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가면과 계급의 저울: 부르주아 법 체계와 국가의 본질

 

현사회에서 법판결의 결과를 두고 일희일비하는 현상 그 자체가 부르주아적 법 체계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오늘날 사법 체계는 단순히 국내적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 지배 계급과 정치가들이 자본의 기구를 옹호하기 위해 마련한 질서의 방편으로 작동한다. 그것이 단순히 시민 사회의 제도여서가 아니라, 그 제도적 한계의 본질이 ‘부르주아적’임을 증명하는 공표인 것이다. 사실상 오늘날 법 체계 전반이 자본주의적 정치 질서의 원천이 되었음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현재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는 혁명적 투쟁의 경우에도, 그 성격이 단순한 시가지의 거리 시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민 간의 동의에 따른 심층적인 조직적·사회적 투쟁으로 확장되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대 법철학이 마주한 근본적인 한계는 자본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현대 법 체계(민법, 헌법, 상법 등)가 여전히 소유재산을 옹호하는 ‘부르주아적 특징’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형식적 권리상의 동등함 뒤에는 ‘실질적 계급적 격차’의 은폐가 숨겨져 있다. 현대 헌법과 민법은 “만인은 법 앞에 동등하다”며 모든 시민에게 동일한 법적 자격과 권리를 부여하지만, 이는 부르주아적 본질에서 하나의 함정에 불과하다. 마르크스가 《고타 강령 비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서로 가진 자산과 경제적 조건이 전혀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형식적 법을 적용하는 것 자체가 실질적인 구조적 종속을 고착화한다. 재벌 대기업과 일용직 노동자가 동일한 법적 기준으로 계약을 맺거나 소송을 벌일 때조차, 법은 형식상 ‘공정성’을 가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자금력과 법률적 대응력이 압도적인 자본가 계급에게 유리하게 작동한다.

 

“각 역사적 시기마다 소유는 각각 다르게 발전해왔고 일련의 전적으로 다른 사회적 관계하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적 소유를 정의하는 것은 바로 부르주아적 생산의 모든 사회 관계를 설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소유를 독립된 관계, 고립된 범주, 영속적인 관념으로 정의하는 것은 단지 형이상학이나 법률학의 환상일 뿐이다.”

 

마르크스, 『철학의 빈곤』, 「정치경제학의 형이상학」, 〈토지 소유 또는 지대〉

 

이처럼 소유 재산을 둘러싼 부르주아적 소유 관계는 노동자가 예속화된 생산관계를 스스로의 역량으로 타파하는 것을 제한하며, 오히려 법률적 형식이라는 허구적 틀에 종속시킨다.

 

“형법의 조문은 기껏해야 근대 공업과 경쟁이 국민의회와 제국시대에는 충분히 발전되지 못했음을 증명할 뿐이다.”

 

마르크스, 『철학의 빈곤』, 「정치경제학의 형이상학」, 〈파업과 노동자 조합〉

 

사유재산권 (특히 생산 수단)의 절대적 보호는 현대 법 체계가 지닌 가장 큰 모순이다. 민법과 헌법은 사유재산을 침해할 수 없는 기본권이자 신성불가침의 권리로 규정하여, 타인의 노동으로 창출된 잉여가치를 소유하고 축적하는 ‘생산 수단(공장, 토지, 자본 등)의 사유화’를 정당화하고 철저히 보호한다. 반면, 아무런 생산수단도 가지지 못한 채 오직 자신의 노동력만을 팔아야 하는 대다수 무산 대중의 생존권과 주거권 등은 낙후된 사유재산권의 장벽 앞에서 빈번이 제약당한다.

 

‘계약의 자유’가 가진 함정 역시 이러한 노동의 상품화와 착취를 합법화하는 데 있다. 국가가 개인 간의 거래나 고용 계약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사법의 대원칙 속에서, 자본가와 노동자가 맺는 근로계약은 겉보기에는 강제성이 없는 ‘자발적 합의’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력을 팔아야만 하는 무산자의 구조적 궁핍함을 이용한 ‘강제된 계약’에 불과하다. 현대 법은 이러한 지배와 종속의 힘의 관계를 ‘개인 간의 자유로운 합의’로 포장하여 합법적인 착취 구조를 정당화한다

 

나아가 현대 법은 사회 구성원을 구체적인 계급이나 사회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지 않고, 고립된 개인, 즉 자유롭고 합리적인 ‘추상적 법적 주체’로 상정한다. 인간을 계급적 조건(노동자, 자본가, 빈곤층 등)에서 떼어내어 단순히 권리를 가진 ‘개인’으로 규정하여,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구조적 불균등과 계급 격차를 개인의 능력이나 선택 문제로 전가해 버린다. 또한 공·사법의 이원화로 경제적 지배를 은폐한다. 헌법·형법 등의 ‘공법’ 영역과 민법 등의 ‘사법’ 영역을 엄격히 분리하여, 자본가들이 공장이나 기업 안에서 노동자를 지휘·감독하고 통제하는 경제적 권력 행사를 ‘사적 자치’라는 명목으로 국가의 규제와 민주적 통제로부터 보호한다. 즉, 자본주의 경제 내부에서 벌어지는 실질적인 독점과 지배를 ‘정치와 무관한 사적 영역’으로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에브게니 파슈카니스가 『법의 일반 이론과 마르크스주의』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법의 본질은 상품 교환”이다. 현대 법 체계 역시 시장에서 상품을 사고파는 자본주의적 교환 관계를 전제로 성립했기 때문에, 겉으로는 ‘보편적 정의와 인권’을 표방하면서도 실상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유지·재생산하고 자본의 지배를 안정화하는 가장 정교한 이념적 도구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에 맞서 소비에트 초기에는 노동 현장의 분쟁을 심리하는 ‘공장 재판소’의 개념이 실천적 구상으로 제시되었다. 고용주와 노동자가 직접 선출한 대표들로 구성된 공장 재판소는 형식주의에 치우쳐 장기 소송이 만연한 일반 법원과 달리, 노동 현장의 실정과 고용주의 기만 수법(임금 체불, 부당 전근 등)을 정확히 이해하여 노동자에게 훨씬 공정했다. 또한 노동자들이 직접 법을 적용하고 집행 과정에 참여하여 국가 운영과 공공 문제에 독립적으로 주도하는 방법을 체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공장 재판수가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을 고양시키고 정부 관료의 독점적 권위를 약화시킬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서류함에 처박아 두고 시행하지 않았다. 결국 공장 재판소와 같은 제도는 노동자에게 절설히 필요하지만,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하는 체제 아래에서는 온전히 실현될 수 없으며, 언론과 집회의 자유, 그리고 노동 참정권을 쟁취하기 위한 총체적 정치 투쟁의 일부로서만 쟁취될 수 있다.

 

지배 계급의 이익과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가 문제를 왜곡해 온 부르주아 사상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발전 단계를 되짚어봐야 한다. 레닌의 《국가에 대한 강연》이 지적한 바와 같이, 국가가 영원히 존재해 온 것은 아니다. 원시 공산주의 사회에는 관습과 도덕적 권위가 사회를 유지했을 뿐, 타인을 영구적으로 지배하는 강제력인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가 계급으로 분화되면서 노예 소유 사회에서는 노예 소유주가 노예를 억압하는 기계로, 봉건 사회에서는 영주가 농노를 예속하는 기계로 국가가 진화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역시 봉건제를 무너뜨린 자본가 계급이 ‘자유’와 ‘법 앞의 동등’을 표방하며 세운 국가이나, 그 실상은 사유재산과 임금노동 제도를 유지한 채 다수의 무산 대중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정치적 도구에 불과하다.

 

이러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보통 선거와 의회주의를 수단 삼아 모든 사람이 평등한 것처럼 선전하지만, 자본의 힘이 사회를 지배하는 한 이는 허구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할수록 자본의 지배는 더욱 노골화되며, 국가는 계급 억압의 도구로 작동한다. 따라서 노동 계급은 부르주아 국가의 보편적 평등이라는 허항된 거짓말에 현혹되지 않고, 국가라는 강제력 기구를 장악하여 부르주아 권력을 전복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착취 구조를 완전히 철폐하고 계급이 사라진 사회가 도래할 때, 비로소 인간을 억압할 필요성이 소멸하여 국가라는 기구는 역사 속에서 고철 더미로 폐기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전환점 속에서 공표된 소비에트의 《법원에 관한 제1호 칙령》은 제정러시아 및 부르주아 임시정부의 사법 체계를 전면 해체하고 최초의 사회주의적 사법 기관을 구축하는 역사적 결단이었다. 제1조, 제3조로 기존 일반 법률 기관(지방법원, 항소법원, 상원 등)과 사법 관료주의 체계(수사관, 검사, 변호사 제도)를 전면 폐지했다. 이어 제2조와 제4조에 따라 노동자·병사·농민 소비에트의 민주적 선거로 선출된 판사와 배심원으로 구성된 ‘인민 법원’을 설치하고, 검사와 변호인의 역할을 도덕적으로 청렴한 모든 인민이 수행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또한 기존 법률은 ‘혁명적 양심’ 및 ‘혁명적 권리관’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한시적으로 준수하게 했으며, 소비에트의 법령이나 당의 강령에 위배되는 구법은 철저히 무효화했다. 특히 제8조에 의거해 반혁명 행위, 폭리, 투기, 사보타주 등을 전담 재판할 ‘혁명재판소’를 설치하여 신생 소비에트 정권을 방어하고자 했다.

 

이 칙령은 부르주아 사법 기구를 단순히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부숴버리고, 인민의 사회적 참여와 ‘혁명적 양심’에 기반한 새로운 사법 체계를 세우겠다는 선언이었다. 현대의 법 체계가 사유재산 제도의 근본적 모순은 배제한 채 오직 돈이 오간 지엽적인 현상만을 문제 삼기에, 이에 맞서는 혁명적 투쟁의 필연성은 조르주 상드의 문구로 요약된다.

 

“전투냐, 죽음이냐; 피로 얼룩진 투쟁이냐 사멸이냐, 이것이야말로 냉혹하게 던져진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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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제기될 때, 그것은 결국 ‘국가’라는 틀로 포섭된다는 근본적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이 국가의 본질이란 추상적인 언어적 담론에서 벗어나는 순간, 특수한 문제에서 보편적인 문제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한국인’이라 칭할 때의 국적은 사실상 민족의 일환으로 작용하는 한계를 지님과 동시에, 부르주아 국가인 ‘대한민국’으로 수렴된다는 한계를 함께 가진다. 마르크스주의가 투쟁해야 할 지점이 바로 여기다.

 

이와 관련하여 스탈린,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는 이론적으로 참고할 만한 대목을 제시한다. 이는 사회민주주의적 한계를 직시하게 함과 동시에, 계급 투쟁적 관점에서 ‘민족 문제’가 정체성으로 고착화되는 순간을 포착해낸다. ‘한국인’에 대한 추상적 담론에 머무는 사회학자들의 편견 어린 시선과는 달리, 마르크스주의자는 적극적으로 국제주의를 지지하고 인터내셔널의 대의를 옹호하는 한에서만 자신의 당위성을 증명할 수 있다. 이는 당 내부의 사정에 기인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핵심은 부르주아 국가 체계로 포섭되는 현상에 맞서 노동자 국가의 방향성을 현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라는 중대한 논의의 출발점이 된다는 데 있다.

 

이 문제는 비단 한국인의 정체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피식민지 및 제3세계의 민족의 경우에도 ‘민족 문제’로 발생하는 제반 분쟁에 대한 해석은, 결국 부르주아 질서로 포섭된 국적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단순히 ‘지지 표명’에 그쳐서는 안 되며, 현상의 전개가 ‘자본주의적 객관적 본질을 얼마나 포착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민족 문제는 단지 언어적 구상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 현상과 결합된 사회·정치적 본질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출발해야 옳다.

 

특히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중첩되어 폐쇄적인 사회배외주의로 낙오하거나 수정주의적 변절로 이어지는 경향이 다수 포착된다. 자본주의 국가 내 갈등이 심화되는 현 상황일수록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국제주의적 노력이 필수적이다. 여기서 스탈린,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를 언급하는 이유는 강력한 국가 통제에 대한 원칙을 지지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국제주의적 비판점을 명확히 하여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탈피하고 전 노동 계급으로 합류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자본주의 국가에 종속된 노동 계급이라는 공허한 모순을 지적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주체가 되는 국제 질서를 객관적으로 분석해야 할 필요성을 증명하는 일이다.

 

‘국민성’과 ‘민족 자결권’을 다룰 때 주의해야 할 점은, 피억압 민족의 해방 투쟁에 대한 단편적인 지지 표명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민족 해방 운동은 혁명 투쟁의 진전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를 철저히 유념할수록 자국 내에서 발생하는 계급 분화 현상을 우선적으로 목격하고, 그 전개 과정을 파악·분석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는 관념론적 수사와 절연함과 동시에, 노동 계급의 실질적 단결을 위한 당면 과제에 집중함을 의미한다.

 

“자국의 민족 문제란 곧 프롤레타리아 국제 문제이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시사점이다. 국가 권력이 자행하는 노동 계급 탄압과 운동 저지, 그리고 과거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선진적 노력을 왜곡·폄하하는 시각에 대해서도 단호히 투쟁해야 한다.

 

현대의 ‘인민의 벗’들이 보여주는 ‘철학의 빈곤’은, 마르크스가 『철학의 빈곤』에서 비판했던 소부르주아적 경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 결과 국가 내부에서의 관료주의적 타협, 그리고 농촌·농민 내부의 계급적 분화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전근대적 시각을 반복할 뿐이다. 독립과 민족 해방이라는 틀에 갇혀 노동 계급 투쟁의 전말을 직시하지 못하는 현대 ‘인민의 벗들’에 대한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반동적 계급 시각을 습관적으로 답습하는 부류를 끊어내지 못하고 방관하는 당파적 한계 극복을 위해서라도, 부르주아 경제의 실체를 국내 정세에 연관하여 깊이 분석해야 한다.

 

행동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이론적 분석을 소홀히 할 경우, 운동은 결국 관념론적 단상에 그치고 만다. 현대 사회로 진입할수록 산업 발달의 조건은 한층 선진화되었음에도 이론이 도리어 후퇴하는 이유는, 민족 문제를 여전히 부르주아 국가의 시각 내에 국한하여 해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각과 단호히 절연해야 한다. 

 

코민테른과 인터내셔널의 역사적 의의를 되짚지 못하는 자들, 자본주의 체제 내에 안주하며 전 인민의 노동 해방 투쟁을 방해하는 ‘문명자’들의 체제 타협적 습관이야말로 가장 노골적인 노동 계급에 대한 배반이자 질타이다. 이는 ‘타협주의’이자 ‘수정주의’에 고착된 체제 안주적 태도일 뿐이다.

 

인민을 대변한다는 명목의 공화국에서조차 민족성만을 강조한 채, 인터내셔널의 취지와 국제 노동 계급의 단결을 호도하고 실패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어리석은 노인’들의 정치는 현대 ‘인민의 벗들’이 보여주는 노동 해방 각오조차 무기력한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하다. 이는 한국 인민 사회에서 ‘수령제’가 보여주는 또 다른 형태의 무산 계급 분단적 비극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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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전진과 선진적 사회주의 투쟁을 수행하시는 일꾼 여러분, 당이 추구하는 노선과 운동의 장기적 전략적 전환을 위해 몇 가지 핵심적인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모든 혁명 운동에는 반동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러한 자명한 사실 속에서 우리는 반동성과의 투쟁 중 포착되는 소부르주아적·유토피아적 성향의 실체를 직시해야 한다. 이는 혁명적 노동 운동에서 저항적 수습이 일시적 단계에 그치거나, 민주주의의 탈을 썼으나 본질은 전제 정부와 다름없는 부르주아 정부의 실태가 반복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최근 『노동자 연대』는 현 부르주아 정부를 향해 ‘줬다 뺐는다’라는 표현을 쓰며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한편 정파 ‘전진’ 내에서는 1960~80년대 그리스, 아르헨티나, 유고슬라비아 등에서 시행되었던 국유화 방식을 바탕으로 생산 수단을 먼저 점유해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노동자 연대』의 비판점이 노동자 계급의 자각된 조직적 투쟁과 정치권력 쟁취가 빠진 ‘자본주의 국가 주도 국유화’의 한계를 지적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 운동 투쟁의 무게 중심이 단순히 국유화에 따른 생산 수단 점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레닌은 1921년 『제3차 코민테른 대회』에 이르기까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계급적 결집뿐만 아니라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일부 기사에서는 레닌의 국유화에 대한 우호적 시각만을 단편적으로 서술하지만, 그 본질은 자본주의 국가가 가질 내적 모순과 위력을 명확히 파악하고 제3차 코민테른 및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했다는 데 있다.

 

신자유주의 도입에 따른 민영화나 관료주의적 행정에 대한 지적은 현대 자본주의 국가를 바라보는 일반적 시각에 불과할 수 있다. 우리가 직시해야 할 점은 자본주의 체제 내 인민들의 저조한 계급 의식 수준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재교육을 논할 때, 노동자 계급의 무지를 탓하는 부르주아적 시각을 답습해서는 결코 안 된다.

 

제1차 세계대전과 크론슈타트 반란 등 소비에트 내외의 중대한 시련이 상충했던 1921년의 상황을 기억해야 한다. 국유화 논쟁과 관련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 역시 『토지 문제에 관하여』 등에서 실질적인 토지 소유화 및 투기·투매 행태에 대해 엄혹한 비판을 가한 바 있다. 국유화의 전개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정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직접 정치 권력을 획득할 때 비로소 성립한다. 아직 이러한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고 반동성이 장기간 지속된 체제 하에서는 인민들의 즉각적인 동의를 얻기 어렵다.

 

따라서 당의 전망은 단순히 국유화를 외치는 허황된 구호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의 노선은 자본주의적 선거 제도나 법적 틀 안에서의 권력 획득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전 노동 인민의 단결에서 비로소 출발한다.

 

‘전진’이 추구하는 방향이 단순히 자본주의 체제 내의 협동조합, 단순 국유화, 일부 노조와의 타협에 머무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를 조속히 본격적인 사회주의 투쟁으로 전환할 것을 긴급히 요구한다. 노동자 권력 획득이라는 과제는 관념적 구상이나 시간의 경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계급적 폭력에 노출된 노동 인민의 실질적 투쟁과 봉기를 요구한다. 현장의 일시적 파업이나 선동 구호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체제에 종속된 사회적·구조적 본질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의 반동적 굴레에 안주하지 않는다. 우리의 시선은 오직 불편한 현실을 직시하는 데 있다. 우리의 투쟁은 자본주의 체제 내 부르주아지에게 국유화를 구걸하는 소수의 요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결집하여 선언하는 참된 국유화 강령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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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적 시민 사회는 시민 교육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주입하는 담론으로 도배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이 표방하는 ‘선진적 노동 의제’의 실상은 노동자 해방이 아니라, 자본의 계급적 억압에 맞선 투쟁을 가로막는 장벽에 불과하다. 마르크스주의가 결여된 시민 교육은 반동적 노동관을 답습하는 동어반복일 뿐임이 자명하다. 이러한 비생산적 담론의 반복은 사회주의 전진을 저해하는 요소일 뿐이다. 부르주아적 시민 사회가 추구하는 자유론의 한계는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이미 명확히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 내의 역학 관계 속에서 시민 사회가 결국 반동적 질서로 흡수된다”는 점을 명시했다.

 

이러한 균열은 한국 상황에서도 결코 특수한 예외가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라는 틀 안에서 노동 의제에 대한 관심이 직간접적으로 표방된다 하더라도, 사회주의 체제가 부재한 공허한 민주적 수사는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한다. 결국 노동 계급의 투쟁을 단순한 제도적 법제화, 시민 사회로의 흡수, 노조의 관료적 의존성에 매달리게 만들어 노동 계급의 사회주의적 전진을 지속적으로 방해할 뿐이다.

 

이러한 자본 체제의 균열은 현대 전제 정부 국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기존 학계와 담론 체계는 이러한 조짐을 ‘인정 투쟁’이나 ‘신유물론’적 접근으로 포섭하거나, ‘이념적 국가 기구’ 식의 해석에 그치는 관념론적·수사적 공리공론에 빠져 있다. 부르주아 시민 사회의 질서는 결코 ‘교양’스럽지도 ‘우월’하지도 않으며, 이는 자본 체제 내에서 생산되는 제반 담론과 소부르주아적 모임 등에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전(全) 노동 계급은 이러한 부르주아적 시각과 철저히 단절해야 한다. 시민 사회 내부에서 추구하는 체제적 사고의 그늘에는 언제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존재하며, 노동 계급의 시각은 부르주아적 틀에 갇혀 있지 않다.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적·역사적 유물론을 간과한 채 시민 사회의 관념론에 매몰되고 부르주아적 자유관으로 도피하는 것은, 모순적으로 계급 투쟁의 전면에서 부르주아지와의 철저한 단절 및 전투적 유물론으로의 전환이 왜 필요한지를 입증할 뿐이다.

 

부르주아 시민 사회와 전제 정부의 관계는 언제나 동일한 역사적 궤적을 반복해 왔다. 이들은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과 전근대적 귀족의 수혜를 누려온 역사관을 유지한 채 계급적 교육을 장려하고 있다. 시민 사회 내에서 자행되는 노동 계급에 대한 억압과 무의미한 소부르주아적 단상들은, 한국 시민 사회가 지향하는 이상적 모델이 결국 부르주아적 질서로의 귀속을 반복할 뿐임을 보여준다. 이 같은 자본 체제의 균열은 체제 내 노동 계급을 억압하고, 나아가 타국 인민에 대한 수탈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이러한 시민 사회 담론의 공허한 반동성은 자명하다. 따라서 노동 계급은 계급 투쟁에 있어 부르주아 시민 사회 이론과 완전히 단절하고, 독자적인 프롤레타리아 노선인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공산당 강령의 입장을 명확히 표방해야 한다. 전 노동 계급은 노골적인 부르주아 시민 사회의 기만과 책동에 더 이상 휘둘리지 말고 전투적 투쟁에 나설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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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인민의 벗들의 정치 강령을 들여다보면'의 검수를 마쳤다. 


본 단원은 인민주의자들이 소부르주아적 자유주의 및 개량주의적 타협주의로 변질된 근본 원인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아울러 당시 전제 정부와 인민주의 세력이 결탁·응수하며 자행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왜곡과 희화화, 그리고 그들의 왜소한 식견의 오류를 잘 보여준다. 이는 비단 당시의 역사적 사건에 그치지 않고 현대 사회의 이념적 대립과 타협 기제를 파악하는 데에도 시사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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