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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자본이라는 대작을 하나 마쳤습니다. 번역이라기보다 검수에 가까운 또 다른 여정이었습니다. 문득 그대에게 별도로 이 지면의 자리를 빌려 짧은 문구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잠시 미쳐 있었습니다. 수많은 문자나 연락보다, 그대와 마주했던 찰나의 순간이 저를 버티게 한 유일한 힘이었습니다. 강산도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지만, 더 이상 알아볼 수 없는 그대 변화마저도 당신이라는 존재 일부는 아닐런지요.  

 

가끔은 여성의 권리조차 지키지 못하는 제가 무슨 자격이 있나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매일 써 내려가는 글은 결국 부재하는 편지로만 남고 맙니다. 기둥 하나 붙잡고 생사조차 모를 이에게 보내는 이 터무니없는 일에 한숨 짓기도 하지만, 불우하여 우울했던 제 시절은 그대와 인연으로 인해 비로소 의미가 생겼습니다. 예비군 시절에 가끔 힘들 때면 속으로 당신 이름을 크게 불러도 보았습니다. 이마저도 우스운 일입니다

 

결국 그대가 남긴 말처럼, 제가 태어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서울 인파 속에 치이다 보면, 그대와 떨어져 있던 그 모든 시간이 가끔은 '잃어버린 시간'이 됩니다. 한때는 부담스러웠을 일들도 이제는 조금씩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마도 그 잃어버린 시간들이 비로소 그대와 온전해지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세상에는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나 봅니다. 삶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듯이, 안주했더라면 당신과 보낸 시절은 진작 잊혔을지도 모릅니다. 바다를 보며 애태우던 날들과 기도가 부질없음을 깨닫던 그 순간에도, 문득 그대가 떠오르면 언제든 곁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못다 한 이야기는 그날을 위해 남겨두겠습니다. 기댈 곳 없는 나그네인 줄 알았으나, 가장 낮은 곳의 평민이겠지요. 농담입니다. 그대가 임금 노동이라는 사슬에서도 진정으로 해방되기를 바랍니다

 

2026. 0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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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5. 02. 


5월의 밀실

 

화물 안에 놓인 칸막이 속에 여기 사람 하나 누워 있다.

말을 잃은 사람들의 찰나에도 혈관이라는 줄기가 펴고 있다.

땀이 모여 빛의 장관을 이루지만, 밀실의 세상에는,

한 어머니는 택배원 아들을 잃었다.

 

굳건하게 자라날 이들은 가벼운 수풀 사이처럼 스치고,

뜬 눈으로 눈을 감는다.

 

남을 대신할 사람을 찾으며 숫자에 눈이 먼 광인들은

선봉을 잃으며 애틋하게 빈 자리를 채운다.

우리는 죽은 노동자. 산 자들의 세상에는 우리가 없다.

우리는 배운 것이 없는 사람. 똑똑한 자들에게도 우리가 없다.

 

두 눈에 철심이 박힌 노동자가 까막눈이 될 때조차,

상식은 노동자를 버렸다. 저기, 제 앞가림만 밝히는 양복쟁이들은,

비천한 것을 잃으며, 자신의 상식을 떠든다

 

, 굳건해야만 하는 것이다.

힘든 시련을, 모진 인내를, 그리고 고된 땀을 붉은 피로 채우려면,

더욱 강인해져야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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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3. 21. 


자본의 도시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찾아 지상으로 내려왔을 때,

온 도시는 화염의 천국이었다.

 

문학의 시녀들은 둔하여 자신의 말을 쓸 수 없었고,

라스베거스에 펼쳐진 신기루가 마천루를 장밋빛으로 가렸다.

그곳은 자신의 조각을 새긴 기풍있는 가문의 벽화를 자랑한다.

당신이 영웅이라면 영원한 동상이 될 것이다.

 

응답하라. 여기는 포화.

시장통에 성경이 조각보처럼 찢기고,

예언서가 먼지처럼 흩날리며,

유러피안이 유토피아를 말한다

 

카스트로가 죽었고, 미국이 부활했다.

재림을 앞세운 군단이 시내를 폭격하며 깔끔하게 정복할 때,

파괴된 국민들은 식민지에 환호한다.

 

희망은 양면이 없는 동전 던지기.

종말의 서막을 앞당긴 화살은 군주로 향하고,

폭격기가 터뜨린 잔상은 지배자의 흉터를 남긴다

 

당신은 누구를 응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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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3. 21. 



소련가

 

1977. 

 

영광 있으랴, 우리의 자유로운 조국이여

민족 단결의 든든한 보루여

레닌의 당은 인민의 힘이며

우리를 공산주의의 승리로 인도하노라!

 

폭풍우를 뚫고 자유의 태양은 우리에게 빛났고

위대한 레닌은 우리의 길을 밝혀주었네

그는 인민들을 정의로운 헌신으로 일으켜 세웠고

노동과 투쟁으로 우리를 고취했노라.

 

공산주의 사상의 불멸의 승리 속에서 

우리는 조국의 앞날을 보노라

영광스러운 조국의 붉은 깃발에 

우리는 언제나 남김없이 헌신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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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8. 30. 


무산 계급 문화 대혁명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 예술이란, 내용적으로는 시대 정신을 담아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이 특수성을 자꾸만 드러내는 작품일수록, 소모적인 예술일 뿐이다. 물론 잔인한 말이다. 하지만 무산 계급의 공통적인 요구를 담아낸다는 점에서는 작품에서도자꾸만 식민지나 여러 지면으로나, 내용 상의 이유를 들어서, 예술가들에게도 교육을 요구하거나, 정작 작품에 대해 충분히 비판할 수 없다면, 더 이상 예술이 아닌 셈이다. 그 판단은 관람하는 독자가 과연 누구에 따라서도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작품을 만든 사람에게는 과연 어떠한 생각으로, 그 대상을 누구에 대한지를 제대로 밝히지 않는다면, 그건 소수를 위한 작품으로 남을 여지도 앞으로는 충분해진다. 저작권을 가지는 출판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차이가 어느 정도냐면, 예전에 중국에서 발생한 '문화 대혁명'과 관련된 배경을 알게 됐을 때, 보이는 반응에서도 충분히 보여질 수 있다.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와 관련된 배경적인 지식과 문제 인물에 대한 의식에 따른 관심도 저절로 생겨나듯이, 특히 예술 작품에서는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점을 밝혀낼 수 있다면, 특히 자본주의에 따른 현대화로부터 잊어버렸거나, 죽어가던 개념도 충분히 재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비되는 예술일수록, 창조보다 파괴가 더 쉽다.

 

특히 플레하노프도 훗날 당신이 사회배외주의로 빠지기 이전에도, 일찍부터 마르크스주의 미학에 대한 높은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전 혁명가들은 예술에 대한 관심과 철학적인 조예도 매우 높았고, 훌륭했다. 자국의 뛰어난 문학을 외울 정도로 접했으니, 그 지식을 일찍부터 수용해서 함양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에서는 '문화 대혁명'이 홍위병으로부터 이뤄진 문화재 훼손과 파괴라는 결과를 생기도록 만들었다는 지적도 있지만, 공산주의 예술에 대한 함양이라는 측면이라는 시각에서 보자면, 기존의 전통적이고, 담론적으로 머물렀던 문화를 새롭게 창시한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과 파급력에 있어서는 또 다른 시각도 충분히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수준은 북조선만큼 이색적이더라도, 질적으로는 한참 낮은 수준으로 보일 따름이다. 물론 인민 예술의 발생을 인위적으로도 막을 수는 없다는 점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현대 예술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근대 인상주의, 현대 미술, 추상적인 담론들이라는 관찰된 개념을 지나볼 때도 공통점을 충분히 추론해볼 수 있다. 그것이 매우 계급적인 시각에 있어, 시대적으로, 특히 대중 인민들에게도 더욱 난해해지고, 복잡하게 전개되지는 않았었나. 특히 예술의 현실적인 요구와 맞물려서, 대중 인민들에게 더 어려워졌다는 책임를 지적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래도 국내 문화재에 대한 역사적인 관심과 반환에 대한 요구와 조예도 깊어진만큼, 봉건적인 전통 문화에 비해볼 때면, 그동안 혁명 문화를 수용하지 않았던 결과를 염두하고 있다. 어느 정도는 그 한계가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부르주아지로부터 한정되고 있다는 점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히려 수입된 서적들에 더욱 의존하고, 무산 예술가들이 직접 창작한 창조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시각적인 제한만을 오히려 강화하는 방식으로, 또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대한 배척에서도, 주관적인 감상에 치우친 경향과 비평에만 몰두한 결과를 오래 전부터 지적했지만, 지금은 앞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심히 우려하는 바이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 국내 문화는 자본주의와 상업성이 가진 문화적인 개념으로부터 모호하고, 쉽게 침투할 수 있다는 점을 실감한다. 그러나 앞선 예술의 목적에 있어 충분한 인민 대중에 대한 계급 투쟁의 함양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자신들의 시각마저, 주관적인 현상으로만 머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표명해본다.

 

무산 혁명의 시금석

 

시험 지면에서도 자주 나오는 예술 비평에서, 객관식은 단순히 선택 사항이 아니다. 자신의 계급적인 시각에서도, 예술에 대해 과연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체계적인 미학적 교육을 받지도 못하고, 또 답하지도 못한다면, 그 예술가는 좋은 예술가라 부를 자격도 없으며, 심지어 소수의 입맛을 맞추는 미학적인 운동을 대변하는 주체들도 부상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 증명은 전적으로 자신이 아니라, 만든 사람인 본인에게도 있다. 여기서는 마르크스주의에 있어 계급 예술이란, 바로 예술가의 성취하는 목적이자, 비로소 그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여부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국에서는 현실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안주해서는 해체하기만 하는 예술가들이 더 많아졌다는 말이기도 하므로, 자본주의에 있어서는 반대로도,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만 해서 예술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그 대상이 누구에게 있었는지를 물을 필요도 있다. 따라서 그들만의 예술이 더욱 저급해지기 전까지는, 더 이상 현실적인 고민 하나 없던 예술에 대해 과연 가난한 예술인지를 부를 수 있었는지도 충분한 의문을 품게 만든다. 앞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 예술가는 자신의 멋대로가 아니라, 그 고민을 더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면 좋겠다. 모든 인공 지능이 그 영역을 대신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세상에서, 어쩌면 예술가들에게도 현실에 대한 노력을 더더욱 요구하게 된다. 새로운 예술가라면 충분히 많아졌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우리에게는 정말로 어떤 예술가들이 과연 필요한가. 이에 대해서는 그동안 창작은 없고, 소비만 남은 우리 예술계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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