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호가 바뀐 뒤로도 87년 체제의 양당적 대립은 계속되었고, 이 시기 한국의 공화국은 분단 체제를 더욱 고착화했다. 조선의 붕당 정치와 일제의 악습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수립된 현행 정부의 국가적 기조는, 사실상 헌정 질서라는 명목하에 분단을 정당화하고 야기한 셈이다. 독일의 경우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동독의 사회주의적 가치가 현재 독일의 경제적 현실과 모순을 빚고 있으나, 과거의 정치가 퇴색할 때 혁명의 성과 또한 그 내용을 달리하며 변화한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언급한 “소비에트를 기억하지 않는 자는 심장이 없고, 그것으로 돌아가려 하는 자는 뇌가 없다”라는 발언의 모순은, 소비에트를 어기고 인민적 독재의 영역으로 나아간 최후를 반복할 뿐임을 증명한다. 이러한 구체제적 정치의 기반은 조선의 정치적 유산에서도 동일한 형태로 드러난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구공화국 시대를 지나 혁명의 시기를 목도하고 있음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단순한 흡수 통일이라는 무력화를 내세울 때, ‘이산가족’의 비극은 조선 체제의 유산이 불러온 경제적 비극과도 밀접하다.

 

한국의 의회 정치는 두 조선 국가 모두를 양면적으로만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역설에 착지한다. 이러한 구도하에서 집권 세력은 현상 유지를 반복하며 정부의 반동성을 강화했고, 국민 전반에 짙은 폐쇄성과 취약한 개량적 획일화를 낳았으며, 자유 경쟁의 미덕을 자본주의적 지배 수단으로 이용해 왔다.

 

87년 체제는 사실상 유신의 잔재가 남긴 이념적 대립과 반공주의가 결합하여, 체제의 자유가 ‘자본의 제도’로 수용되는 고질적인 독점 문제를 양산했다. 특히 노동 제도의 한계 역시 구시대적 조선 정치의 그림자 아래 자행된 토지 개발, 그리고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발생했다. 이는 고립된 지역 노동 인민에 대한 체계적 계급화와, 이를 층위적으로 분류했을 때 드러나는 소득 산정의 평균적 모순을 잘 보여준다. 물론 한국에서 군주제는 폐지되었으나, 의회의 기능은 여전히 조선 체제의 구시대적 틀에 갇혀 제한적이다. 그 구습이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유포되었든 아니든, 분단된 두 국가 모두 조선 체제의 고질적인 악습만을 반복하며 역사적 반동성의 최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자명하다.

 

서로를 비난하기에 앞서, 과거의 체제를 청산하지 못한 노동 제도와 그 주도권이 각국의 부르주아적 대표자들에게 돌아가 국가 기구를 안주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이 구조는 충분히 ‘배반적’이다.

 

차기에 부상할 집권 세력에게 더 이상의 권력적 정당성은 없다. ‘구원은 독점에 있다’는 말에 대해 ‘독점은 제국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라던 레닌의 지적대로, 제국주의적 독점과 자본에 기댄 구시대적 정치의 여파가 인민을 더욱 옥죄게 왔음을 다시 한번 증명할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현재 미국은 중간 선거를 앞두고 있으며, 그 결과와 무관하게 유럽 전역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중동 전쟁의 여파가 각국 민중의 삶에 깊은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의회주의가 사실상 제국주의적 통치 기능으로 변질된 프랑스의 시위 역시 단순한 생태적·기술적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번져나가는 사회주의 운동의 물결과 맞닿아 있다. 선진국 대도시에서 분출되는 이러한 투쟁은 급속히 확산하며 전 유럽을 물가 폭등에 맞선 강력한 투쟁의 장으로 전환하고 있다.

 

반면 아시아가 조용하다는 학계 일각의 진단과 달리, 이 대륙은 사회주의 체제 이행기에 수반되는 혁명적 질서의 재편을 심층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이는 오히려 지금까지 축적된 부분적 투쟁의 성과들이 집약된 혁명적 결과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한국 상황에 대해 장기적 전망 아래 발발할 혁명의 발아를 진단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경우 분단 체제와 맞물린 정치 질서 전반에서, 향후 급격한 경제 악화가 결정적 변수로 대두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국민 개개인의 ‘피신’이 아니라, 대의에 동참하는 노동자 계급의 대규모 결의와 투쟁 참가다. 이러한 민중의 요구는 결코 기존의 의회 제도 내에서 만족하여 수렴되기란 극히 어렵다.

 

혁명의 전개 과정에서 포착되는 전 세계적 전조는, 지금까지의 ‘전쟁의 세계’를 이끌어온 구질서와 지배 체제에 대한 깊은 불신과 반발을 담고 있다. 이 거대한 격류 속에서 노후화나 청년 인구 감소 같은 세대 갈등 요소는 상쇄되며, 당면한 현실은 계급 투쟁이라는 단 하나의 지름길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우리 당은 이 혁명의 전조를 양분 삼아 차차 전진할 것이다. 구시대의 유물인 국가와 의회 제도가 부르주아 질서를 옹호하는 반동 집단과 결탁해 있는 지금, 한국에서도 혁명의 조건은 이미 충분히 무르익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국가의 본질이란 인민의 계약으로 성립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혁명은 단순한 ‘표심의 이동’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대다수 인민이 직면한 참담한 현실에 대한 거부이자, 혁명적 질서에 대한 동의로 표출된다. 이 지점은 국가의 성립 기반과 국가 내 인민들 사이에 내재된 계급적 모순과 암묵적으로 충돌해 왔으며, 그것이 가시화될 때 거대한 연속적 사건이자 역사적 현상으로 발현한다.

 

결국 자본주의의 ‘제국적 기생성’이야말로 현대 사회 체제의 본질을 규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파생된 누적된 제도와 법적 문서들은 그 효력이 다하는 순간, 자본의 내적 모순을 증폭시킬 수밖에 없는 필연적 구조의 산물에 불과하다. 이 모순이 극에 달하는 시점을 두고, 한국 사회만은 무사히 넘어갈 것이라 여긴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착각이자 과오다.

 

이 혁명적 국면은 우리 당의 목적에 있어 중요한 역사적 계기가 될 것이다. 부르주아 지식인 집단과 그 일파는 그동안 혁명적 공산당의 존재를 간과하며 관습적인 제도권 정치에 안주하는 패착을 저질렀다. 또한 부르주아 언론은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노동 인민의 자본 노동 피로도를 외면한 채, 사태를 자극적으로 보도하며 자본의 편을 들었다. 이러한 부르주아적 선동 매체야말로 민중을 압박하고 투쟁을 방해하는 반동적 세력이다.

 

저들은 도시의 약탈과 방화를 우려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기존 정부와 체제가 전체 인민이 아닌 독점 자본만을 위해 작동해 왔음을 상기할 때, 기존의 정부와 현 집권 세력의 정당성과 발언권은 이미 효력을 다했다. 노동 인민의 피를 수혈받으며 기생해 온 자본이 그제서야 현실에 놓인 프롤레타리아의 ‘살인’이라는 생존 위기를 목격할 때, 매체를 앞세워 논란의 불씨만 지피는 궤변만을 늘어놓고 있다.

 

인민의 각성은 이제 더 이상 관제 언론이나 함량 미달의 시민 언론 따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피억압의 식민지 역사에서부터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으로 국호만 바뀐 채 집권 세력의 반동적 질서가 반복되어 온 이 탄압의 굴레를 우리는 뼈 깊이 새기고 있다. 이 시퍼런 사슬에 묶여 눈이 멀어 버린 자들, 부르주아의 영속성에 기대어 우리 당을 향한 적의를 부추기는 이 무지한 반동 세력에 맞서, 우리는 계급적 단죄와 혁명의 불길을 완성해 나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자본의 밤에서 노동자의 밤으로

 

8시간 노동 법안은 체결되었지만, 정작 노동자들은 여전히 노동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란 열심히 ‘근로’함에도 부족한 보상을 채울 수 없는 이유가, 단순히 임금 조정의 여파나 여하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노동의 제한적인 여가 역시 취약한 채 이중 노동의 부과에 현대 노동자들이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단순히 노동 시간의 쟁취에 머물러 있는 노동법과 협상, 또는 극적인 타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대기업들의 야간 노동의 강제에도 있는 것이다. 2022년 10월, SPC 계열 빵 공장에서 20대 여성 노동자가 새벽 야간 근무 중 샌드위치 소스 혼합기에 끼여 숨진 사고는 2인 1조 수칙조차 무시된 채 밤샘 노동으로 내몰린 현대 직장의 적나라한 현주소를 보여준 사례이다.

 

자본의 이윤 추구는 이러한 자본주의 내적 모순이 강화됨에도, 끝까지 기생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이를 제도적으로 보완하면서 야간 노동을 요구하는 직종의 경우에도 노동자의 밤은 노동이 아니라 여가의 보장에 중점을 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야간 노동의 사고율은 오전 시간대 노동보다 훨씬 심대한 압박을 가할 수 있으며, 수면과의 관계와 불규칙적인 생활 습관 등으로 인한 건강 악화는, 마르크스, 『자본』만이 아니라 엥겔스, 『영국 노동계급 상태』에서도 체계적으로 증명된 바 있다.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가 2007년 심야 교대 근무를 ‘2A군 발암물질’로 지정한 것이나, 미국 노동통계국 등 각종 연구에서 야간 근무자의 작업장 사고 위험이 주간 대비 최대 30~50% 이상 급증한다고 보고하는 현실은 이러한 비판이 결코 과거의 유물이 아님을 입증한다.

 

그것은 현대에도 유효한 전근대적 8시간 노동법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일괄적으로, 또는 ‘자유롭게’ 자본의 임금 노동과 잉여 가치 창출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계형 압박이 고도화되었음을 의미할 뿐이다.

 

특히 한국의 8시간 노동법은 타국의 노동법에 비해서도 노동자의 결속을 제한하고, 훨씬 더 탄압적인 ‘야간 노동’으로 작동할 뿐이다. 이 점에서 최근 발휘된 ‘노란봉투법’의 여파 역시 순진한 법조계의 임시방편형 구시대적 정책일 뿐임이 증명된다. 야간 노동과 8시간 법안은, 줄여도 모자란 여가의 보장 없는, 사무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각 계급 및 세부적인 층위의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현대사의 현실인 것이다.

 

야간 노동의 폐지는, 첫째로, 자본주의 노동의 현실을 파악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수익을 따라잡을 수 없는 막대한 수익 창출의 복합적인 현대 구조를 해체하고, 그 실상이 전근대적인 노동법에서 비롯되었음을 법의 지배하에서 보호받지 못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생산 현장에서 표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에도 버젓이 진행되고 있는 순환제 근무 노동자들에게도 장기적으로 건강 악화를 초래할 뿐이며, 이러한 불상사에 대한 대처가 미흡함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물류센터에서 주간·야간을 오가며 일하던 노동자들이 잇따라 수면 장애와 뇌심혈관 질환(과로사)으로 사경을 헤매거나 목숨을 잃은 사례는, 변칙적인 교대 체제 아래 노출된 인체가 어떻게 서서히 파괴되는지를 생생히 증명한다. 체제적 모순은 야간 노동을 비롯한 전 인민의 ‘무상한 세월’을 잊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것이어서 그들은 단순히 ‘근로’함이 국가를 위해 성실하게 힘을 쓰고, 기업을 위해 복무할 수 있다고 간주해 온 오래된 까닭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노동자들에게 이러한 노동법에 대한 요구들이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 관습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실감하는 계기가 된다. 잠들 수 없는 고도의 압박이 초래한 결과가 불의의 사고로 이어질 때, 그것은 단순히 노동자 한 개인의 희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악순환의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심야 시간대 철도 관제나 장거리 화물 운송, 또는 고위험 화학 공장 등에서 피로 누적과 수면 부족으로 인한 주의력 저하로 발생한 대형 산업 재해들이 증명하듯, 야간 노동이 초래하는 불의의 사고는 한 개인의 희생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전반의 계급적 악순환으로 비화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도시 재개발이 가린 자본

 

강남 부근 계룡 마을 일대가 화염에 휩싸였다. 화재 직후 주민들 사이에서는 도시 재개발을 겨냥한 의도적 사고가 아니냐는 무성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진위여부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나, 분명한 사실은 이번 참사가 주거지를 잃은 가난한 주민들에게 가혹한 생존의 압박을 안겼으며, 부실한 정부의 지원 속에서 이들이 삶의 터전을 복구하기란 요원하다는 점이다. 그것이 자연 발화이든 의도적 방하이든, 화재가 남긴 잔해 위로 인근 토지 점유권을 둘러싼 투기적 경쟁이 불씨처럼 번져나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러한 참사를 단순한 우연적 재난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자본과 공공 권력이 주도하는 도시 재개발의 진행을 가속화하는 ‘입지 마련의 방편’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도시 재개발은 자본주의적 ‘강탈에 기반을 둔 축적’의 현대판 판본이다. 주민들에게 집과 땅은 생존을 지탱하는 ‘사용 가치’이지만, 국가와 자본가에게는 오직 시세 차익을 안겨줄 ‘교환 가치’의 상품일 뿐이다. 화재는 주민들의 삶이라는 사용 가치를 순식간에 잿더미로 소멸시켜, 자본이 토지를 완전한 교환 가치의 공간으로 전환하도록 돕는 가장 야만적인 촉매제로 작동한다.

 

발화의 원인이 자연 발화이든 투기 세력의 횡포이든, 그 결과는 언제나 토지주택공사(LH·SH)의 방관 속에 자본의 이익으로 귀속된다. 화재가 노후된 시설로 인한 자연 발화였다 하더라도, 공공 기관은 소방 기반 시설이 취약한 이 지역을 “어차피 철거할 땅”이라며 방치해 왔다는 점에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나아가 화재로 주거지가 전소되면 공공 기관은 복구를 지연하고 ‘안전’을 명목으로 철거 속도를 오히려 가속화한다. 반대로 화재가 투기 세력의 소행이라면, 이는 저항력을 지닌 세입자들의 물리적 조직력과 점유의 증거를 하룻밤 사이에 지워버리고 명도 소송과 철거 비용을 극단적으로 단축하는 잔혹한 수단이 된다.


실제로 토지주택공사(LH·SH)는 공공의 가면을 쓰고 있으나, 실상은 자본을 위해 토지를 정비하고 지대를 창출하는 ‘공공 개발자’로 기능한다. 법적 수용권을 동원해 원주민의 땅을 강제 매수하고, 용도지역 변경 (종 상향)과 인허가로 막대한 개발 지대를 창출하지만 그 이익은 공공으로 환수되지 않는다. 대기업 건설사는 ‘책임준공’과 고액의 공사비를 독식하며 ‘상표 가치 이익’을 챙기고, 지주와 투기 세력은 지분 다툼을 벌인다. 따라서 수년간의 갈등과 화재를 거쳐 완성된 신축 대단지에 다시 돌아와 살 수 있는 원주민의 재정착률은 고작 10%~20%에 불과하며, 대다수의 빈민은 도시 외곽으로 축출된다.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의 화재는 단순한 ‘사고’의 범주를 넘어선다. 위험과 주거 상실이라는 사회적 비용은 전적으로 가난한 세입자와 원주민에게 전가되는 반면, 그들이 밀려난 자리의 막대한 지대 상승분과 분양 이익은 정부의 행정적 묵인 속에서 대기업 자본과 투기 세력이 독점한다. 따라서 계룡 마을의 화재 참사는 자본주의 도시가 공간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주거 빈곤층을 지워버리는 구조적 폭력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민중’이 중심이 아닌 ‘자본의 지대’가 지배하는 도시 계획이 근본적으로 철회되지 않는 한, 개발의 그늘 속에서 터전을 잃는 비극은 반복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해외 거대 자본이 국내에 통상과 원조를 요구하는 까닭은, 제국주의적 침탈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을 확보하려는 데 있다. 특히 미국과 서구의 제국주의 자본이 주식 발행과 금융 수탈을 매개로 한국 진출에 열을 올리는 까닭은, 한국의 생산과 무역 구조를 자국 자본의 종속물로 예속시키려는 전략적 의도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제국주의 자본의 침투는 국내 핵심 독점 기업의 지분을 장악하여 매년 막대한 잉여 가치를 배당금의 탈을 쓰고 본국으로 수탈할 뿐만 아니라, 국내 노동 민중을 향한 초과 수탈을 한층 극심하게 만든다. 대외 의존이 심화할수록 제국주의의 식민지적 수탈 대상이 될 여지가 커진다는 마르크스의 『자본』 속 지적은 여전히 확고한 유효성을 지닌다.

 

그러나 토마 피케티의 수식적 자산 불평등 분석이나 마이클 로버츠의 통계적 이윤율 측정, 데이비드 하비의 공간적 수탈론 따위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단순한 ‘분배의 불균형’이나 ‘실증적 수치’, 혹은 ‘외형적 강탈’로 축소한다는 점에서 계급적 생산 관계를 부차화하는 경제주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들 개량주의적·실증주의적 진단과 달리, 마르크스주의 정론이 지목하는 모순의 본질은 ‘자본가 계급의 노동자 계급에 대한 잉여 가치 착취’ 그 자체에 있다. 따라서 자립적인 자생적 생산 기반을 수립하지 못하는 한, 제국주의 자본의 확장은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인 ‘가치 증식의 위기’와 ‘노동 대중의 빈곤화’를 가속화할 뿐이며, 그 결과 노동 민중의 삶은 개별화된 생존 경쟁 속에서 철저히 파편화된다.

 

제국주의 자본을 매개로 추진되는 전방위적 경제 원조는 실상 국내 생산품보다 서구 독점 자본에 유리한 기술 규격과 생산 표준을 강요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이러한 기술과 수입에 대한 종속은 단순한 에너지 자원 문제를 넘어, 의식 산업과 매체를 매개로 민중의 의식 구조 전반을 잠식하고 흡수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속박 아래서 대외 무역 의존도가 고착될 경우, 그 귀결은 생산력의 정체와 장기적 경제 침체로 나타난다. 이는 증권 시장과 투기 자본에 몰두하는 현대 금융 제국주의와 결합하여 전 세계적 독점체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노동 민중에게 심대한 위협이 된다.

 

따라서 기존 종속 이론이나 현대 수치 중심의 경제학이 빠졌던 국가 간 대립이라는 경제주의적 착시를 깨부수고, ‘자본 대 노동’이라는 계급 투쟁의 본질을 바로 세워야 한다. 이 관점에서 ‘제국주의 대자본 기업 철수 요구’는 단순한 배타적 민족주의의 구호가 아니라, 계급적 해방을 위한 투쟁의 도구이다. 한국 GM 공장의 기습 폐쇄나 해외 사모펀드의 자본 도피 행태가 증명하듯, 제국주의 자본의 진출은 시혜가 아닌 착취와 수탈이었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결론적으로 제국주의 대자본과 국내 독점 자본의 생산 수단을 상환 없이 무상 몰수하여 사회화하고, 노동자 위원회에 기반한 계획 생산 체제를 수립하며, 국제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단결에 기초한 물자 교환(무역)을 실현하는 것만이 인민 경제를 수탈로부터 해방하고 사회주의적 자립 생산을 이뤄내는 유일한 길이 된다.

 

 

참고 자료

 

 

· 피케티, 토마 (Piketty, Thomas), 『21세기 자본』 , 2014.

 

- r > g 공식을 기반으로 한 장기적 세습 구조 실증 분석으로 자산 불평등의 수치적 심화를 폭로했으나, 그 모순의 본질인 ‘자본가 계급의 노동자 계급에 대한 잉여가치 착취’라는 생산관계를 외면하고 단순한 분배 불평등으로 축소하여 개량주의적 조세 개혁에 머무르고 마는 한계를 명백히 드러낸다.

 

 

· 로버츠, 마이클 (Roberts, Michael), 『The Long Depression』, 2016.

 

- 주요 G20 국가 및 세계 자본의 장기 이윤율 하락 수치 통계화로 세계 이윤율의 경향적 하락을 실증 수치로 증명한 의의가 있으나, 지나치게 실증주의적·통계적 측정에 매몰되어 이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체적 계급 투쟁과 혁명적 실천을 부차화하는 경제주의적 오류에 빠져 있다.

 

 

· 하비, 데이비드 (Harvey, David), 『신제국주의』, 2005.

 

- 현대 자본주의의 ‘강탈적 누적’ 및 공간적 다변화 이론은 제국주의적 자산 약탈의 외형을 포착했으나,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을 생산 현장에서 발생하는 가치 증식의 위기가 아닌 외형적 강탈 및 공간적 재편으로 국한시켜 자본주의 본연의 계급적 착취 구조를 추상적 도식으로 치부했다는 저술적 한계를 보인다.

 

 

· 한국은행 / 금융감독원, 『2022~2025년 외환지출 및 외국인 주식투자 현황』, 한국은행·금융감독원 공시 자료.

 

- KOSPI 주요 독점 기업의 외국인 지분율 50%~60% 대 유지 및 매년 수조~10조 원 규모의 해외 배당금 유출 실증 통계로 해외 금융 자본으로의 부 유출을 수치화하고 있으나, 단순한 자본 이동 및 수지 균형 수준에서 통계를 집계할 뿐 이 수치가 노동 민중에게 가해지는 ‘초과 수탈’의 결과물임을 밝히지 못하는 제도권 통계의 한계를 안고 있다.

 

 

·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GM지부, 『한국GM 군산공장 폐쇄 보고서: 해외 ‘먹튀’ 자본의 실상과 노동자 생존권 파탄』, 금속노조, 2018.

 

- 2018년 GM 본사의 이윤율 방어를 위한 일방적 군산 공장 폐쇄 및 대량 실직 기록으로 해외 다국적 대자본의 일방적 자본 도피 행태를 기록했으나, 이를 해외 자본의 개별적 도덕적 해이로 바라볼 뿐 제국주의 자본과 국내 부르주아 국가 권력의 결탁 구조 및 생산수단 무상 몰수라는 계급적 과제로까지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한계를 보인다.

 

 

·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EU Commission),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및 기업 지속가능성 공급망 실사 지침(CSDDD) 이행안』, EU Official Publication, 2023.

 

- 서구 중심의 생태·노동 기술 규격 및 통상 표준 설정으로 표면적으로는 ‘지속적 발전’과 ‘환경 보호’를 내세우고 있으나, 실상은 서구 독점 자본의 기술 독점을 공고히 하고 종속국의 생산 체계를 속박하는 현대 제국주의의 신형 규제 장벽임을 은폐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