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제기될 때, 그것은 결국 ‘국가’라는 틀로 포섭된다는 근본적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이 국가의 본질이란 추상적인 언어적 담론에서 벗어나는 순간, 특수한 문제에서 보편적인 문제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한국인’이라 칭할 때의 국적은 사실상 민족의 일환으로 작용하는 한계를 지님과 동시에, 부르주아 국가인 ‘대한민국’으로 수렴된다는 한계를 함께 가진다. 마르크스주의가 투쟁해야 할 지점이 바로 여기다.

 

이와 관련하여 스탈린,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는 이론적으로 참고할 만한 대목을 제시한다. 이는 사회민주주의적 한계를 직시하게 함과 동시에, 계급 투쟁적 관점에서 ‘민족 문제’가 정체성으로 고착화되는 순간을 포착해낸다. ‘한국인’에 대한 추상적 담론에 머무는 사회학자들의 편견 어린 시선과는 달리, 마르크스주의자는 적극적으로 국제주의를 지지하고 인터내셔널의 대의를 옹호하는 한에서만 자신의 당위성을 증명할 수 있다. 이는 당 내부의 사정에 기인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핵심은 부르주아 국가 체계로 포섭되는 현상에 맞서 노동자 국가의 방향성을 현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라는 중대한 논의의 출발점이 된다는 데 있다.

 

이 문제는 비단 한국인의 정체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피식민지 및 제3세계의 민족의 경우에도 ‘민족 문제’로 발생하는 제반 분쟁에 대한 해석은, 결국 부르주아 질서로 포섭된 국적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단순히 ‘지지 표명’에 그쳐서는 안 되며, 현상의 전개가 ‘자본주의적 객관적 본질을 얼마나 포착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민족 문제는 단지 언어적 구상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 현상과 결합된 사회·정치적 본질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출발해야 옳다.

 

특히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중첩되어 폐쇄적인 사회배외주의로 낙오하거나 수정주의적 변절로 이어지는 경향이 다수 포착된다. 자본주의 국가 내 갈등이 심화되는 현 상황일수록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국제주의적 노력이 필수적이다. 여기서 스탈린,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를 언급하는 이유는 강력한 국가 통제에 대한 원칙을 지지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국제주의적 비판점을 명확히 하여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탈피하고 전 노동 계급으로 합류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자본주의 국가에 종속된 노동 계급이라는 공허한 모순을 지적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주체가 되는 국제 질서를 객관적으로 분석해야 할 필요성을 증명하는 일이다.

 

‘국민성’과 ‘민족 자결권’을 다룰 때 주의해야 할 점은, 피억압 민족의 해방 투쟁에 대한 단편적인 지지 표명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민족 해방 운동은 혁명 투쟁의 진전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를 철저히 유념할수록 자국 내에서 발생하는 계급 분화 현상을 우선적으로 목격하고, 그 전개 과정을 파악·분석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는 관념론적 수사와 절연함과 동시에, 노동 계급의 실질적 단결을 위한 당면 과제에 집중함을 의미한다.

 

“자국의 민족 문제란 곧 프롤레타리아 국제 문제이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시사점이다. 국가 권력이 자행하는 노동 계급 탄압과 운동 저지, 그리고 과거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선진적 노력을 왜곡·폄하하는 시각에 대해서도 단호히 투쟁해야 한다.

 

현대의 ‘인민의 벗’들이 보여주는 ‘철학의 빈곤’은, 마르크스가 『철학의 빈곤』에서 비판했던 소부르주아적 경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 결과 국가 내부에서의 관료주의적 타협, 그리고 농촌·농민 내부의 계급적 분화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전근대적 시각을 반복할 뿐이다. 독립과 민족 해방이라는 틀에 갇혀 노동 계급 투쟁의 전말을 직시하지 못하는 현대 ‘인민의 벗들’에 대한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반동적 계급 시각을 습관적으로 답습하는 부류를 끊어내지 못하고 방관하는 당파적 한계 극복을 위해서라도, 부르주아 경제의 실체를 국내 정세에 연관하여 깊이 분석해야 한다.

 

행동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이론적 분석을 소홀히 할 경우, 운동은 결국 관념론적 단상에 그치고 만다. 현대 사회로 진입할수록 산업 발달의 조건은 한층 선진화되었음에도 이론이 도리어 후퇴하는 이유는, 민족 문제를 여전히 부르주아 국가의 시각 내에 국한하여 해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각과 단호히 절연해야 한다. 

 

코민테른과 인터내셔널의 역사적 의의를 되짚지 못하는 자들, 자본주의 체제 내에 안주하며 전 인민의 노동 해방 투쟁을 방해하는 ‘문명자’들의 체제 타협적 습관이야말로 가장 노골적인 노동 계급에 대한 배반이자 질타이다. 이는 ‘타협주의’이자 ‘수정주의’에 고착된 체제 안주적 태도일 뿐이다.

 

인민을 대변한다는 명목의 공화국에서조차 민족성만을 강조한 채, 인터내셔널의 취지와 국제 노동 계급의 단결을 호도하고 실패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어리석은 노인’들의 정치는 현대 ‘인민의 벗들’이 보여주는 노동 해방 각오조차 무기력한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하다. 이는 한국 인민 사회에서 ‘수령제’가 보여주는 또 다른 형태의 무산 계급 분단적 비극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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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전진과 선진적 사회주의 투쟁을 수행하시는 일꾼 여러분, 당이 추구하는 노선과 운동의 장기적 전략적 전환을 위해 몇 가지 핵심적인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모든 혁명 운동에는 반동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러한 자명한 사실 속에서 우리는 반동성과의 투쟁 중 포착되는 소부르주아적·유토피아적 성향의 실체를 직시해야 한다. 이는 혁명적 노동 운동에서 저항적 수습이 일시적 단계에 그치거나, 민주주의의 탈을 썼으나 본질은 전제 정부와 다름없는 부르주아 정부의 실태가 반복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최근 『노동자 연대』는 현 부르주아 정부를 향해 ‘줬다 뺐는다’라는 표현을 쓰며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한편 정파 ‘전진’ 내에서는 1960~80년대 그리스, 아르헨티나, 유고슬라비아 등에서 시행되었던 국유화 방식을 바탕으로 생산 수단을 먼저 점유해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노동자 연대』의 비판점이 노동자 계급의 자각된 조직적 투쟁과 정치권력 쟁취가 빠진 ‘자본주의 국가 주도 국유화’의 한계를 지적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 운동 투쟁의 무게 중심이 단순히 국유화에 따른 생산 수단 점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레닌은 1921년 『제3차 코민테른 대회』에 이르기까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계급적 결집뿐만 아니라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일부 기사에서는 레닌의 국유화에 대한 우호적 시각만을 단편적으로 서술하지만, 그 본질은 자본주의 국가가 가질 내적 모순과 위력을 명확히 파악하고 제3차 코민테른 및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했다는 데 있다.

 

신자유주의 도입에 따른 민영화나 관료주의적 행정에 대한 지적은 현대 자본주의 국가를 바라보는 일반적 시각에 불과할 수 있다. 우리가 직시해야 할 점은 자본주의 체제 내 인민들의 저조한 계급 의식 수준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재교육을 논할 때, 노동자 계급의 무지를 탓하는 부르주아적 시각을 답습해서는 결코 안 된다.

 

제1차 세계대전과 크론슈타트 반란 등 소비에트 내외의 중대한 시련이 상충했던 1921년의 상황을 기억해야 한다. 국유화 논쟁과 관련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 역시 『토지 문제에 관하여』 등에서 실질적인 토지 소유화 및 투기·투매 행태에 대해 엄혹한 비판을 가한 바 있다. 국유화의 전개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정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직접 정치 권력을 획득할 때 비로소 성립한다. 아직 이러한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고 반동성이 장기간 지속된 체제 하에서는 인민들의 즉각적인 동의를 얻기 어렵다.

 

따라서 당의 전망은 단순히 국유화를 외치는 허황된 구호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의 노선은 자본주의적 선거 제도나 법적 틀 안에서의 권력 획득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전 노동 인민의 단결에서 비로소 출발한다.

 

‘전진’이 추구하는 방향이 단순히 자본주의 체제 내의 협동조합, 단순 국유화, 일부 노조와의 타협에 머무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를 조속히 본격적인 사회주의 투쟁으로 전환할 것을 긴급히 요구한다. 노동자 권력 획득이라는 과제는 관념적 구상이나 시간의 경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계급적 폭력에 노출된 노동 인민의 실질적 투쟁과 봉기를 요구한다. 현장의 일시적 파업이나 선동 구호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체제에 종속된 사회적·구조적 본질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의 반동적 굴레에 안주하지 않는다. 우리의 시선은 오직 불편한 현실을 직시하는 데 있다. 우리의 투쟁은 자본주의 체제 내 부르주아지에게 국유화를 구걸하는 소수의 요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결집하여 선언하는 참된 국유화 강령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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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적 시민 사회는 시민 교육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주입하는 담론으로 도배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이 표방하는 ‘선진적 노동 의제’의 실상은 노동자 해방이 아니라, 자본의 계급적 억압에 맞선 투쟁을 가로막는 장벽에 불과하다. 마르크스주의가 결여된 시민 교육은 반동적 노동관을 답습하는 동어반복일 뿐임이 자명하다. 이러한 비생산적 담론의 반복은 사회주의 전진을 저해하는 요소일 뿐이다. 부르주아적 시민 사회가 추구하는 자유론의 한계는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이미 명확히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 내의 역학 관계 속에서 시민 사회가 결국 반동적 질서로 흡수된다”는 점을 명시했다.

 

이러한 균열은 한국 상황에서도 결코 특수한 예외가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라는 틀 안에서 노동 의제에 대한 관심이 직간접적으로 표방된다 하더라도, 사회주의 체제가 부재한 공허한 민주적 수사는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한다. 결국 노동 계급의 투쟁을 단순한 제도적 법제화, 시민 사회로의 흡수, 노조의 관료적 의존성에 매달리게 만들어 노동 계급의 사회주의적 전진을 지속적으로 방해할 뿐이다.

 

이러한 자본 체제의 균열은 현대 전제 정부 국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기존 학계와 담론 체계는 이러한 조짐을 ‘인정 투쟁’이나 ‘신유물론’적 접근으로 포섭하거나, ‘이념적 국가 기구’ 식의 해석에 그치는 관념론적·수사적 공리공론에 빠져 있다. 부르주아 시민 사회의 질서는 결코 ‘교양’스럽지도 ‘우월’하지도 않으며, 이는 자본 체제 내에서 생산되는 제반 담론과 소부르주아적 모임 등에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전(全) 노동 계급은 이러한 부르주아적 시각과 철저히 단절해야 한다. 시민 사회 내부에서 추구하는 체제적 사고의 그늘에는 언제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존재하며, 노동 계급의 시각은 부르주아적 틀에 갇혀 있지 않다.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적·역사적 유물론을 간과한 채 시민 사회의 관념론에 매몰되고 부르주아적 자유관으로 도피하는 것은, 모순적으로 계급 투쟁의 전면에서 부르주아지와의 철저한 단절 및 전투적 유물론으로의 전환이 왜 필요한지를 입증할 뿐이다.

 

부르주아 시민 사회와 전제 정부의 관계는 언제나 동일한 역사적 궤적을 반복해 왔다. 이들은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과 전근대적 귀족의 수혜를 누려온 역사관을 유지한 채 계급적 교육을 장려하고 있다. 시민 사회 내에서 자행되는 노동 계급에 대한 억압과 무의미한 소부르주아적 단상들은, 한국 시민 사회가 지향하는 이상적 모델이 결국 부르주아적 질서로의 귀속을 반복할 뿐임을 보여준다. 이 같은 자본 체제의 균열은 체제 내 노동 계급을 억압하고, 나아가 타국 인민에 대한 수탈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이러한 시민 사회 담론의 공허한 반동성은 자명하다. 따라서 노동 계급은 계급 투쟁에 있어 부르주아 시민 사회 이론과 완전히 단절하고, 독자적인 프롤레타리아 노선인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공산당 강령의 입장을 명확히 표방해야 한다. 전 노동 계급은 노골적인 부르주아 시민 사회의 기만과 책동에 더 이상 휘둘리지 말고 전투적 투쟁에 나설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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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인민의 벗들의 정치 강령을 들여다보면'의 검수를 마쳤다. 


본 단원은 인민주의자들이 소부르주아적 자유주의 및 개량주의적 타협주의로 변질된 근본 원인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아울러 당시 전제 정부와 인민주의 세력이 결탁·응수하며 자행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왜곡과 희화화, 그리고 그들의 왜소한 식견의 오류를 잘 보여준다. 이는 비단 당시의 역사적 사건에 그치지 않고 현대 사회의 이념적 대립과 타협 기제를 파악하는 데에도 시사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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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성향을 막론하고, 당 내 특정 집단이 저지르는 마르크스에 대한 노골적인 왜곡은 엄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이는 공산당이 추구하는 이론적 모범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자 훼손이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 내 매체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평생에 걸쳐 규명한 ‘자본주의 분석과 세계 부르주아 질서에 대한 통렬한 반박’을 두고 ‘실패한 사상’이라는 딱지를 붙여 자신들의 이론적 궤변을 정당화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체제적 모순을 깊이 파악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의 수혜를 누리는 지식인층 학자들과 손잡고 마르크스의 ‘단편성’에만 집착하는 태도는 그들이 정치적 기득권과의 타협이 케케묵은 수준에 도달했음을 폭로할 뿐이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재해석’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소시민적 연대나 노조 민주화 등을 합리화하고, 기존 정권과의 일시적 타협을 도모하고 있다. 급기야 마르크스의 과학적 분석과 당시 러시아 노동자들의 역사적 경향마저 ‘실패’로 단정 짓는 논리적 파단을 저지르고 있다. 그러나 운동권에서 사회주의 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은 당 내 투쟁이자 공산당의 확실한 일보 전진을 의미한다. 마르크스라는 대의명분 아래 그의 평생에 걸친 연구가 정확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공산당 선언』을 주의 깊게 읽은 독자라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국제노동자협회에서 제시했던 선언의 참뜻을 알 것이다. 즉 “당의 전진을 가로막는 반동적 경향”에 맞서 엄중히 투쟁하고 “부르주아적 이상에 대한 반박”을 전개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결코 안일하고 귀찮은 일이 아니며, “끈질기고 집요하게” 걸어가야 할 길이다. 이러한 반동적 경향들은 늘 ‘전통적 색채’나 ‘진보적 수사’를 들먹이며 자신들을 합리화해 왔으며, 자본주의 체제와 국가가 발전함에 따라 더욱 노골적으로 논변을 ‘수정’하고 ‘변질’시켜 왔다. 따라서 독자라면 원전이 갖는 중요성을 끊임없이 자문하고, 이를 실천하는 데 게을러져서는 안 된다. 


엥겔스는 마르크스 추모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마르크스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당당한 자부심으로 그의 평생의 과업을 돌아볼 수 있는 한 그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엥겔스,『제2인터내셔널 폐막 연설』 中

 

단순히 마르크스를 입맛대로 요약하여 재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남긴 평생의 유산과 노고를 되새기는 실천이야말로 우리 당이 추구해야 할 가장 정확한 노선이자 선구적인 조직 투쟁의 결집이다.

 

만국의 부르주아지를 심판하자! 그들의 녹슨 사슬은 ‘현대화’로 둔갑한 전근대적 자본의 비참한 결말일 뿐이다. 공산당의 전진에는 오늘날 계급 투쟁의 역사가 함께하고 있으며, 이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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