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8. 30. 


소비에트를 기리며

 

소비에트를 선언한지 100년이 또 흘러갔다. 언젠가 여유가 생겨 자유롭게 이동한다면 독일과 러시아를 한 번은 꼭 방문해보고 싶다. 다른 시간대였다면, 대학교를 바로 졸업하고, 대학원도 다녀보거나, 교수가 되어 전공을 심화한 연구원으로 가르치는 일도 했겠다. 그래도 한 헤겔주의자 교수에게 논리를 배울 수 있었던 건 제법 큰 영광이었지만, 전직은 소수 공산주의자로 인도됐다. 지도 교수는 무정부주의자였다. 인생이란 참 희한한 일이다. 인생의 스승이란 늘 언제나 열려 있지만, 진리 앞에서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슷한 또래에서 쉽게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만나볼 수 있다. 서로 잡지에도 기고할 정도로, 주로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한다고 익히 들었다. 어느덧 작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독특하게도, 시골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 마르크스주의라는 비판의 길을 결심했다. 그저 역사를 가르치는 일이라면 또 어떤 사람일지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전공을 잇기에는 독일 관념론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알아버렸다.『4월 테제』이후 반동이라는 단어의 결과로 찾아오는 충격이라는 변화로부터도, 깨진 구슬로 산산조각난 운명 같은 소비에트의 유산을 마지못해 잇고 있다.

 

체제 아래에 묶여버린 한 서민주의자는 공산주의를 마무리하고 싶은 갈망 때문에 우리를 저버렸다. 한 여성주의자는 분명 함께하겠다고 말했지만 등을 돌렸다. 한 경제주의자는 하다못해 아는 척하면서 탁상에 앉아 소비에트를 추억만 했다. 그래도 크게 신경 쓰지 말자고 말했다. 잘못된 선택은 돌이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동지에게는 가야 할 길이 멀고도 험한 미지의 길이라 미리 조언했다. 우리를 포기시키는 게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선택을 진정으로 포기할 때, 비로소 변증법이라는 눈으로 유물론 앞에 서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렇다. 정답이란 자신의 길로 가더라도 신경을 끄는 일이다. 우리는 각자 해낸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 최후의 발악을 얌전히 지켜보는 중이다. 그리고 조직한다.

 

레닌주의라는 또 다른 기억으로,

 

위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를 위한 해방을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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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2. 29.


트로츠키주의와 그 한계



국제주의 경향과 연속성 비판

 

트로츠키주의 이전에 트로츠키는 그의 생애와 함께 굵직한 족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의문의 죽음을 둘러싼 해명의 여부는 충분히 설명되었기 때문에, 단순히 역사적 고찰은 더 이상 논의에 있어 그 진행을 비극으로만 몰고 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한 가지 제기해야 할 사안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당사자들이 해명할 부분이란 바로 트로츠키의 생애와는 별개로, 그의 사상이 결과적으로 구 소련 내에서도 충분한 영향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그의 최후 저작으로 잘 알려진 『스탈린 전기』와 『파시스트 투쟁』과 관련된 많은 논쟁을 담은 역사 서적을 그는 꾸준하게 출판했다. 소련의 치열한 내부 투쟁에서 밀려났기 때문에 트로츠키는 멕시코로 이주하면서, 그곳에서 혁명적인 성향의 부르주아지들과 교제했다는 점은 사실이다. 중요한 점은, 멕시코에서 활동하면서 그가 아메리카, 특히 미국의 혁명을 기대하여 주도했다는 점인데, 그는 국제 혁명의 연속 선상에서 여러 민족들과의 민주적 결합을 기대했다. 트로츠키에게는 이와 관련된 대표적 저작이 두 권 존재한다. 첫째는, 『연속 혁명과 전략』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고, 둘째는, 『배반 당한 혁명』으로 잘 알려진 트로츠키의 소련 내 경제 문제를 비판한 중요한 문건이다. 물론 이는 당시의 소련 사회와 비교했을 때를 전제해야 하므로, 트로츠키 자신이 소련 사회에 대한 주관이 깃든 서술상의 한계를 보인다. 또한 그의 행적에서 교제와 관련된 인물을 고려했을 때 충분히 오해 삼을 행동을 보였다.  

 

물론 당시의 레닌 사후로 일어난 소련 당내의 내부 투쟁를 둘러싼 해석이란 실질적으로 그당시의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함부로 다룰 수는 없다. 당대 역사의 정황은 독일이 파시스트의 힘을 빌려 진격 중이었다는 사실이고, 파시스트가 유럽 전역을 광범위하게 휩쓸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역시 제국주의와의 전쟁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트로츠키는 무려 초기에 소련 국방부 장관 정도의 지위를 이르게 역임했기 때문에 인민 권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실적은 이미 소련 당내에서도 충분히 인정받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는 도피하고 말았다. 소련 내 대숙청 과정에서 오해를 부른 여러 논쟁을 남겼기 때문에 단편적인 정치적 판단이 실수라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겠지만, 소련 역사의 정립이 이 사안에서 중요한 점은 아니다. 또 다른 이유란 바로 트로츠키주의의 영향력과 국제주의의 결합, 그리고 후대의 토니 클리프, 크리스 하먼, 알렉스 캘리니코스 등 영국사관에 여전히 고취된 범유럽적 사고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일부 부르주아적 추종 태도를 과감하게 버리지 못한 자들이 혼재된 자유주의에 대한 의식을 더욱 고취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들만의 수정된 세계관으로 자리잡은 칸트주의에 대한 옹호를 숨긴다. 이것이야말로 부르주아적 경향이라 부른다. 

 

그들은 범민주적인 토대를 건설하기 위해 사회주의 운동을 곧바로 국제 민주주의 경향으로 흡수시켰으며, 기회에 따라 현재에 발생하고 있는 여러 정치적 사안들에 대한 날 선 비판을 가하고 있음에도, 실질적으로 정책적 타협주의를 옹호하는 성향만 내비칠 따름이다. 전반적으로, 맑스주의에 대한 재해석을 중시하는 신경향을 추구하여 오히려 배타적인 국내 인식을 더욱 강화시켰다. 트로츠키 역시 실제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와 같다는 카우츠키의 오래된 정치적 편견과 의견을 답습한 부분 역시 존재한다. 이러한 연속관들이 모여 칸트주의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점 역시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우리가 정당을 건설함에 있어 이것이 실질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정당 내의 구성원들은 비로소 어떠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합당한 강령마저 생략하고는, 그저 소모적인 연대 의식 고취나 시민 단체에 대한 호소로만 그치고 말거나, 공식 석상 전반의 회의론이 자리잡은 지금의 경향에 대해서도 이질적인 추종 세력을 낳게 했다는 점에서 그 위세에 비하면, 일부는 동의할 수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 역시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경과를 지켜볼 수 있는 기회는 물론 영광이지만, 그 결과는 더욱 처참하다. 이 경과란 바로 레닌의 계승자를 둘러싼 존재가 다름아닌 트로츠키였다는 식의 논리에 편승하고, 현재 발부되는『스탈린주의와의 투쟁』에 대한 편역 역시 큰 오류를 안고 있다. 이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듯이, 두 사이의 문제는 당내의 정립 과정에 있어서는 새로운 문제 의식을 일으켰지만, 그것이 경향으로 자리잡은 한 그러한 오류야말로 바로잡고 검토해야 함을 전제하며, 그리고 앞선 시도와 기초적 학습 구조의 재생산만을 반복하는 현재의 자본주의 구조 내에 뚜렷한 한계를 보이는 조직 구성에 대해서도, 지금의 정당 건설에 대한 중요성을 심화하는 것 역시, 『자본』 논의에서도 중요한 지점이다.  그러나 그러한 지적마저 생략하고는 곧바로 혁명적 연속선상의 일부가 자본주의적 지속성 내로 흡수될 수 있음을 배제하고 만다. 이를 두고 『자본』이 잘못됐다고 과연 지적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의 심각한 낙관론이 지니고 있는 기대의 오류를 내재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더욱 조악한 책임이라면, 1991년 12월 26일 부로 구 소련의 역대 서기장들이 그 취지와는 반대로, 모두가 우려했던 소련을 결국 지켜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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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2. 29. 


물리주의 비판


과학적 상대주의와 경험론의 한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하 E=mc²)은 마하의 실증주의적 경험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 체계는 가속주의적 경향과 결합하여 우주의 실체적 근거를 형이상학적 수준으로 환원시켰다. 현대 물리주의 세력은 이러한 체계의 유효성을 근거로 물리적 법칙을 절대화하려 하나, 이는 본질적으로 현상 세계의 객관적 실재를 주관적 인식의 영역으로 제한하여 포섭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현대 물리주의의 기반이 되는 이러한 체계가 가진 과학적 세력들이 그 한계를 배제한 채 정치적으로 존재한다. 

 

과학적 상대주의는 현대 부르주아 과학 기구의 사상적 토대로 기능한다. 우주 공간에 대한 해석적 상이함을 두고 물리적 특수성으로 오인하면서 발생하는 오류들은 단순한 학문적 논쟁만이 아니라 정치적 지배의 도구로 전락했다. 사물을 오로지 현상과 인식의 수준에서만 판단하려는 경향과 전체 체계의 진행 과정이 아닌 수식적 분석에만 의존하는 실용주의적 태도는 부르주아 국가 장치가 과학을 자본 증식의 복무 도구로 선점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충돌은 실재하는 모순이 아니라, 실체 없는 가설들에 의존한 관념적 층위의 반영과 대립이다. 플랑크, 보어,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노이만 등이 제시한 역학적 운동 과정은 과학적 엄밀성보다는 부르주아 국가의 정치적 요구에 부응하는 기묘한 가정들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양자역학의 관찰자 중심주의는 주관에 따른 상대성을 절대화하며, 중첩과 결합이라는 논리로 접근하여 물질적 실재의 모순을 은폐한다. 

 

이러한 과학적 추상화의 문제는 오펜하이어의 원자 폭발성 연구에서 볼 수 있으며, 고도화된 무기 체계의 확장을 초래한다. 현대의 복잡한 물리주의와 기술 발전의 결합은 부르주아 과학관을 공고히 할 뿐이며, 더 높은 생산성을 강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극 활용된다. 아서 C. 클라크의 공상적 원자론과 양자역학의 초기 설정 역시 이 학문적 체계가 지닌 비현실성과 체계적 허구성을 증명한다. 

 

결론적으로, 양자역학을 비롯한 현대 물리주의 연구는 기존의 시공간 점유 형태를 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사상적 귀결에 가깝다. 주관적 상대성에 기초한 물리적 가설들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작업은 부르주아 과학 기구의 물신성을 타파하기 위한 필수적 공정이다. 본 보고서는 현대 과학 연구의 비판적 지점으로 물리주의적 상대주의의 한계를 명확히 규명하기를 제안하는 바이다. 더불어, 현대 양자역학 연구는 시·공간의 점유 형태에 대한 또 다른 귀결의 정당화일 뿐이라는 점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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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1. 17.


구조주의 비판

 

필자에게 구조주의 비판은 초기 연구 과제였으며, 이를 국내 문제로 풀어내고자 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 실천의 모순에 대한 고민은, 프랑스 구조주의 비판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실천으로의 구체적 이행으로부터 비판적 본질에 도달하는 경로를 확보한다. 비판적 대상은 마르크스주의 진영 내부에서도 충분한 논쟁의 여지를 남긴 인물들이다. 특히 헝가리 출신의 루카치와 코제크가 주목된다. 이들은 프랑스 공산당 내에서 진행된 마르쿠제와 알튀세르 간의 논쟁과 비슷하게, 마르크스주의적 구조주의 철학자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비판적 독해 문제가 야기된다. 벤야민 역시 이러한 독해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면, 영국 공산당 내 에릭 홉스봄의 역사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라면, 그들 모두의 작업이 구조주의적 동기를 내포했다는 점은 피할 수 없다. 더불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원전에 충실했는지에 대한 자기 비판적 의문을 제기한다.   

 

루카치 비판의 핵심은, 그가 반영론의 중심에서 자의적·경험적 해석을 중시했다는 인식에 기반한다. 필자가 이들의 저작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일부 습득했음을 인정하더라도, 철학적 마르크스주의가 비평적 함의로만 제한될 때, 본질적인 실천의 문제를 간과한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이러한 실천적 통일성의 측면에서 루카치의 한계는 명백하다. 이는 여러 국가의 공산당 내부 문제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업이다.  

 

알튀세르 이전의 마르쿠제 등도 경우에 따라, 수정주의 마르크스주의로 비칠 수 있는 만큼, 반영론자들에 대한 당내의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 이는 레닌이『좌익 공산주의』에서 ‘좌파주의적 소양이 특정 이념으로 퇴색됐다는’ 지적과 함께 개시된다. 이 지적은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고찰하는 데 유효하다고 본다. 궁극적인 목적은 구조주의의 한계를 짚어내고, 그들이 놓친 마르크스주의 저작의 중심을 오히려 연구하는 데 있다. 이는 기존 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 지금도 시도하는 맑스와 엥겔스 간의 오해와는 매우 다르다는 점을 제기하고자 한다. 때에 따라, 이는 칸트주의의 편향된 인식적 모순과도 일치한다. 이 글의 핵심을 열면 이렇다. 

 

‘맑스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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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9. 14.



1. 마르크스주의와 가부장제

 


1.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관계

 

먼저 레닌의 저서를 전제로, 자본주의가 전통적이고 자연적인 가부장제를 해체한다는 지점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이는 현대에도 가부장제가 단순히 사라지는 요소가 아니라, 가족 기반의 직접적 통제에서 자본주의 경제 구조로부터 이동하는 과정 속에서 간접적 통제로 그 형태가 변형된다. 특히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이점을 많이 놓치고 말았다. 

 

2. 여성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의 한계

 

여성주의는 일부 성별 갈등 속 특수한 갈등(젠더와 성소수자 등)의 문제를 다루며 가부장제가 사회 불평등의 핵심 원인으로 본다. 그 중에는 여성의 경험에 집중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놓칠 수 있는 부분을 조명하자면, 특히 여성주의의 그 한계는 일부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에서 보여지는 경제적, 통계적 분석이 취약하다는 문제와 사회 비평이나 철학적 담론으로만 다루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여성 노동자의 착취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간과하고, 자본주의 논의를 가리면서 오히려 현실과 동떨어지게 만들 수 있다. 

 

3.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의 유효성

 

여성주의가 가진 그 한계 때문에,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이 더 유효하다는 결론이다. 

 

구조적 모순 진단: 마르크스주의는 여성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윤리나 문화적 편견이 아닌, 극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에서 찾는다. 이는 여성의 임금 격차, 경력 단절, 무급 가사 노동 등이 모두 자본주의의 노동력 착취 및 이윤 극대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파열음'에 대한 통찰: 자본주의가 가부장제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남성의 역할 상실, 여성의 이중 부담과 같은 '파열음'은 단순히 성별 갈등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사회 관계를 재편하면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형태의 억압이라는 점을 파악하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시각이 분명히 필수적이다. 

 

4. 계급적 시각의 필요성

 

궁극적으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보는 일은 모순적이지만,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여성주의가 제기하는 문제를 바라볼 때 비로소 그 문제의 본질에 가닿을 수 있다고 정리한다. 이는 여성이기 때문에 반드시 여성주의적 시각을 공유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며, 진정으로 여성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추상적인 담론을 넘어 경제적, 구조적 분석의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결혼 제도


 

오늘날 혼인 제도의 의미

 

일부 시각에서는 혼인 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앞서기 보다는 너무 나간 견해라고 본다. 오히려 결혼식 문화는 거기에 들어가는 혼수 비용과 서비스를 더 요구하기 때문이다. 특히 상견례에서 가족 간의 결합을 강조하는 나머지, 매력이 반감되어 패스트푸드 같이 손 쉽게 신부의 날을 망치기도 한다. 신혼 생활도 그리 오래가지 않는 듯이 보인다. 신혼 생활에서는 정(情)에 너무 많은 신경을 쏟기 때문에 주위에 더 많은 것을 놓치고 만다. 특히 결혼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은 양측 모두 가지게 되며, 자본의 유무에 따라 측정된다. 비교적 안정적인 쪽이 추가로 부담하는 구조에서도 보이지만, 결혼식은 하루 동안의 짧은 식을 거행하고자 동반되는 너무 많은 대가를 치른다. 반면, 가수 하림 씨나 해외에서는 배우 호아킨 피닉스 씨의 단조로운 연주회나 전시회 감상으로 대신하는 파격적인 사례도 있다. 따라서 결혼식이란 서로에 대한 계약에 따른 종속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약속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이혼 가정에서는 번거로운 재혼을 하고 다시 가정을 이루려는 강박적인 삶의 모습이 지금의 소비 생활에서 한 축을 이룬다. 그러나 결혼식은 생각보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기념의 의미보다는 축하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족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는 성소수자나 한 부모 가정에도 해당한다. 

 

그들만의 특수한 결혼식

 

물론 차이고 나면 그만이다. 흔히 연애와 결혼은 매우 다르다고 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어떤 매력을 느껴 속궁합을 이루더라도, 그 경험의 시간이 오래가지는 않는다. 이후로는 각자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뒷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애를 하면서 느끼는 감정에 매몰된 태도가 오히려 인간을 더 저급하게 만들기도 한다. 오히려 연애를 했을 때 인간의 본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혼수 비용을 더해 여기에 신혼 여행까지 고려한다면, 소수의 결혼식은 더욱 화려해지고, 꾸며지고자 보여질 뿐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청혼 비용과 훗날의 세금 비용도 같이 들어간다. 어떤 선택이든 만족하면 그만이지만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질 때, 그 결과가 잘 이뤄지는 경우는 드물다. 단순히 매력을 넘어 호의에서 시작된 결과의 끝도 썩 좋지는 않았다. 특히 정치인들과 언론에서 출산율과 청년들을 운운하기 이전에 이런 경제적 사고를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 반문해볼 때가 많다. 그렇다면 청년들은 결혼보다 왜 연애를 더 선호할까. 


여기에는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어떤 사람은 피임 도구가 발달했기 때문에 연애를 더 선호한다는 그럴 듯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순히 피임 도구 때문에 출산율이 낮아진다면, 그건 한 예방일 뿐이지 결혼의 이유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사회적 인식을 갖췄어도, 경제적 사고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매력을 즐기는 문화라면 철이 많이 지났다. 상대방의 외모와 재력에 더 끌리는 현상도 충분히 이해는 간다. 그러나 이마저도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한 억대 기업가의 이혼을 둘러싼 몇 천억 대의 상속 문제를 보지만, 그들에게는 아마 껌값 같은 비용들이 날라갔을 뿐이며, 또 다시 막대한 부(富)로 채워진다. 그들의 세월 묻은 호주머니에 비하면 가난한 청년들은 그들만의 연애를 경험하고, 연예를 즐기고자 하지만 겨우살이로 번 지갑의 잔고를 더욱 비도록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사람과 접촉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마저 사라지고 마는 자본의 선순환이 아니면 무엇일까. 

 

성인물

 

예전에 허전한 마음이 자주 들었을 때는 성인물을 틀어놓고 혼밥을 하고는 했다. 소리는 낮추고 조용히 감상했다. 바지를 내리지는 않았다. 가끔 살인에 대한 영화를 보면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처럼, 강간하는 장면을 보면서 식사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유도 없는 죄책감과 자괴감에 빠지고는 했다. 이후로는 잘 틀어놓지는 않고, 검색의 빈도를 줄이게 됐지만 말이다. 알게 된 사실로는, 성인물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결혼한 배우자를 가로채거나, 자신의 노예로 복종시키면서 관계를 맺는 과정은 과연 성인물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고는 했다. 아무리 배우라지만 그러한 일은 되도록 근절될 필요는 있어 보인다. 화면으로 비춰지는 영상의 반영일 뿐이지만, 실제로는 더 한 일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거장 영화 감독들은 현실이 가상보다 더 하다는 말을 자주 내뱉고는 했다. 맞는 말이다. 특히 성관계 기술에 있어 때때로 무작정 돌진하는 남녀의 관계보다는 여성 둘이나, 여성 동성애자들이 관계 맺는 장면을 보는 게 전희를 더 잘 보여준다. 어쨌든 연애든, 결혼이든 몸을 잘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몸을 해치는 장면이라면 수 없이 본 터였다. 논란도 많았던 성인물 잡지를 몇 번 구독하거나, 관련된 성인 장난감을 수집했을 때도, 기계를 활용한 중독보다는 오히려 손을 사용하는 게 더 낫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성인물과 선정적인 영화는 여러 비슷한 점이 있는 듯 하다. 성인물이나 폭력적인 영화를 단순히 금지시키는 일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부르는지는 충분히 인간의 성욕을 고려해보면 예상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성욕마저 나쁘고 해롭다고만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마저도 자신의 성욕을 오히려 인정하지 않은 결과에서 나타나 더 큰 문제를 일으키고는 만다. 이러한 쪽에는 본능적으로 관심 없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성욕자들은 자신의 성욕을 인정하지만, 때로 큰 불편을 겪는다고도 말한다. 반대로, 너무 많은 성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걸 해소하지 못하면 버티지를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성욕의 문제도 있지만, 이상 성욕은 그 본능을 차단하기만 한다고 해서 해소되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이 사람들은 스스로 적절한 공간에서 잘 해소할 수 있어야, 개인의 욕구를 잘 풀고 비교적 건전하게 생활한다. 하지만 특히 젊기 때문에 자신의 본능을 주체하지 못해 타인에게 더욱 해를 가하는 여러 사례들은 단순히 범죄 그 자체 때문이라면, 과거에는 단순히 치마가 짧거나, 노래 가사가 저속하다는 이유만으로도 경찰 단속이 이뤄지기도 했다. 오히려 현대에는 금품을 매수해서 인간마저 사유화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들이 더 크다. 사내에서도 계급이나 지위로부터 붉어지는 문제들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도 건강한 성생활마저 아무리 교육을 하더라도, 그 문제가 더 크다는 점을 보게 된다.

   


부르주아식 여성 해방 운동 비판


 

여성이라는 수식어

 

여성 노동자의 언어로 말해보자면, 현대 여러 기관에는 '여성'이라는 주어도 수식어가 붙는다. 여성 가족부, 여성 신문, 여성 영화제, 여성 운동가, 여성 상담소 등 심지어 여성 대학도 있다. 이처럼 여성에게 붙는 단체 이름도 매우 많다는 걸 실감한다. 부르주아 국가에서는 그런 식으로, 여성을 쉽게 길들일 수 있고, 자신의 권리를 표현하도록 믿게 만든다. 그러나 일부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때는 계급적인 인식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젠더라는 말을 번역할 수 없어서다.「여성 신문」의 존재를 알게 됐다. 주요 주장에는 기업 아래에서 인센티브를 내세운다. 그러나 봉건제 아래에서 '인센티브'가 다름 아닌 지주에게 '봉사하는' 고역 노동이었다는 걸 충분히 상기해본다. 성 착취로 보자면, 남녀 공용 화장실이 분명히 있음에도, 성중립 화장실을 요구하는 등, 꼭 여성의 요구는 여성만의 특권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러나 이 화장실이 분리된 건, 다름 아닌 정확한 성별 분리로부터 차별적인 역할로 나누고자 함이 아니라, 성에 대한 배려에도 있기 때문에, 남녀 화장실은 분리될 수밖에 없다. 꼭 화장실이 차별을 조장할 수 있다는 건 문제 의식일 뿐이지, 전제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물론 흑인이라는 인종 때문에 화장실을 못 쓰게 만든 역사적인 일도 있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여성 흑인이 더 부당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삼가게 된다. 주위로는 특히 젠더를 읽을 줄 아는 여성들 덕분에, 온갖 로맨스와 문학 작품들, 그리고 소비할 수 있는 차고 넘치고도 대상화되는 상품들도 또 다르게 널리 퍼진다. 매우 우려를 표했음에도, 그들은 심지어 그것을 똑같이 즐긴다. 그래서 가급적 성차별·성폭력적인 표현도 피하고 다녔다. 거름망처럼 걸러 들어야 하는 말들도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는 보편성을 위해 또한 그 인권을 위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기관들은 여성을 특수성에 따른 대상으로 도배시킨다. 덕분에 여성 혐오를 남성들에게 더욱 조장하고, 남녀 구분에 있어서도 성희롱까지 서슴치지도 않는다. 단순히 범죄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어린 생각을 가졌기 때문일까. 충분히 젠더 관련 책들을 많이 탐독해봐도, 공감대를 이뤄내지도 못하고, 결국에는 여성의 연대에 호소하는 동맹이 남성들에게는 더욱 멀어진 분열로 끝나고 말았을 때, 앞으로는 잡담으로 마무리되는 시간들도 참 많아진다. 자유로운 성관계의 만족은 잠깐의 희열을 줄 수 있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언젠가 육체의 책임은 생각보다 무거워진다. 여성은 단순히 가족을 이루게 될 때,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자아인, 자녀를 낳으며 알게 될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돌봄이라는 보육이란 단지 머리로만 알 뿐이다. 자꾸만 원인을 딴 곳에서 찾고 말아 문제는 생겨난다. 그리고 일이 일어나면 아이를 탓한다. 특히 <노동자 연대>에서 기고한 여성에게 있어 임신 중절권은 그 자신이 단순히 쾌락을 위함인지, 자녀를 위함인지를 묻지 않는다. 그 선택의 결정이 여성에게 온전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사자의 책임이 분명 존재할지라도 쉬쉬하고, 그걸 무시한 채로 자신의 권리만이 남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격한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의 신체는 온전한가. 그동안 의도된 투약과 노동의 탈진, 그리고 성폭력으로 인한 훼손된 신체에 있어서는 법적으로 더 온전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 주장은 잘못됐다. 이외에도 더 거론하고 싶지만, 젠더에 있어서도, 그동안 여성의 신체를 성관계에만 의존했다는 점에서 여론에 휩쓸린 결과를 따라 <노동자 연대>는 여성 해방에 대한 그릇된 시각을 잘 보여주고 만다.

 

전역모 논증

 

남성들에게는 철 없다고, 또 무식하다고 여기던 버릇이 남는다. 그들은 첫 사회로 나와 또 다른 희생을 요구하는 폐쇄된 회로와 같은 체제로부터 통제하는 법을 먼저 배운다. 청년들은 군대로 끌려가다시피 해서, 훈련장에서 전역모의 추억을 맛본다. 자신보다 아래인 사람들에게 하대해서 돈을 걷으면 전역모를 마음껏 꾸밀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만, 그 사람이 부조리한 어떤 힘을 가지는지, 전역모는 치장에 있어 화려하게 꾸며지기도 하고, 평범한 모자가 되기도 한다. 헌금을 얼마나 투자했는지에 따라 좌우된다는 점에서도 얼마나 놀라운 모자의 변신인가. 군대에서 안보 교육을 받는다면, 매체의 통제를 더욱 잘 볼 수 있다. 그곳에서는 좌우, 남북을 가리지 않고 합작해서 적을 섬멸하고, 전쟁에 있어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훈련이 강제된다. TV와 인터넷이 생긴 이유로, 수 많은 정보는 여성의 매력적인 특수성을 말한다. 그러나 성별에 따라 생겨나는 분명한 보편적 요구를 말하지도 않는다. 덕분에 더욱 난해할 수밖에는 없는 복잡하고, 특수한 개념들이 만들어진다. 


전에 잠깐 거론했었던, 로자 룩셈부르크 갤러리에서도 일부 마르크스주의를 이용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수법으로 그러한 변장을 했지만, 논쟁에 있어서는 반론을 더 이상 제기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다. 이마저도 일부로 드러난 모습이다. 노동 계급에 있어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노동 현장에서 당하는 준강간과 같은 범죄의 우려와 부르주아지가 가진 자본의 힘을 가진 자들에게 맞서지 못하는 무력감으로 합쳐져 있다. 따라서 노동에 관련된 요구마저 정당하게 맞서지도 못해보고, 다른 쪽으로는 피하고 마는 셈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그들은 젠더주의 페미니스트의 퀴어 이론이 여성 노동 계급의 자본주의 노동 해방에 대한 요구를 대신들어 줄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말로 그러한가.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노동 현장에 있던 마르크스주의자는 계급 착취에 따른 폭력만 두 눈으로 보게 된다. 그런 태도가 모여,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이 부르주아지를 위해서라면 충분히 자발적으로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여성만의 기관

 

따라서 같은 반대라도 이유는 다르다. 유익한 남성은 자신의 힘을 기르고자, 어떤 사람에게는 치우친 생각에 빠져서, 거울처럼 혐오를 이용하다가도, 또 쉽게 잘못된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지고 말아서 범죄를 낳는다. 바로 악순환의 탄생이다. 그리고 남성도 군대를 가니, 여성도 군대에 가서, '평등하게' 인센티브를 받자는 식으로 걱정을 앞세우고, 논란을 더욱 부추기도록 만든다. 극우 남성이든, 극좌 여성이든 각자의 특수성이라는 함정에 빠져서, 공통적으로는 보편성을 잃는다. 그들의 요구는 차이에 있어서도 계급적인 인식과 더욱 멀어진다. 또 다른 프레임이라는 감옥에 갇히고 마는 꼴이다. 물론 심각할 수는 있지만, 꼭 출산율의 문제만은 아니다. 출산률이 낮아졌다는 건 국가에 있어서지, 국방력이 낮아졌다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주아 국가에 있어서는 자유 한국과 <조선일보>만큼이나 기괴하게 기관화되어 통폐합된 여성 가족부의 폐지는 요구여야만 하고, <여성 신문>도 분명 폐간이 언젠가는 필요하다고 보더라도, 그건 남성의 요구가 아니라, 여성의 전적인 필요에 따른 요구로부터 나온다. 단순히 여성이 더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앞서 노동자인가, 자본가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재산 유무라는 구분에서 강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에 따른 성별의 특수성도 더욱 문턱이 낮아지고,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자본주의 아래에서 가정은 이미 무너졌다. 당신들이 홍위병만큼 파괴하신 걸 보신다면, 온갖 낭만적인 연애에서 시작된 자신만의 '특수한' 결혼과 이혼으로 뒤범벅된 사랑의 변증법 아래에서는 제도가 낡아질 뿐이다. 


그렇다면 독자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으로, 어떤 선택을 내릴 수 있을까. 여성의 특수성은 자신만의 언어다. 자신의 계급 아래에서 마르크스주의 언어로 분명하게 번역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당했던 온갖 수모를 가지고도, 복수에 찬 나머지 눈이 멀어 부르주아지라는 지배 계급이 되고자 노력하게 된다. 나중에는 똑같이 부조리한 힘을 가진 권력자의 시녀로 남고자 갈망한다. 그런 여성들이 더 세월이 흘러, 안락 의자에서 편안하게 앉아,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서 남편의 불평으로 남은 독서 토론을 하고, 뜨개질을 배우면서, 다시금 남편의 종노릇을 자처한다. 여기에는 자녀란 이미 떠나고 없다. 자본주의 앞에서는 똑같이 소비되는 이론의 말에 현혹되어 아이 없이 깨어난 여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목욕물에 물을 버리는 게 아니라, 다음 차례가 오는 자신의 아기를 버리고 마는 일과도 같이. 제대로 말뚝을 박아버린다. 그리고 밤낮으로 아이를 탓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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