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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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의 역기능을 부풀려 ‘바보상자’라고 비꼬는 이들도 있지만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유용하고도 신선한 몇몇 프로그램을 보고 있자면 그 말이 무색해지곤 한답니다. 나의 채널 선택권을 앗아가 버린 그런 것들 가운데는 괜찮은 토크쇼가 꽤 있습니다. 그런데 볼 때마다 느끼는 게 이런 프로그램의 경우 MC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무얼 맡겨도, 어떤 빈약한 소재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만족스런 결과를 낳는 MC가 있다는 거죠. 한결같이 미덥고 맡는 것 마다 품질이 보장되는 그런 진행자라면 PD보다 먼저 눈 밝은 시청자들이 알아보겠지요.
 

그런 이들 가운데 군계일학이랄까, 요즘 강호동을 빼면 더 이상 꼽을 사람이 없을 정도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강호동은 프로그램을 원만하게 진행하는 우아한 MC이기도 하지만 거의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남성성을 오롯이 지니고 있는 말 그대로의 남자이기도 하여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답니다. 뽀샵없는 날 것 그대로의 야성미 넘치는 모습에서 본연의 남자다움을 새삼 확인하곤 불끈 주먹을 쥐는 남자들도 꽤 있을걸요. 쉴 새 없이 강력한 포스가 작렬하는 통에 시청자들은 어느새 빨려들고 말게 되지요. 그런데 기를 너무 세게 내뿜어서인지 초대받은 패널이 묻히는 일도 가끔 있더라고요. 특히 <무릎팍 도사>에선 무속인 캐릭터로 분장하여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한동안 능글능글 약을 올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고함을 버럭 지르며 온몸을 내던지곤 하여 심약한 패널 가운덴 기겁을 하고 까무룩 정신 줄을 놓는 지경에 이르는 이들도 있답니다. 그런데 이런 강호동을 순하디 순한 어린 양, 속칭 초식남으로 만들어버린 사건을 최근에 목격했습니다.

바로 비야 님 앞에서 말이지요. 그것도 판정패 정도가 아니라 깨끗이 완패를 시인해야 할 정도로요. 오랜 기간 긴급구호팀장으로 활약하던 월드비전을 그만두고 새로운 트랙에 막 오르고자 하는 비야 님이 미국 유학 전 그간의 활동을 정리하며 출국 인사 겸해서 출연한 순서였지요. 그런데 그만 공격 본능으로 이글거리는 야성미의 화신, 육식남 강호동을 보기 좋게 순치시켜버린 겁니다. 완벽한 무장해제 말입니다. 너무 의외여서 이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일까 곰곰 따져보았습니다. 강호동의 가식일까, 어쩜 설정은 아닐까 하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도무지 그건 아니었습니다. 한 눈에 진정성이 느껴졌으니까요.
 

곧 그건 지고지순한 사랑 앞에 고꾸라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계산 없는 순수한 사랑 앞에 세상 논리도 동물적 공격 본능도 눈 녹듯 사라지고 본연의 인간적인 면모, 어린 양 같이 보드라운 모습이 되고 말았다는 거죠.

사랑은 정말 놀라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강호동을 초식남으로 바꿔버린 정도는 약과이지요. 아 글쎄! 하나님도 비야 님의 사랑에 감동을 먹었는지 몇 번이나 기도 응답을 해 주시고 또 동행하며 지켜주기까지 했으니까요. 빙하 크레바스에 빠지기 직전 뒤로 잡아당겨 넘어뜨린 손길을 얘기할 때 얼마나 아찔하면서도 흐뭇하던지요. 파키스탄 군인들도 종교가 다르고 본 적도 없는 외지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기꺼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의탁하기까지 했고요, 지진 피해 복구를 돕기 위해 나와 있던 보석상, 변호사들도 비야 님의 사랑에 감전된 듯 앞뒤 재지 않고 선뜻 짐꾼을 자청하여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지경으로 이끌기도 했지요. 심지어 고생 모르고 귀하게만 자랐던 부잣집 아들 이샴조차 건강도 돌보지 않고 난생 처음 겪는 험한 일을 묵묵히 해나가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무의식중에 실천해보이기도 했는데 그게 다 비야 님의 사랑의 자장에 휩싸인 이들에게서 자연스레 우러나온 모습이거든요. 과연 사랑의 힘은 높고도 크다 하겠습니다.

한때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인다는 말이 회자되곤 했지요.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남들의 절박한 사정에 관심을 가질리 없으니 뻔히 보고도 그들의 처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밖에요.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그런 사랑의 결핍과 무관심을 은유한 작품 아닐까요. 그런데 <그건 사랑이었네>를 통해 비야 님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배우고 또 마음으로 따라하다 보니 이제 겨우 색맹은 면하게 된 것 같아 여간 뿌듯한 게 아니랍니다.
 

그런데 비야 님의 그 도저한 사랑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하는 의문이 종종 들었답니다. 사랑의 저수지에 물이 가득 차고 넘치게 된 데는 분명 연유가 있을 테니까요. 먼저 꼽아본 게 지식에서, 아니 그건 앞뒤가 한참 바뀐 것 같았답니다. 사랑해야 알게 된다 했으니까요. 지식은 충만한데 메마른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처해 있는 입장 때문에, 그건 더욱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직책에 충실하는 것만으로는 이처럼 영혼을 바쳐 몸과 맘이 혼연일체가 되게 몰입하는 경우가 드물거든요.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비야 님의 그 결곡하고 넘치는 사랑은 천부적으로 발달된 감성에서 우러나온 게 아닐까 하는 쪽으로 좁혀지더라고요. 유난히 민감하고 울림이 깊은 심성이니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떨림에 공명(共鳴)할 밖에요. 그러니 자연스레 사랑의 눈길을 기울이고 가슴과 손발로 다가가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건 비야 님이 시를 좋아하고 또 분별하는 안목을 지니고 있는 걸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답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는 고은 시인의 그 짧은 시에서 많은 의미를 떠올리며 감흥의 여운을 즐기는 모습이라니. 또 ‘슬픈 사람들에겐 / 너무 큰 소리로 말하지 말아요 / 눈으로 전하고 / 가끔은 손 잡아주고 / 들키지 않게 / 꾸준히 기도해 주어요’라는 이해인 시인의 <슬픈 사람들에겐>을 읽고 가슴 울렁거리는 대목에선 아! 비야 님의 감성지수가 바로 이 정도로구나. 초민감 센서를 장착하고 있구나 하고 무릎을 치고 말았답니다.

또 비야 님 스스로 꼽은 좋은 습관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게 칭찬하고 남의 말에 맞장구쳐주는 거라 했죠. 그게 다 감정이입이 쉬 이뤄질 수 있는, 그래서 자신이나 타인에게 진솔하게 다가갈 수 있는 넉넉한 가슴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거든요. 글쎄 자신을 후원금 모으러 다니는 앵벌이라고까지 스스럼없이 말할 정도로 흉허물 없이 대하는데 누가 가슴을 열고 비야 님과 하나가 되어 그 사랑을 주저 없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가슴이 부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반응할 줄 아는 센서가 유난히 발달한, 그리고 그것을 늘 긍정적인 쪽으로 자동 변환시키는 시스템이 내장되어 있는 비야 님이기에 매사에 거리낌 없이 솔직하고 사랑이 흘러넘칠 밖에요.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올레(olleh)! 하고 외치게 된답니다. 가슴에서 비롯된 따뜻하고 진실한 사랑을 확인하고 만끽하게 해 준 비야 님 만세(Biya)!

비야 님의 사랑은 또 깊은 영성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기도가 응답되는 복도 받고 싶지만 자신이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 응답이 되는 복 또한 한껏 누리고 싶다는 비야 님의 고백에서 영성의 깊이를 알 수 있었거든요. 언감생심 복의 원천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복을 전달해주는 통로는 꼭 되고 싶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정말 울컥했답니다. 고통 받는 이들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응답이,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는 통로가 되고 싶다는 그 결곡하고 심원한 영성 앞에 내 얕디얕은 영적 감수성이 그만 고스란히 드러난 것 같아 일순 부끄러움도 밀려왔고요. 신앙인이라 하지만 영적인 떨림에 얼마나 민감하게 촉수를 뻗어 반응을 보여 왔는지 돌아볼 때마다 늘 민망할 지경이었는데 비야 님 앞에서는 더욱 초라하게 왜소해지고 만 듯하여 자괴감에 빠질 정도였답니다. 비야 님은 또 복이 들어와 쌓이는 종착역이 아니라 들어와 쌓인 복이 골고루 나눠지는 환승역이 되고 싶다고 했죠. 사랑과 평화의 도구로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도 저는 늘 제 이익과 안일만 간구하는, 그리하여 복이 제게 머물기만 바라왔다는 생각에 뜨끔해졌답니다. 신앙을 복 받는 수단으로 삼은 셈이었으니까요. 그러니 이젠 어디 가서 감히 신앙인이라고 입도 뻥끗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이런 좀비 같은 자를 어디에 쓸 수 있을는지 하나님도 골치깨나 아프실 걸요.
 

그렇게 깊은 영성을 지녔으니 감사할 수 없는 것까지 감사하는 성숙한 기도를 구호 현장에서 드리며 시종일관 사랑의 메신저가 되었던 것이겠지요. 눈에 보이는 은총은 물론 고통으로 가장한 은총까지 알아챌 정도였으니. 이 부분을 읽다가 불현듯 교회 목사님들이 <그건 사랑이었네>를 꼭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핏대 올리며 불신 지옥만 외칠 게 아니라 사랑이 뭔지, 복은 어떻게 받을 수 있으며 어떤 경로로 순환되는지, 그리고 이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은 또 얼마나 중요한지 비야 님께 좀 배우셨으면 해서요. 그러면 세상 어디에서나 환영받을 수 있을 건데. 빛과 소금의 역할이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비야 님의 사랑은 또 주변 뭇사람들과의 인연의 연쇄에서 비롯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관계의 망, 그 네트워크가 어찌나 촘촘하게 잘 짜여 있던지. 비야 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듬뿍 사랑을 안겨주며 뭐든지 밀어주는 이들이 끊임없이 중보의 기도를 올리고, 108배를, 또 묵주신공을 드리니 어찌 하늘이 비야 님을 보우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비야 님을 에워싸고 있는 이들의 깊고 절절한 사랑이 어떻게 비야 님에게 감염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늘 멘토가 되어주는 친구 수녀님, 외모에다 내면의 깊이까지 곁들인 첫사랑 남자 동창생, 실연의 상처를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던 대학 은사님, 그리고 칭찬과 배려를 아끼지 않던 부모님까지, 이렇게 많은 분들이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기에 좌충우돌하는 비야 님의 파격적인 행보도 결국은 사랑스런 결말로 아름답게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버팀목이자 보호막이 한결같이 애정 어린 눈길로 보살피고 있다는 걸 알기에 얼마쯤의 일탈은 전혀 개의치 않았던 거고요.

사랑은 받아 본 자만이 느낄 수 있고 또 베풀 수 있는 거라고 했지요. 비야 님의 곡진한 사랑도 결국은 비야 님께 사랑을 베풀던 분들에게서 옮겨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가식이 아닌 진정한 사랑을 받게 되면 가시 같이 건드리기만 해도 아픈 상처가 어느새 은은한 향기를 발하는 향주머니로 바뀔 정도니까요. 그러니 비야 님도 실은 사랑의 빚을 듬뿍 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걸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 갚고 있는 거고요.

하여 민감한 감성에다 깊은 영성, 그리고 오로지 비야 님을 위해주기만 하는 이들로 겹겹이 에워싸인 관계 망에서 비롯된 그 사랑이 긴급 구호 현장으로 달려가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을 베풀고 그들과 함께 아픔을 공유하며 희망을 꿈꿀 수 있게끔 이끌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비야 님은 늘 한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새롭게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젊은이 같은 싱그러운 이미지로 다가오곤 한답니다. 이번에 또 변신을 시도하려 하고 있지요. 현장 실무 경험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정책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이론적 배경을 쌓으려 미국 유학의 길에 나서니 말입니다. 보나마나 어려운 여건에 힘겨운 과정이 가로놓여 있겠지만 늘 긍정적 에너지가 흘러 넘치고 스스로를 행복 발전소로 여기는 비야 님이기에 이 도전도 너끈히 성공적으로 마치고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발랄하고 도전적인 화두를 던지는 비야 님을 가까이에서 뵐 수 없다는 아쉬움이 크다는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곧 환하게 웃으며 짠 하고 나타날 줄 알기에 기다린다는 게 그리 지루하지만은 않을 듯도 합니다. 못내 섭섭하기는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하여 비야 님의 그 사랑이 한결 더 성숙하고 깊어져서 어려운 이들을 전폭적으로 보듬어줄 수 있게 될 것이기에 기꺼이 마음 추스르렵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 남은 제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비야 님을 위해 중보 기도의 화살을 쏘아 올리는 일밖에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기도가 모인 사랑의 저수지에 한 모금 물이라도 더 보탤 수 있었으면 해서요. 남을 위해 기도해본 게 참 오랜만이어서 어색하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 기도를 통해 오히려 제가 더 큰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답니다. <그건 사랑이었네>를 통해 터득한 이치지요. 이런 값진 의미를 발견하고 또 사랑의 기를 팍팍 받는 기쁨을 누리게 해 준 비야 님께 너무 많은 빚을 진 것 같습니다. 이제 저도 그 빚을 다른 이들에게 갚아야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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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 공지영 에세이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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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들의 들판>이후 공지영 작가에게 빠져버렸다. 여간해선 헤어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하게 내뿜는 아우라에 휘둘려 그만 순치되어버린 듯하다. 물론 이전에도 <고등어>같은 작품에 매료되기는 했지만 <별들의 들판>부터는 풍기는 냄새가 완전 달라졌음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할까. 아프게 옛일을 곱씹으며 자신이든 타인의 가슴이든 뾰족하게 후벼 파는 방식이 아닌 살갑게 다가오는 보드랍고 진솔한 글에 선뜻 정감이 갔고 메시지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서 거의 전작을 읽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작년 어느 땐가 한겨레신문에 에세이를 연재한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하여 손꼽아 기다리다 게시물이 뜨면 잽싸게 읽곤 하였는데 몇 편은 사정상 못 읽고 빼먹은 것도 있어 못내 아쉬웠었다. 이번에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와 전편을 오롯이 읽을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시리즈물을 연재하던 시기가 마침 촛불시위로 전국이 울렁거릴 때여서 작가는 가벼운 에세이 글로 마음결이나 누그러뜨리고 있어서 되겠나 하는 자격지심이 일었던 모양이다. 글 곳곳에서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자책과 조바심을 드러내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글을 읽을수록 내게는 공지영 작가의 그 가벼운 에세이가 현장의 어떤 선동적인 격문이나 진보 진영의 학술 논문보다 더 강력하고 정확하게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것으로 들렸다. 그것도 직설적으로 감정을 배설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교한 문학적 장치와 심미적 문체가 아우러진 멋진 글로써 말이다.

이를테면 “패랭이꽃이 내게 가르쳐준 것”에서 어릴 적 유리구슬 아저씨에게 사기당한 경험을 토대로 완벽한 것은 가짜일 가능성이 크니 상대방의 결점이 보일 때 오히려 안심하고 다가갈 수 있다고 넌지시 말하는 식으로 말이다.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는 것의 차이 중 뚜렷한 것은 살아 있는 것들은 대개 쓸모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게 화분이라면 필요 없는 누런 이파리나, 그게 꽃이라면 시들거나 모양이 약간 이상한 꽃 이파리들을 달고 있다는 거다. 반대로 죽어 있는 것들은, 그러니까 모조품들은 완벽하게 싱싱하고, 완벽하게 꽃이라고 생각되는 모양들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누군가 너는 무슨 재미로 살아? 하고 물으면, 응, 나는 인생의 비밀을 하나하나 깨닫는 재미로 살고 싶어, 라고 대답하곤 하던 내게 패랭이꽃은 많은 의미를 남겨주었다. 그리고 가끔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을 때, 아이들을 어떻게든 이해해야 할 때, 마지막으로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할 때 나는 이 교훈을 떠올려본다. 그 사람도, 아이들도, 그리고 나도 살아 있기에 보기에도 싫고 쓸모없고 심지어 버리면 더 좋을 군더더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완벽한 모양을 가지고 완벽한 초록으로 무장한 비닐 화분을 생각해보면 이런 지푸라기 같은 결점들을 그 사람이나 아이들이나 내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큰 위안이 되기도 한다. 너무 아름다운 청사진은 그러므로 내게는 언제나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98~99쪽)

그러면서 이 소중한 깨달음을 오늘날의 사회 상황과 관련된 메시지로 치환하여 작가의 심경을 듬뿍 담은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난데없이 길을 가다가 “네가 너무 예쁘니 이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겠다.” 는 그 어린 아저씨는 내 인생에 여전히 출몰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싸고 맛있고 안전하다, 라는 말인데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대도시에서 자라나 일찍이 마음고생(?)을 많이 겪은 나로서는 비싸거나 맛없거나 안전하지 않은 한 가지를 포함하지 않은 것은 의심부터 하고 본다. 왜냐하면 싸고 맛있고 안전하다는 말을 믿다가 뭉개져 버리는 것은 나와 내 아이들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뭉개져 버린 뒤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리기 때문이다.(99쪽)

이러니 누구든 그의 글을 따라 읽다 보면 자연스레 공감할 밖에. 그리고 사태의 진면목을 또렷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 하여 독자들은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정책에 대한 홍보가 얼마나 정직하지 못하게 본질을 호도하고 있는 것인지를 시민단체의 문건이나 경제학자의 논문보다 더 명료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작가가 에세이나 끼적거리며 현실의 아픔과는 절연한 채 안일하게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격지심에 빠져 촛불 시위대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머뭇거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작가의 글 때문에 머리로 가슴으로 동조하고 공감하게 된 이들이 얼마나 많아졌는데. 그걸 작가만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까지 하다. 쌈박한 글을 읽고 나면 머릿속 꼬였던 실타래가 하나 둘 정리되고 가슴속 맺힌 응어리도 후련하게 풀리는 것을 느끼게 된다. 공지영 작가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도 그런 기분이 들게끔 즐겁고 의미심장한 독서 경험을 제공해 주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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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하는 글쓰기 - 발설하라, 꿈틀대는 내면을, 가감 없이
박미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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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들도 누구나 글쓰기를 시도할 수 있다고 북돋우는 책들이 많습니다. 그런 책들 중에서 이 책은 참 특이합니다. 상처 곁에 오래 서성인 당신에게로 시작하는 머리글부터 심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상처 때문에 밤마다 잠들지 못합니다. 외로움을 많이 타요. 불안해서 늘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좌절의 경험이 너무 많아서 무기력합니다. 실수투성이인 나를 변화시킬 수는 없을까요? 인생의 전환점에 서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고 싶고, 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 마음을 성찰하고 싶지만 상담가를 찾아가기는 부담스럽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제 얘기인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정도 차는 있겠지만 누구나 겪어 보았거나 혹은 지금 앓고 있을 법한 마음의 고약한 움직임을 거의 망라하고 있기 때문이었지요. 하여 마음결이 자연스레 작가의 내면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느꼈답니다. 그런데 이런 개연성 있는 질문에 대한 필자의 조언은 조금 의외입니다.
“글을 써서 마음을 표현해보세요. 글쓰기가 가진 치유의 힘을 믿어보세요.”
정말 그럴까 하고 읽다 보니 금방 공감하게 되었답니다. 필자는 사례 중심으로 글쓰기의 치유 능력을 또렷하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에 못지않게 인간 심리의 복잡 미묘한 부분을 학문적 근거까지 곁들여 소개하고도 있어 이론과 실제를 아우르는 지혜를 듬뿍 얻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게 딱 안성맞춤일 듯한 케이스 여럿을 메모해 두기도 했답니다. 마음결 심란해질 때 꺼내 읽으며 추스르기도 하고, 더러는 글을 쓸 때 활용할 수 있게끔 말입니다. 하여 필자에게 많은 빚을 진 것 같습니다. 제 마음의 일단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프로그램 참가자들의 심경을 고백한 글을 통해 대리만족의 기쁨도 느꼈고 앞으로 저작권료도 지불하지 않고 제 글에 많이 인용할 테니까 말입니다. 이런 멋진 책이 숨어 있는 걸 남들은 아는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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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이권우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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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부류의 글이건 서평이라면 눈길이 자연스레 가닿고 더러는 책을 읽은 다음 나름의 울림을 직접 남기기도 하는 편이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 늘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는데 도대체 서평은 어떤 장르에 속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서평의 장르적 정체성은 모호하기만 하다. 이론적 관점을 토대로 본격적인 작품 분석을 시도하는 문학 평론의 영역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에세이와도 격을 달리하는 독자적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독립된 장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학문이나 예술의 분야 혹은 장르가 독립성을 인정받으려면 그것이 다루고자 하는 고유의 대상과 이에 다가가는 체계적인 접근 방법, 그리고 그 결과물로서의 이론이나 작품의 축적 등의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서평은 대상이 명확하고 결과물도 많이 축적되어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독자적인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하는 것이 독립 장르로의 승격의 관건이라 하겠다.

이권우는 다양한 방법의 글쓰기를 통해 서평의 독자성 확보와 품격 있는 독립 장르로서의 위상 정립을 시도하고 있다. 겹쳐 읽기와 깊이 읽기를 통해 펼쳐 보이고 있는 그의 방법론의 모색은 실로 눈부시다. 특히 <호밀밭의 파수꾼> 홀든과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의 선재가 나누는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져있는 '호밀밭에서 부르는 아름다운 아이들의 노래'는 압권이다.

홀든과 선재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방식을 통해 책의 내용이나 지향, 작가의 의식 등을 명료하게 드러내기도 하고, 두 책의 소재와 주제에 대한 격조 있는 대화 과정에서 청소년들의 내면세계와 그것의 현실적 좌절 등을 실감나게, 그리하여 안타깝게 그려 보이기도 하고 있다. 정형화된 서평의 틀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파격을 우아하게 펼쳐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현란하게 방법론만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담겨진 글의 내용도 진지하고 문체도 품격이 있다. 읽다보면 누구나 가슴 서늘해지고 머리 가뿐하게 맑아지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처럼 이권우가 펼쳐 보이는 서평의 세계는 단순히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정도의 부수적인 차원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작품적 완결성을 갖고 특유의 매력으로 독자들을 흡인하는 강렬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런데도 서평이 독립된 장르의 품격 있는 창작물이 아니란 말인가 반문하고 싶다.

이권우는 그 외에도 원전과 패러디물의 대조를 통해 작가의 의식세계를 드러내 보인 '로빈슨 크루소에 대한 두 가지 변주곡', 페루 여행이라는 공통의 경험을 다른 장르의 창작물로 표현하여 작품의 소재적 동질성을 숙고해 보게 하는 '꿈꾸는 거대한 상처 잉카로의 여행'이나 거꾸로 읽음으로써 전복적 세계의 원형 탐구를 시도한 '거꾸로 읽으면 제대로 보인다.' 등의 글을 통해 서평에 관한 방법론을 다원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이들 하나하나가 독자적 장르로서의 서평 문학의 방법론적 모형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유의미하다 하겠다.

이권우의 이러한 시도는 앞으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을 것이라 확신한다. 새로운 장르로서의 서평의 독립을 염원하는 이들이 이권우의 시험적 작업에 대한 후속 조치로써 나름의 다양한 방법론을 개발해 내어 책의 세계를 심원하게 탐색해 나가는 가운데, 이들의 연대로 서평문학이라는 독자적인 장르가 점점 또렷한 실체를 갖추며, 만인이 공감하는 고유의 정체성을 인정받게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 서막을 연 이권우의 모험적인 시도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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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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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김윤아의 <야상곡>을 들으며 정희가 당신에게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를 읽고 있습니다. 노랫말처럼‘꽃잎 흩날리던 늦봄의 밤’영국더기 언덕에 마주 앉은 둘은 붙박인 조각상인양 뭇 사람의 시선을 흡인하곤 했죠. 환하게 웃던 정희의 서늘한 눈매, 하지만 그 가운덴 왠지 모를 그림자가 짙게 어려 있어 살얼음 밟듯 어찌나 조마조마 하던지. 아니나 다를까 그 어여쁜 사랑이, 눈부시게 빛을 뿜던 시간들이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버리다니요. 홀로 남겨진 당신의 상심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요. 갈피를 못 잡던 그 안쓰러운 모습이라니. 작가조차 당신의 사랑을 앗아간 자를 처단하지 못해 밤의 노래를 온전히 부르지 못하고 곁가지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았다고 고백할 정도였으니까요. 저 또한 먹먹한 가슴 추스를 길 없어 한동안 넋을 놓고 망연자실일 따름이었답니다. 그런데 더욱 심란해진 것은 오늘 이곳에게 벌어지고 있는 장면이 겹쳐졌기 때문입니다. 정희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리하여 당신을 카오스로 내 몬 그 참혹한 상황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는 게 이 시대의 실상이거든요. 하여 마음결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시대의 얼어붙은 문만 멍하게 바라보던 저는 문득 당신에게 제 마음을 전하고 싶어졌습니다. 일말의 위로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당신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픈 비슷한 부류의 인간도 있으니 너무 외로워 말라고 얘기해주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편지를 쓴답니다. 정희의 편지가 우여곡절 끝에 전해진 것처럼 제 편지도 당신에게 닿을 수 있었으면. 하나 당신이 받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쓰다 보니 어쩜 제게 보내는 편지가 되어 버렸거든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제 말은 들리나요. 어쩌면 이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겠어요.” 이렇게 시작되는 한 장의 편지로 말미암아 당신의 삶은 온통 꼬여버리고 말았죠. 그때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밤의 세계가 존재하는지 조차도 모른 채 평온하게 이어지던 당신의 삶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거죠. 진실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것들이 그처럼 간단하게 무너져 내릴 줄 아마 짐작조차 못했을 겁니다. 세계가 낮과 밤, 빛과 어둠, 진실과 거짓 그리고 고귀함과 하찮음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던 당신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달라진 건 당신만이 아니었어요. 당신을 만나기 전 정희는 혁명의 대의만 생각하던 당찬 전사였지요. 오로지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밤의 노래만 부르던 정희의 삶에 해연, 당신이 끼어든 것입니다. 하이네의 시를 적은 연서에서 “장미, 백합, 비둘기, 태양, 이 모든 것을 옛날엔 사랑의 환희에 젖어 사랑했었네. 하지만 나 이제 더 이상 사랑하지 않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조그맣고 예쁘고 순수한 그 한 소녀, 그녀는 모든 사랑의 샘물, 그녀 자신이 바로 장미, 백합, 비둘기, 태양이기 때문이라네.”라 고백하던 당신은 영락없는 낮의 사람이었죠. 그렇게나 달랐던 둘이 시대의 질곡을 뚫고 모든 것을 넘어 오로지 사랑으로만 거듭나고자 했으니 자연 격랑에 맞닥뜨릴 밖에요. 하여 당신들의 곡절 많은 사랑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하겠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정희를 통해 밤의 세력과 조우하게 되었어요. 유격대 단합호에서 생활하던 때, 당신의 눈이 어느새 어둠에 익숙해져 아주 미세한 빛에도 감응하는 것을 느끼며 낯설어 하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런 실제의 어둠에 적응해 간 것처럼, 볼 수도 없고 그리하여 믿을 수도 없는 관념의 세계로도 진입한 것이지요. 그러자 당신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 회의에 빠지고 말더군요. 가려져 있던 세계의 진면목을 알아버렸기 때문일 겁니다. 추한 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진실을 볼 수 있고, 모순과 투쟁만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잔혹해져야 하며 그제야 참인간으로 성숙할 수 있는 그 세계의 원리를 당신의 내면이 어찌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멈칫거리며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당신의 방어기제가 곤두섰겠지요. 하지만 한번 진실의 문에 들어선 다음에는 돌아 갈 방법이라곤 도무지 없기에 당신에게 닥친 카오스는 온전히 당신 몫일 밖에요. 

당신은 곧 혼돈스런 상황에 휩싸이게 되었죠. 바로 정희의 죽음 말입니다. 죽는 순간에도 행복을 요구할 수 있는 건 고귀한 자들뿐이라던 정희. 그들을 무참히 죽여서는 안 된다던, 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죽어야 할 권리가 있다고 강변하던 정희는 밤의 세계를 꿰뚫고 있던 혁명가였지요. 그래서인지 그녀는 고문을 받다 어이없게 최후를 맞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존엄한 방식의 죽음을 스스로 택했던 것입니다. 삼나무 높은 우듬지에 올라 본 까마귀는 다시는 뜰로 내려앉지 않는 법이라 했죠. 진실을 알게 된 고귀한 자들은 비참하게 죽어도 세계 전부를 얻은 셈이니까 구차하게 진흙을 묻히지 않는다고요. 정희는 수많은 목재가 땅에 묻히지만 우리가 얻는 것은 조그만 석탄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했지요. 운명과 역사 앞에서 개인은 그 조그만 덩어리를 만들기 위해 쓰러질 때 비로소 고귀해진다는 이치를 이미 꿰고 있었던 거죠. 정희가 바로 삼나무 우듬지에 올라 본 그 까마귀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그 덩어리를 만들기 위해 쓰러진 수많은 나무의 세계를 까맣게 몰랐던 김해연, 그러고 보니 제가 당신과 닮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네요. 세상 물정 모르는 백면서생에다가 까마귀같이 고귀한 자들의 세계에는 범접조차 못해 본 좀비니까요. 그저 문약한 인텔리로 제 앞가림에만 급급하여 이웃에 눈 돌릴 겨를도 없이 이익만 탐하다가 늘 뒤늦게 땅을 치곤하죠. 제 그릇이 그것밖에 안 되냐고 말입니다. 

그런 당신은 정희의 사랑을 혹 의심하진 않았나요? 운명적인 게 아니라 치밀한 계획에 의해 조종당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정희가 계획적으로 나카지마를 유혹하여 동침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당신은 질투로, 또 분노로 무너지지 않았나요? 이런 음모론을 접하고 당신은 아마 우주 저편에서 날아온 별 하나가 지구와 충돌한 정도의 충격에 휩싸였을 걸요? 자신조차 신뢰할 수 없는 밤의 세계에 대해 당신이 가졌을 실망과 적대감의 크기가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저 또한 사랑하는 이의 작은 몸짓, 사소한 말 한마디도 못 미더워하며 집착하다 결국은 상처받고야 마는 모습을 문득 문득 발견하고 오스스 소름이 돋곤 한답니다. 이런 소심한 자를 어디에 쓸까요. 

그때 나카지마가 말했죠. 김해연 당신은 자신이 누군지 모를뿐더러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그건 최도식도 마찬가지였지요. 정희는 다름 아닌 여자로서 죽었다는 것을 일깨워준거죠. 정희가 보낸 편지를 건네주며 말입니다. 당신은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었죠. 보이지 않는 부분이, 읽을 수 없는 부분이 보이고 읽혀질 때까지. 정희의 마음이 빤히 들여다보일 때까지. 

그런데 당신이 정희를 진정 제대로 보게 된 건 아마 새로운 사랑으로 다가온 여옥의 풋풋하고 발랄한 모습 때문이었을 겁니다. 여옥의 노래 소리가 당신의 밤을 깨우고 막혔던 입을 열게 했으니까요. 그리고 사진관 암실의 인화지에 당신의 손이 반투명하게 현상되는 것을 보고 빛과 어둠의 세계가 둘이 아님을, 결국은 공존할 뿐임을 받아들이게까지 되었고요. 그리하여 비록 지금 여기에는 없는 것들이라 해도 어딘가 다른 곳에서 당신과 함께 하고 있을 거라는데 생각이 미쳐 정희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상실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지요. 사진 속 정희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또 웃으며 고맙다고 고백하던 당신, 어느새 까마귀와 닮아 보였답니다. 

그리고 당신이 우연찮게 말려들었던 민생단 사건 있죠. 거기에도 정희의 그림자가 배어 있어 당신을 애틋하게 만들었죠. 정희와 당신은 정말 질긴 인연의 끈으로 얽혀있었던 것 같아요. 민생단 사건의 심층에는 용정 출신 중학생 네 명의 개인적인 애증이 자리하고 있었지요. 안세훈, 박도만, 최도식과 이정희 그들 말입니다. 나중엔 박길룡까지 끼어들게 되죠. 당장 천국을 만들고자 했던 그들은 결국 제가끔 지옥을 보게 되었지요. 그들을 에워싸고 있던 시대는 죽음이 지척에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그런 곳에서 청춘은 거추장스럽기만 했고요. 누구나 임종을 앞둔 노인에 다름없는 존재일 뿐이었죠. 하여 살아 있어도 반쯤 죽은 상태나 마찬가지였고요. 반쯤만 살아 있는 것이었기에 삶과 죽음이 서로 자리를 바꿔가면서 이뤄내는 세계였기에, 그 세계는 결국 실체가 없는 가짜가 아니었을까요. 그러기에 그 카오스를 걷어내려는 이들의 밤의 노래가 드높을 밖에요. 하여 의식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길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었죠. 소비에트에서 벌어진 이들 네 명의 또 다른 전쟁, 변절과 배신이 판치는 마당에서는 인간의 숨겨진 본성이 발가벗겨질 수밖에 없게 되죠. 이게 혁명이냐며 조직을 떠나기도 하고 두려움 속에서 스스로 민생단이라고 허위 자백을 하기도 했으며, 또 자신이 민생단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동료를 민생단으로 몰기도 했고요. 그 기막힌 밤의 시대에 이성적 객관주의의 논리가 작동할 여지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주관으로 결정되는 가혹한 세계만이 존재할 뿐이었죠. 그리하여 당신은 세상이 이토록 잔인한데 과연 인간에게 무슨 희망이 남아있는 것일까 하고 몸을 떨곤 했죠. 그 울림이 지금 여기의 제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답니다. 

하지만 그렇게 얼어붙은 밤의 시대에도 정희는 늘 누군가를 사랑하는, 아니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는 천사였지요. 그런데 정희가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낸 건 오로지 당신밖에 없다는 걸 알았나요. 정희의 유일한 참사랑은 당신뿐이라는 거죠. 그러니 정희가 체포되던 날 모든 혐의를 당신에게 덤터기 씌우고 자신은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당신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그 길을 자청했던 거랍니다. 죽음으로 당신을 감싸준 거죠. 

그건 정희에게 당신이 신생 우주였기 때문입니다. 해연, 당신을 만나기 전 정희에게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고백했잖아요. 당신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어 막 돋아난 새싹처럼 앳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거죠. 그 순간 정희는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밤의 세계를, 혁명의 대의를 어쩜 까맣게 잊고 말았는지도 모릅니다. 한때는 이 세상 전부를 원했던 정희가 말입니다. 민족의 해방과 사회적 평등이라는 고상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혁명에 투신했던 정희가 이제 자신에게 필요한 건 오직 당신과의 추억이 보물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단 한 사람뿐이라고 여기게 된 거죠. 이제 그날은 비록 다시 올 수 없다 하더라도 당신은 그게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지경, 사랑의 절정이었다는 것을 알겁니다. 그러니 애틋하고 안타까운 마음 이제는 접고 정희를 놓아 보내라고, 저도 더 이상 당신을 염려하지 않겠다고 넌지시 일러주고 싶어요. 그리하여 이제 편지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런데 한편으론 당신을 향한 이 편지를 선뜻 끝낼 수만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흔쾌하게 마음 털고 기꺼운 마음으로 보내야 할 건데 저를 멈칫거리게 하는 것들이 많거든요. 그런 제 마음을 당신께 전하여 오히려 제가 위로받고도 싶어졌답니다. 지금 여기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는 얼어붙은 시대, 당신이 겪었던 그 동토의 땅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군복을 입은 노인들이 몽둥이를 들고‘좌익’처단에 나서자고 발호하는 등 비이성적 작태가 버젓이 벌어지고 있거든요. 당신이 그토록 아파했던 30년대 일제 강점기와 어찌 그리 닮았는지요. 그 살풍경이라니. 돌이켜 보면 해방 이후에도 당신이 겪었던 아픔에 못지않은 참혹한 사태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던 것 같아요. 6·25 때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이들이 적의 프락치라는 간첩 누명을 쓰고 재판도 없이 동료들에 의해 죽어갔던 것처럼 말입니다. 민생단이나 보도연맹 사건의 상흔이 아물지도 않았는데 여전히 비슷한 유형의 마녀 사냥이 오늘 이곳에서까지 서슴없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지요. 과거의 일이 과거가 되지 못하고 현재 진행형으로 작동하고 있는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일은 시대가 이 지경인데도 제가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기만 할뿐인, 아니 어쩌면 고스란히 당해야 할지도 모르는 입장이 되고 보니 김해연 당신의 고뇌가 더욱 절절하게 와 닿는 것 있죠.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얼음장 밑에서는 녹은 물이 흘러내리듯 엄혹한 현실 가운데서도 알게 모르게 밤의 노래가 서서히 가시는 징조가 보이고 있거든요. 암흑을 걷어낼 변화의 조짐이 아직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조금씩 싹트고 있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답니다. 그런 움직임은 김해연 당신이나 나처럼 밤의 노래 소리에 질려 패배주의에 젖어버린 반쯤 죽은 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분노에 무력해지지 않고 전망을 잃지 않는, 그리하여 불가능을 기어코 가능하게 만들고야 마는 새로운 세대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제 세상의 주도권은 당연히 그들 몫이니까요. 밤의 노래를 폭압적으로 짓눌렀던 일제 토벌대에 버금갈 정도로 맹렬한 위세를 떨치는 전경대 앞에서도 결코 주눅 들지 않는 그들이니까요. 오히려 그들의 엄숙한 권위를 하찮게 만들어 버리듯 대중가요에 댄스를 뽐내던 남총련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김연수 작가가 보고 느낀 것처럼 저 역시 이런 질곡에도 굴하지 않고 발랄하게 어둠을 몰아내고자 분투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하여 새로운 세대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건설하는 데 조그만 벽돌 하나라도 보태고자 마음결 다잡고 있습니다. 하여 제가 다음에 당신께 편지를 보낼 즈음이면 아마 그렇게 끈질기게 불리던 밤의 노래가 드디어 막을 내리고 신새벽이 밝아왔다는 소식을 전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니 오늘 이곳에 대해 언짢은 마음은 그만 접고 이제 당신에게 남은 일말의 거리낌이라도 있다면 그도 털어버리시길. 

이쯤해서 김해연 당신에게 꼭 해주고픈 말이 있답니다. 삶이, 사랑이 꼭 아픈 것만은 아니라고요. 그리고 또 당신은 아프기만 했던 게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정희의 사랑이 결국은 당신을 구원한 것이었으니까요. 정략이 앞서고 배신과 변절이 판을 치던 밤의 세계, 그 미친 바람이 불어오는 들판에 가녀린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던 정희와 당신. 둘은 더도 덜도 아닌 오롯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념이니 음모니 하는 가당찮은 것은 틈입할 여지가 도무지 없을 밖에요. 오로지 인간 대 인간의 순결한 영혼으로만 교감했으니까요. 그러니 더 이상이랄 수 없을 정도로 지고지순한 사랑을 만끽했던 게 아닐까요. 하여 둘은 진정 삼나무 우듬지에 오른 까마귀였다 하겠습니다. 그 빛을 뿜던 시간들이 비록 일순간에 사라져버리기는 했지만 짧을수록 농도와 여운이 짙고 오래가는 법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옛일을 음미하면서 마음결 추스르시길. 

얼어붙은 시대를 오롯이 견뎌냈던 당신을 생각하며 여기 봄이 오는 길목에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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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2009-01-29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12-05-04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연히 검색하다가 읽게되었습니다. 정말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