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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포도』 집필 배경

 


1947년, 스타인벡은 로버트 카파와 함께 소련을 직접 방문했다. 당시 미국은 반공주의가 점차 거세지던 시기였음에도, 그는 국가의 이념이 아닌 ‘소련 인민들의 삶’을 포착했다. 이 여정을 바탕으로 《러시아 일기 (1948)》를 출간하여 이념적 편견을 거두고, 2차 세계대전 후 폐허가 된 터전(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 우크라이나, 조지아 등)을 재건하며 살아가는 소련 대중을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그는 대공황기 미국의 자본주의가 소작농과 노동자들을 철저히 착취하고 파멸시키는 과정을 목격했다. 따라서 집단 농장이나 노동자 자치 형태를 시도하던 소련의 체계에서 자본주의 비인간성에 맞설 투쟁점을 찾고자 했다.

 

《분노의 포도》가 출간되었을 때, 미국 자본가들과 정치권은 스타인벡을 “공산주의 선전 작가”, “빨갱이”라며 거세게 비난했다. 실제로 캘리포니아주와 오클라호마주의 일부 지자치에서는 “더럽고 욕설이 난무하며, 캘리포니아 농장주들을 모욕한다”는 이유로 공공도서관에서 책을 대출 금지 처분했다.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고 도서관에서 불태우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반면 소련을 비롯한 진영에서는 그를 ‘미국 민중의 고통을 대변하는 양심적인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작가’로 높이 평가했다.

 

스타인벡은 냉전이 한창이던 1963년에도 소련과 동유럽을 다시 방문했다. 한편 스타인벡은 《분노의 포도》를 쓰기 전, 오클라호마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이어지는 이주민들의 66번 국도를 직접 차를 타고 따라가며 그들의 비참한 삶을 몇 달 동안 취재했다.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과 대규모 모래바람 여파로 터전을 잃은 농민들의 투쟁을 그린 소설이다. 미국 대공황기 가뭄과 트랙터 중심의 대규모 기업농으로 인해 수많은 소작농이 토지에서 쫓겨났다. 주요 등장인물로는 정당방위 살인으로 복역 후 가석방되어 고향에 돌아온 주인공 톰 조드가 있으며, 그의 어머니 마 조드는 가족의 단합과 생존을 이끈다. 짐 케이시는 전직 목사 출신으로 이주민 노동자들의 현실을 깨닫고 노동 운동가로 변모한다. 샤론의 장미는 톰의 동생으로 임신 중인 젊은 여성이다.

 

가석방된 톰 조드는 술집 싸움에서 정당방위로 상대를 죽여 4년간 복역한 뒤 고향 오클라호마주 살리소로 돌아온다. 고향에 돌아오지만 가뭄과 은행의 토지 압류로 집이 황폐해진 것을 확인한다. 길에서 옛 마을의 전직 목사였던 짐 케이시와 재회하는데, 케이시는 목사직을 그만둔 상태였다. 고향 집은 이미 가뭄과 은행·대기업의 농지 압류로 파괴되어 있었다. 가족들은 이웃에 피신해 있었으며, ‘캘리포니아에 가면 일자리와 과수원이 풍부하다’는 전단지를 보고 낡은 허드슨 트럭을 개조해 일자리를 찾아 캘리포니아로 떠나려던 차에 톰도 합류한다. 조드 일가는 낡은 트럭 한 대에 온 가족과 전 재산을 싣고 ‘젖과 굴이 흐르는 땅’이라 불리는 캘리포니아를 향해 66번 국도를 따라 고난의 여정을 떠난다.

 

조드 일가는 12명의 가족과 짐 케이시까지 총 13명이 트럭 한 대에 타고 서부로 이동한다. 고향을 떠나자마자 고된 여정 속에서 조부모가 고령과 가혹한 압박으로 길 위에서 세상을 떠나고, 톰의 형 노아는 강가에 남아 가족을 떠나며, 톰의 동생 샤론의 장미의 남편 코니마저 가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는 등 일부 가족도 이탈한다. 그러나 어렵게 도착한 캘리포니아는 기회의 땅이 아니었다. 농장주들은 전국에서 몰려든 30만 명이 넘는 이주 노동자(일명 ‘오키(Okies)’)들을 이용해 인건비를 깎고자 과잉 공급 사태를 악용했다. 그들은 임금을 형편없이 후려치고 악랄하게 착취했다. 가난한 이주민들은 밤마다 66번 국도변 임시 숙소에서 만나 음식을 나누고, 정부가 관리하는 수용소(위드패치 캠프)에서는 노동자들이 자치회를 구성해 경찰의 폭력 없이 위생적이고 인간적인 생활을 누리며 잠시 기대를 품기도 하지만, 일자리가 부족해 다시 민간 과수원 농장(후버빌)로 이동하게 되면서 일자리를 찾아 다시 유랑 노동길에 나선다.

 

복숭아 농장에서 일하던 중, 임금 인하에 반대하며 파업을 주도하던 짐 케이시를 만난다. 그러나 임금 인하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에서 짐 케이시는 자경단원의 몽둥이에 맞아 숨을 거둔다. 케이시의 죽음에 분노한 톰은 자경단원을 살해하고 수배자가 된다. 톰은 숨어 지내다 어머니와 작별을 고한다. 톰은 케이시가 남긴 생각, “인간은 저마다의 영혼을 가진 것이 아니라, 커다란 하나의 영혼에 속해 있음”을 깨닫고 노동 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며 떠난다. 케이시의 뜻을 이어받아 굶주리고 억압받는 민중 편에 서서 싸우겠다고 약속하고 길을 나선다.

 

수확철이 끝나도 일거리가 없는데 비마저 쏟아져 폭우와 홍수로 수해를 입고, 거처가 물에 잠기게 된다. 영양실조로 사산한 아이를 출산한 샤론의 장미와 가족들은 피신한 헛간에서 굶어 죽어가던 한 노인과 마주한다. 샤론의 장미는 아이를 잃은 자신의 가슴에서 나오는 모유를 아무것도 먹지 못한 노인에게 물려 그의 목숨을 건진다.

 

소설은 톰 조드의 서사와 1930년대 미국 노동자 대중의 현실을 교차하는 구성으로 전개된다. 《분노의 포도》는 단순한 개별 가족의 수난사가 아닌, 자본주의 구조가 초래한 비극과 이에 대응하는 노동자 계급의 의식 성장을 담아낸다. 스타인벡은 개별 농장주의 악함보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비인간성을 포착한다. 소설 초반에 은행은 “피를 마시고 돈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괴물”로 묘사된다. 소살 내 가장 유명한 묘사 중 하나는 과잉 생산으로 인한 식량 폐기 장면이다.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는데, 오렌지에는 석유가 뿌려진다. 굶주린 이들의 눈 속에 분노가 쌓여가고, 그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수확기를 향해 익어간다.”

 

이러한 자본의 이윤을 유지하기 위해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 앞에서 음식을 불태우는 대공황기 자본주의의 모순이 드러난다. 마 조드는 처음에는 “우리 가족만 살아남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점차 남의 아이들에게도 찌개를 나눠주고 길거리의 이웃을 품는다. 톰은 개인적인 복수나 생존을 도모하던 개인에서 전 민중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운동가로 거듭난다. 짐 케이시는 종교적 관념론에서 벗어나 현장 중심의 계급 의식으로 전환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위드패치 수용소에서는 경찰이나 자본가의 압제 없이 노동자들이 스스로 규율을 만들고 자치 위원회를 운영한다. 샤론의 장미는 결말에서 자신의 아이가 비록 죽었음에도 타인을 살려낸다. 이러한 장면들은 소설 전반에서 가장 강렬한 사회적 고발이 담긴 대목이자, 자본주의의 비인간성과 과잉 생산의 모순을 드러낸다.

 

짐 케이시는 자경당원에게 최후의 말을 남긴다.

 

“너희는 너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라. 너희는 사내아이 하나를 배고프게 만들고 있어. 너희는 너희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단 말이다.”

 

케이시는 자신을 공격하는 자경단원 개개인을 악마화하지 않고, 그들 역시 노동자를 억압하는 거대한 악순환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 죽음은 방관자였던 톰 조드를 각성시켜, 개인의 생존에서 민중 전체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투사로 전환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도망자가 된 톰이 동굴 속에서 어머니 마 조드에게 마지막으로 작별하며 말을 남긴다.

 

“어디든 사람들이 굶주린 이들을 위해 싸우는 곳이 있다면, 나도 거기에 있을 거예요. … 사람들이 우리가 만든 음식을 먹고, 우리가 지은 집에서 살 때 … 나 역시 거기에 있을 거예요.”

 

이는 눈에 보이는 한 인간으로서의 톰 조드는 비록 사라지더라도, 압제받는 민중이 있는 모든 현장에 존재하겠다는 선언이다. 개인에서 민중 전체로 이어지는 순간이며, 톰 조드는 이러한 굵직한 인물들과의 생사를 겪으며 운동가로 성장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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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가 올 때면 시동을 멈추곤 했다. 운전대를 잡기 전에 그녀의 생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소한 것까지 알고 있었기에, 찬 공기의 온도가 식고 있었다. 그녀에게 유창하게 말할 줄 몰라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말의 심연이 가라앉는다. 무작정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가끔 숨바꼭질의 술래 없는 당사자가 된다. 모두가 숨진 곳에서 바람이 조용히 떠나간다. 조금씩 힘을 잃어가는 당나귀가 가까운 마을에 목을 축이기까지, 숲속에서 피운 모닥불에는 나른한 그녀의 흐릿한 모습이 빠져나간다. 유골에 떨어진 먼지가 옷깃 사이로 떨어졌다.

 

학이 날자 모든 것이 고요했다. 폐허가 된 병원에 있을 때도, 인적이 없어 축축한 서커스 공연장의 관객석에 홀로 앉아 있을 때도, 무작정 마을 버스를 아무거나 탈 때도, 예정되지 않은 곳으로 훌쩍 떠났다. 이 썩은 세상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면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밀려오는 폭풍의 충동을 밀어내고, 소용돌이의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가방에 이틀치 속옷만을 챙겨 운전대를 잡았다. 비는 도로를 축축하게 젖을만큼 개운하게 훑고 지나갔다. 폐차가 예정된 구식을 끌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바람의 언덕으로 향했다.


식장에 초대받지 못한 이가 등장할 때만큼 당혹스러운 일이 있을까. 떨리고 있었다. 긴 추위는 백지로 채운 폭설이 세차게 쏟아졌다. 하얗게 번진 얼룩처럼 형체를 잃은 그림자가 떠돌고 있다. 언젠가 화실에서 채색을 하던 중 무취의 향을 맡은 적이 있다. 독특했다. 눈 덮인 고속도로 위에는 폐차가 쌓였다.


그녀의 자서전에는 정작 그의 이름이 쓰여있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글로는 차마 담을 수 없는 상심의 세월이 그림자처럼 번졌다. 마치 꺼져가는 불꽃을 억지로 되살려보려는 안간힘처럼, 그의 행방은 부재중 표시를 남겼다. 오늘 아침에는 아무도 깨워주지 않은 깊은 잠이 들었다. 웃고는 있지만 속이 타는 영정의 분신처럼 그는 사라졌다. 다시 시동이 걸렸다. 내내 고속도로를 달리고는 있지만, 딱히 정해진 목적지가 없다. 계속 바퀴만 굴리고 있다. 바퀴의 도르래가 심장 주위로 낙하할 때면 낭떠러지로 추락을 준비하는 중이다. 무신경함의 극치가 속도를 추월했다.


떨어진 차량은 절벽의 험준한 낭떠러지로 굴러갔다. 나뭇가지들이 날카롭게 송곳처럼 온몸을 찔렀다. 창백한 상태로 눈을 떴다. 마비가 되었지만 의식은 눈처럼 하얗게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폭설로 폐차가 쌓인 도로에는 창백한 사람들이 일제히 누워 있다. 그중에 하나였지만, 비바람처럼 세차게 몰아치는 폭설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근처에 천막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차량 안은 무척 적막했다. 창문 틈 사이로 거센 바람이 스며들었다. 뒤집힌 차량에 바람이 샜지만 막을 도리조차 없었다. 깜빡이만 똑딱거렸다. 멀리서 외투를 입은 한 아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는 뒤집힌 차량 위로 올라가 등유를 부었다. 차량에 불이 붙었다. 거센 불길이 폭설을 뚫고 있었다. 차량은 금세 불이 붙었다. 사방에서 경고등이 울렸다. 눈 덮인 폐차들 속에서 전조등이 깜빡거렸다.   


눈앞이 아득했다. 험준한 등고선을 따라 높은 시내가 보이는 곳까지 올라갔다. 물론 그녀는 이제 없었다. 잠잠해진 심연의 눈을 따라갔다. 그 언덕의 폭풍에 휩싸여 순식간에 행방불명이 된다면 그대로 바다가 인도해줄 것이라 여겼다. 차라리 그렇게 안도했다. 이제는 안중에도 없던 지하실의 계단으로 차츰 내려갔다. 구세계가 끝나듯, 여정에 지친 당나귀가 막사에서 잠을 청하고, 그는 바람의 언덕에서 숨을 거두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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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왓킨스, 《코뮌(파리, 1871), 2000년 작》은 1871년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자치 정부였던 ‘파리 코뮌’의 탄생과 몰락을 다룬 작품이다. 약 5시간 45분 (345분)에 달하는 긴 상영 시간 동안 영화는 단순한 역사극에 그치지 않고, 파리 코뮌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현대 매체 간의 관계를 파격적인 방식으로 다룬다.

 

영화는 보불전쟁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패배 직후, 피폐해진 프랑스 민중의 삶에서 출발한다. 1871년 3월 18일, 티에르가 이끄는 프랑스 임시정부(베르사유)는 파리 인민들로 구성된 국민방위대의 대포를 압수하려 한다. 그러나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여성들과 민중이 이를 저지하고, 군대가 발포를 거부하면서 봉기가 시작된다. 위협을 감지한 임시정부가 베르사유로 도피하자 파리 인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선거를 거쳐 자치 정부인 ‘파리 코뮌’을 선포한다.

 

코뮌 정부는 집세 면제, 제빵 노동자의 야간 작업 금지, 무상 및 종교 분리 교육, 여성 권리 향상, 공장 노동자 공동 운영 등 사회 혁명 정책들을 쏟아낸다. 그러나 동시에 전시 상황에서의 행정적 미숙함, 지도부 내 이념적 분열, 여성 참여에 대한 일부 보수적 한계 등 내부적인 균열도 함께 드러낸다.

 

이후 프로이센과의 협력으로 전열을 정비한 베르사유 정부군이 파리로 진격해 들어온다.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이어진 ‘피의 일주일’ 동안 코뮌 인민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격렬히 저항하지만, 압도적인 무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진다. 결국 약 3만 명에 달하는 파리 인민과 노동자들이 무차별 학살당하면서, 파리 코뮌은 72일간의 역사를 뒤로한 채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다.

 

이 영화의 특징은 1871년이라는 역사적 현장에 ‘현대 방송 매체’의 존재를 개입시킨 시대착오적 연출이다. 극 중에는 두 개의 방송 취재진이 등장한다.

 

코뮌 TV (민중 방송): 마이크를 들고 바리케이드 위를 직접 누비며 여성, 어린이, 가난한 노동자, 군인들의 목소리와 열망을 대담 형식으로 담아낸다.

 

베르사유 TV (기득권 방송): 정제된 방송실에서 고급 정장을 입은 보도 진행자와 취재원이 코뮌을 폭도와 무정부주의자로 몰아가며 선전 선동과 가짜 뉴스를 보도한다.

 

19세기 역사극에 현대의 촬영 장비와 뉴스 진행자가 등장하는 이 구조는 대중 매체가 역사를 다루고 편견의 틀을 씌우는 방식을 풍자했다.

 

또한 영화는 장시간 연속 촬영 방식을 활용해 카메라로 파리의 골목과 바리케이드 사이를 천천히 훑고 다닌다. 345분이라는 방대한 상영 시간 덕분에 주인공 몇 명에게만 조명이 집중되지 않고, 거리의 아이들, 방직 공장 여성, 정부군 병사 등 모든 출연진에게 고루 발언권이 주어진다. 관객은 6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72일간의 역사를 마치 ‘실시간 생중계’로 목격하는 듯한 깊은 생동감에 빠져든다.

 

무엇보다 서늘한 충격을 주는 대목은 화면 속 열기 외적으로 등장하는 검은 자막이다. 코뮌 인민들이 화면 속에서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을 때, 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떠오른다.

 

“이 증언에 나오는 21세 여성 노동자는 5월 24일 베르사유 정부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이 병사는 진압 후 신원 미상 상태로 대량 매장지에 묻힌다.”

 

민중의 모습과 그들의 비극적 최후를 미리 알리는 자막의 대비는 관객에게 깊은 충격을 선사한다.

 

감독은 전문 배우 대신 약 300명의 비전문 일반인을 기용했다. 이들은 단순한 보조 출연자가 아닌 영화의 공동 창작자였다. 신문 광고, 전단지, 사회 단체 등을 거쳐 모집된 출연진은 실제 선반공, 교사, 우체부, 간호사, 노조 활동가, 알제리·아프리카계 이민자, 실업자, 학생 등 현실에서 약자나 노동자 계급으로 살아가는 프랑스 인민들이었다. 특이한 점은 베르사유 정부군이나 기득권층 역할을 맡은 사람들 역시 실제 보수적 정치 성향을 가진 일반인이나 언론인들을 모집했다는 것이다.

 

배우들은 촬영 전 수개월 동안 역사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파리 코뮌 학습 토론회에 참여했다. 각자 맡은 인물의 사회적·경제적 배경을 연구한 이들은 정해진 대본을 외우는 대신, 감독이 던져주는 특정한 상황 (“빵 값이 올랐다”, “정부군이 진격해 온다”) 속에서 자신이 연구한 인물로서 자발적인 즉흥 연기를 펼쳤다. 영화 촬영장은 제작진이 완벽히 통제하는 연기 공간에 머물지 않고, 출연진들이 실제로 화를 내고 상대의 말을 끊으며 논쟁하는 하나의 ‘정치적 공론장’으로 기능했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배우들은 ‘4차원의 벽’을 깨고 1871년의 역할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온다. 그리고 촬영기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진짜 모습 (현대 프랑스의 노동자, 이민자, 학생 등)으로 돌아와 오늘날 사회 문제 (세계화, 대중 매체 독점 및 왜곡, 인종차별, 신자유주의 노동 조건, 교육 문제, 실업난 등)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인다.

 

“저는 사실 알제리 출신의 이민자 노동자입니다. 제가 맡은 1871년 노동자의 빈곤은, 2000년대 프랑스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저의 삶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과 현대 출연진의 실제 삶이 한 화면에서 교차하는 순간, 영화는 단순한 연극에 머물지 않고 시대를 가로지르는 기록극으로 전환된다.

 

이들의 동지애는 촬영장에서 끝나지 않았다. 완성도 높은 민중극을 만들어낸 출연자들은 영화 완성 후 대형 매체나 배급사가 영화를 외면하려 하자, 직접 영화 수입/배급 협동조합을 결성하여 자체 상영회를 열고 언론 매체 비판 운동을 이어갔다.

 

《코뮌》은 단순히 지나간 옛 역사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역사적 사건과 현대적 매체가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불꽃으로 대중 매체의 독점적 편견의 틀을 고발하며, “150년 전 민중들이 피 흘려 싸웠던 가치들이 과연 지금은 이루어졌는가?”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345분 동안 관객을 투쟁의 장벽 한가운데로 불러앉히는 이 혁명적인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민중의 열망은 왜 역사 속에서 지워졌는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스스로 되묻게 만든다.



<《코뮌》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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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니셰프스키의 생애

 

체르니셰프스키는 사제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신학 대신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해 유물론 철학과 공상적 사회주의를 흡수했다. 이후 당대 최고의 진보 잡지인 『현대인』의 편집을 맡아 사회 비판적 논설과 비평을 쏟아내며 청년들의 사상적 지주로 떠올랐다. 1861년 러시아 농농해방령이 농민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자, 혁명적 농민 운동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1862년 제정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었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그의 가장 유명한 대표작 『무엇을 할 것인가?』 (1863)를 집필했다. 1864년 ‘시빌 공판 (가짜 사형 집행 의식)’을 거쳐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시베리아에서 고된 유배 및 강제 노동 생활을 했다.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후 1883년에야 고향 사라토프 부근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소설은 감옥에 갇혀 있던 체르니셰프스키가 집필한 작품으로, ‘새로운 사람들(신인류)’이라 불리는 급진적 진보 지식인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노동 조합 공동체를 다룬다. 주인공 베라 파블로브나는 속물적이고 가부장적인 부모의 압박과 원치 않는 정략결혼 위기에 처해 있다. 이때 그녀의 남동생 가정교사이자 의학도인 드미트리 로푸호프가 그녀를 돕기 위해 나선다. 로푸호프는 베라에게 법적·사회적 독립을 제공하기 위해 위장 결혼을 제안하고, 두 사람은 형식적인 부부가 되어 부모의 집을 떠난다.

 

독립한 베라는 경제적 자립을 위해 여성 노동자들을 모아 봉제 작업장 (협동조합)을 설립한다. 이 작업장은 기존 자본주의 공장과 달리, 모든 노동자가 이익을 공평하게 나누고 경영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구조이다. 베라는 단순한 경제적 자립에서 여성들이 교육을 받고 자존감을 되찾는 공동체 공간으로 발전시킨다.

 

소설에는 베라가 꾸는 네 가지 주요 꿈이 등장한다. 

 

첫 번째 꿈에서 베라는 어둡고 습기 찬 지하실에 갇혀 다리가 마비된 상태로 누워 있다. 이때 신비의 여신 (‘민중에 대한 사랑’ 혹은 ‘해방’)이 나타나 그녀의 손을 잡자, 베라의 마비가 풀리고 지하실 밖으로 나와 들판을 달리게 된다. 여신은 베라에게 “사람들을 감옥에서 풀어주라”고 당부한다. 이 꿈에서 베라는 억압에서의 해방과 자립을 깨닫는다.

 

두 번째 꿈에서 로푸호프와 베라가 들판을 거닐고 있다. 들판에는 이삭이 자라고 있지만, 관리되지 않아 황폐해진 땅과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이 대비되어 나타난다. 꿈속에서 이성적 판단과 자연적 순리가 대화를 나누며, 어째서 어떤 땅은 황폐하고 어떤 땅은 결실을 맺는지를 설명한다. 이 꿈에서 자연과 이성의 조화를 이해한다.

 

세 번째 꿈에서 베라는 자신의 비밀 일기장을 읽어주는 여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일기장에는 베라가 자신도 모르게 숨겨왔던 진심이 적혀 있다. 베라는 자신을 구출해 준 첫 남편 로푸호프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을 느끼고 있지만, 그것은 사상적 동반자로서의 감정이자 부채의식일 뿐 성적·감정적 울림을 주는 ‘진정한 연애 감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꿈에서 베라는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네 번째 꿈에서 베라는 여신의 안내를 받아 인류 역사 속 여성의 지위 변화를 살펴본 뒤, 미래의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목격한다.

 

베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로푸호프의 친구이자 의사인 알렉산드르 키르사노프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보통의 통속 소설이라면 질투와 갈등이 일어났겠지만, 로푸호프는 ‘합리적 이기주의’ 철학에 따라 행동한다. 소유욕이나 질투로 베라를 구속하는 것은 모두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로푸호프는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이 자살한 것처럼 위장한 뒤 미국으로 떠난다. 이후 베라와 키르사노프는 정식으로 연인이 되어 서로를 존중하는 사상적 동반자이자 연인으로 살아간다.

 

소설 중반에 등장하는 라흐메토프는 일반적인 ‘새로운 사람’에서 ‘헌신적인 혁명가’의 전형이다. 그는 오직 민중의 해방과 혁명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모든 사사로운 욕망, 편암함, 사랑까지 포기한다.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뾰족한 못이 박힌 침대에서 자는 등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훈련을 거친다. 작품 전체에서 비중은 크지 않지만, 당대 러시아 청년들에게 가장 강력한 혁명적 모범을 제시한 인물이다.

 

훗날 미국에서 돌아온 로푸호프는 다른 여성과 결혼하여 베라·키르사노프 부부 근처로 이사한다. 두 부부는 서로 깊은 우정을 나누며, 이상적인 공동체와 사업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1863)는 단순히 한 편의 문학 작품에서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흔들고 러시아 혁명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가장 강력한 정치·사회적 선언문으로 평가받는다.

 

새로운 사람들 (신인류)라는 행동하는 지식인상을 제시하여 소설은 관념적 논쟁에만 머물던 기존 1840년대 세대 (‘잉여인간’)와 달리, 이성과 행동으로 삶을 주도하는 1860년대 진보 청년층 (‘신인류’)의 모델을 제시했다. 베라, 로푸호프, 키르사노프 같은 인물들에서 이기주의와 타인에 대한 봉사가 대립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합리적 이기주의’를 보여주었다. 금욕과 철저한 자율 훈련으로 자신을 단련하는 라흐메토프는 당대 청년들에게 ‘민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전천후 혁명가’의 완벽한 표상이 되었다.

 

가부장적 억압이 극심했던 당대 러시아 사회에서 이 소설은 여성의 인권과 경제적 자립을 최초로 정면 다룬 작품 중 하나이다. 부모의 압제나 정략결혼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방 수단으로 ‘위장 결혼’을 제시했다. 베라가 만든 봉제 작업장은 단순히 돈을 버는 곳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착취 없이 이익을 나누는 생산자 협동조합이자 여성이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공간이었다. 이는 러시아 여성 운동과 초기 사회주의 운동의 시험대가 되었다.

 

이 소설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러시아 혁명가들의 ‘지침서’ 역할을 했다. 1870년대 “민중 속으로 (브나로드)”를 외치며 농촌으로 내려간 수많은 청년들이 이 책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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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런던의 생애와 한계

 

   

잭 런던 (1876~1916)은 20세기 초 미국 문학사를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파란만장한 삶을 몸소 살아낸 행동주의 지식인이다. 동시대 대중 상업 문학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 미국 작가 중 최초로 글을 서서 거부가 된 인물 중 한 명이지만, 그 사상적·삶의 궤적은 지극히 거칠고 급진적이었다.

 

잭 런던은 샌프란시스코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노동을 겪었다. 노동 이력으로는 신문 배달원, 통조림 공장 노동자, 불법 굴 밀수꾼 (해적), 해안 경비대, 물개잡이 선원, 황금광 (클론다이크 골드러시 참전) 무임승차 방랑자 (부랑아) 등 거친 밑바닥 삶을 전전했다. 이 시기 직접 겪은 육체 노동과 극한 자연에서의 생존, 그리고 밑바닥 사람들과의 만남은 훗날 현장 취재형 작가로 성장하여 그의 작품들에 사실적인 생동감을 부여하는 결정적 원천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정의하며 정치적 신념을 글과 행동으로 적극 표출했다. 무임승차 방랑자로 미국 대륙을 유랑하다 무단전착 혐의로 감옥에 수감된 후, 노동자 계급이 처한 구조적 착취를 뼈저리게 겪고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칼 맑스, 『자본』과 사적 유물론도 이때 접하여 깊이 탐독했다. 그는 미국 사회당 활동 이력이 있으며, 미국 사회당 후보로 오클랜드 시장 선거에 두 차례 출마했으며, 미국 전역의 대학을 돌며 강연을 펼치는 등 사회주의 혁명 사상을 적극적으로 전파했다. 런던의 슬럼가인 이스트엔드에서는 직접 누더기를 걸치고 빈민들과 함께 생활한 뒤, 자본주의의 참상을 고발한 르포르타주인 『심연의 사람들, (1903)』을 집필했다.

 

그러나 잭 런던은 단순한 사상가라기보다 시대의 복잡한 이념과 충돌했던 입체적인 인물이다. 노동자 계급의 연대와 해방을 외치는 동시에, 자연의 가혹함과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본능 (자연주의·생물학적 결정론)을 깊이 다뤘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지지했음에도, 당시 미국에 팽배했던 백인 우월주의 및 사회적 다원주의의 영향을 받아 백인 영웅주의나 인종적 편향성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잭 런던의 대표작 및 문학적 유산으로는 『야성이 부르는 소리, (1903)』 & 『하얀 어금니, (1906)』는 알래스카 자연 속 문명과 야성의 충돌을 다룬 소설이다. 『강철 군화 (1908)』는 자본 독재 체제의 등장과 계급 투쟁을 다룬 정치 소설이다. 『마틴 이든, (1909)』은 노동자 출신 작가의 성공과 환멸을 그린 자전적 성격의 명작으로 잭 런던은 40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50권이 넘는 책을 남기며, 펜을 무기 삼아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로하고 인간 생존의 본질을 밀도 있게 탐구했던 ‘행동하는 작가’였다.

 


『강철 군화』 소개



잭 런던이 1908년에 발표한 『강철 군화』는 맑스주의적 세계관과 정치적 관점을 나타낸 작품이다. 이 소설은 ‘편집자 주석이 달린 회고록’이라는 특수한 형식의 구성을 취한다. 본 줄거리는 혁명가 어네스트 에버하드의 아내 아비스 에버하드가 20세기 초 자본가 계급의 독재와 민중의 저항 과정을 기록한 수고 형태다. 편집자 주석은 사회주의 혁명이 완수된 약 700년 후의 시대이며, 역사학자 ‘앤서니 메러디스’가 아비스의 수고에 주석을 달아 출판하는 형식을 띤다. 이러한 구성은 자본주의의 비극적 종말과 사회주의의 최종 승리를 역사적 기정사실로 전제하는 효과를 낸다.

 

‘강철 군화’는 독점 자본가 집단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국가 권력, 언론, 사법부, 군대를 완전히 장악하여 구축한 극단적인 자본주의 독재 체제 (초기 파시즘의 형태)를 표상한다.

 

어네스트 에버하드는 계급 투쟁과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정밀하게 분석한다. 노동자가 생산한 총가치에 비해 지급받는 임금이 적기 때문에 국내 소비 시장에는 항상 상쇄되지 않는 ‘잉여 생산물’이 남게 되며, 자본가 체제는 이를 해외 시장 개척으로 해결하려다 결국 제국주의 전쟁과 자체 붕괴로 치닫는다는 논리를 제시한다. 소설 속 자본가 계급은 노조 간부나 숙련 노동자 일부에게 특권을 부여하여 노동자 계급을 분열시키며, 자유주의적 지식인이나 종교인들을 포섭하여 체제를 유지한다.

 

혁명을 일으키려던 민중의 시도는 강철 군화의 철저한 공작과 잔혹한 군사력 진압으로 실패하고, 시카고는 무참한 유혈의 장이 된다. 소설은 단기적 패배와 비극에도, 수세기에 걸친 지하 투쟁으로 이어지는 혁명의 장기성을 그려낸다.

 

『강철 군화』는 단순한 정치 선전물에서, 20세기 역사적 사건들을 정확히 예견한 성격을 지닌다. 이는 조지 오웰의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보다도 앞선 것으로, “자본가 계급이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파시즘적 폭력을 행사할 것임을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정확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또한 혁명이 한 번의 폭발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처절한 반동과 시련을 거치며 단계적으로 이행한다는 역사적 변증법을 서사로 구현했다.



에버하드의 논쟁


 

이 저작은 자본주의 체제의 내적 모순과 계급 권력의 본질을 거침없이 파헤치며, 계급 해방을 위해 싸운 혁명가들의 뜨거운 투쟁을 다룬 선명하고 강렬한 작품이다. 잭 런던의 『강철 군화』에서 주인공 어네스트 에버하드가 자본가, 성직자, 철학자 등 기존 기득권층 및 관념론적 지식인들과 벌이는 논쟁은 이 소설의 정수이자 서사의 핵심 동력이다. 에버하드의 논쟁은 단순한 말다툼이 아니라 맑스주의적 경제학 및 유물사관에 입각한 정밀한 이론적 투쟁이다. 주요 논쟁의 핵심 논리와 사상적 배경은 과학적 사회주의와 사회적 진화론을 결합한다.

 

어네스트 에버하드의 사상적 기반은 크게 두 가지 핵심 축으로 구성된다.

 

첫째로, 맑스주의의 잉여 가치설 및 유물사관으로,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 계급 투쟁의 불가피성, 노동 가치설에 기반한 부의 착취 기제를 핵심 분석 도구로 사용한다.

 

둘째로, 스펜서 및 다윈주의적 사회적 진화론의 재해석으로, 잭 런던 특유의 방식으로, 자본주의가 초기의 자유 경쟁 단계에서 독점 단계로 진화했듯, 독점 자본주의 역시 거대한 사회적 결합 형태인 사회주의로 진화해야 한다는 사상적 당위성을 포섭한다.

 

소설 내에서 에버하드가 벌이는 논쟁은 상대 집단의 성격에 따라 단계적으로 치밀하게 전개된다.

 

· 지식인 및 성직자 집단과의 논쟁 (관념론과 도덕주의 비판)

 

‘철학 모임’ (‘Philomath Club’) 등에 모인 자유주의 지식인, 목사, 대학 교수들은 사회의 불평등이 개인의 도덕적 결함이나 교육의 부재에서 비롯되며, 종교적 사랑, 자선, 도덕적 개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에버하드는 파쇄 논리에 따라 지식인들이 말하는 ‘도덕’과 ‘이성’은 자본가 계급이 제공하는 봉급과 자선기금에 의존하는 ‘하수인적 관념론’에 불과함을 지적한다. 대학, 언론, 교회는 자본의 지배를 받는 기구이며, 사상과 도덕 역시 경제적 하부 구조 (생산관계)로 결정된다는 사적 유물론을 제시한다. 이어 에버하드는 관념적 도덕론은 자본주의의 잔혹한 구조적 착취를 은폐하는 연막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 자본가 및 산악회 (자본가 모임)와의 논쟁 (경제적 모순 증명)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장 중 하나로, 에버하드는 자본가들의 수학적·경제적 논리를 그들의 언어로 역공한다. 상대는 대자본가, 사업가, 금융가 집단으로 ‘상쇄 불능의 잉여 생산물’이라는 모순을 지적하며, 노동자가 100달러 상당의 제품을 생산하고 50달러의 임금을 받는 자신이 생산한 가치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다는 생산과 임금의 불일치, 자본가는 잉여 가치 (50달러)를 전부 소비하지 않고 재투자하며, 노동자는 자신이 받은 임금 (50달러)만큼만 구매할 수 있다. 따라서 국내 시장에서는 생산된 총상품을 결코 전령 소비할 수 없다는 국내 소비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어 남아도는 잉여 생산물을 처분하기 위해 자본주의 국가들은 해외 시장을 개척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벌이며 해외 시장 개척과 한계를 보인다. 곧 전 세계가 자본주의화되어 더 이상 잉여 생산물을 수출할 해외 시장이 남지 않게 될 때, 자본주의는 거대한 공황과 함께 구조적 총파국에 직면한다. 이는 지구적 자본주의의 종말로, 자본주의의 파멸은 자본가의 악의 때문이 아니라, 체제 자체가 지닌 소비 부족과 잉여 생산물의 수학적 모순으로 인해 물리적으로 피할 수 없음을 증명한다.

 

· 소자본가 (소시민 또는 프티 부르주아) 및 조합주의 노동 운동 비판

 

상대는 자본의 독점화로 몰락해가는 중소 기업가들과 개량주의 노동조합 간부들로 소자본가의 주장은 거대 트러스트 (독점 자본)를 법으로 해체하고 과거의 자유 경쟁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에버하드의 파쇄 논리는 독점과 트러스트는 기계화 및 생산력 발전이 가져온 기술적·역사적 발전의 결과다. 경제적인 대규모 생산 체제를 포기하고 과거의 비효율적인 소규모 경쟁으로 돌아가는 것은 역사적 퇴행이라는 점을 밝히며, 문제의 본질은 ‘트러스트의 존재’가 아니라 ‘트러스트를 누가 소유하는가’에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독점 자본을 파괴할 것이 아니라, 무산자 계급이 이를 몰수하여 사회 전체의 점유로 전환 (사회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본가들이 에버하드의 이성적·수학적 논증에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할 때, 그들은 본색을 드러낸다. 자본가 대표인 위키원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당신들의 논리가 아무리 완벽할지라도, 우리가 권력을 잡고 있는 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힘으로 당신들을 짓밟을 것이다.”

 

에버하드는 이 답변으로 자본가 계급이 이성과 법치, 민주주의의 탈을 벗고 ‘강철 군화 (지배 계급의 폭력적 독재 체제’를 착용할 것임을 확인한다. 이 논쟁 과정은 평화적인 설득이나 선거에 따른 정권 교체의 한계를 폭로하며, 계급 권력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조직화된 지배 체제에 맞서는 피할 수 없는 혁명적 투쟁과 계급 의식이 필수적이라는 맑스주의적 결론을 강렬하게 도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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