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갈매기는 수컷과 암컷이
똑같이 생겼다.
먹이를 위한 난투극을 벌이는
새들 중에
암컷도 틀림없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암컷들도 먹어야 하고,
썩은 고기를 먹는
청소 동물의 생활은
가혹하기 때문이다.



3

늑대의 울음과 하이에나의 웃음

테스토스테론과 여성



당신이 소녀인 적이 있었다면, 당신은 소녀가 되기 위해 맨 처음 할 일이 소녀 집단 내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것임을 안다. 그리고 집단을 이룬 소녀들은 별개의 요소들이 모여 만들어진 조니 미첼〔캐나다 출신의 싱어 송 라이터. 포크 음악을 기반으로 재즈, 블루스, 아방가르드까지 표현해낸다〕의 선율 같은 것이 아니다. 집단을 이룬 소녀들은…… 뭐랄까, 공격적이다. 그 말이 소년들에게 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고 있긴 하다. 물론 소녀들이 공격적인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살아 있지 않은가. 그들은 영장류이다. 그들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다, 소녀들은 바비 인형을 갖고 놀기를 좋아할지 모르지만, 방향이 다르다. 아가씨, 이런, 여기 쓰레기통에 네 치과 의사 바비 인형이 있네. 벌거벗고 머리가 깎이고 젖가슴에 이빨 자국이 나 있는 인형이 말이야.


당신이 소녀이거나 소녀인 적이 있었다면, 당신은 소녀들이 공격적이라는 것을 안다. 이것은 함무라비 법전만큼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캔디랜드 광고에 나오는 소녀들은 전혀 공격적이지 않다. 사실 그들은 해가 갈수록 더 감상적으로 변하고 있다. 생물학 이론이라는 초원을 달리고 있는 소녀들도 전혀 공격적이지 않다. 아니, 그들은 사회 지향적이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고, 상호 작용을 하고, 관심을 기울이고, 붙임성 있다. 그들은 당신이 텔레비전에서 보는 벨체 아기 인형과 함께 사고 싶은 친구들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상냥한 여성성이 유전된다는 사실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진취적이고 공격적인
여성의 모습을 사회에서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1997년 《네이처》에 실린 기사를 보자. 그 영국 연구자들은 X염색체가 둘 있는 대다수 소녀들과 달리 하나만 있는 터너 증후군 소녀들을 연구했다. 그들은 터너 증후군 소녀들의 사교적 능력이 염색체의 출신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매우 복잡한 관찰 결과부터 제시했다. 정상적으로 소녀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X염색체를 하나씩 물려받는다. 터너 증후군 소녀의 하나뿐인 X염색체는 어머니에게서 온 것일 수도 있고 아버지에게서 온 것일 수도 있다. 연구자들은 터너 증후군 소녀 백 명을 연구한 끝에 X염색체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소녀들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소녀들보다 더 상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버지 쪽의 소녀들은 다정하고, 사교적이고, 잘 적응하는 경향을 보인다.


어머니 쪽의 소녀들은 상대적으로 잘 토라지고, 다루기 어렵고, 남과 말을 잘 안 하고, 공격적이거나 파괴적인 행동을 보인다. 이런 관찰 결과들은 뛰어나고 흥미로우며, 터너 증후군의 행동 양상을 엿볼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확장해 소녀들, 모든 소녀들의 좋은 행동이 선천적인 것인지 여부를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은 아버지의 X염색체를 가진 터너 증후군 소녀들, 즉 사회적으로 적응을 잘하는 소녀들은 소녀다운 소녀들이며, 어머니의 X염색체를 가진 소녀들, 즉 공격적이며 사회적으로 적응을 잘 못 하는 소녀들은 더 소년다운 유전형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교묘하고 난해한 추론 과정을 거쳐 최종 분석 결과라고 내놓은 것은 소녀의 사교성, 외교적 수완, 상냥함이 유전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미심쩍은 가설에 따르면, X염색체는 정상 소녀들에게서는 활동을 하지만 정상 소년들에게서는 침묵하고 있는, 사교적인 매력을 낳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이런 성별에 따른 발현 차이가 각자에게 진화적으로 유리하다고 보았다. 이론적으로 볼 때 남성들은 사교적 매력들에 둔감해짐으로써 더 공격적으로 되고, 위계 질서에서 상위를 차지하게 되고, 사냥 집단과 군대를 조직해 앞길에 있는 마음 여린 바보들을 정복하게 되었을 것이다. 소녀들은 더 뛰어난 사교적 능력을 갖게 됨으로써 다른 여성들과 친구가 되고, 흐름에 맞춰 살아가고, 어머니 역할을 배우는 일을 더 쉽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연구자들 중 한 명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다정한 소녀들은 다정한 어머니가 되고 싶어하죠. 그리고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해요. 그들은 다른 여성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 재능을 갖고 있어요.” 


(그러나) 내게 인상적인 것은 그 연구가 빚어낸 보편적인 소녀의,  모습이다. 그 소녀는 사교적 재능과 친구 집단을 갖고 태어난다. 즉 말재주를 가진 여성이다. (그러나 현실에는) 두목 같은 소녀들, 병적인 소녀들, 보통 소녀들, 꿈꾸는 소녀들, 지금 계속 만나고 있는 당신의 단짝 친구이자 내일의 이브 해링턴〔영화 〈이브의 모든 것〉에 나오는, 출세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주인공〕이 될 소녀들이 있다. 왜 그 현실의 소녀들에 대해선 말해지지 않을까? 당신을 밑바닥에서 정상으로 올려줄 사회적 공증인, 출세가도를 달리게 해줄 계획자는 어디에 있는가? 당신이 더러운 일을 직접 맡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하이에나 소녀들, 표범 소녀들, 코요테 소녀들, 까마귀 소녀들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유일한 소녀들, 살아 요동치는, 공격적인 소녀들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진짜 소녀를 말해주지 않는다
갇힌 소녀들은 자신의 공격성을 죽이기 위해
소녀와 소녀가 맞붙는 경기장을 뒹굴고 있다 


우리는 소녀와 여성의 공격성에 관해서는 그다지 말하지 않으며 그다지 들어본 적도 없다. 즉 그런 것이 있으며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공격적인 행동을 남성과 연관지으며, 그런 생각을 고수하고 있으며,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하거나 속삭이거나 소리치지 못한다. 과학자들은 의례적으로 남성과 연관짓는다. 우리 모두는 경험에 비춰 그렇게 연관짓는다. 자신이 현명하며 깨어 있으며, 지겨운 진부한 생각을 벗어 던졌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한다. 


예전에 해변에서 오래된 과자 더미를 놓고 바다갈매기 무리가 싸우는 것을 지켜보다가, 나는 나이 든 갈매기들, 즉 더러운 흰색 깃털과 성숙했다는 표시인 부리에 난 붉은 반점을 가진 갈매기들이 갈색 깃털을 가진 더 젊은 갈매기들을 신경질적으로 쪼아대면서 우위를 주장하려 애쓰느라 여념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반면에 젊은 갈매기들은 연장자들을 무시하면서 먹이를 집어삼키는 데 열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나는 싸움을 거는 새들이 모두 수컷이라고, 수컷이 분명하다고 가정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나 공격적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나이 든 수컷들은 지위에 얽매여 있는 반면, 젊은 수컷들은 반항적이고 기회주의적이라고 머릿속에서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나중에서야 나는 바다갈매기는 어릴 때는 갈색을, 나이 들면 흰색을 띠는 것일 뿐, 수컷과 암컷이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을 기억해냈으며, 부끄럽게도 그 난투극을 벌이는 새들 중에 암컷도 틀림없이 많이 있었을 것임을 깨달았다. 암컷들도 먹어야 하며, 썩은 고기를 먹는 청소 동물의 생활은 가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련을 일으킨다고 무릎을 욕하지 말자. 우리가 수컷의 공격성에 집착하는 것이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서 남성의 공격성은 코를 부러뜨리는 것처럼 때때로 명확히 드러난다. 폭력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대부분 남성들이다. 살인자는 90퍼센트, 강도는 80퍼센트, 강간은 거의 100퍼센트 남성들이 저지른다. 공격성의 토대를 이해하고 싶어하는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호기심을 의학적 토대 위에서 정당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연구비를 얻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남성의 공격성은 병폐를 일으키기 쉽다. 폭력은 공중 보건을 위협한다. 남성들은 여성들보다 신체적 폭력이 더 심하며, 따라서 남성의 공격성은 여성의 공격성보다 과학적으로 더 주목을 받는다. 더구나 우리는 모두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훨씬 공격성이 덜하며, 소녀들이 훨씬 더 우호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소녀여, 당신의 생각이 다르다면, 우리는 텔레비전을 의무적으로 보게 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당신을 설득하는 일에 나설 것이다.


여성의 공격성을 무시할 때 생기는 문제는 공격적인 우리, 즉 소녀이자 여성이자 영장류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마치 방정식에서 무언가 빠진 것처럼 자아와 충동을 해석할 때 혼란을 느낀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잔혹성, 포효하고 싶은 욕구와 충동이라는 덤불 속을 헤매도록 방치되어 있으며, 화면이나 책이나 생물학 논문에서 그 투쟁이 있다는 증거를 거의 보지 못하면서도 자신을 입증하고 과시하고 가늠하고 자신과 타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서, 그 잔혹성을 우리 자신에게서 몰아내야 하는 소녀 대 소녀가 맞붙는 경기장에서 뒹굴고 있다. 한 여성 과학자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왜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아닌지, 왜 그렇게 많은 것을 원하며 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지 궁금해하면서, 자신이 ‘오류가 난 변이체’가 아닐까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 생물 문화적인, 금발을 붙인 여성 인형에게 뭔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 공격성의 경계를 탐사하기를 주저한다. 우리는 공격적으로 보이고 싶어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공격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공격적인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공격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화나게 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며, 우리는 집에서든 가정에서든 머릿속에서든 그들과 함께 있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공격성을 단조롭게 철저히 부정적으로 본다. 우리는 그것을 아내를 때리는 자나 습관적으로 물건을 부수는 자와 관련지어왔다. 단호하고 결단력이 있는 것은 좋다. 그것들은 멋지고 정당한 용어이며, 바쁜 지구 시장 상인인 우리는 그것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공격성은 낡은 것이다. 공격성은 수준 낮은 것이다. 그것은 사실 패자를 위한 것이다. 공격성은 진정한 힘을 갖고 있지 못할 때 의지하는 것이다.


약자인 여성의 공격성은 이제 말해져야 한다
그것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약속이다


내가 말하고자 애쓰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공격성은 소녀들을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 차례이다. 공격성은 유행에 뒤진 것이다. 그것은 치료 대상이자 퇴치 대상이 되어왔으며, 여론을 통해 매립장에 내던져졌고, 더 이상 바람직한 형질이나 진정한 인간의 증표로 여겨지지 않는다. 우리는 공격성을 마음 내키는 대로 이용하고 처리한다. 우리는 그것을 복권시켰다가 물러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공유할 수 있다. 우리는 소녀로서 여성으로서 지닌 욕구라는 맥락에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으며, 우리는 공격성이 언제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알 수 있다. 공격적인 행동은 적대적이고 상처를 입히고 싶어하는 것이 될 수 있지만, 창조적이고 약속을 도모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심리학자들은 대개 공격적인 행동을 반사회적이라고 여기지만, 이것은 생명체를 지극히 낙천적으로 보는 실망스러운 관점이다. 순진무구해 보이는 수많은 사회적 행동들의 표면을 긁어보라. 그러면 그 밑에서 공격성이 낄낄거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정도 매우 공격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저녁 식사 시간에 걸려 온 간청하는 전화가 “지금 뭐 해? 돈 좀 빌려줘”라는 것임이 드러날 수 있듯이 말이다. 아니면 집에 손님이 왔을 때 흔히 일어나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보자. 안주인은 손님에게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을 내올까 묻는다. 손님은 사양한다. 언뜻 보면 각자의 행동은 공격성과 정반대인 호의적인 것이다. 안주인은 관대하게 내오겠다고 하고 손님은 사려 깊게 사양함으로써 안주인이 수고를 하지 않도록 배려한다. 


이런 의사 교환은 매우 간단하고 즐겁고 숨은 의미도 없이 이루어질 때도 있다. 즉 손님이 막 저녁을 먹고 와서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의례가 공격적일 가능성, 즉 그 속에서 울리고 있는 역동적인 힘을 생각해보자. 음식을 내오겠다고 함으로써, 안주인은 자신이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린다. 그곳은 그녀의 집이며, 그들 주위를 그녀의 자원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녀는 줄 것을 갖고 있으며, 후한 대접을 할 수 있는 지위를 활용해 이익을 얻고 싶어한다. 그녀는 자신의 조건에 맞게 관계를 정립하고 싶어한다. 즉 믿을 수 있고, 관대하고, 풍족하게 보이고 싶은 것이다. 그녀는 일시적이라고 해도 그 선물이 받아들여짐으로써 주는 사람에게 약간의 은혜를 입을 손님과 동맹 관계를 다지기를 원한다.


음식을 사양함으로써, 손님은 일시적인 동맹이나 종속을 거부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상황을 주도하는 쪽이 자신이라는 미묘한 의사를 전달한다. 선물과 일시적인 동맹이 없이도 지낼 수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면 안주인은 그 거절에 약간 마음이 상할 수도 있고, 어색해질 수도 있으며, 좋아요, 그러면 친구가 되지 않을 테니까 용건만 이야기하죠 하고 결심할 수도 있다. 


이유 없이 거절하는 것은 때로 뺨을 때리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모든 사회적 교환은 맥락에 따라 순해지도록 달래거나 적대감을 부추기는 식의 공격 역학으로 볼 수 있다. 안주인이 오랜 친구이고 아이들이 딸려 있으며 음식을 차리는 데 시간이 걸린다면, 음식을 사양하는 것은 관대한 행동이다. 당신이 주말에 부하 직원의 집에 들른 것이라면, 음식을 거절하는 것은 붉은 반점이 박힌 부리를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과 같다. 당신은 예기치 않게 나타나 가여운 안주인에게 충격을 주면서, 그녀가 어떤 것을 마시겠냐고 물으면서 관계를 균형 상태로 돌리려 애쓸 때 그녀의 기를 죽인다. 결국 당신은 그녀를 격분시키는 것이다. 마실 것이 필요한 쪽은 그녀이다.


호소처럼 보이는 것도 맥락에 놓고 재구성하면 노골적인 공격성이 드러날 수 있다. 맥베스 부인은 모두가 좋아하는 여성 혐오자이며, “당장 나를 남성으로 만들어 다오. 그러면 왕관에서 발끝까지 무시무시한 잔혹함이 가득 차리라”라고 영혼들에게 간청할 정도로 무모한 야심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던컨 왕을 살해하도록 방조하고 교묘히 조종하고는 그 피 속에 자신의 손을 담근다.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계집”이라는 말로는 이 귀부인을 제대로 표현했다고 할 수 없다. 우리의 선입관을 조금만 바꾸면, 맥베스 부인은 비장함이 담긴 고고한 모습을 띤다. 맥베스 부인이 북유럽의 여성 족장, 즉 자기 일족의 수호자라고 하면 어떨까? 


핀란드 웁살라 대학의 철학자인 페카 니에멜라는 맥베스 부인이 고대 북구 서사시인 오르크네잉가 전설에 나오는 강인한 여성들과 흡사한 바이킹족이었다고 주장해왔다. 니에멜라는 《맥베스》의 무대가 서기 1000년 경 스코틀랜드이며, 당시 스코틀랜드는 바이킹 문화에 지배되면서 기독교인보다 이교도인이 더 많았다고 지적한다. 바이킹족이라고 보면, 맥베스 부인은 잔인성을 전혀 잃지 않으면서도 훨씬 더 우리의 동정심을 얻는다. 


우리는 바이킹 여성들이 잔혹함과 진한 피와 많은 젖에 익숙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이킹 남성들은 정복을 위해 몇 달이나 몇 년 동안 떠나 있곤 했다. 바이킹 여성들은 뒤에 남아 영토를 맡았으며, 삶과 죽음, 전쟁과 평화에 관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상당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화려하고 꿀이 흐르는 축제를 열 시간이 거의 없었다. 약탈하는 집단은 언제나 약탈당할 위험에 처해 있으며, 바이킹에게는 재산과 사람을 보호하는 법도, 보안관도, 기마 경찰대도 없었다. 외부에서 오는 위협에 대항할 유일한 보호 수단은 친족과 일족이었다. 약한 일족은 동맹을 이끌어낼 수 없었다. 약한 일족은 갑작스런 습격에 절멸될 수 있었다. 바이킹 여성은 지위에 개의치 않을 수 있는 사치스러움을 누리지 못했다. 맥베스는 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스코틀랜드 귀족이라는 지위와 자연스러운 인품을 해외에까지 알릴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 고원 지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의 부인은 여왕의 왕관이 자기 일족을 지켜줄 만큼 강한 보호 수단이라고 보았으며, 칼 끝을 겨누는 것 외에는 그 왕관을 차지할 방법이 없었다.


맥베스 부인은 모든 여배우들이 꿈꾸는 배역이지만, 북구 여성의 일상 생활을 연기할 필요가 없다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 그 역할에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공격성은 지우기 힘든 오점이라기보다는 즐기는 취향 쪽에 가깝다. 우리는 여전히 공격성, 우리의 공격성을 갖고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적대감이나 정신적 의상 도착증〔이성의 옷을 입기 좋아하는 변태적 성향〕 없이 공격성을 바라보고, 그것의 기원과 토대를 탐색한다면, 우리는 자신이 원한을 지녔다고 해도 용서할 수 있으며, 친구들에게 키스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공격성과 호르몬 -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


공격성은 테스토스테론과 이어지고, 테스토스테론의 명성이 너무나 무시무시하기 때문에 당신은 그 탄소 고리들이 철컹거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이다. 잘난 척하는 테스토스테론의 그 작은 눈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공격성의 근원을 생각할 수 없다. 테스토스테론이라는 압도적인 개념은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 사이를 휘젓고 돌아다녔기에 사소하다고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테스토스테론이 공격적인 행동을 매개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그 호르몬이 후보자라는 것은 확실하다. 


테스토스테론은 상대를 지배하거나 공격하려 하고, 과시하려 하고, 허세를 부리려 하고, 방 한가운데에 빨랫감을 수북히 쌓아놓으려 하는 충동 등 공격성이라는 포괄적인 용어 아래 들어가는 모든 형질들과 연관되어 있다. 공격성은 지도자를 만들고 악당을 만들며, 양자의 구별을 어렵게 만드는 것도 테스토스테론이다. 테스토스테론은 커다란 쇠망치처럼 섬세하지 못하다. 테스토스테론은 어릴 때, 아주 어릴 때인 태아 때 발달하는 뇌에 영향을 미쳐서, 뇌가 나중에 오만하고 무모하고 서투른 행동을 하도록 길을 들인다고 이야기된다. 테스토스테론은 젖가슴이 엉덩이를 공격하듯 한다. 즉 전자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후자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물론 최근 들어 우리는 테스토스테론을 엄격히 말해 남성 호르몬이라고 할 수 없으며 여성도 어느 정도 그 호르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여성은 적게, 훨씬 더 적게 갖고 있다. 여성의 테스토스테론 농도는 혈액 0.1리터당 20~70나노그램이다. 그중 반은 부신에서 만들어지며, 나머지 반은 난소에서 만들어진다. 남성은 가장 수치가 낮은 사람이 0.1리터당 300나노그램을 지니고 있으며, 대다수 남성들은 400~700나노그램을 지니고 있다. 즉 남성은 여성보다 10배나 더 많은 양을 지니며, 이 테스토스테론은 거의 대부분 정소에 있는 세포들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남성이 더 많은 테스토스테론을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남성이 여성보다 더 공격적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설령 테스토스테론이 이른바 남녀의 공격성 차이를 낳는 주요 원인 또는 원흉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그 차이에 어느 정도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또 우리는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정상적인 여성의 농도 범위의 상한에 있고, 보통 여성보다 더 공격적이고, 자신의 직업에 더 헌신적이고, 성적 주장이 더 강하고, 육아에 신경을 덜 쓰는, 어머니로서는 빵점인 테스토스테론 과다 여성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여성을 보아왔다. 이 테스토스테론 과다 여성은 왜 일부 여성들이 정상에서 벗어난 듯한 행동을 하는지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테스토스테론 과다 여성, 더 정확히 말해 강인하고 날카롭고 야심적인 여성이 테스토스테론 농도 증가의 결과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전혀 없다. 테스토스테론은 리비도 호르몬, 공격 호르몬, 지배 호르몬으로서 대단한 권위를 누려왔다. 하지만 여성이 성욕이나 분노나 기운이 샘솟는 것을 느끼는 등 인생에서 뭔가를 할 때 테스토스테론에 의지해야 한다면, 딱하게도 그들은 운이 없는 셈이다. 그들의 테스토스테론은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테스토스테론 과다 여성이라 해도 0.1리터당 70나노그램밖에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남성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낮기 때문에 여성들이 그 호르몬 수치상의 작은 변화나 요동에 매우 민감하다는 주장도 있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높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테스토스테론은 그다지 활동적인 호르몬이 아니다. 무게로 비교하면, 테스토스테론은 에스트라디올보다 생물학적 능력이 훨씬 떨어진다. 남성은 생활할 때 그것을 다량으로 갖고 있어야 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여성이 남성보다 그 허약한 호르몬을 행동 능력의 원천으로 사용하는 데 더 뛰어나야 할 것이다. 왜 그래야 할까?


설득력 있는 대답은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테스토스테론이라는 압도적인 개념에 오랫동안 맹목적으로 경의를 표해왔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실제로 그렇든 희망이든 간에, 우리는 그것이 모든 통치자들을 통치한다고 생각할 정도까지 숭배해왔다. 하지만 우리가 지배적인 패러다임에 도전하고 그 생각이 얼마나 우리를 실망시키는지 알고 나면, 다른 우주가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그 우주에서는 바이킹 여성 족장의 뇌 신경 회로가 가까스로 탄 꼴찌상이 아니라 타고난 권리로 받아들여진다.


테스토스테론은 뇌에서 조직화 단계와 활성화 단계라는 2단계로 작용한다고 한다. 조직화는 태아 때 이루어진다. 남성 태아의 정소가 테스토스테론 방출을 시작할 때이며, 이때 테스토스테론은 뇌를 남성화시킨다고 한다. 활성화는 훨씬 뒤인 사춘기 때 시작된다. 사춘기가 되면 남성의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높아지고, 잠재되어 있던 남성적인 패턴들이 모두 발현되며, 우리는 《포춘》지가 선정한 최고 경영자 500인(그중 남성은 10퍼센트 정도이다)이나 아놀드(슈왈츠제네거)나 노먼(슈바르츠코프)라는 이름의 험악한 인물이 될 기본 재료를 갖게 된다.


반대로 여성의 뇌는 다른 신호가 없을 때 본래 정해져 있는 상태로 발달하는 뇌, 안정 상태의 뇌이다. 여성의 뇌는 태아 때 테스토스테론에 노출되지 않는다. 테스토스테론을 분비하는 정소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 뇌 회로의 특징은 존재가 아니라 부재를 통해 확정된다. 그 회로는 사춘기가 되어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이 쇄도하는 것을 느낄 때 활성화하여 여성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이어서 어떻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개인마다 다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모든 것을 금지하는 방식으로 이런저런 행동을 하라는 충고를 받게 된다. 남성처럼 공격성을 갖지 말며, 야심을 갖지 말며, 불쾌한 짓을 하지 말며, 성에 몰두하지 말라는 등등. 적어도 뇌의 성적 성향에 관한 표준 조직화/활성화 이론 속에는 그런 가정이 항상 들어 있었다. 즉 여성의 뇌는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행동 같은 것을 덜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조직화/활성화 가설의 오류와 타당성을 검토할 수 있다. 첫째, 테스토스테론은 태아 각인에 그만큼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많은 연구자들은 태아의 뇌에 도달한 테스토스테론 중 상당 부분이 뉴런을 통해 즉시 에스트로겐으로 전환되며, 이렇게 전환된 에스트로겐만이 뇌의 성적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그 남성 호르몬은 오직 ‘여성’ 호르몬이 되어서만 뇌를 남성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뇌에 성적 성향을 새겨 넣고, 공격적이고 지배적이며 호색적인 행동을 부여하는 것이 에스트로겐이라는 의미이다. 


에스트로겐은 여성의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호르몬의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결핍된 상태로 치부될 수 없다. 하지만 에스트로겐이냐 테스토스테론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태아의 뇌가 얼마나 많은 스테로이드 호르몬에 노출되는지가 중요하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조직화/활성화 가설을 고수할 수도 있다. 가령 모체에서 나온 것이든 태아의 난소에서 나온 것이든 간에 태아의 혈액에 있는 에스트로겐이 알파-태아단백질이라는 태아의 몸에 있는 단백질과 결합하면 뇌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하자. 그리고 남성 태아의 정소에서 나온 테스토스테론은 이 태아단백질과 결합하지 않기 때문에, 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자. 그런 다음 에스트로겐으로 전환되어 뇌의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렇다면 테스토스테론은 대뇌 피질에 존재하는 것이 되고 원인이 되며, 여성 태아의 에스트로겐은 그렇지 않은 것이 된다. 즉 남성 태아만이 몰려드는 스테로이드의 세례를 받는 셈이다. 반면에 여성의 뇌는 호르몬에 대해 처녀성을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그 가정이 틀렸다는 것이다. 그 가정을 뒷받침한다고 하는 실험들은 대부분 설치류를 대상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설치류의 알파-태아단백질은 혈액 속의 에스트로겐을 포획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인간의 태아단백질은 에스트로겐이 뇌로 가는 것을 막지 않는다. 따라서 모체에서 나온 에스트로겐은 마음대로 여성 태아의 뇌에 영향을 미치며, 그 태아의 난소에서 나온 에스트로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에스트로겐은 임신 기간 내내 여성 태아의 뇌를 이슬비처럼 촉촉하게 적신다. 뇌 안으로 얼마나 많은 양이 흘러 들어가며 그것이 신경 회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누가 알겠는가? 과학자들은 남성 태아의 정소에서 나와 뇌로 홍수처럼 밀려가는 호르몬에 비하면 그 양이 적을 것이라고 가정하면서, 논리에 체계를 갖추기 위해 저농도의 에스트로겐은 뇌를 여성화하고 고농도의 에스트로겐은 뇌를 남성화하며, 태아가 분비한 안드로겐이 뇌 속에서 전환되어 생긴 에스트로겐은 고농도라고 본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전혀 없다. 심지어 설치류에서도 이 산뜻한 이분법 모델은 잘 들어맞지 않는다. 유전적으로 변형시켜 에스트로겐 알파 수용체를 없앰으로써 정상 생쥐보다 에스트로겐에 반응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생쥐 암컷을 예로 들어보자. 발달할 때 에스트로겐의 영향을 받지 않는 뇌가 여성성을 띠도록 예정되어 있다면, 이 생쥐는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교태가 흘러넘치는 미녀들, 완벽한 여성에 해당하는 생쥐 암컷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정반대로 그들은 유별나게 공격성을 보인다. 때로는 새끼를 죽이기도 한다. 그들은 다른 암컷의 새끼를 보면 공격한다. 이 수용체가 없는 암컷은 에스트로겐 수용체가 없는 수컷보다도 더 공격적이다. 


이 수컷들은 다소 암컷화가 이루어진 듯이 보인다. 그들은 생쥐 수컷들이 흔히 하는 행동인 공개된 공간을 가로질러 가는 모험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암컷과 교미를 하지만 사정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뇌도 발달할 때 에스트로겐에게 설득당하지 않았다. 그들의 정소는 테스토스테론을 만들지만, 그 테스토스테론은 뇌의 조직화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테스토스테론은 에스트로겐이 되어 활동해야 하는데 에스트로겐 수용체가 묵묵부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인가? 당신의 염색체가 여성의 것이고 당신이 자궁 속에서 에스트로겐에 반응할 수 없다면, 당신은 남성화가 된다는 것일까? 당신이 남성이지만 에스트로겐에 반응할 수 없다면, 여성으로 바뀐다는 것일까? 아니면 그와 비슷한 존재나,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는 말인가? 아니면 기존의 이야기들이 틀렸고 여성의 뇌가 기본 설정 상태가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만일 성별이 어떻든 간에 유전자 이상 때문에 뇌 발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예기치 않은,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일까?


여성도 테스토스테론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활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테스토스테론에 의지할 수 없으며, 아예 그것이 필요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테스토스테론을 남성의 공격적이거나 지배적인 행동과 연결하려는 연구들은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그런 연구들은 혼란스러운 결과를 내놓고 있다. 일부 연구는 남성 죄수들 중에 더 폭력적인 범죄를 저지른 부류가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더 높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반면에 그런 상관 관계를 찾아내지 못한 연구들도 있다. 사춘기 소년들 중 또래들에게 ‘억센 대장’이라고 여겨지는 소년들은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높다고 알려져왔다. 하지만 ‘억센’이 ‘억센 운명’ 때문일 수도 있다. 같은 연구는 어릴 때부터 툭하면 싸움질을 하고 말썽을 일으키는 소년들은 사춘기에 들어서도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매우 낮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테스토스테론과 남성의 공격적이거나 지배적인 행동 사이의 연관성이 혼란스럽다면, 여성들에게 그것은 냉장고 아래 바닥과 같다. 즉 아예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여성 운동 선수들은 경기 직전에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증가하지 않으며, 경기에서 이긴다 해도 증가하지 않는다. 여성 법정 변호사가 세무 담당 변호사보다 평균적으로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더 높은 축복을 누릴 것 같지도 않다. 난자가 성숙할 시기에 안드로겐 농도가 최대가 되는 것처럼,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월경 주기에 맞춰 오르락내리락할 때 여성의 공격성도 마찬가지로 오르락내리락하는지 조사한 연구가 있었다. 


여성 24명에게 ‘점수 뺏기 공격 패러다임’이라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게임을 시켰다. 게임 참가자는 한 단추를 백 번 눌러 자기 점수를 1점 올리거나, 다른 단추를 10번 눌러 보이지 않는(가상의) 상대의 점수를 1점 뺏거나 선택할 수 있었다. 1점은 10센트에 해당했다. 그런 다음 참가자의 점수를 주기적으로 1점씩 뺌으로써, 가상의 적이 그녀를 적대시하고 있는 것처럼 자극했다. 연구자들은 여성의 상대적인 테스토스테론 농도와 그녀가 자기 점수를 올리기보다는 화가 나서 상대의 점수를 뺏으려 하는 행동 사이에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월경 전 증후군을 지닌 여성들이 전반적으로 생리 주기 내내 더 호전적이며, ‘가만 안 두겠어’라는 단추를 더 많이 누른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테스토스테론 농도에 무관하게 말이다.


테스토스테론은 지나치게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많이 생각한다. 여성 공격성의 뿌리를 이해하려 시도할 때 우리가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나는 테스토스테론이 남성의 행동에 의미가 있는지, 남성이 개인적 승리를 달성한 뒤에 테스토스테론 농도를 높게 유지함으로써 더 큰 성취를 할 수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남성들은 많은 테스토스테론을 갖고 있으며, 아마도 그중 일부를 행동을 하는 데 쓸 것이다. 몸은 원래 그렇다. 몸은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하고 손을 대본다. 


그 이용이 경험, 역사, 사회적 제약, 믿고 싶어하는 뇌의 위약(僞藥) 효과에 깊이 영향을 받고 지나치게 통제를 받을 때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은 테스토스테론을 지니고 있으며, 일부 여성들이 배란기에 에스트로겐 농도가 최대에 달할 때 성욕과 오르가슴 능력을 최대화시킬 수 있는 것처럼 남성이 테스토스테론을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반응과 감각을 강화하고 연장시키는 데 사용할지 모른다는 사실은 그 결과와 그다지 상관이 없다. 다른 방식으로도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도 자유와 초월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테스토스테론이라는 멍에와 그것 없이 지낼 수 없다는 감정, 즉 리비도를 설정하는 호르몬이자 공격 호르몬이자 영웅 호르몬을 남성들이 독점하고 있다는 감정을 벗어 던져야 한다. 그것은 거기에 있지 않다. 테스토스테론을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암컷 하이에나를 통해 여성 공격성 알아보기
하이에나는 수컷이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더 높다
하지만 왜 암컷이 우두머리가 되는가


계통학적으로 우리의 자매가 되는 존재들을 몇몇 살펴보고, 그들이 여성 공격성의 근원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보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례는 얼룩하이에나이다. 얼룩하이에나는 아프리카 육식 동물이다. 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말은 잘못 됐다. 얼룩하이에나는 다른 포유동물들과 생김새가 다르다. 이 동물은 뒷다리가 앞다리보다 더 짧아, 먼 거리를 더 잘 뛸 수 있다. 매머드처럼 굵은 목과 삼나무처럼 튼튼한 몸통 근육과 강한 턱으로 먹이를 살, 가죽, 뼈 할 것 없이 모조리 부술 수 있다. 얼룩하이에나는 뼈를 부숴 가루로 만든다. 그래서 배설물이 분필처럼 하얗다. 얼굴은 고양이과, 개과, 곰과, 기각류의 얼굴을 섞어놓은 듯하다. 이 하이에나의 습성은 포악함 그 자체이다. 사자 새끼는 눈도 못 뜨고 이빨도 없는 무기력한 상태로 태어난다. 반면에 하이에나의 새끼는 눈을 뜬 채 송곳니가 완전히 자란 상태로 태어나며, 그 즉시 자매의 목을 향해 이빨을 들이댄다. 막 태어난 새끼가 다른 새끼를 물어 죽이는 일도 있다. 첫 유혈 의식을 치른 뒤, 생존자는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새끼들의 보편적인 습성인 재롱떠는 모습으로 변신한다.   


하지만 얼룩하이에나의 진정한 특징은 생식기의 모양과 성적 행동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얼룩하이에나는 암수의 외부 생식기가 흡사하다. 암수 모두 음경과 음낭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수컷의 생식기가 진정한 음경과 음낭인 반면, 암컷의 음경처럼 보이는 것은 질과 클리토리스의 조합이며, 음낭처럼 보이는 것은 음순이 융합된 것이다. 암컷은 소변을 보고, 교미를 하고, 새끼를 낳는 등 모든 일을 그 음경을 통해 한다. 그 가느다란 터널을 통해 출산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첫 출산 때 음경은 새끼가 나올 때 찢겨 나간다. 첫 분만 때 죽는 암컷들도 많다. 살아남은 암컷들은 그 이후의 출산을 훨씬 더 수월하게 할 수 있다. 이 점은 인간 어머니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처음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이르기까지 자연학자들은 얼룩하이에나의 특이한 생식기를 보고서 이 동물들이 암수한몸이라고 오해했다.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성별이 둘이라는 것을 깨달은 뒤에도, 과학자들은 하이에나의 행동과 사회 조직을 보고 곤혹스러워했다. 얼룩하이에나는 암수의 몸집이 거의 같지만, 예외 없이 암컷이 지도자가 된다. 암컷이 우월한 성이다. 나이가 더 들고 몸집이 더 큰 수컷이라도 더 젊고 더 작은 암컷에게 항복한다. 이런 암컷의 우월성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언뜻 생각할 때는 테스토스테론이 해답인 듯하다. 암수 새끼 모두 자궁 내에서 매우 다량의 테스토스테론에 노출된다. 암컷 새끼가 수컷과 흡사한 생식기를 갖고 태어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테스토스테론은 어미의 독특한 태반에서 분비된다. 대다수 포유동물의 태반에는 모체의 안드로겐을 에스트로겐으로 전환시키는 아로마타제가 풍부한 반면, 전구 물질을 테스토스테론으로 전환시키는 효소들은 적게 들어 있다. 하이에나의 태반에는 이 효소 비율이 역전되어 있다. 


즉 스테로이드 전구 물질을 테스토스테론으로 바꾸는 효소들은 많고, 테스토스테론을 에스트로겐으로 만드는 아로마타제는 적다. 따라서 하이에나 태아의 혈액에는 테스토스테론이 진하게 들어 있으며, 에스트로겐보다 더 많은 이 테스토스테론은 하이에나의 뇌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에스트로겐으로 전환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이 많은 테스토스테론은 하이에나 암컷의 특이한 생식기를 만들 수도 있고, 새끼가 어미의 음경 형태 질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송곳니를 험악하게 딱딱거리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태어난 지 몇 주가 지나 혈액에서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줄어들면, 새끼는 더 유순하고 재롱떠는 존재가 된다. 그 호르몬의 명성에 딱 들어맞는 현상인 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암컷이 어떤 식으로 무엇 때문에 수컷보다 우위에 서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하이에나 새끼 몸 속의 테스토스테론 농도는 암수 똑같이 태어난 뒤에 낮아진다. 그럼에도 암컷 새끼가 수컷 새끼보다 더 공격적이다. 청년기와 성년기에는 포유동물 수컷들이 성적으로 성숙할 때 대개 그렇듯이 암컷보다 수컷의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상당히 높아지지만, 그래도 암컷의 우위에는 변함이 없다. 얼룩말의 넓적다리를 놓고 다툰다면, 암컷이 이긴다. 암컷이 수컷을 누르는 것이다. 그것은 습성이 되어왔다.


하지만 이 습성, 이 지배하려는 취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테스토스테론은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얼룩하이에나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모든 하이에나의 뇌가 태아 때 다량의 테스토스테론에 노출되어 모든 뇌가 수컷화했을 것이고, 암수의 뇌에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추측해왔다. 하지만 실제로 많은 포유동물 종에서 암컷보다 수컷의 뇌 용량이 더 큰 것처럼 하이에나도 수컷의 뇌 용량이 더 크다. 성적 행동을 통제하는 뇌 부위도 마찬가지이다. 하이에나 암컷은 ‘암컷의’ 뇌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강력한 모권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에나 연구를 통해 안드로스테네디온이라는 스테로이드 호르몬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 호르몬은 테스토스테론과 화학적으로 같은 부류에 속한 안드로겐의 일종이지만, 그렇게 남성적이거나 자극적인 안드로겐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오랫동안 연구자들은 안드로스테네디온이 테스토스테론이나 에스트로겐으로 전환될 때까지는 아무 의미도 없는 중간 물질이라고 무시해왔다. 이 물질은 주로 생식샘이 아니라 부신에서 만들어진다고 여겨졌다. 부신 호르몬들은 난소나 정소의 호르몬에 비해 그다지 성적인 역할을 안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적 차별에 얽매여 있는 우리의 눈에는 암수의 부신이 별 차이가 없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이에나는 안드로스테네디온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성년기 암컷은 수컷보다 테스토스테론의 양이 적을지는 몰라도, 다량의 안드로스테네디온으로 그것을 보충한다. 


그 다량의 호르몬은 그녀의 부신이 아니라 난소에서 분비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이에나 암컷의 생식샘은 다량의 안드로스테네디온을 만들어낸다. 임신 기간에는 하이에나의 태반이 이 호르몬을 테스토스테론으로 변형시키며, 변형된 테스토스테론은 태아의 혈액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암컷이 임신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난소는 일정하게 안드로스테네디온을 만들어내며, 이 호르몬이 암컷에게 공격성을 불러일으키는 데 한몫을 할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안드로스테네디온이 전보다 훨씬 더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뿐이다. 


먹이고 보살펴주고 그것에 목줄을 매어라. 그러면 당신은 포악한 암컷을 상징하는 호르몬 마스코트를 갖게 된다. 한 연구는 공격적인 10대 소녀들의 혈액에 안드로스테네디온 농도가 높다는 것을 발견했다. 연구자들은 처음에는 그 결과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소녀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부신이 과도하게 흥분하여 안드로스테네디온을 비롯한 부신 스테로이드들을 과잉 분비한 결과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 연구자들은 그 실험 대상자들이 정말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아 흥분했는지, 아니면 난소가 안드로스테네디온 폭풍과 그에 따른 행동이나 억양, 즉 건방지고 과시적이고 뻔뻔스런 말투를 낳은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다. 얼마나 공격적이든 간에, 여성들의 혈장에는 테스토스테론보다 안드로스테네디온이 네다섯 배 더 많으며, 그 안드로스테네디온은 대부분 자유롭다.


즉 혈액 단백질과 결합해 있지 않으며, 따라서 이론상 뇌에 더 쉽게 들어갈 수 있다. 안드로스테네디온 농도는 여성이나 남성이나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여기서 여성은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지 않는다. 여기에는 갖고 놀 진흙이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안드로스테네디온을 너무 중요시하고 싶지 않다. 과대 평가된 것이 테스토스테론만은 아니다. 모든 호르몬들은 궁극적으로 과대 평가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제대로 이해되어 있지도 않다. 하지만 설령 우리가 이 주문을 능숙하게 외운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테스토스테론이라는 족쇄에 매여 있으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새로운 관점을 필요로 한다. 하이에나는 사슬을 끊는 데 이상적인, 강한 턱을 지니고 있다.


호르몬에 집착하지 말자
여성호르몬을 대표하는 에스트로겐도
여성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에스트로겐을 잊지 말자. 그 호르몬도 복종하거나 편협한 영혼이 아니라, 당당한 영혼을 부추길지 모른다. 유타 대학의 엘리자베스 캐시던이 여대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혈액에서 에스트로겐, 테스토스테론, 안드로스테네디온, 세 호르몬의 농도가 가장 높은 여성들이 가장 자존심이 세며, 동년배 사이의 위계 질서에서 자신이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나타났다. 


또 그들은 거의 웃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매우 불행한 증상에 속한다. 흥미롭게도 안드로스테네디온 농도가 가장 높은 여성이 설문 조사를 했을 때 친구들이 평가한 것보다 자신이 훨씬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즉 그들은 자신의 힘을 과장하려는 성향을 보였다. 안드로스테네디온은 그저 마녀가 이것저것 뒤섞어 만든 약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기 확신을 과도하게 가질 수가 있는 것일까? 맞아, 그래, 분명해.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과대 망상을 품고 있는 사람을 매우 병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자기 확신이 강하고 반발심이 일 정도로 자화자찬하는 사람이 진정한 불굴의 의지로 힘을 획득할 뿐 아니라, 그것을 한번 움켜쥐면 놓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왔다. 여성이 자기 확신을 지나치게 가질 수 있을까? 안드로스테네디온을 주입해 여성을 오만하게 만들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팔을 뻗어 당신이 정맥을 찾을 수 있도록 돕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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