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로와 함께 강을 따라서
에드워드 애비 지음, 신소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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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이 넘쳐나고 있다.  이 신조어에 시대가 휘둘리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한동안 잘 먹고 잘 살기, 즉 물질적 풍요를 통한 유족한 삶 향유라는 뜻으로 이 용어가 쓰여지더니 요즘은 일상의 번잡한 굴레에서 벗어나 느림과 하강, 생태적 삶 실현 등 정신적 가치를 지향하는 생활 양식으로까지 의미 범주가 확장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소로의 삶과 내면세계를 벤치마킹 하고자 하는 에드워드 애비의 <소로와 함께 강을 따라서>는 트랜드에 부합하는 저작이라 할만하다.  인위가 아닌 유유자적한 삶, 강물과 더불어 혼연일체가 되어 자연에 의탁하는 모습 등에서 이러한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애비를 따라 읽으며 소로를 함께 강을 내려가다 보면 웰빙이라는 시대의 유행이, 우리의 지향이 얼마나 지적 허영인지, 정신적 사치인지 금방 깨닫게 된다.  부대끼며 살아내어야 하는 실천적 삶이 아닌 상징으로서 우리가 그것을 좇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시대가 만들어낸 몽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생태적 삶은 그렇게 편안하고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계의 냉혹한 법칙이 예외 없이 지배하는 조야하고 불편한 것이다.  애비 가족이 살았던 애리조나주 투산의 집 주변처럼 멧돼지가 내려오고 전갈과 방울뱀이 집안까지 들어오며 모래 먼지가 뒤덮는 야성적인 공간에서 살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 보호막도 없는 상태에서 나약한 인간이 고스란히 온몸으로 버텨내어야 할 따름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들은 애완용으로 길들여진 집개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안락과 평온을 탐하는 통속적인 자들이다.  그런 우리가 코요테가 출몰하는 야생에서 무방비로 지내기란 너무도 두렵고 힘겨운 것이리라.  아니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통속적 의미로서의 웰빙(well-being)이라는 상징적 관념에 빠져 대책 없이 느림과 하강과 생태적 삶을 지향하는 요즘의 유행을 읽는 함의를 얻을 수 있는 대목이다.  애비의 삶에 비추어보자면 많은 부분 그것은 몽환이요 아편이자 정신적 유희인 것이다. 

진정한 생태적 삶은 안락과 평온을 얻으려고 해서는 실천되지 않는다. 그것은 애리조나 투산의 척박한 환경속에서도 절망하거나 자기 연민-천박한 슬픔-에 빠지지 않고 의연히 나무를 심으며 후일을 기약하는 야성의 삶을 살았던 애비와 1세기 전 콩코드 숲에서 지난한 불편을 오히려 축복으로 여기고 기꺼이 받아들였던 소로우에게나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이문재 시인의 말-나는 생태주의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처럼 아마도 나는 야생의 삶을 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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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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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은 변절의 길을 택하였다.  그것이 심한 자의식의 손상을 준 듯 하다.  뜬금없이 흰소리를 중언부언 늘어놓는 구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스스로도 당당하지 못함을 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대의를 저버린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듯, 남들의 폄훼를 희석하기 위해서인 듯 주저리주저리 엮어내는 울림 없는 공허한 말들은 일견 노추(老醜)의 넋두리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륵의 선택에는 절개, 순결, 정통을 강조하는 가부장적 지배 이데올로기로만으로 판별하기 어려운 차원의 정서와 의지가 개입되어 있다.  순결 이데올로기는 한 인간과 그의 시대를 읽기에 너무 거칠고 편협한 잣대이다.  그런 일차원적 척도로는 인류나 문화와 역사 같은 거시적이고 심층적인 것들의 양과 질을 가늠하기에 역부족이다.

우륵의 선택을 변별하는 가늠자의 한쪽은 소리의 절대 경지를 지향하는 예술혼이어야 할 것이다.  여러 고을의 경계를 넘나들며 금(琴)을 수집하여 자신의 마음(心琴)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악기를 만들어 내려던 모습이나 악기 울림통에 비치는 미세한 변화에도 촉각을 곤두세우며 최상의 소리에 집착하던 그를 읽어 내려면 말이다.  가늠자의 다른 한편은 자신과 타자를 아우르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연민의 깊이여야 한다.  "소리는 미루지 못하고 머뭇거리지 못한다.  목숨 또한 그러하다." 고 하며 가야왕의 장례에서 순장을 모면한 아라를 붙들고 악머구리 같은 울음을 우는 우륵이기에 그러하다.  그리하여 그는 유미적 예술지상주의자이자 국경을 초월하여 인간 존재 자체의 존엄을 터득한 인본주의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소리는 결국 좁디좁은 고을을 넘고 얕디얕은 인간의 분별력을 넘어 온 세상을 아우르는 소리가 되었다.  사마귀도 움직이고 나라들마저도 울리는 살아있는 소리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우륵은 순결한 칼을 지켰던 이사부나 수준 높은 철기 문명을 선도했던 야로보다 더 광범하고 심층적인 내면을 지녔고 또 그것이 자연스레 우러나와 예술적 완성과 인간 사랑을 지향했고 실천했던 거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목숨과 이익을 위해 구차하게 변절한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훈은 이렇듯 간곡한 정서와 문체로 저급한 인간들의 단선적인 폄훼에서 그를 복권시켰다.  이 작품을 통해 김훈은 우리에게 한 인간과 그의 시대와 문화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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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교양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디트리히 슈바니츠 지음, 인성기 옮김 / 들녘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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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의 깊이는 사람의 깊이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결국 기본적 교양을 지닌 성숙한 의식의 구성원들에게서 사회의 품격이 우러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교양인들로 이루어진 깊이 있는 사회는 모든 구성원들이 집단 운영을 가능케 하는 일종의 하한선이라 할 기본적 자질, 즉 교양을 내면화하고 있는 공동체일 것이다. 집단 구성들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의 분별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타인, 다른 집단 및 이질적 문화에 대해 배척과 몰이해를 일삼을 것이며 또 이로 말미암은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관용과 이해와 통합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구성원의 의식의 역량, 곧 교양을 길러나가야만 할 것이다.

교양인이라 하면 여러 덕목을 갖추어야 하겠지만 특히 고도의 자기 성찰력과 자제력을 바탕으로 한 관용의 실천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똘레랑스(관용)를 모르는 이는 교양 있는 시민으로 여기지 않는다. 또 교양인은 다양한 타문화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상대주의적 이해심을 지녀야 하며 개인간, 집단간의 분열과 갈등과 혼란을 딛고 통합을 이뤄내는데 기여할 수 있는 역량을 보유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관용과 이해와 통합의 정신은 교양에서 우러나온 덕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관용과 이해와 통합의 원천이 되는 교양을 어디서 얻고 어떻게 기르고 또 내면화할 수 있을 것인가? 슈바니츠의 결론은 고전적이고 지극히 당연한 수준에서 내려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언어와 문학, 역사와 철학 및 예술 등에 천착하는 독서와 사색이다. 우리 동양에서도 전통적으로 교양인이라 하면 독서인을 의미했다. 독서로 교양을 쌓아 내면 세계의 일가를 구축한 전형적 인물을 군자(君子)라 하여 최고의 지성으로 우러러보았다. 현대적 맥락으로 보자면 교육의 궁극적 실현 목표인 전인(全人)이 곧 과거의 군자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군자 혹은 전인은 자신의 전문 분야뿐 아니고 광범위한 보편적 지식을 습득한 토대 위에다 인간적 품성과 사회에 대한 사명감, 인류에 대한 봉사 정신을 자각한 교양인을 가리킨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의 풍토는 이러한 교양인을 길러내는 것 보다 한가지 분야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는 기능적 전문인을 선호하고 있다. 그들이 자본의 증식과 부가 가치 창출에 유용한 요소이자 상품이기 때문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 풍토도 교양인을 길러 내기보다는 점수 획득 기능만 발달시킨 서글픈 인간 군상을 양산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시대 상황을 돌이킬 수 있는 역량은 타인에 대해 관용하고 다름과 차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분열과 대립과 갈등을 딛고 통합을 이뤄낼 수 있는 능력인 교양에서 비롯될 것이다. 그리고 그 교양은 너무나 소박한 결론이겠지만 독서와 사색을 통해 길러나가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 하겠다. 이러한 응답을 슈바니츠는 『교양』에서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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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재수 똥 튀겼네 사계절 중학년문고 3
송언 지음, 백남원 그림 / 사계절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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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차를 몰고 드나드는 재래시장 소방도로 골목이 있습니다. 평소에도 혼잡하여 다니기 어려운 길인데 5일장이 서는 날이면 더더욱 운행이 힘겹습니다. 어느 땐가 그날이 마침 장날이라 차 한 대가 겨우 빠져나갈 정도의 틈새밖에 없는 길을 서행하고 있는데 갑자기 길 가운데로 하체가 절단된 부분을 고무로 동여매고 몸통으로 기어다니며 구걸하는 분이 들어섰습니다. 그분이 지나갈 동안 도저히 경적을 울릴 수도 움직일 수도 없어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뒤따라온 차가 사정도 모르고 경적에다가 라이트까지 깜빡거리면서 나아가라고 독촉하는 것이었습니다. 묵묵히 견디다가 구걸하는 분이 길을 다 건넌 다음 차를 서서히 움직였습니다. 뒷 차를 운전하는 이는 짜증이 극에 달했던지 연신 빵빵거리며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차 옆으로 기어가는 그분을 보더니만 이제 상황을 알았다는 듯이 욕설을 퍼붓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모습을 바라보다가 사람의 품격은 약자에 대한 태도로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의 입장을 이해하려하고 그에게 연민을 느끼며 더 나아가 감정이입을 통한 동일시에까지 이를 수 있는 이의 내면이야말로 드높고 맑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송언님이 쓴 5편의 동화에는 하나같이 약자에 대한 너그러운 이해와 그들을 따뜻이 배려하는 마음을 지닌 이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된다는 말처럼 이들은 절절한 애정 어린 눈으로 연약한 모든 것들을 보기에 그들의 가녀린 떨림마저 포착해 내고 있습니다. 제비 몸짓에 담겨있는 간절한 의미를 새봄이가 알아채거나 하늘이가 임종 직전의 모습을 보고 할머니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기까지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하여 이 책에 실린 글들이 겉으로 볼 때는 음울하고 애처로워서 가슴이 미어지게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두움까지 감싸안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들의 가슴 벅찬 이야기이기도 하여 우리를 희망으로 들뜨게 합니다.

간신히 존재하는 것들, 겨우겨우 버텨내는 것들에게는 따뜻한 보살핌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약삭빠르게 군림하는 강자들의 횡포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을 그것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없다면 아마도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에서 영원히 밀려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약자 위에 폭압적으로 군림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봉구에게 수면제를 탄 우유를 날마다 먹여 자폐 증세를 유발한 아줌마나 다들 고이고이 지켜주고자 하는 제비집을 무자비하게 헐어버린 옆방 아줌마, 살아있는 콩을 실험 대상으로 죽이고자 잠시나마 생각했던 선생님,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마지막 애원을 무참하게 짓밟은 사용자와 경찰들처럼 말입니다. 이들만으로 세상이 이루어져 있다면 약자들은 물론 보통 사람들도 아마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미약하고 예민한 것들의 어두운 그늘까지도 사랑하는 이들이 없지 않습니다. 안타까이 지켜보고 흔쾌하게 보살펴주는 이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가여운 것들의 힘겨운 상황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똥을 갈기는 제비나 거동하지 못하고 관장을 해야 배설을 하는 할머니, 무기력하게 가족 부양을 다 못하고 있는 아버지나 정신 지체로 다른 이들을 힘겹게 하는 봉구의 돌출행동까지 말입니다. 이들이 있기에 제비도 기어이 새끼를 까고 할머니도 편안히 하늘 나라로 가게되며 콩도 싹을 틔우고 아버지나 봉구 같은 이들도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들 때문에 우리는 이 척박한 세상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버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을 열어주고 있는 아름다운 이들, 새봄이와 하늘이, 콩을 살려낸 병태, 그리고 우리의 따뜻한 모든 이웃들, 그들이 진정 밑바닥의 음습한 곳까지 비춰주는 한줄기 햇살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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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의적 2004-11-18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이 사는 세상을, 우리가 꿈 꿔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하니 아쉬고 내가 나서지 않으니 부끄러울뿐입니다.
 
별 아래 잠든 시인 - 자연을 노래한 3인 시집
송수권.나태주.이성선 지음 / 문학사상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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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에 와서 생태적 삶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부쩍 늘어났다. 산업혁명 이후의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 가져온 한계에 대한 반향으로 새로운 지향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관념적 이미지로서 이를 상정하고 있을 뿐 현실에서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생태학적 세계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작가들도 꽤 있는데 -이는 생태라는 분야가 감수성과 관련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들도 실생활과는 유리된 상상으로서 자연을 그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들의 생태시가 문학 작품으로서는 뛰어나다 하더라도 왠지 공허하여 우리의 감성을 절절하게 울리기에는 미흡한 경우가 많다.

<별 아래 잠든 시인>의 공동 저자인 송수권, 이성선, 나태주 세 분은 이러한 세태와 일정 부분 동떨어져 있다. 자연 속에서 생활하며 생태와 일체가 된 의식을 가지고 자연에서 우러나온 노래를 나직하고 솔직하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어가 소박하고 자그마하며 꾸밈이 없다. 그러나 그 울림은 여느 시와 비길 수 없이 가녀리면서도 끈질기게 우리의 의식과 심성에 전해져 와 그윽하게 머물곤 한다. 특히 설악산 자락에서 별을 벗삼아 가난한 삶을 꾸려나가다가 별 나라 친구들에게로 간 이성선의 시는 더욱 그러하다. 가식이 없고 인간의 고약한 냄새가 배어 있지 않다. 순진무구 안빈낙도의 삶을 살다가 하늘로 승천한 것이다. 마치 고운 최치원이 가야산에서 우화등선한 것이나 천상병 시인이 아름다운 이 세상의 소풍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간 것에 비길 수 있겠다.

혼탁하고 어지러운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켜 줄 한 줄기 싸아한 맑은 바람, 한 모금 들이켠 차디찬 생수 같이 청정한 시의 세계에 빠져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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