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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흔적을 찾아서


문득 전라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경상도 일대는 자주 방문했지만, 전라도 광주와 해남 땅긑마을로 향하는 길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일주일 남짓의 여정을 계획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김남주 시인의 생가와 묘역을 직접 둘러보고 싶어서였다.

 

여정의 시작은 시인의 생가가 있는 해남이었다. 작은 고속버스가 드물게 다니는 해남의 한 시골 마을. 배차 간격이 긴 버스를 기다리기보다 택시에 올라타 기사님께 김남주 시인의 생가로 가달라고 부탁드렸다. 기사님은 “요즘 같은 세상에 젊은이가 김남주 시인을 찾아가다니 대단하다”며 흥미로운 표정으로 차를 몰았다.

 

도착한 곳은 정말 논밭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그 한가운데 작은 초가집 한 채가 덜렁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 앞에 서 있는 시인의 동상은 무엇보다 우직하고 당당했다. 생가 옆에 무성하게 자란 대나무 숲, 그리고 그가 겪었던 오랜 옥고의 세월을 증언하듯 보존되어 있던 감옥의 흔적을 마주하니 묵직한 여운이 밀려왔다. 치열했던 그의 땀이 생생했다.

 

광주로 이동하여 찾아간 곳은 5·18민주묘지였다. 여러 민주화 주역들이 안장된 그곳에서 안내원분의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군부 독재 시절의 잔혹한 진압과 희생자들, 그리고 아직도 신원을 찾지 못한 채 남아있는 수많은 비극의 참상을 접했다. 예전에 서울에서 방문했던 ‘서대문 형무소’나 ‘대공분실’과는 또 다른 무게감이었다. 화면으로 접할 때는 재를 뿌리는 추모 공간 정도로만 생각했으나, 직접 눈으로 확인한 그 넓은 땅 전체가 묘역이라는 점이었다. 세대 간의 시간 차이로 그 시절을 직접 겪지는 못했지만, 왜곡되지 않은 시선으로 역사의 숨결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다.

 

이어 김남주 시인의 기념관이 있다는 모 대학교 인문 강당을 찾았다. 교무실에 사정을 전하여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생전에 출판된 그의 시집들과 보존된 기록물들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었고, 시인의 발자취를 다시 한번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해남으로 다시 내려가 둘러본 땅끝 마을의 바다는 아득할 만큼 넓었다. 케이블카 대신 경사를 따라 직접 걸어 오르며 마주한 바다, 그리고 유리가 깔린 전망대 바닥 너머의 풍경은 장관이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행군 군인들을 촬영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스산하리만치 긴 버스 대기 시간과 드문 배차 간격을 겪으며, 이곳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청년들과 학생들의 정주 여건이 쉽지만은 않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시 광주 시내로 돌아와 5·18 유적들을 살펴보았다. 특히 당시 헬기 사격의 총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건물을 올려다보았을 때는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번 여정은 겉으로 보기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적지를 둘러본 역사 탐방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여행은 오롯이 김남주 시인을 기리고 그의 발자취를 추적한 여정이었다.

 

광주와 해남은 여전히 깊은 여운을 준다. 그 여운이란 단순히 ‘민주화’라는 거창한 정치적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우직한 역사 속에서 이어져 온 혁명의 숨결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김남주 시인 동상>



<광주 내 5·18 추념탑>



<광주 5·18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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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니셰프스키의 생애

 

체르니셰프스키는 사제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신학 대신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해 유물론 철학과 공상적 사회주의를 흡수했다. 이후 당대 최고의 진보 잡지인 『현대인』의 편집을 맡아 사회 비판적 논설과 비평을 쏟아내며 청년들의 사상적 지주로 떠올랐다. 1861년 러시아 농농해방령이 농민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자, 혁명적 농민 운동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1862년 제정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었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그의 가장 유명한 대표작 『무엇을 할 것인가?』 (1863)를 집필했다. 1864년 ‘시빌 공판 (가짜 사형 집행 의식)’을 거쳐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시베리아에서 고된 유배 및 강제 노동 생활을 했다.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후 1883년에야 고향 사라토프 부근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소설은 감옥에 갇혀 있던 체르니셰프스키가 집필한 작품으로, ‘새로운 사람들(신인류)’이라 불리는 급진적 진보 지식인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노동 조합 공동체를 다룬다. 주인공 베라 파블로브나는 속물적이고 가부장적인 부모의 압박과 원치 않는 정략결혼 위기에 처해 있다. 이때 그녀의 남동생 가정교사이자 의학도인 드미트리 로푸호프가 그녀를 돕기 위해 나선다. 로푸호프는 베라에게 법적·사회적 독립을 제공하기 위해 위장 결혼을 제안하고, 두 사람은 형식적인 부부가 되어 부모의 집을 떠난다.

 

독립한 베라는 경제적 자립을 위해 여성 노동자들을 모아 봉제 작업장 (협동조합)을 설립한다. 이 작업장은 기존 자본주의 공장과 달리, 모든 노동자가 이익을 공평하게 나누고 경영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구조이다. 베라는 단순한 경제적 자립에서 여성들이 교육을 받고 자존감을 되찾는 공동체 공간으로 발전시킨다.

 

소설에는 베라가 꾸는 네 가지 주요 꿈이 등장한다. 

 

첫 번째 꿈에서 베라는 어둡고 습기 찬 지하실에 갇혀 다리가 마비된 상태로 누워 있다. 이때 신비의 여신 (‘민중에 대한 사랑’ 혹은 ‘해방’)이 나타나 그녀의 손을 잡자, 베라의 마비가 풀리고 지하실 밖으로 나와 들판을 달리게 된다. 여신은 베라에게 “사람들을 감옥에서 풀어주라”고 당부한다. 이 꿈에서 베라는 억압에서의 해방과 자립을 깨닫는다.

 

두 번째 꿈에서 로푸호프와 베라가 들판을 거닐고 있다. 들판에는 이삭이 자라고 있지만, 관리되지 않아 황폐해진 땅과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이 대비되어 나타난다. 꿈속에서 이성적 판단과 자연적 순리가 대화를 나누며, 어째서 어떤 땅은 황폐하고 어떤 땅은 결실을 맺는지를 설명한다. 이 꿈에서 자연과 이성의 조화를 이해한다.

 

세 번째 꿈에서 베라는 자신의 비밀 일기장을 읽어주는 여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일기장에는 베라가 자신도 모르게 숨겨왔던 진심이 적혀 있다. 베라는 자신을 구출해 준 첫 남편 로푸호프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을 느끼고 있지만, 그것은 사상적 동반자로서의 감정이자 부채의식일 뿐 성적·감정적 울림을 주는 ‘진정한 연애 감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꿈에서 베라는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네 번째 꿈에서 베라는 여신의 안내를 받아 인류 역사 속 여성의 지위 변화를 살펴본 뒤, 미래의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목격한다.

 

베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로푸호프의 친구이자 의사인 알렉산드르 키르사노프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보통의 통속 소설이라면 질투와 갈등이 일어났겠지만, 로푸호프는 ‘합리적 이기주의’ 철학에 따라 행동한다. 소유욕이나 질투로 베라를 구속하는 것은 모두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로푸호프는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이 자살한 것처럼 위장한 뒤 미국으로 떠난다. 이후 베라와 키르사노프는 정식으로 연인이 되어 서로를 존중하는 사상적 동반자이자 연인으로 살아간다.

 

소설 중반에 등장하는 라흐메토프는 일반적인 ‘새로운 사람’에서 ‘헌신적인 혁명가’의 전형이다. 그는 오직 민중의 해방과 혁명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모든 사사로운 욕망, 편암함, 사랑까지 포기한다.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뾰족한 못이 박힌 침대에서 자는 등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훈련을 거친다. 작품 전체에서 비중은 크지 않지만, 당대 러시아 청년들에게 가장 강력한 혁명적 모범을 제시한 인물이다.

 

훗날 미국에서 돌아온 로푸호프는 다른 여성과 결혼하여 베라·키르사노프 부부 근처로 이사한다. 두 부부는 서로 깊은 우정을 나누며, 이상적인 공동체와 사업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1863)는 단순히 한 편의 문학 작품에서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흔들고 러시아 혁명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가장 강력한 정치·사회적 선언문으로 평가받는다.

 

새로운 사람들 (신인류)라는 행동하는 지식인상을 제시하여 소설은 관념적 논쟁에만 머물던 기존 1840년대 세대 (‘잉여인간’)와 달리, 이성과 행동으로 삶을 주도하는 1860년대 진보 청년층 (‘신인류’)의 모델을 제시했다. 베라, 로푸호프, 키르사노프 같은 인물들에서 이기주의와 타인에 대한 봉사가 대립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합리적 이기주의’를 보여주었다. 금욕과 철저한 자율 훈련으로 자신을 단련하는 라흐메토프는 당대 청년들에게 ‘민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전천후 혁명가’의 완벽한 표상이 되었다.

 

가부장적 억압이 극심했던 당대 러시아 사회에서 이 소설은 여성의 인권과 경제적 자립을 최초로 정면 다룬 작품 중 하나이다. 부모의 압제나 정략결혼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방 수단으로 ‘위장 결혼’을 제시했다. 베라가 만든 봉제 작업장은 단순히 돈을 버는 곳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착취 없이 이익을 나누는 생산자 협동조합이자 여성이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공간이었다. 이는 러시아 여성 운동과 초기 사회주의 운동의 시험대가 되었다.

 

이 소설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러시아 혁명가들의 ‘지침서’ 역할을 했다. 1870년대 “민중 속으로 (브나로드)”를 외치며 농촌으로 내려간 수많은 청년들이 이 책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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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런던의 생애와 한계

 

   

잭 런던 (1876~1916)은 20세기 초 미국 문학사를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파란만장한 삶을 몸소 살아낸 행동주의 지식인이다. 동시대 대중 상업 문학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 미국 작가 중 최초로 글을 서서 거부가 된 인물 중 한 명이지만, 그 사상적·삶의 궤적은 지극히 거칠고 급진적이었다.

 

잭 런던은 샌프란시스코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노동을 겪었다. 노동 이력으로는 신문 배달원, 통조림 공장 노동자, 불법 굴 밀수꾼 (해적), 해안 경비대, 물개잡이 선원, 황금광 (클론다이크 골드러시 참전) 무임승차 방랑자 (부랑아) 등 거친 밑바닥 삶을 전전했다. 이 시기 직접 겪은 육체 노동과 극한 자연에서의 생존, 그리고 밑바닥 사람들과의 만남은 훗날 현장 취재형 작가로 성장하여 그의 작품들에 사실적인 생동감을 부여하는 결정적 원천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정의하며 정치적 신념을 글과 행동으로 적극 표출했다. 무임승차 방랑자로 미국 대륙을 유랑하다 무단전착 혐의로 감옥에 수감된 후, 노동자 계급이 처한 구조적 착취를 뼈저리게 겪고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칼 맑스, 『자본』과 사적 유물론도 이때 접하여 깊이 탐독했다. 그는 미국 사회당 활동 이력이 있으며, 미국 사회당 후보로 오클랜드 시장 선거에 두 차례 출마했으며, 미국 전역의 대학을 돌며 강연을 펼치는 등 사회주의 혁명 사상을 적극적으로 전파했다. 런던의 슬럼가인 이스트엔드에서는 직접 누더기를 걸치고 빈민들과 함께 생활한 뒤, 자본주의의 참상을 고발한 르포르타주인 『심연의 사람들, (1903)』을 집필했다.

 

그러나 잭 런던은 단순한 사상가라기보다 시대의 복잡한 이념과 충돌했던 입체적인 인물이다. 노동자 계급의 연대와 해방을 외치는 동시에, 자연의 가혹함과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본능 (자연주의·생물학적 결정론)을 깊이 다뤘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지지했음에도, 당시 미국에 팽배했던 백인 우월주의 및 사회적 다원주의의 영향을 받아 백인 영웅주의나 인종적 편향성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잭 런던의 대표작 및 문학적 유산으로는 『야성이 부르는 소리, (1903)』 & 『하얀 어금니, (1906)』는 알래스카 자연 속 문명과 야성의 충돌을 다룬 소설이다. 『강철 군화 (1908)』는 자본 독재 체제의 등장과 계급 투쟁을 다룬 정치 소설이다. 『마틴 이든, (1909)』은 노동자 출신 작가의 성공과 환멸을 그린 자전적 성격의 명작으로 잭 런던은 40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50권이 넘는 책을 남기며, 펜을 무기 삼아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로하고 인간 생존의 본질을 밀도 있게 탐구했던 ‘행동하는 작가’였다.

 


『강철 군화』 소개



잭 런던이 1908년에 발표한 『강철 군화』는 맑스주의적 세계관과 정치적 관점을 나타낸 작품이다. 이 소설은 ‘편집자 주석이 달린 회고록’이라는 특수한 형식의 구성을 취한다. 본 줄거리는 혁명가 어네스트 에버하드의 아내 아비스 에버하드가 20세기 초 자본가 계급의 독재와 민중의 저항 과정을 기록한 수고 형태다. 편집자 주석은 사회주의 혁명이 완수된 약 700년 후의 시대이며, 역사학자 ‘앤서니 메러디스’가 아비스의 수고에 주석을 달아 출판하는 형식을 띤다. 이러한 구성은 자본주의의 비극적 종말과 사회주의의 최종 승리를 역사적 기정사실로 전제하는 효과를 낸다.

 

‘강철 군화’는 독점 자본가 집단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국가 권력, 언론, 사법부, 군대를 완전히 장악하여 구축한 극단적인 자본주의 독재 체제 (초기 파시즘의 형태)를 표상한다.

 

어네스트 에버하드는 계급 투쟁과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정밀하게 분석한다. 노동자가 생산한 총가치에 비해 지급받는 임금이 적기 때문에 국내 소비 시장에는 항상 상쇄되지 않는 ‘잉여 생산물’이 남게 되며, 자본가 체제는 이를 해외 시장 개척으로 해결하려다 결국 제국주의 전쟁과 자체 붕괴로 치닫는다는 논리를 제시한다. 소설 속 자본가 계급은 노조 간부나 숙련 노동자 일부에게 특권을 부여하여 노동자 계급을 분열시키며, 자유주의적 지식인이나 종교인들을 포섭하여 체제를 유지한다.

 

혁명을 일으키려던 민중의 시도는 강철 군화의 철저한 공작과 잔혹한 군사력 진압으로 실패하고, 시카고는 무참한 유혈의 장이 된다. 소설은 단기적 패배와 비극에도, 수세기에 걸친 지하 투쟁으로 이어지는 혁명의 장기성을 그려낸다.

 

『강철 군화』는 단순한 정치 선전물에서, 20세기 역사적 사건들을 정확히 예견한 성격을 지닌다. 이는 조지 오웰의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보다도 앞선 것으로, “자본가 계급이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파시즘적 폭력을 행사할 것임을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정확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또한 혁명이 한 번의 폭발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처절한 반동과 시련을 거치며 단계적으로 이행한다는 역사적 변증법을 서사로 구현했다.



에버하드의 논쟁


 

이 저작은 자본주의 체제의 내적 모순과 계급 권력의 본질을 거침없이 파헤치며, 계급 해방을 위해 싸운 혁명가들의 뜨거운 투쟁을 다룬 선명하고 강렬한 작품이다. 잭 런던의 『강철 군화』에서 주인공 어네스트 에버하드가 자본가, 성직자, 철학자 등 기존 기득권층 및 관념론적 지식인들과 벌이는 논쟁은 이 소설의 정수이자 서사의 핵심 동력이다. 에버하드의 논쟁은 단순한 말다툼이 아니라 맑스주의적 경제학 및 유물사관에 입각한 정밀한 이론적 투쟁이다. 주요 논쟁의 핵심 논리와 사상적 배경은 과학적 사회주의와 사회적 진화론을 결합한다.

 

어네스트 에버하드의 사상적 기반은 크게 두 가지 핵심 축으로 구성된다.

 

첫째로, 맑스주의의 잉여 가치설 및 유물사관으로,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 계급 투쟁의 불가피성, 노동 가치설에 기반한 부의 착취 기제를 핵심 분석 도구로 사용한다.

 

둘째로, 스펜서 및 다윈주의적 사회적 진화론의 재해석으로, 잭 런던 특유의 방식으로, 자본주의가 초기의 자유 경쟁 단계에서 독점 단계로 진화했듯, 독점 자본주의 역시 거대한 사회적 결합 형태인 사회주의로 진화해야 한다는 사상적 당위성을 포섭한다.

 

소설 내에서 에버하드가 벌이는 논쟁은 상대 집단의 성격에 따라 단계적으로 치밀하게 전개된다.

 

· 지식인 및 성직자 집단과의 논쟁 (관념론과 도덕주의 비판)

 

‘철학 모임’ (‘Philomath Club’) 등에 모인 자유주의 지식인, 목사, 대학 교수들은 사회의 불평등이 개인의 도덕적 결함이나 교육의 부재에서 비롯되며, 종교적 사랑, 자선, 도덕적 개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에버하드는 파쇄 논리에 따라 지식인들이 말하는 ‘도덕’과 ‘이성’은 자본가 계급이 제공하는 봉급과 자선기금에 의존하는 ‘하수인적 관념론’에 불과함을 지적한다. 대학, 언론, 교회는 자본의 지배를 받는 기구이며, 사상과 도덕 역시 경제적 하부 구조 (생산관계)로 결정된다는 사적 유물론을 제시한다. 이어 에버하드는 관념적 도덕론은 자본주의의 잔혹한 구조적 착취를 은폐하는 연막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 자본가 및 산악회 (자본가 모임)와의 논쟁 (경제적 모순 증명)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장 중 하나로, 에버하드는 자본가들의 수학적·경제적 논리를 그들의 언어로 역공한다. 상대는 대자본가, 사업가, 금융가 집단으로 ‘상쇄 불능의 잉여 생산물’이라는 모순을 지적하며, 노동자가 100달러 상당의 제품을 생산하고 50달러의 임금을 받는 자신이 생산한 가치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다는 생산과 임금의 불일치, 자본가는 잉여 가치 (50달러)를 전부 소비하지 않고 재투자하며, 노동자는 자신이 받은 임금 (50달러)만큼만 구매할 수 있다. 따라서 국내 시장에서는 생산된 총상품을 결코 전령 소비할 수 없다는 국내 소비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어 남아도는 잉여 생산물을 처분하기 위해 자본주의 국가들은 해외 시장을 개척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벌이며 해외 시장 개척과 한계를 보인다. 곧 전 세계가 자본주의화되어 더 이상 잉여 생산물을 수출할 해외 시장이 남지 않게 될 때, 자본주의는 거대한 공황과 함께 구조적 총파국에 직면한다. 이는 지구적 자본주의의 종말로, 자본주의의 파멸은 자본가의 악의 때문이 아니라, 체제 자체가 지닌 소비 부족과 잉여 생산물의 수학적 모순으로 인해 물리적으로 피할 수 없음을 증명한다.

 

· 소자본가 (소시민 또는 프티 부르주아) 및 조합주의 노동 운동 비판

 

상대는 자본의 독점화로 몰락해가는 중소 기업가들과 개량주의 노동조합 간부들로 소자본가의 주장은 거대 트러스트 (독점 자본)를 법으로 해체하고 과거의 자유 경쟁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에버하드의 파쇄 논리는 독점과 트러스트는 기계화 및 생산력 발전이 가져온 기술적·역사적 발전의 결과다. 경제적인 대규모 생산 체제를 포기하고 과거의 비효율적인 소규모 경쟁으로 돌아가는 것은 역사적 퇴행이라는 점을 밝히며, 문제의 본질은 ‘트러스트의 존재’가 아니라 ‘트러스트를 누가 소유하는가’에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독점 자본을 파괴할 것이 아니라, 무산자 계급이 이를 몰수하여 사회 전체의 점유로 전환 (사회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본가들이 에버하드의 이성적·수학적 논증에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할 때, 그들은 본색을 드러낸다. 자본가 대표인 위키원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당신들의 논리가 아무리 완벽할지라도, 우리가 권력을 잡고 있는 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힘으로 당신들을 짓밟을 것이다.”

 

에버하드는 이 답변으로 자본가 계급이 이성과 법치, 민주주의의 탈을 벗고 ‘강철 군화 (지배 계급의 폭력적 독재 체제’를 착용할 것임을 확인한다. 이 논쟁 과정은 평화적인 설득이나 선거에 따른 정권 교체의 한계를 폭로하며, 계급 권력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조직화된 지배 체제에 맞서는 피할 수 없는 혁명적 투쟁과 계급 의식이 필수적이라는 맑스주의적 결론을 강렬하게 도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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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강철 솟구치는 용광로의 그릇에

석유의 인부들의 피와 땀이 맺힌다.

탄광의 이름을 대신한 그 살신성인,

프롤레타리아트의 붉은 기치를 세운다.

자신을 불살라 일으킨 혁명의 불길은 차가운 냉동마저 얼려버린 심장을 녹여낸다.

화염 속에서 사그라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잿더미, 우리는 이토록 뜨겁다.

 

우리의 심장과 손은 언제나 도구의 굴종에 매여 있었다.

이제 스스로 억압의 사슬을 끊어낸다.

그것은 고통스럽다.

고통의 시간마저 우리를 단련할 뿐.

 

방관하는 부르주아지는 지키지 못할 약속만 남긴 채

높은 곳만 쳐다보는 부르주아지는 깨닫지 못한다.

그들의 시간은 언제나 헛되이 흐른다.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을 받치는 노동의 숨결을.

언제나 가장 깊은 바닥에서 묵묵히 임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을.

부르주아지의 시체를 묻을 준비를 마친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을. 

 

시간은 우리를 단련시킨다.

프롤레타리아트인 우리는, 마침내 우리 자신을 지켜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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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단에 누워 눈을 감는다.

살갗에는 장미라는 꽃이 핀다.

운명하다.

花園之臨終

臥於花壇 閉目

肌膚之上 薔薇花開

殞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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