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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2. 07.


무산 혁명 전환을 위한 에비 단계

 


우리는 민주 공화국의 '비공식' 논리와는 철저히 무관하다. 이 작업의 특성상, 앞으로는 기존의 정치인에 대한 언급은 가급적 자제하며 준비할 것이다. 기존 정치 행보의 수준을 면밀히 지켜본 결과, 우리의 지적 · 정치적 수준에 훨씬 미달한다는 판단이다.

 

혁명 역량의 구성과 역할

 

공산당의 지침은 모든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의식에 기반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소수의 직업 혁명가로 구성된 지식 계급과의 연계가 예상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프롤레타리아트만으로는 혁명적 결사에 충분한 기반이 될 수 없다. 특히, 이곳이 자본주의 사회임을 이해할 때, 실천적 · 비판적 지식 계급의 중요성과 우리의 활동 도모가 명확해진다. 따라서 지역적인 네트워크의 도움 역시 중요해진다.

 

무산 권력 장악과 정부 형태 전환

 

만약 (이는 가정일 뿐이다) 우리가 직접 권력을 창출할 수단이나 방편을 지니게 된다면, 기존의 선거제는 폐기된다. 우리의 역할은 기존의 정부 형태의 보존이 아닌 최대한의 파괴에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 권력 기구의 수립을 위한 북측과의 협의와 논의를 차차 진행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기존의 주권 정부 형태는 공식적인 협상을 표명한 적이 없으므로, 차분히 계획을 수립할 때, 예전과 같이 유격전을 도모하거나 전투원의 희생을 소모할 필요는 없다. 현대는 전쟁의 양상과 교통이 발전했으므로, 우리는 '혁명적 전환'을 정확히 표기하며 이행하는 것이다.

 

조직적 태도와 주 노선 확립

 

우리는 소수 혁명가 양성과 그 교육 집단의 진지한 양성에 깊은 태도를 보인다. 역사적 교훈을 발판을 삼아, 현 유럽 공산당의 일부 퇴조를 염두에 둔다. 이는 서구 사회가 자본주의에 무력할 뿐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정부(조선) 형태나 대통령과 관련된 언급은 우리 또한 앞으로 다룰 일은 없다. 관련 노동 단체가 있다면, 그들과의 행보 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이며 무관하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밝힌다.   

 

추상적인 노동 조직 기구는 반드시 멸한다. 다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 첫 걸음을 직접 실행할 뿐이다

 

*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제시된 조직 기구 운영과 이러한 정치적 계획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나중에 체계적으로 후술한다. 우리는 이러한 불법적행위의 결과마저 수용하므로, 오히려무결점을 주장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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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9. 16.


마르크스주의 연구회를 희망하며

 

생각해보면, 자신만 알고 있는 계획이 그렇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한, 널리 알리는 게 알맞다는 생각이다. 아마 부서 개설로 시작한다면,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알맞겠다. 대학도 사회·과학의 제 기능을 못하고 있을테니까 말이다. 무슨 이유인지, 당원이 되고 싶다는 방문객들이 점점 늘어난다고 느낀다. 해외에서도 관심을 많이 보인다. 아무튼 글이 정돈되니, 집중은 더 잘되니까 말이다. 오히려 선진 국가들은 이미 공산당이 고일 정도로 오랫동안 고착화됐기 때문이다. 특히 비선진 국가나 저개발국에서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보여준다. 네팔도 공산당이 있어서 그런지, 반갑기는 하다. 단순히 구호만 외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새로운 생각을 두려워하는 일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지금은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두려워 인공 지능도 검열을 받는 세상이니까. 극우든 극좌든, 실질적으로는 국가법이 가진 '사상의 자유''국가의 보안'과 충돌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더 연구를 해봐야겠다당신의 지능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선택이 아니라, 이제는 필수가 되어가는구나두려웠던 이유가 있었다. 본인의 긴장 속에도 무고한 사람들을 옥 중에 보냈으니까이것이 국가의 현실이라면, 어찌해서 맞서지 않을 수 있을까정작 중요한 문제는 생사가 달려 있으니 말이다여기에는 매일 같이 심문을 받고, 조사를 받으며, 사상을 검증받는 자유가 있다조직 건설의 체포가 두렵다면, 이미 옥중 수고를 기록했을 테니까공부를 하고, 용기를 내야할 때다어떤 각오라도 임할 수 있다면 말이다그동안 대학은 '합법적인' 마르크스주의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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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9. 02. 


부르주아지의 폭력

 

 

부르주아지의 평화

 

여기서 부르주아지는 지배 계급 일체를 말하며, 유산 계급에 속한 사람들도 모두 포함된다. 현대 부르주아지는 더욱 이 둘 간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모든 폭력은 해로우며, 발휘되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계급에 대한 시각과 이론이 조금씩 무르익고 있을 무렵, 평화에 대한 강박이 꼭 지배 계급 간 전쟁이라는 양상으로도 나타난다는 점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지배 계급과 유산 계급이 사용하는 폭력이 무엇인지를 알아간다. 특히 이에 대해 현대 철학자들은 모든 폭력에 대해 보편성을 거론한다. 특히 구조적 폭력과 언어적 폭력으로 구분짓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막상 폭력을 사용해야만 하는, 그 상황에 처하게 될 때는 어떻게 사용할지조차 몰랐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일정 부분 지식인이기에, 자신의 계급에 갇힌 협소한 소시민적인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결론을 체제에 순응해야만 한다거나, 그마저도 교훈적인 폭력의 결과에 따른 단상으로만 그치고 만다. 하지만 적어도 본인은 자신의 위치에서나, 계급적인 요구에서 한 조건이 알맞다면, 폭력의 사용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국가나 체제를 수호한다거나,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정부 군부에 의존한 무력 간 충돌에 따른 폭력이라거나, 익히 들은 내전의 양상을 띠는 전쟁을 주도하고, 제국주의를 더욱 암묵적으로 드러내고자, 수 많은 무고한 인민들을 학살한 사건들을 보더라도, 오히려 그것이 국내와는 무관한 일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물론 자본주의자들의 끝은 언제나 인민 간 내전으로 가장한 지배 계급 간 전쟁으로 표현되기도 했고, 바로 부르주아적인 평화주의자들도 내세우는 전쟁에 대한 협상에 앞서 더욱 지배 계급 간 협상을 중재하려는 태도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표현된 바는 바로 프롤레타리아트를 더욱 고도로 억누를 수 있다는 생각과 통제할 수 있는 시각적인 매체와 지배 계급들의 선동에서도 보여왔다


저항을 대표하던 한 정권이 집권을 하게 되면 순식간에 모든 일들은 사라져버리고, 모든 인민들이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환호를 보내는 듯이 보여진다. 하지만 유산자들은 너무나 손 쉽게 노동 자들을 자신의 소유지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로부터 무책임하게 죽음으로 내몬다. 늘어나는 노동자의 수가 대변이라고 해주듯이, 우리는 폭력을 감추고 살거나, 시각적인 매체로부터 지배 계급과 유산 계급 간의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를 축하하면서, 저항한 사람들을 역사적으로 기리고 만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여야당을 막론했다. 우상 숭배에 대한 끝을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전쟁을 반대하기만 하면, 지배 계급들로부터 협상되는 국가의 보호라는 안전망이 언제나 대중들도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 자부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지배자들과 자본가들은 더욱 튼튼한 건물과 보안 경찰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자신들의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해간다. 어쩌면 부르주아적인 평화론자들이 구축하고 있는 또 다른 지배 계급과 유산 계급의 모습들인 셈이다. 더 높이 세워지는 건물들과 더 나은 인민을 통제하는 방식은 더 이상 이념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져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 지배자가 국내의 모습을 보며, 혁명과 숙청이 일어나냐고 물었을 때도, 같은 방식으로 협상에 대한 기대를 그들만의 '평화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굳게 믿음으면서, 자신들의 손에서 일궈낼 수 있다고 떠벌리고 다닌다. 그들은 정부의 무기를 가졌고, 방위 업체까지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 쉽게 진압하면서, 앞서 자신들만의 세상을 그려내며, 인민들을 더욱 무력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지배 계급과 유산 계급이 기대하는, 싸울 수 없도록 노동자마저 줄어들게 만드는 그들의 전략 속에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력을 바로 자신들로부터 손 쉽게 진압하고, 학살할 수 있다는 분명한 믿음과 자만에서 때로는 기인하고 있는 것 같다.

 

프롤레타리아트 폭력

 

가끔 체 게바라의 게릴라전을 읽는다. 가진 것이 없어서 범죄를 일으키고, 소요에 그치고 마는 과격한 시위로 머무는 운동들은 군대와 경찰들에게 체포되면서 쉽게 멈추고 만다. 그러한 간접적인 장면이라도 볼 때면, 단순히 지도자의 부재라기 보다는, 오히려 현대 혁명 전략과 전술이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아직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실 전 세계에서도 시위가 일어나는 양상들을 살펴보면, 생각보다 그 힘이 미숙해서 충분히 발휘해내지 못하거나, 일찍 그치기도 하기도 해서, 장기적으로 분명한 목적과 끈기 면에서 아쉬울 때도 많이 보였다. 심지어 그러한 훈련의 경험이 없어 은행마저 어떻게 점거하는지를 미숙한 태도마저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이제는 게임에서도 시뮬레이션으로 손 쉽게 이러한 경험을 체험해볼 수 있지만, 현실은 아무리 훌륭한 전략과 전술을 갖추더라도, 모든 범죄들로 재판 받고 곧바로 없는 사람에게 뒤집어 씌우는 과정 속에서 부르주아지들만의 의회가 자신들의 복장 따위로 논쟁을 벌인, 그러한 연회의 수준마저 은연 중에 드러내고 말았다. 여기서는 군부 독재를 일으켜 반대를 부르짖는 장본인들마저, 이제는 국회 속으로 하나가 되어, 그들만의 파티를 즐기는 중이다. 우리에게는 폭력을 사용할 여지도, 그러한 힘도 갖추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파괴적인 본능에 힘 입어 때려부실 수 있다는 생각은 그들과 우리가 같다는 점만 드러낼 뿐이다. 이러한 논리를 각국의 평화론자들은 자신의 희생으로 귀결시키면서, 부르주아지들에게 맞설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양상도, 변화되는 과정도 분명 다를 수밖에는 없다. 지금과는 다른 고도의 기술적인 발전을 앞세우고, 지배 정부를 앞세운 모든 국가들에서는 하물며 유산 계급들의 파티마저 지배 계급들도 자신들의 벗들을 찾아 노동 계급과 무산 계급을 더욱 무력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출판되는 연구 이론들은 대체로 앞으로 희망찬 전망을 말하면서, 더욱 무의미해지는 혁명의 필요 조건과 필수 조건에 대해서는 단순히 위험하고, 잔인한 생각이므로 멈추기를 바라고 만다. 노동자들이 사고로 가장한 자본으로부터의 살인마저 꾸준하게 그 수가 늘어나고 있음에도 말이다. 더욱 부유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은 한정되어 가고, 생계에 대한 위협을 받는 사람들도 늘어났다는 요즘에도, 포화 속의 글만큼 일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또 아니면 부유한 사람을 꿈꾸며, 뼈 빠지게 일해서 그나마 누릴 수 있는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인민 대중에게 있어 부르주아지들의 폭력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소시민이 말하는 평화적인 방식과는 무엇이 달라야만 하는가. 가끔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무산 혁명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을 많이 듣고는 했다. 하지만 한강에서 가만히 앉아 생각해봤다


그 말이 과연 희박한 확률일까. 그렇다고 해서 쉽게 자본주의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생각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배 계급과 유산 계급이 무너질 수 있을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교과서처럼 민주주의를 배워왔고, 체제를 잘 유지하고, 세우는 게 당연하다고 배웠다. 정작 세상 밖으로 나와 겪은 것은, 소중한 사람들의 헛된 죽음이었고, 돈이라는 욕망에도 눈이 먼 사람들이었다. 그 눈으로 가려진 채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가난한 사람들은 폭력을 쓸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그리고 단순하기 때문에, 폭력에 따른 혁명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왜 그러한 체제를 붕괴시키는 폭동에 더욱 가담했을까. 무산 계급에게도 군대는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정부 속의 군대로부터 억지로 징집되거나,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단순히 인민을 대변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필연적인 결과이지만, 어쩌면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 준비를 앞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덧, 저 부르주아지들의 비웃음에 갇혀버린 우리들의 무력한 모습 속에서, 계급 운동이 더욱 살아나도록 도울 필요는 있다. 그럼에도 정부군의 역사가 아닌,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에서도 보여주고 있듯이 혁명군이라는 무산 계급의 무장을 위해서도 미리 전략과 전술을 앞서 잘 세울 필요는 있어 보인다. 더욱 당연해지고, 첨예해진 계급 간 관계와 사유 재산를 두고 둘러싼 긴장 간 전쟁, 착취된 토지의 부름에 있어서도, 그리고 조국으로 인해 먼저 간 노동자를 위해서도 비록 건장한 체력은 아니지만, 본인도 필요하다면 군부 폭동의 가담이 아니라, 누군가 죽음을 비웃고, 아무리 실패로 끝나더라도, 부르주아지들에게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력은 참가하고, 도울 의지는 충분해진다. 그리고 그 문제는 단순히 노동 계급으로부터 표출된 그 이상의 요구를 담아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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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4. 16.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란 무엇인가

 

꾸준하게 말하지만 <국가와 혁명>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뜻에 대해서도 숙고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모든 저작을 곱씹어 볼 때도, 우리는 <국가와 혁명>은 꼭 읽어봐야 할 저작이라고 자신 있게 말해본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내전>에서도 언급했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한 물음이란 곧 코뮌에 대한 질문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바로 앞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다음 질문이란 민주주의를 정의 내리지도 못하고, 추상적으로만 아는 민주주의 수호가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라는 점이다. 그렇다. 여기서 추상이라고 한다면 대중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관념적으로만 뭉뚱그렸거나, 또는 엉뚱하게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그리고 간접적인 대의 민주주의를 직접 민주주의와 뒤섞어 놓고는 알아서 혼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는 곧 직접 참가를 바라는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그리고 지식인 계급만이 아니라, 인민 모두에 대한 참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을 포괄할 수 있고, 소수 지식인들로부터 사고됐던 민주 요구를 옮겨와 대중 모두에게도 집중할 수 있는 민주 제도를 구비하고자 더욱 노력해왔다. 그러나 여기서 대중 요구에만 머물지도 않는다. 그들은 '시민'이라 말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투쟁하므로, 우리는 더 이상 한 나라 속에만 갇힌 국민도 아닌 여러 나라 속 인민이자 또한 더 많은, 더 나은 요구를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우리는 추상적인 사상에서만 머물 수도 없었다. 그리고 맹동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언제든 요구한다. 또한 혁명으로부터 늘 배운다. 우리는 노동 계급을 만나고 어울려서 학습한다. 무엇을. 바로 계급 투쟁을 배운다. 그리고 혁명 이론을 학습하고, 곧 학습으로만 머물지도 않고 언제든 조직할 줄 안다. 놓치기 쉽지만 직접 민주주의란 전 세계 국민들도 인민 참가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단지 민주주의를 더욱 집중한다고 해서 나라를 포기한다는 협소하거나, 좁은 의미도 아니다. 오히려 더욱 폭 넓다고 본다. 그렇다고 우리는 무산 운동이라는 대의를 저버리지도 않고자 노력한다. 기존 부르주아 의회 정치에 가담했던 외국인과 장애인들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 아무런 포부를 내세우지도, 거부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체제로부터 순종을 보노라면 처참하다고는 말할 수 있다. 덕분에 추진하던 포괄적인 차별금지법 제정도 미뤄졌다. 여러 요구들도 담길 수 있는 대표하는 법안이었다.

 

이번 집회에서는 개인으로 왔지만, 조직을 꾸리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리고 각자 방식대로, 나름대로 조직에 대한 염원이라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떤 조직을 바라는가. 단지 미약한 자생적인 조직을 말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군중에서 모여진 대중들도 바로 질서 잡힌 조직도 아닌 언제든 탈퇴는 손 쉽고, 강제도 없는 강령 조직이자 곧 낡고 오래된 관료에 대한 불만에서부터 터져나오고 있다고 본다. 전쟁이라는 얼룩진 폭력에 몰두하느라 놓치기 쉬운 점이란 바로 프롤레타리아트들은 실천으로 말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더욱 많은 사람들은 부르주아지가 일으키고자 한 범죄들로부터도 곧 효율적일 줄 알았던 낡은 전쟁에 대한 경제적 손실을 목도하고 있다. 어쩌면 쉬운 말일지도 모르지만, 돈만이 아니라 재물마저 축적하는 부르주아 일당들로부터 잔존하는 체제를 무너뜨리고 혁명으로 보답하고자 노력하는 참된 사람들로는 다음으로 말해주는 말도 곰곰이는 곱씹어본다.

 

'노동 계급에게는 더 이상 국가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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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4. 16. 


무산 혁명과 농민

 

농민들은 때로는 매우 억센 민중이기도 하다. 바로 농촌 사회로는 노동 계급 투쟁보다도 매우 끈질기게 성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바로 모든 정권에도 속 깊게 도전한다는 점으로는 일반 노동 계급들 가운데에서도 무산 농민들은 경제 요구와 그러한 반발에 대해서는 매우 정확하고 깊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훨씬 정당하고, 또 과격하기도 하다. 농촌 사회에서 농민들은 계급 층위로도 나뉘었다고 지적한 사람으로는 다름 아닌 레닌이기도 했다는 점을 받아들일 줄 안다면, 과거 소련에서는 지주 자본가라는 쿨라크에 대한 비판과 청산으로부터 제기한 집단 농업이라는 형태마저도 여러 정책으로부터 시행해볼 수 있었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개별 농업에 대한 한계에서부터 자본주의와 무관한 공산주의 경제로부터 독립한 식량 생산에 대한 여러 연구를 실천하고 또 진행했다는 점에서도 찾아볼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주 토지 문제로는 농촌 사회에서도 많은 훼방과 방해를 야기하기도 했다. 단지 토지 소유권에 대한 단편적인 시각이 아니라, 공동 농업 뿐만이 아닌, 해양에서도 수산업으로도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업도 있다. 당시 소련은 전형적인 농업 국가였다는 점을 간과하곤 한다. 그러나 각국마다 같은 생산 수단들에 대한 생산력들은 따라서 무슨 일에 종사하는가에 따라서 매우 다르다는 점을 쉽게 잊거나, 까먹곤 한다. 소련 농촌 교육에서는 특히 단지 까막눈 운동이라는 문맹에 대한 해소로만 끝나지 않았고, 계급 문제에 대한 고찰로까지 전개할 수 있었다는 점으로도, 시사하고 배울 점도 크다고 본다. 따라서 단지 과거 유산이라는 문제로만 취급하거나, 바라 볼 문제도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지주 자본가에 대한 전원 생활에 대한 환상을 일소하는 데로는 계급 문제를 꾸준하게 제기한 사람들도 있다는 점이다.


레닌은 노동 계급을 다룰 때도 단순하게 도시 노동가만이 아니라, 농민들에게도 매우 깊은 관심과 또한 흥미를 보였다는 점이다. 처음 소련 대략 80% 농민들로는 단지 농촌 사회에서 오래 거주하고 있었다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개별 농업에서도 여러 과학 연구를 환경에도 알맞게 혼재했을 뿐만 아니라, 생산력을 늘릴 수 있는 방안들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를 해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농민에게도 계급 생산에 있어서 지주만이 아니라 부농, 중농, 소농으로 분류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러한 농촌 사회에서도 지배된 계급 사회에 대한 문제를 당시로는 앞서 증명하고자 했고, 또 그러한 농촌 사회 참된 개혁에도 앞장 섰다는 점에서 계획 경제에 대한 실천에서도 배울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또 말하고자 한다.

 

무산 혁명은 농민 민중들과도 무관하다는 식에서, 그리고 농민들이나 민중들은 하나도 배운 게 없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오히려 무산 계급을 지지하는 농촌 사회로는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만 찾던 집단 농업만이 아니라 코뮌 경제를 먼저 내세웠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토지와 임농에 대한 같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미리 땅 투기를 해서, 관광업을 개발한다는 목적으로, 자본을 공들여 여러 가구들과 처음부터 있던 공동 농업 토지를 되돌릴 수도 없도록 훼손하고, 황폐하도록 만들었다는 문제를 이제는 제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한 관광지들은 자본 산업으로부터 특히 자연 경제에 대한 여러 문제들도 남겨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로는 문제를 제기할 때는 단지 자연 훼손이나 환경 파괴로만 문제를 일축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제들은 모두 계급 문제 특히 농업 사회에서도 나타나는 무분별한 노동 개발과 농촌 사회라는 문제에서도 두각을 보이고 깊은 골과도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지주와 자본가라는 오래된 토지 문제로는 국내에서도 시급하게 제기할 자본주의에 대한 물음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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