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한국의 정치 상황은 이제 단순한 개혁안으로 수습할 수 있는 단계를 지났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명확한 혁명의 강령이다. 이는 소외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철저한 전투적 준비와 조직화를 의미하기에, 현 정부를 비롯한 기존 정치권의 미온적인 타협안은 더 이상 수용되기 어렵다. '국민 불신안'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지금, 위선적인 시민 정부의 밑바닥은 이미 명백히 드러났다.


이제 가두 시위나 보여주기식 행진이 아니라 실질적인 변혁을 만들어낼 때다. 더 이상 자본의 순환이 부르주아의 손아귀에서 통제되도록 방치할 수 없다. 이 엄중한 현실 앞에서 전 계급의 결집을 호소한다. 


혁명에 대한 내적·철학적 고찰과 담론에 머물 시간이 없다. 본질은 언제나 행동과 실천에서 나온다. 비록 외롭고 지난한 과정일지라도, 역사적 책무를 다하기 위한 실천에 모든 것을 던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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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증명된 마르크스 및 마르크스주의를 부정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여전히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의 단계적 차이를 모른다는 말과도 같다.


이런 말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가끔은 '소수의 논리'에 기반한 저들이 '무식한 인간'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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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 수단의 사유화’라는 착각


최근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의 글 일론 머스크: 어떤 사회구조가 조만장자를 만들어내는가를 읽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백만장자 정도면 자본가 반열에 오르기에 충분했으나, 자본가들의 경제적 부가 극단적으로 축적되면서 이제는 조만장자혹은 경만장자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유 재산을 지키기 위한 그들만의 투쟁이 현실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기술 발전에 필요한 자본의 규모가 날로 커지는 상황에서, 낙후된 한국 경제의 조건은 미국의 대자본가들처럼 고도화된 생산 수단을 확보할 만한 여건을 아직 갖추지 못한 듯하다.

 

오늘날 사유 재산의 통제력이 기술적 진보와 결합하여 획기적인 수준으로 진화했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은, 부르주아 사상 전반을 이루는 그들의 국가 통제 전략과도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일론 머스크는 조만장자가 맞지만, 동시에 명확한 내적 한계를 지닌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사유 재산의 유무가 오직 자본의 액수로 평가받는 세상에서, 고도화된 생산 수단이 자본가들의 수중에서 독점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부분의 서평가들은 이러한 자본의 내재적 확장이 영구불멸할 것이라 판단하지만, 이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이자 그들이 사로잡혀 있는 착각의 기제일 뿐이다. 정치와 언론의 선동마저 자동화되어 기사 작성조차 불필요해진 오늘날,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 폐지를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이러한 지점에서 이번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의 분석은 노동자 연대의 문제 제기보다 냉철한 대목이 있다. 그러나 사유 재산과 자본 축적의 관계를 직시하지 못한다면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여전히 방관하고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세계 자본주의화 경향 속에서 자본가의 사유 재산이 팽창할 때, 그들이 필연적으로 몰락해 가는 시대를 임시방편으로 수정하려 하는지, 아니면 당의 혼란을 수습하고 공동의 질서를 구축하는 데 오히려 기여하고 있는지 묻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라는 사회 구조가 오늘날의 조만장자를 만들어내는 구조적 동인이라는 점은 더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핵심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경향의 심화가 한국 사회에서도 사유 재산의 정당화로 귀결되고 있음을 꾸준히 알리는 일이다. 이에 맞설 수 있는 주체적 조직력을 갖추고 있는가, 당 건설을 위한 건설적 투쟁에 나설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오직 계급적 단결과 조직적인 당 건설 투쟁으로만 도출될 수 있다.  



그들은 가혹한 재앙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알지 못하고 있노라, 파멸은 이미 그들 머리 위에 내려앉았으니, 이 오만한 자들의 잔치는 머지않아 끝이 날 것이다.


호메로스,『오디세이아』 (할리테르세스의 경고) 



이처럼, 백만장자든 경만장자든, 자본주의의 경제적 모순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 내재적 모순이 초래한 해악이 매달 나가는 고정 비용의 형태로 재산 없는 노동 계급에게 그대로 전가되는 현실, 그 자체가 바로 체제 보수성이 가진 가장 큰 해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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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비록 노동자이지만, 언젠가 세상은 나의 세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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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관계와 제도의 진실

 

주위에서 이혼이나 파혼을 겪으며 불행해진 이들을 자주 목격한다. 결혼 생활이란 사랑으로 이어지는 소설이나 예술 작품처럼 언제나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반대로, 가정의 화합을 강조하거나, 개인주의를 장려하는 담론 뒤에는 여전히 일종의 검열과 억압이 존재한다. 타인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때로 자신에게 불행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특히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이조차 어른이 되어 사랑을 나눠주어야 할 때, 정작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라는 의구심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는 비단 특정 성별만의 문제는 아니다.

 

파혼을 자유로 여겨 이혼을 방조하는 태도가 한 가정의 처참한 몰락을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가부장제의 무게 때문일까, 아니면 결혼이라는 제도의 구조적 결함 때문일까. 반려 동물과 반려자의 차이가 단지 반응의 여부에 불과하다고 여길 만큼 관계가 메마른 사회에서, 자녀의 본연한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이 자본이라는 제도적 질서에 있음을 우리는 직시하게 된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알아가는 과정은 이러한 '불편한 관계' 속에서 시작된다. 이 흔들리는 부실한 관계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일이 가장 어렵다. '좋은 관계'만을 유지하려는 이들의 가장 큰 함정은 여기에 있다. 좋은 관계에 대한 강박에 갇혀 자신의 희생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높은 도덕심으로 착각하고 만다.

 

이에 대해 그럼에도 선()은 좋은 것이라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이라 부르는 것들의 이면을 차분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터무니없거나 불우한 가정사가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관계의 선악은 가정의 자유가 정치·법과 같은 상부 구조에 가로막힐 때 결정되며, 우리는 이 억압된 제도적 질서를 수용하며 스스로 정상적이라 믿는다. 부실한 가정 교육조차 받지 못한 이들이 자본 체제 속에서 다시 가정을 꾸려야 하는 모순, 이 모순이 바로 현대 결혼 제도의 진실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비혼주의자가 역설적으로 가장 안정된 가정을 꿈꾸는 모순을 목격하게 된다.

 

심리적 착각이 아닌 사회 구조를 이해할 때, 인간은 비로소 세상을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된다.

 

당신의 행복은 우리의 기쁨이지만, 동시에 당신의 불행은 우리의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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