 포도밭은 열매가 많이 열린다! 쿠크는 난자, 베스의 포도를 생존할 수 있는 난자를 갖지 못한 여성의 남편 정자와 수정시킬 수 있도록 준비한다.

기증 받은 난자를 시험관 수정용으로 활용하는 분야는 1970년대에 그 방식이 처음 도입된 이래로 그다지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한 상태이다. 시험관 수정을 시도한 여성들 대부분은 인내와 출산 능력이 거의 한계까지 도달해 있다. 그들은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이다. 아직 전혀 모르는 어떤 이유들 때문에, ‘나이가 든’ 여성—내 동년배들뿐만이 아니라 80세가 되지 않은 누군가에게 그 표현을 쓴다는 것이 나는 불쾌하다—의 난자는 유연성과 튼튼함을 어느 정도 잃는다. 그들의 난자는 쉽게 성숙하지 않으며, 제대로 수정되지도 않고, 수정이 되더라도 젊은 여성의 난자처럼 자궁에 단단히 붙지 않는다. 나이 든 여성들은 대개 처음에는 자신의 난자로 시험관 수정을 시도한다. 그들은 자신의 유전체, 자신의 분자적 조상을 선호한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아기와 책은 거의 차이가 없다. 보통 둘 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관해 쓰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게 그들은 베스 데로치가 거쳐간 길, 몇 주에 걸쳐 호르몬을 주사하는 준비기를 거친다. 하지만 그들은 몇십 개의 난자가 아니라 아마 서너 개의 난자를 배출할 것이며, 그중에서 일부는 거의 숨을 쉬지 못할 수도 있다. 출산의 신들은 최선을 다한다. 그들은 실험용 접시에서 가장 건강해 보이는 난자와 상대의 정자를 결합시켜 배아를 만든다. 이틀쯤 지난 뒤 그들은 질 속으로 삽입해 자궁 경부를 지나 자궁 속으로 넣은 가느다란 관을 통해 액체 속에 떠 있는 세포 덩어리를 주입함으로써, 그 배아를 여성의 몸 속으로 돌려보낸다.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눈 깜짝할 순간에 그 장면을 놓치게 된다. 여성에게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잃는 것이기도 하다. 대다수의 환자들에게서 그 방법은 실패한다. 나이 든 여성이 자신의 난자로 시험관 수정을 해서 잉태한 아기를 출산할 확률은 12~18퍼센트이다. 당신이 암에 걸렸을 때 살아남을 확률이 바로 그 정도라고 말하면, 당신은 몹시, 몹시 의기소침해질 것이다.

나이 든 여성은 시험관 수정을 한두 번, 심하면 세 번까지 시도할 수도 있지만, 그때까지 자신의 DNA 수확물로 임신을 하지 못한다면, 아마 그녀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쯤 의사는 기증 받은 난자를 사용하라고 권할지 모른다. 젊은 여성의 씨를 나이 든 여성의 남편이나 연인이나 또는 남성 기증자의 정자와 결합시킨 뒤, 생긴 배아를 자궁에 착상시키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이다. 번식 측면에서 말하면 기증 받은 난자를 사용하면 40세의 여성을 21세의 여성처럼 만들 수 있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작동한다. 오, 여성이여, 그것은 제대로 작동한다. 시험관 조작 한 번에 아기를 출산할 가능성이 10퍼센트 대에서 갑자기 40퍼센트로 치솟을 정도로 말이다. 그 수치는 아기가 정말로 우는 소리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와인이 충분히 숙성하지 않았다면, 그 병과 상표까지도 넌더리가 나는 법이다. 그러므로 좌지우지하는 것은 난자이다. 미래를 설정하는 것은 자궁이 아니라 난자이다. 캐롤-앤 쿠크는 데로치의 난자 하나를 고해상도 현미경 밑에 놓는다. 그 현미경은 비디오 모니터로 영상을 보낸다.

“아름다운 난자네요.”

버스틸로가 말한다.


“그녀의 난자는 모두 아름답죠.”

쿠크가 덧붙인다. 그것들은 건강한 젊은 여성의 난자이다. 그것들은 빛이 날 수밖에 없다.

난자를 생각하기 위해 천체를 생각해보고, 날씨를 생각해보라. 난자의 몸은 태양이다. 그것은 태양처럼 둥글고 위풍당당하다. 그것은 몸에서 유일하게 공 모양을 이루고 있는 세포이다. 다른 세포들은 꽉 조인 상자나 잉크 방울이나 중앙에 구멍이 뚫리지 않은 도넛 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난자는 기하학자의 꿈이다. 그 형태는 의미가 있다. 공은 자연에서 가장 안정한 모양에 속한다. 당신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가보, 즉 우리의 유전자를 보호하고 싶다면, 그것들을 공 모양의 보물 상자 속에 묻어라. 진주와 마찬가지로, 난자는 몇십 년 동안 살며, 부수기 어렵고, 수정을 갈구할 때면 당당하게 난관을 따라가는 여행에 나선다.

캐롤-앤 쿠크는 그 난자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준다. 화면에서 은백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구 가장자리에는 거품을 인 생크림이나 아이들이 하늘을 그린 그림에 흔히 나타나는 보풀거리는 흰 구름들처럼 보이는 것이 붙어 있다. 이것은 사실 구름을 닮았다고 해서 난자 구름층cumulus이라 한다. 난자 구름층은 난자를 천체와 비슷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특징인 부챗살관corona radiata과 결합하는, 세포 밖에 있는 끈적끈적한 물질 덩어리이다. 태양의 코로나처럼 난자의 코로나도 중앙의 난구(卵球)에서부터 꽤 멀리까지 후광을 비추고 있다. 그것은 여왕이 쓰는 왕관이며, 뻗어 나온 불꽃들과 가지들은 난자가 정확히 구형이라는 것을 강조해준다. 부챗살관은 보모 세포nurse cell라고 하는 세포들이 성긴 그물처럼 얽혀 있는 것이며, 난자를 품고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인간의 수정 과정
 

또 거드름을 피우면서 난자의 바깥 층을 향해 헤엄쳐 오는 작은 편모충들, 즉 정자를 위한 활주로나 승강장 역할도 한다. 난자 세포의 바깥에 있는 두꺼운 층은 투명대zona pellucida라 한다. 이 투명한 띠는 포유동물 난자의 알 껍데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투명대는 당과 단백질로 된 덩어리로 자기장처럼 빈틈없이 두껍게 난자를 둘러싸고 있다. 그것은 정자가 지형을 탐사할 수 있도록 초대하지만, 그 정자가 적합하지 않을 때에는 물리친다. 그것은 누가 친구이며 누가 낯선 자인지 판단을 내린다. 투명대는 자연적인 종 분화가 시작되는 장소, 생물 다양성의 모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지닌 당들의 구조를 약간 변화시킴으로써, 인연을 맺은 부부를 성격 차이로 갈라서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침팬지의 유전자와 우리 유전자는 99퍼센트 이상 똑같고, 침팬지 정자 세포의 DNA를 인간의 난자 속에 직접 주입하면, 비록 윤리적으로 혐오스럽겠지만 계속 살아 있는 잡종 배아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유성 생식에 수반되는 자연적인 제한 조건들 하에서, 침팬지의 정자는 인간 난자의 투명대 방어 벽을 뚫고 들어갈 수 없다.

또 이 띠는 정자가 하나 이상 난자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준다. 수정이 이루어지기 전에 띠의 당들은 개방적이고 친절하며, 다가오는 정자의 머리에 비슷한 당이 들어 있는지 탐색한다. 정자의 머리가 닿으면, 띠는 정자와 융합되어, 거의 말 그대로 딱딱하게 굳는다. 띠를 구성하는 당들은 안쪽으로 방향을 튼다. 난자는 물리도록 배를 채운 상태이다. 즉 난자는 더 이상의 DNA를 원하지 않는다. 띠의 문턱에 서 있던 정자들은 곧 죽는다. 하지만 그 띠의 임무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에스키모인들이 입는 두껍고 튼튼한 모피 옷이며, 막 형성된 새로운 배아가 천천히 난관을 따라 내려가 자궁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보호해준다. 수정된 지 일주일쯤 지나 배아가 자궁 벽에 붙을 능력을 갖추고 난 뒤에야 투명대는 터져 흩어져서 배아의 혈관이 어머니의 혈관과 연결될 수 있도록 한다.


부챗살관, 난자 구름층, 투명대는 난자가 아니라 난자의 바깥에 있는 부속품들이다. 난자 자체는 진정한 태양이자 생명의 빛이며, 이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난자는 몸에서 보기 드문 세포이며, 능력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난자 외의 세포들은 완전히 갖춘 유전자로 시작해서, 완전한 존재, 즉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낼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앞에서 포유동물의 난자는 배아의 발달을 지탱해줄 양분들이 없기 때문에 새의 난자와 다르다고 말했다. 포유동물의 배아는 스스로 모체의 순환계에 결속되어 태반을 통해 양분을 얻어야 한다. 하지만 유전적인 측면에서 보면 포유동물 난자의 세포질은 하나의 완벽한 자족적인 우주이다.

커스터드 같은 그 세포질의 어딘가에 유전체가 스스로 자신의 목적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그 종(種)이 지금까지 말해왔던 모든 이야기를 말할 수 있게 해주는 단백질이나 핵산 같은 인자들이 있다. 이 모성 인자들이 무엇인지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그들은 선정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실력을 보여왔다. 1997년 스코틀랜드의 과학자들이 어른 양을 복제해 돌리라는 이름의 새끼 양을 탄생시켰을 때, 세계는 인간 클론과 인간 수펄과 신이 한 말을 놓고 와글와글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아무리 손을 쥐어짜고 있어도 인간 복제 전망을 둘러싼 윤리적 딜레마는 거의 해결되지 않았다. 그 딜레마가 있다고 했을 때 말이다. 아무튼 돌리의 귀여운 얼굴은 난자가 얼마나 경이로운 존재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난자가 클론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과학자들은 어른 양의 젖샘에서 세포를 떼어낸 뒤에 그 세포의 유전자 창고인 핵을 빼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바로 그 어른 유전자였다. 그들은 다른 기관에서 핵을 얻을 수도 있었다. 동물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세포에는 똑같은 유전자가 한 벌씩 들어 있다. 젖샘 세포와 췌장 세포와 피부 세포가 다른 점은 그 속에 든 몇만 개의 유전자들 중에 활동을 하는 것과 잠자고 있는 것이 세포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난자는 민주적이다. 그것은 모든 유전자가 목소리를 내도록 한다. 그래서 그 과학자들은 양의 난자 세포를 떼어내서 핵을 제거했다. 즉 난자의 유전자를 없앰으로써 난자의 몸인 세포질만, 난황이 아닌 난황만을 남겨두었다. 그들은 난자의 핵이 있던 자리에 젖샘 세포의 핵을 집어넣은 뒤, 그 기이한 키메라, 인공 제작한 미노타우로스를 다른 양의 자궁에 착상시켰다. 그 난자의 몸은 어른의 유전체 전체를 부활시켰다. 그것은 석판에 새겨져 있던 기록들을 깨끗이 지우고, 헌신적인 젖샘 세포에 묻은 젖 얼룩들을 씻어내고, 그 낡은 유전자를 다시 새로 태어나게 했다. 난자의 몸 속에 있던 모성 인자들은 그 유전체가 잉태라는 광적인 장관을 다시 펼치도록, 모든 기관과 모든 조직과 완전한 양을 재창조하도록 해주었다.

몸의 세포들 중 난자만이 몸 전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간 세포나 췌장 세포를 자궁에 넣는다고 해도, 아기가 자라나지는 않는다. 그 세포들도 새로운 존재를 만들 유전자를 지니고 있지만, 그럴 능력은 없다. 따라서 난자가 그렇게 큰 세포라는 점이 약간 놀라울 것이다. 그것은 발생(發生)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아마도 난자의 분자적 복잡성은 우리가 왜 어른이 된 뒤에 새로운 난자를 만들어낼 수 없는지, 우리가 왜 평생 지닐 모든 난자들을 미리 갖고 태어나는지, 남성들이 왜 평생에 걸쳐 새로운 정자를 계속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과학자들은 난자와 정자의 차이를 크게 강조하곤 한다. 남성 생식 세포의 대량 생산과 지속적인 생산을 여성 난자의 한정된 수와 퇴화하는 특성과 대조해왔다. 그들은 정자가 쉴새 없이 생산된다고 말한다.

“남성의 심장이 한 번 고동칠 때마다 천 마리의 정자가 만들어진다!”

랠프 브린스터는 1996년 5월에 《워싱턴 포스트》에 그렇게 떠벌렸다. 그는 여성은 자신이 지닐 모든 난자를 갖고 태어나며, 그난자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늙어갈 뿐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복제할 수 있는 능력 자체는 기립 박수를 받을 이유가 되지 못한다. 세균은 20분마다 수가 두 배로 늘어난다. 많은 암 세포들은 처음 생긴 종양으로 그 환자가 죽은 뒤에도 실험용 접시에서 계속 분열을 계속할 수 있다. 아마 난자는 어른이 되어서는 다시 보충되지 않는 뉴런과 비슷할 것이다. 난자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난자는 파티 계획을 짜야 한다. 정자는 단지 나타나기만 하면 된다. 물론 중절모를 쓰고 연미복 자락을 휘날리며 말이다.



*

서점가기


알라딘 : http://goo.gl/KKV97Z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여성의 몸과 마음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퓰리처상 수상 작가 나탈리 앤지어
생물학 이론을 바탕으로
여성의 몸과 마음을 도발적으로 해석한 책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를 저술하여 전미도서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가 단순히 여성의 건강한 몸을 위한
설명서라든가, 여성의 인권을 말하는 페미니즘 도서였다면,
그런 상을 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 책은 생물학을 바탕으로
여성의 몸과 마음에 대한 편견을 깨고
여성의 몸과 마음으로 어떤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저술된 도서입니다.

과학이 많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여성에 대한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시선들이 존재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남자로부터 여자가 태어났고,
그렇기 때문여 여자는 뭔가 결핍되어 있다는 시선이죠.


"남자에게서 여자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 창 2장 21~24절



더불어, 남성들이 여성들을 바라보며 품는
잘못된 성(性)적 상상도 있죠. 

여기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여성의 신체가 남성의 성(性)적 상상을 해소하기 위한
비밀스런 마법사는 아니라는 거죠.

여성이 자신의 몸을 통해 어떤 기쁨을 느낀다면,
그건 남성 때문에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고유한 기쁨이 있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의 기쁨을 말할 때,
남자와 비교할 필요가 필요가 없습니다.

여자만의 특별하고 신성하고
축복받아야 할 부분이 있으니까요.

오히려 그런 부분을 남자에게 잘 알려줘야 겠죠.
'엉뚱한 생각하지 말라'고요.

만약 공감이 되신다면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 연재 1화.
<빛 속으로>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자매들이여, 우리가 컵과 병이며 용기와 상자인가?
우리는 자궁이라는 거미줄 안에 웅크린 채 천체를 짜는 거미인가, 
아니면 은밀한 지하에 살고 있는 눈먼 거미인가?
우리는 그렇게 내밀하고 신비스러운가?
헤카테여, 그렇지 않다!





들어가는 말

빛 속으로




이 책은 여성의 몸을 찬양하는 책이다. 여성의 신체 구조와 생화학과 진화와 웃음을 말이다. 이 책은 생물학적 결정론이라는 오물 속으로 빠지지 않으면서 여성이라는 존재의 생물학을 고찰할 방법을 찾으려고 시도한 사사로운 책이다. 이 책은 우리가 기존에 여성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들, 이를테면 자궁, 난자, 유방, 월경, 그리고 그 대단한 클리토리스 같은 것들과 활동, 힘, 공격성, 분노처럼 여성과 연관시키지 않는 것들을 다룬다.


이 책은 환희를 다룬 책이다. 몸의 아름다운 부위들, 육체에 단단히 뿌리를 박은 환희를 말이다. 여성의 몸은 디오니소스적 존중을 받아야 마땅하며, 나는 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가 가장 잘 알고 가장 사랑하는, 모범이 되는 인물들과 괴짜들을 동원하려 한다. 나는 우리가 여성적이라고 부르는 부위들을 작업 지도로 그리고, 그 바탕에 깔린 원동력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과 의학을 불러내려 한다. 나는 우리의 내밀한 지리학의 기원을, 말하자면 왜 우리의 몸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으며 왜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지, 왜 매끄럽고 둥근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꼴사납고 서툰 행동을 하는지를 규명하기 위해 다윈과 진화론에 의지하려 한다. 나는 특정한 신체 부위나 신체적 특징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찬사를 받아왔는지 파악하기 위해 역사와 미술과 문학을 뒤지려 한다. 나는 우리의 충동과 행동에 대한 가능한 시나리오들을 쓰기 위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경이로울 정도로 확대된 유전자, 뇌, 호르몬, 발달 지식 중에서 차별적이고 충동적으로 추려내고 골라내려 한다. 나는 유방의 기원, 오르가슴의 목적, 어머니를 향한 애달픈 사랑, 여성들이 거의 똑같은 열정으로 서로를 필요로 하고 거부하는 이유 등을 다룬 관념들과 이론들을 버리려 한다. 이런 이론들 중에는 다른 이론에 비해 불분명한 것이 있다. 나는 인류가 탄생한 이유가 그저 우리 여성 조상들이 난소가 죽었을 때 함께 죽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크리스턴 호크스의 주장처럼, 연구 과정에서 나를 머뭇거리게 만든 재미있고 현혹적인 이론들을 일부 제시하려 한다. 또한 나는 여성 ‘본성’의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강한, 즉 모순을 지닌 이론들은 버릴 것이고, 나머지 이론들은 신부에게 쌀을 던지듯이 행운과 격려와 희망과 무질서를 위해 내던지려 한다.


디오니소스적 몸 상태를 얻기가 쉽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오랜 세월 동안 여성의 몸을 혐오스럽다고 여겨온 탓이다. 여성의 몸은 지나치게 과장되어왔거나 철저히 무시되어왔다. 그것은 제2의 성, 초벌 원고, 불완전한 성, 미리 규정된 성, 위안거리, 서큐버스〔꿈속에서 남자의 정액을 훔쳐낸다는 여성형 몽마(夢魔)〕, 남성을 파멸시키는 것으로 여겨져왔다. 우리는 음탕하고 정숙하고 야수 같고 천사 같다. 우리는 원하지 않는 태아를 가진 것보다 훨씬 더 부조리한 은유들을 갖고 태어난다.


하지만 여성인 우리는 이 중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쓰레기인지 알고 있다. 잔혹하다는 면에서 아주 산뜻하고 정교하며 거의 비위를 맞추는 듯하지만, 그래도 결국 쓰레기이다. 우리는 남성을 사랑할 수도 있고, 남성과 함께 살 수도 있지만, 그들 중에는 우리와 우리의 몸과 우리의 심리를 터무니없이 부정확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성의 내밀한 곳에 관한 신화를 예로 들어보자. 남성들은 우리의 몸을 쳐다보지만, 우리의 외부 생식기를 쉽게 볼 수 없다. 편리한 삼각형 털가죽이, 즉 치골(恥骨)에 놓인 무화과 나뭇잎이 외음부의 윤곽을 보일 듯 말 듯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으로 남성들은 부드러운 털과 바깥 주름으로 된 현관을 뚫고, 더욱 깊숙이 감추어진 내부 생식기인 질이라는 신성한 본당에 도달하기를 갈망한다. 따라서 여성이 내면과 융합된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남성들은 볼 수 없는 것을 원하며, 따라서 그들은 우리가 아마도 새치름하게 자신의 해자(垓子)를 기쁘게 생각한다고 가정한다. 여성은 그릇이자 단지이자 동굴이자 사향 냄새 풍기는 정글이다. 우리는 암흑의 신비이다! 우리는 숨겨진 습곡이자 제1의 지혜이며, 언제나, 언제나 생명을 배고 생명을 낳았다가 다시 생명을 자신의 축축한 어둡고 신비한 주름 속으로 빨아들이는 자궁이다. 존 업다이크는 이렇게 썼다.


따라서 이 제1의 근원으로 돌아간 남성의 성은 존재의 샘에서 물을 마시고 

사향 냄새 풍기는 영역으로 들어가며, 그곳에서는 신화상으로 위가 아래이며 죽음이 삶이다.


하지만 자매들이여, 우리가 컵과 병이며 용기와 상자인가? 우리는 자궁이라는 거미줄 안에 웅크린 채 천체를 짜는 거미인가, 아니면 은밀한 지하에 살고 있는 눈먼 거미인가? 우리는 그렇게 내밀하고 신비스러운가? 헤카테〔그리스 신화에서 천상과 지상, 지하계를 다스리는 여신〕여, 그렇지 않다! 남성들과 별 차이가 없다. 사실 남성들은 스스로를 외면화하여 자신들의 몸 너머의 세계로 밀어 넣고 그곳에서 빼낼 수 있는 듯이 보이는 페니스를 갖고 있지만, 페니스가 그들에게 주는 감각은 클리토리스가 우리에게 주는 감각과 마찬가지로, 근사하고 내면적이며 포괄적인 것이다. 발가락 소유자의 성별이 어떻든 간에 발가락조차도 오르가슴을 느끼지 않는가? 남성의 정소(精巢)는 노출되어 있는 반면, 여성의 난소(卵巢)는 엉덩이뼈 맨 아래쪽에서 약간 올라온 안쪽에 갇혀 있다. 하지만 두 기관은 자신들의 산물을 방출하고 내부적·내분비학적, 또한 번식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남성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보편 정신이라는 우화에 사로잡힌 채 이상 속에 살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우리는 물론 남성들도 우리 내부의 신체가 매순간에 무엇을 하는지, 즉 간과 심장과 호르몬과 뉴런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모든 강력하고 내밀한 유기 활동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결코 남성이나 여성이나 어느 누구에게든 신비스런 분위기를 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췌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수수께끼이다.


심지어 여성이 지하 마법사라는 개념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사건인 임신 동안에도, 그 어머니는 자신의 위대한 암흑 마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때가 있다. 임신 말기에 머리가 몽롱해서 앉아 있을 때 내 아기가 뱃속에서 쉴새 없이 꼼지락거리던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아기가 행복한지, 불안한지, 지루한지는커녕, 발로 차는지, 팔꿈치로 찌르는지, 탄력 있는 양막에 머리를 들이박는지도 전혀 몰랐다. 양수 검사를 하기 전에도, 나는 여성적인 것인지 모성적인 것인지 파충류적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직관으로 태아의 성(性)을 파악했다고 확신했다. 진정한 본능적인 감정이었는데, 그것은 소년처럼 툴툴거렸다. 나는 연한 감청색을 띤 난자 꿈을 꾸다가 그 상징이 지닌 생경한 의미에 당황해서 깨어났다. 적어도 통상적인 해몽에 따르면, 그것은 엄마가 사내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양수 검사 결과는 달랐다. 그는 여자였던 것이다.

여성의 몸을 신비와 성스러운 내밀한 공간과 같은 차원에 놓으면, 온갖 어리석은 생각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우리는 밤과 대지는 물론 오래된 할리우드 뮤지컬에 나오는 신나는 무도회처럼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순환성을 그토록 능숙하게 따르는 달과도 연관을 맺게 된다. 우리는 배란과 함께 차고, 피와 함께 기운다. 달은 우리를 끌어당기고, 우리의 자궁을 당기고, 생리 때 복통까지 안겨준다. 친애하는 귀부인들이여, 보름달이 뜨는 밤에 울부짖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지는 않는가? 아마 그럴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보름달은 너무나 아름답다. 수평선 근처에서 젖이 흐르는 젖가슴처럼 약간 흐릿하게 번져 있을 때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기쁨에 젖어 울고 싶은 이런 욕망은 탐폰을 사야 할지 여부와 거의 관계가 없다. 사실 우리 중 대부분, 말하자면 생리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생리 주기가 달 순환 주기의 어느 시기에 해당하는지도 잘 모른다. 그러나 과장 섞인 주장들은 떨쳐내기가 쉽지 않고, 우리는 여성을 식품 용기의 성분 표시처럼 지겨울 정도로 교묘하게 묘사한 말들과 계속 마주친다. 카밀 패글리아가 《성적 페르소나》에 쓴 것처럼 말이다.


자연의 주기는 여성의 주기이다. 생물학적 여성성은 같은 지점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순환 반복의 연속이다. 여성은 자연의 순환을 초월하거나 그 역사에서 달아나는 꿈을 꾸지 못한다. 여성 자신이 그 순환이니까. 그녀의 성적 성숙은 차고 기우는 주기를 가진 달과의 혼인을 의미한다. 고대인들은 여성이 거절할 수 없는 약속 시간이 표시된 자연의 달력에 매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유 의지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녀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받아들이는 것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녀가 모성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자연은 그녀에게 출산 법칙이라는 경직된 야만적인 리듬을 멍에로 씌운다. 월경 주기는 자연이 원하기 전까지는 끌 수 없는 자명종이다. 달, 월, 월경. 그것은 같은 말이자 같은 세계이다.


아, 그렇다. 어원은 때로 진리의 심판자이다.
나, 그리고 아마도 당신들, 나의 자매들이 오래전에 끄집어내서 갈기갈기 찢어 불태웠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구린내 나는 진부한 표현들이 최근에 부활한 것을 보면서 여성들은 너무나 놀랐고, 사실상 미칠 지경이다. 오랫동안 생물학과 진화를 다룬 글들을 읽고 써온 나는 ‘과학’이 당나귀 꼬리처럼 우리의 그녀라는 과녁에 꽂힌〔눈을 가리고 당나귀나 말 그림에 꼬리를 다는 놀이〕 그 자리에 경직된 현실주의 담론이 풀칠되는 방식에 솔직히 신물이 난다. 나는 여성이 그 모든 낡은 헛소리들과 실제로 어떻게 같은가를 말하는 진화심리학이나 신다윈주의나 성(性)생물학 관련 책들을 읽기가 싫증이 난다. 우리가 남성들에 비해 미적지근한 성적 충동을 갖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일부일처제에 더 목말라하며, 냉엄한 성 투기장의 바깥에 있으며, 성취와 명성에 비교적 관심이 없으며, 행동하기보다는 그냥 있는 것을 더 좋아하며, 조용하고 자족적인 본성을 갖고 있으며, 더 ‘다정다감’하며, 수학적 능력이 떨어지는 등 흐리멍덩한 크로마뇽인 조상들이 갖고 있었을 기타 등등의 특징을 보여준다는 책들 말이다. 나는 진화적 설명이 어떻게 그런 것들을 여성의 본성이라고 말하는지, 어떻게 우리가 그 이야기들을 고지식하게 꿋꿋하게 웃으면서 마주 대해야 하는지 듣기가 지겹다.


나는 나의 페미니스트적 여성 옹호 신념이 ‘현실’을 보고 ‘사실’을 인식하는 데 장애가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로 지겹다. 나는 동물성을 사랑하고, 생물학을 사랑하고, 몸, 특히 여성의 몸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지겹다. 나는 뇌가 침울해지거나 거만해질 때 몸이 뇌를 정신차리게 만드는 것을 사랑한다. 하지만 타고난 여성성이 어떻다고 현재 떠들어대는 이야기들 중에는 너무나 빈약하고 불완전하고 부정확하며, 너무나 놀랍게도 실제 증거가 전혀 없어서 나만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여성들에게도 거짓말처럼 들리는 것들이 많다. 그 여성들은 과학이 자신들에게 말하는 것 그리고 자신들에 관해 말하는 것을 대개 무시한다.


그런 한편으로 다윈주의와 여성다움의 생물학적 견해에 반대하는 표준 주장들도 몸, 아니 적어도 몸이 행동에 미친 영향을 부정하는 태도에 근거를 두고 선언되곤 하므로, 반드시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몸에 의지하지도 이따금 몸으로부터 몇 가지 정보를 얻는 것조차도 하지 않은 채, 우리의 삶을 통해 심리영성적으로 재생할 수 있는 순수한 정신, 순수한 의지인 것처럼 본다. 다윈주의와 생물주의를 비판해온 사람들 중에는 슬프게도 대개 나 스스로 끼려 애쓰고 있는, 고매하고 반드시 있어야 할 시민들인 페미니스트와 진보주의자들이 많다. 알다시피 수동적인 여성이라는 신화를 공격하거나 남녀의 수학 재능에 어찌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들을 공격할 때처럼, 그 비판가들의 비판은 때로 정당하다.


그렇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뿐일 때, 그들은 실망시킨다. 그들은 결점을 집어내고 투덜거리고 거부한다. 호르몬은 중요하지 않다, 욕구는 중요하지 않다, 냄새와 감각과 생식기도 중요하지 않다. 몸은 결코 운전사가 아니라 탈것일 뿐이다. 모든 것은 배우고, 모든 것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모든 것은 문화적 조건 형성의 결과이다. 또 비판자들은 인간이 특수하다는, 즉 아마 더 나을 수도 있고 더 나쁠 수도 있겠지만 진화의 다른 수공예품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암묵적인 전제를 갖고 일한다. 그들은 다른 종을 연구해봤자 우리 자신에 관해 배우는 것은 거의 없으며, 특히 우리 여성들은 잃을 것이 많다고 한다. 어쨌거나 우리가 실험용 암컷 생쥐에 비교됨으로써 언제 혜택을 받은 적이 있었나? 사실 우리는 다른 종을 연구함으로써 우리 자신에 관해 꽤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한다. 당신이 다른 동물들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행동 속에서 당신 자신의 단편들을 보지 못한다면, 당신은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다. 그렇지 않을까?


나로 말하자면, 다른 동물들로부터 배우고 싶어하는 쪽이다. 나는 초원의 들쥐에게서 가능한 한 친구들과 꼭 붙어 자고 서로 사랑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불변의 논리를 배우고 싶다. 나는 빈둥거리는 일에 전문인 내 고양이들에게서 숙면을 취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나는 우리의 보노보 자매들인 피그미침팬지에게서 생식기끼리 문지르는 법 외에 논쟁을 평화롭고도 유쾌하게 해결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그리고 나는 수컷들이 더 크고 더 강함에도 불구하고, 보노보들이 수컷에게 방해받지도 않고 심지어 시달리는 일이 거의 없이 서로 붙어 다니는 암컷들에게서 자매애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싶다. 여성들이 갖은 수를 써서 성폭력, 아내 학대, 강간 같은 문제를 대중의 눈앞에 그리고 의회 앞까지 끌고 온 것은 끈질기고 조직적인 자매애적 활동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었던 일이며, 보노보 암컷들은 이미 오래전에 자신들의 원시적인 인식 방식을 통해 그 모든 것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나는 우리가 다른 종, 우리의 과거, 우리의 일부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믿으며, 그것이 바로 내가 이 책을 여성성의 과학적 환상곡으로 쓴 이유이다. 우리는 과학에게 쉽게 학대당할 수 있는 만큼, 과학을 우리의 목적에 맞게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을 고양시키거나 즐겁게 하기 위해 과학을 사용할 수 있다. 계통학, 발생학, 유전학, 내분비학 등 이 모든 것을 그러모으는 나는 뜨내기 협잡꾼이다. 나는 여성의 염색체, X염색체라고 불리는 거대한 염색체를 샅샅이 뒤지고, 그것이 왜 그렇게 큰지, 그것이 어떤 눈에 띄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사실 지니고 있다) 묻는다. 나는 여성들의 생식기는 왜 그런 식으로 냄새를 풍기는지 묻는다. 나는 수유, 월경, 사춘기, 폐경기 등등 여성 생애의 특정 시기에 일어나는 화학적 변화들을 탐구하고, 각 시기가 어떻게 단조로운 신체의 항상성을 파괴하여 선명함, 즉 감각을 예민하게 할 수 있는지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닫힌 계가 아니라 지역 사회라는 용액 속에 떠 있는 것이므로, 몸이 어떻게 외부에서 오는 화학 신호들을 빨아들이며, 세계를 흡수하는 그 행동이 어떻게 우리의 행동을 뒤흔드는지, 말하자면 영감이 어떻게 계시가 되는지 묻는다. 이 책은 대체로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난자라는 치밀하고 가시적인 것에서 사랑이라고 부르는 몹시 달콤한 감각의 늪으로 나아간다. 전체적으로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부분은 몸의 구조, 우리 해부 구조의 서술 대상들을 다루고, 뒷부분은 몸의 체계, 즉 호르몬과 신경처럼 우리 행동과 열망의 토대가 되는 것들을 다룬다.


나는 이 책이 담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몇 마디 하고 싶다. 이 책은 성 차이의 생물학, 이를테면 남성과 여성이 얼마나 비슷하고 다른지 같은 것을 다루고 있지 않다. 이 책은 필연적으로 남성과 수컷의 생물학을 많이 참조한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타자와 비교하는 방법을 통해 우리 자신을 정의하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타자는 당연히 남성이다. 그렇지만 남녀가 행복한 사건이나 쇼핑 목록을 떠올릴 때 뇌가 반짝이는 부위가 서로 다르다거나, 그런 차이들이 당신이 서로의 관계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싶어할 때 그가 하키 경기를 보고 싶어하는 이유가 될지 모른다는 식의 연구를 깊이 탐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학술적인 적성 검사 점수로 남녀를 비교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쪽 성이 후각이나 방향 감각이 나은지, 천성적으로 남에게 방향을 묻지 못하는지도 묻지 않을 것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이 자신들이 상정한 남녀의 번식 전략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내놓은 주장들을 일부 규명하고 있는 18장에서도 나는 성 차이를 둘러싼 논쟁보다는 여성의 본성을 보는 진화심리학의 빈약한 관점에 도전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즉 이 책은 두 성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의 최전선에서 보내온 책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여성을 다룬 책이다. 그리고 비록 여성들뿐 아니라 남성들도 이 책의 독자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지만, 나는 이 책의 평균에 해당하는 독자가 여성gal이라고 가정하고 쓸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내키는 대로 gal이라는 단어를 쓸 것이다. 이유는 그 단어를 내가 좋아하고, 모든 증거와 상관없이 그 단어가 곧 다시 유행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이 책은 실용적이지 않다. 이 책은 여성 건강의 지침서가 아니다. 나는 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나 정확성을 기했지만,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에서는 내 견해를 고집했다. 에스트로겐이 그 예이다. 이 호르몬은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이다. 그것을 찬미한 장에서 보여주려 했듯이, 에스트로겐은 한 편의 교향시이다. 하지만 에스트로겐은 한쪽에 삶과 뇌 기능을 간직하고, 다른 한쪽에 죽음을 간직한 야누스의 얼굴을 한 호르몬일 수도 있다. 유방암의 근원이 무엇이든 간에, 그 병은 에스트로겐을 매개로 할 때가 종종 있다. 따라서 나는 여성에게 할당된 몫만큼 그것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에 기뻐하긴 했지만, 그것을 보충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절대 피임약을 먹지 않으며, 적절한 지면을 통해 말한 바 있지만 에스트로겐 대체 요법도 거부한다는 생각을 절대 바꾸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모든 흑인 여권 운동가들을 부화시킨 책이자, 결코 어설프게 모방해서는 안 될 놀라운 선구적인 저서인 《우리의 몸, 우리 자신》의 부산물이 아니다.


이 책은 ‘여성을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루고자 한다. 하지만 나는 집어넣지 않은 블라우스 자락처럼 펄럭거리는 내 편견과 인상과 욕망을 통해 서투르고 색다르게 여성성이라는 주제의 변죽을 울릴 수밖에 없다. 물론모든 여성은 자신이 주는 것들과 받는 것들을 바탕으로 삼아 자신을 여성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나는 몸이 어떻게 그 대답의 일부인지, 의미와 자유로 나아갈 길을 가르쳐주는 지도가 되는지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하버드 의대의 메리 카슨은 생물학적 지식을 활용해 우리의 심리적 상처를 치료하고, 두려움을 이해하며, 우리가 가진 것들의 대부분과 우리를 소유하고 우리를 사랑할 사람들의 대부분을 만들어내는 것을 ‘해방 생물학’이라고 불렀다. 탁월한 표현이다. 우리는 해방을, 영속적인 혁명을 원한다. 여태껏 우리가 살아온 궁전의 문 앞보다 봉기를 일으키기 더 좋은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

서점가기


알라딘 : http://goo.gl/KKV97Z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