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저마다의 고민을 안고 살아가지만, 막상 그 고민이 과연 깊은 의미를 거두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자신을 위해 산다는 것이 쉽게 말하지만 가장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것’에 노력의 조건이 된 이들에게는 아까운 세월을 누린 덧없음임을 알게 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럴 때 무력한 개인은 정신적으로 의존할 대상을 찾기 마련인데, 사람은 절박할 때 행동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열심히 살았다”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냉혹한 현실이 놓여 있다. 무력한 개인은 이로 인해 쉽게 좌절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절박한, 또는 궁핍한 삶이 단순히 성공 신화에 갇힌 위인들을 불러내는 것일까. 물론 이들의 노력을 폄하할 수는 없지만, 그것에 들인 인내의 시간에 비하면 방향 없는 노력이 보여준 결과는 신기루에 불과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또한 무수한 세월이 지나간다.

 

단순히 “열심히 산다”여서가 아니라, 지금 주어진 일을 시작하면 나중에는 큰 일이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 노력도 “돈을 많이 벌기 위함”이라는 노력으로 이어질 때면 그보다는 모두에게 이로운 노력을 제공하는 편이 큰 보람이 될 수 있다. 이 점에서 필자는 노력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이제는 누군가를 위해서도 아니고, 자신부터 시작하여 위축된 상태에서 비교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조건을 위해 필사적인 순간으로 찾는다. 받지 못해 떼인 돈처럼, 삶의 대가나 보상을 전적으로 기대할 수는 없듯이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아닌 밤중에 『분노의 포도』를 읽고 있다. 미국 이주민의 생사를 건 노력만큼 필사적이면서 한편으로 공허한 것도 없겠다. 이주에 대한 노력이 정착이 되기까지, 여기서는 눈 앞에 현실을 놓친 인간의 꿈이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목표를 향해 달려나가는 무수한 경쟁의 출발선에서 인간의 노력도 저마다 각양각색일 수 있지만, 그 노력의 조건에 비하면 곧바로 결과로 달성되지 않을 때면 '노력의 배신'으로 쉽게 좌절하여 안주한다. 이들은 근사치를 보고 조급해진 노력으로, 더욱 자신을 혹사시킨다. 이들이 바라는 것이 단순히 "잘살기" 위함일까. 그렇다면 재고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대지주들은 바로 눈 앞에 있는 것들을 공격한다. 점점 영역을 넓혀가는 정부, 자꾸만 성장하는 노동조합 같은 것들을. 그들은 새로운 세금 제도, 새로운 계획들을 공격한다. 이러한 것들이 원인이 아니라 결과임을 모르고서. 원인이 아니라 결과."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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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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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언어를 다루다 보면 그것이 외래어라는 사실을 종종 인지하게 된다. 상거래에서도 ‘표준 우리말’이라는 기치 뒤에서, 수입산 기계어에 익숙해진 채 뜻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용어들을 무자비하게 남용한다. 단순히 문맹을 벗어나 아름다운 순우리말을 쓰자는 상투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구사하는 언론의 말을 보면 그들의 언어는 그들만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만들어진 폐쇄적인 ‘은어’에 가깝다. 실제 우리말의 구성 비율을 보면 한자어가 50~60%, 고유어(순우리말)이 20~30%이며, 외래어 및 혼용어는 5%~10% 남짓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국민의 약 77.9%가 외국어와 외래어를 훨씬 더 많이 접한다고 응답한다. 자본의 논리로 도배된 상업·홍보성 문구가 매체를 점령하면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언어의 폭이 극도로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검수할수록, 정치인들과 자칭 ‘자유 지식인’들이 만들어내는 수사가 얼마나 구차한 변명에 불과한지 알게 된다. 그들은 막대한 연봉을 누리면서 사회의 실질적 기둥인 노동자를 은연중에 폄하한다.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지지자들과 결탁해 선동을 일삼는다. 정작 자신들의 정당성에는 침묵한 채 오직 자신들만의 ‘정의’를 내세우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실체란 본디 속물적이고 지저분할 뿐이다. 우리가 ‘계급’이라는 개념을 처음 배울 때조차, 사회는 전문 용어와 외래어로 포장된 뜻 모를 기계어를 주입식으로 반복 학습시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들이 외치는 ‘순수한 우리말’이라는 구호조차 또 다른 구차한 변명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나만 잘 먹고 살면 되지’는 안일한 태도가 모여 사회를 이룰 때, 자유는 끝내 인간을 배신한다. 우리가 처한 현실은 자본의 언어가 주입한 극소수의 언어에 불과하며, 그것을 방관하는 사회의 일원들 역시 이러한 구차함이 묻어난 글과 말로 저마다의 상아탑 속에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이 방관에 대해 단순히 ‘심심함’이라 말하기에는 얼마나 유치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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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어쩌면 이들의 생애는 처음부터 비극을 내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순히 질병이나 낭만적인 연애와는 거리가 먼, 투쟁 속에서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극 때문에 공산주의자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언제나 사랑과의 이별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곤 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이는 공산주의자들의 사랑이 실패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르주아적 사랑이 제도와 결합하고, 결국 이별을 반복하여 사랑의 실패를 초래했음을 보여줄 뿐이다. 물론 사랑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사랑은 오직 서로 간의 깊은 우정 속에서 피어날 뿐이다. 이 지점에서 과거의 인연이란, 공산주의자들에게도 그저 스쳐 지나간 흔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여성이 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 벗어나 자신이 공산주의자임을 자각하고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자본 체제의 종식을 목도하는 때일 것이다. 계급적 위선으로 포장된 ‘가능한 사랑’은 노동자를 시혜적으로 바라보지만, 모순적이게도 진정한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인간을 체제에 안주하게 한다. 이는 인간의 나약함을 증폭시켜 개인의 사사로운 시각에 머물게 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사랑과 ‘이별’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과거의 시각과 폐단은 자연스럽게 소멸하지 않으며, 새로운 시각의 자리에는 짙은 부르주아적 독백만이 남을 뿐이다.

 

예전에 한 호텔에서 값비싼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곳은 무제한으로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지만, 막대한 낭비와 폐기물을 생각하면 집밥보다 무의미한 일이었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유지되어 온 가정과 가족의 존재에 반하여, 페미니스트들은 고독을 장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마주하는 ‘가능한 사랑’에 안주한 나머지 ‘불가능한 사랑’을 생각하기를 꺼렸던 태도는, 결국 그들에게 독약과도 같은 혹독한 시련을 안겨주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자유가 아니다. 빈약한 죽음을 담보로 소비된 사랑을 장려하는 시대에, ‘불가능한 사랑’은 영화 매체조차 담아낼 수 없는 현실의 투쟁 속에서 비로소 실현된다.

 

수많은 이들을 남몰래 만나며 타인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것만으로는 인간의 근원적 결핍을 채울 수 없음을 안다. 온갖 사적인 비밀로 도배된 불가능한 사랑의 끝에는 오직 고독한 인간만이 남을 뿐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가능한 사랑’이란 계급적 차이나 의식적 수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당신의 것을 내가 나눈다”는 실천 속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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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제적 파산은 단계상 충분히 예정된 것이지만, 그것을 대비한 중도 보수층의 집결 역시 몰락의 국면이 예고된다." 


자본이라는 구체제의 숨결이 지도자 개인을 거두어 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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