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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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의 역기능을 부풀려 ‘바보상자’라고 비꼬는 이들도 있지만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유용하고도 신선한 몇몇 프로그램을 보고 있자면 그 말이 무색해지곤 한답니다. 나의 채널 선택권을 앗아가 버린 그런 것들 가운데는 괜찮은 토크쇼가 꽤 있습니다. 그런데 볼 때마다 느끼는 게 이런 프로그램의 경우 MC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무얼 맡겨도, 어떤 빈약한 소재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만족스런 결과를 낳는 MC가 있다는 거죠. 한결같이 미덥고 맡는 것 마다 품질이 보장되는 그런 진행자라면 PD보다 먼저 눈 밝은 시청자들이 알아보겠지요.
 

그런 이들 가운데 군계일학이랄까, 요즘 강호동을 빼면 더 이상 꼽을 사람이 없을 정도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강호동은 프로그램을 원만하게 진행하는 우아한 MC이기도 하지만 거의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남성성을 오롯이 지니고 있는 말 그대로의 남자이기도 하여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답니다. 뽀샵없는 날 것 그대로의 야성미 넘치는 모습에서 본연의 남자다움을 새삼 확인하곤 불끈 주먹을 쥐는 남자들도 꽤 있을걸요. 쉴 새 없이 강력한 포스가 작렬하는 통에 시청자들은 어느새 빨려들고 말게 되지요. 그런데 기를 너무 세게 내뿜어서인지 초대받은 패널이 묻히는 일도 가끔 있더라고요. 특히 <무릎팍 도사>에선 무속인 캐릭터로 분장하여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한동안 능글능글 약을 올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고함을 버럭 지르며 온몸을 내던지곤 하여 심약한 패널 가운덴 기겁을 하고 까무룩 정신 줄을 놓는 지경에 이르는 이들도 있답니다. 그런데 이런 강호동을 순하디 순한 어린 양, 속칭 초식남으로 만들어버린 사건을 최근에 목격했습니다.

바로 비야 님 앞에서 말이지요. 그것도 판정패 정도가 아니라 깨끗이 완패를 시인해야 할 정도로요. 오랜 기간 긴급구호팀장으로 활약하던 월드비전을 그만두고 새로운 트랙에 막 오르고자 하는 비야 님이 미국 유학 전 그간의 활동을 정리하며 출국 인사 겸해서 출연한 순서였지요. 그런데 그만 공격 본능으로 이글거리는 야성미의 화신, 육식남 강호동을 보기 좋게 순치시켜버린 겁니다. 완벽한 무장해제 말입니다. 너무 의외여서 이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일까 곰곰 따져보았습니다. 강호동의 가식일까, 어쩜 설정은 아닐까 하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도무지 그건 아니었습니다. 한 눈에 진정성이 느껴졌으니까요.
 

곧 그건 지고지순한 사랑 앞에 고꾸라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계산 없는 순수한 사랑 앞에 세상 논리도 동물적 공격 본능도 눈 녹듯 사라지고 본연의 인간적인 면모, 어린 양 같이 보드라운 모습이 되고 말았다는 거죠.

사랑은 정말 놀라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강호동을 초식남으로 바꿔버린 정도는 약과이지요. 아 글쎄! 하나님도 비야 님의 사랑에 감동을 먹었는지 몇 번이나 기도 응답을 해 주시고 또 동행하며 지켜주기까지 했으니까요. 빙하 크레바스에 빠지기 직전 뒤로 잡아당겨 넘어뜨린 손길을 얘기할 때 얼마나 아찔하면서도 흐뭇하던지요. 파키스탄 군인들도 종교가 다르고 본 적도 없는 외지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기꺼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의탁하기까지 했고요, 지진 피해 복구를 돕기 위해 나와 있던 보석상, 변호사들도 비야 님의 사랑에 감전된 듯 앞뒤 재지 않고 선뜻 짐꾼을 자청하여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지경으로 이끌기도 했지요. 심지어 고생 모르고 귀하게만 자랐던 부잣집 아들 이샴조차 건강도 돌보지 않고 난생 처음 겪는 험한 일을 묵묵히 해나가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무의식중에 실천해보이기도 했는데 그게 다 비야 님의 사랑의 자장에 휩싸인 이들에게서 자연스레 우러나온 모습이거든요. 과연 사랑의 힘은 높고도 크다 하겠습니다.

한때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인다는 말이 회자되곤 했지요.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남들의 절박한 사정에 관심을 가질리 없으니 뻔히 보고도 그들의 처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밖에요.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그런 사랑의 결핍과 무관심을 은유한 작품 아닐까요. 그런데 <그건 사랑이었네>를 통해 비야 님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배우고 또 마음으로 따라하다 보니 이제 겨우 색맹은 면하게 된 것 같아 여간 뿌듯한 게 아니랍니다.
 

그런데 비야 님의 그 도저한 사랑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하는 의문이 종종 들었답니다. 사랑의 저수지에 물이 가득 차고 넘치게 된 데는 분명 연유가 있을 테니까요. 먼저 꼽아본 게 지식에서, 아니 그건 앞뒤가 한참 바뀐 것 같았답니다. 사랑해야 알게 된다 했으니까요. 지식은 충만한데 메마른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처해 있는 입장 때문에, 그건 더욱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직책에 충실하는 것만으로는 이처럼 영혼을 바쳐 몸과 맘이 혼연일체가 되게 몰입하는 경우가 드물거든요.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비야 님의 그 결곡하고 넘치는 사랑은 천부적으로 발달된 감성에서 우러나온 게 아닐까 하는 쪽으로 좁혀지더라고요. 유난히 민감하고 울림이 깊은 심성이니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떨림에 공명(共鳴)할 밖에요. 그러니 자연스레 사랑의 눈길을 기울이고 가슴과 손발로 다가가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건 비야 님이 시를 좋아하고 또 분별하는 안목을 지니고 있는 걸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답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는 고은 시인의 그 짧은 시에서 많은 의미를 떠올리며 감흥의 여운을 즐기는 모습이라니. 또 ‘슬픈 사람들에겐 / 너무 큰 소리로 말하지 말아요 / 눈으로 전하고 / 가끔은 손 잡아주고 / 들키지 않게 / 꾸준히 기도해 주어요’라는 이해인 시인의 <슬픈 사람들에겐>을 읽고 가슴 울렁거리는 대목에선 아! 비야 님의 감성지수가 바로 이 정도로구나. 초민감 센서를 장착하고 있구나 하고 무릎을 치고 말았답니다.

또 비야 님 스스로 꼽은 좋은 습관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게 칭찬하고 남의 말에 맞장구쳐주는 거라 했죠. 그게 다 감정이입이 쉬 이뤄질 수 있는, 그래서 자신이나 타인에게 진솔하게 다가갈 수 있는 넉넉한 가슴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거든요. 글쎄 자신을 후원금 모으러 다니는 앵벌이라고까지 스스럼없이 말할 정도로 흉허물 없이 대하는데 누가 가슴을 열고 비야 님과 하나가 되어 그 사랑을 주저 없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가슴이 부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반응할 줄 아는 센서가 유난히 발달한, 그리고 그것을 늘 긍정적인 쪽으로 자동 변환시키는 시스템이 내장되어 있는 비야 님이기에 매사에 거리낌 없이 솔직하고 사랑이 흘러넘칠 밖에요.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올레(olleh)! 하고 외치게 된답니다. 가슴에서 비롯된 따뜻하고 진실한 사랑을 확인하고 만끽하게 해 준 비야 님 만세(Biya)!

비야 님의 사랑은 또 깊은 영성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기도가 응답되는 복도 받고 싶지만 자신이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 응답이 되는 복 또한 한껏 누리고 싶다는 비야 님의 고백에서 영성의 깊이를 알 수 있었거든요. 언감생심 복의 원천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복을 전달해주는 통로는 꼭 되고 싶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정말 울컥했답니다. 고통 받는 이들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응답이,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는 통로가 되고 싶다는 그 결곡하고 심원한 영성 앞에 내 얕디얕은 영적 감수성이 그만 고스란히 드러난 것 같아 일순 부끄러움도 밀려왔고요. 신앙인이라 하지만 영적인 떨림에 얼마나 민감하게 촉수를 뻗어 반응을 보여 왔는지 돌아볼 때마다 늘 민망할 지경이었는데 비야 님 앞에서는 더욱 초라하게 왜소해지고 만 듯하여 자괴감에 빠질 정도였답니다. 비야 님은 또 복이 들어와 쌓이는 종착역이 아니라 들어와 쌓인 복이 골고루 나눠지는 환승역이 되고 싶다고 했죠. 사랑과 평화의 도구로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도 저는 늘 제 이익과 안일만 간구하는, 그리하여 복이 제게 머물기만 바라왔다는 생각에 뜨끔해졌답니다. 신앙을 복 받는 수단으로 삼은 셈이었으니까요. 그러니 이젠 어디 가서 감히 신앙인이라고 입도 뻥끗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이런 좀비 같은 자를 어디에 쓸 수 있을는지 하나님도 골치깨나 아프실 걸요.
 

그렇게 깊은 영성을 지녔으니 감사할 수 없는 것까지 감사하는 성숙한 기도를 구호 현장에서 드리며 시종일관 사랑의 메신저가 되었던 것이겠지요. 눈에 보이는 은총은 물론 고통으로 가장한 은총까지 알아챌 정도였으니. 이 부분을 읽다가 불현듯 교회 목사님들이 <그건 사랑이었네>를 꼭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핏대 올리며 불신 지옥만 외칠 게 아니라 사랑이 뭔지, 복은 어떻게 받을 수 있으며 어떤 경로로 순환되는지, 그리고 이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은 또 얼마나 중요한지 비야 님께 좀 배우셨으면 해서요. 그러면 세상 어디에서나 환영받을 수 있을 건데. 빛과 소금의 역할이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비야 님의 사랑은 또 주변 뭇사람들과의 인연의 연쇄에서 비롯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관계의 망, 그 네트워크가 어찌나 촘촘하게 잘 짜여 있던지. 비야 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듬뿍 사랑을 안겨주며 뭐든지 밀어주는 이들이 끊임없이 중보의 기도를 올리고, 108배를, 또 묵주신공을 드리니 어찌 하늘이 비야 님을 보우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비야 님을 에워싸고 있는 이들의 깊고 절절한 사랑이 어떻게 비야 님에게 감염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늘 멘토가 되어주는 친구 수녀님, 외모에다 내면의 깊이까지 곁들인 첫사랑 남자 동창생, 실연의 상처를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던 대학 은사님, 그리고 칭찬과 배려를 아끼지 않던 부모님까지, 이렇게 많은 분들이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기에 좌충우돌하는 비야 님의 파격적인 행보도 결국은 사랑스런 결말로 아름답게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버팀목이자 보호막이 한결같이 애정 어린 눈길로 보살피고 있다는 걸 알기에 얼마쯤의 일탈은 전혀 개의치 않았던 거고요.

사랑은 받아 본 자만이 느낄 수 있고 또 베풀 수 있는 거라고 했지요. 비야 님의 곡진한 사랑도 결국은 비야 님께 사랑을 베풀던 분들에게서 옮겨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가식이 아닌 진정한 사랑을 받게 되면 가시 같이 건드리기만 해도 아픈 상처가 어느새 은은한 향기를 발하는 향주머니로 바뀔 정도니까요. 그러니 비야 님도 실은 사랑의 빚을 듬뿍 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걸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 갚고 있는 거고요.

하여 민감한 감성에다 깊은 영성, 그리고 오로지 비야 님을 위해주기만 하는 이들로 겹겹이 에워싸인 관계 망에서 비롯된 그 사랑이 긴급 구호 현장으로 달려가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을 베풀고 그들과 함께 아픔을 공유하며 희망을 꿈꿀 수 있게끔 이끌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비야 님은 늘 한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새롭게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젊은이 같은 싱그러운 이미지로 다가오곤 한답니다. 이번에 또 변신을 시도하려 하고 있지요. 현장 실무 경험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정책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이론적 배경을 쌓으려 미국 유학의 길에 나서니 말입니다. 보나마나 어려운 여건에 힘겨운 과정이 가로놓여 있겠지만 늘 긍정적 에너지가 흘러 넘치고 스스로를 행복 발전소로 여기는 비야 님이기에 이 도전도 너끈히 성공적으로 마치고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발랄하고 도전적인 화두를 던지는 비야 님을 가까이에서 뵐 수 없다는 아쉬움이 크다는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곧 환하게 웃으며 짠 하고 나타날 줄 알기에 기다린다는 게 그리 지루하지만은 않을 듯도 합니다. 못내 섭섭하기는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하여 비야 님의 그 사랑이 한결 더 성숙하고 깊어져서 어려운 이들을 전폭적으로 보듬어줄 수 있게 될 것이기에 기꺼이 마음 추스르렵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 남은 제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비야 님을 위해 중보 기도의 화살을 쏘아 올리는 일밖에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기도가 모인 사랑의 저수지에 한 모금 물이라도 더 보탤 수 있었으면 해서요. 남을 위해 기도해본 게 참 오랜만이어서 어색하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 기도를 통해 오히려 제가 더 큰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답니다. <그건 사랑이었네>를 통해 터득한 이치지요. 이런 값진 의미를 발견하고 또 사랑의 기를 팍팍 받는 기쁨을 누리게 해 준 비야 님께 너무 많은 빚을 진 것 같습니다. 이제 저도 그 빚을 다른 이들에게 갚아야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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