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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언어를 다루다 보면 그것이 외래어라는 사실을 종종 인지하게 된다. 상거래에서도 ‘표준 우리말’이라는 기치 뒤에서, 수입산 기계어에 익숙해진 채 뜻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용어들을 무자비하게 남용한다. 단순히 문맹을 벗어나 아름다운 순우리말을 쓰자는 상투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구사하는 언론의 말을 보면 그들의 언어는 그들만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만들어진 폐쇄적인 ‘은어’에 가깝다. 실제 우리말의 구성 비율을 보면 한자어가 50~60%, 고유어(순우리말)이 20~30%이며, 외래어 및 혼용어는 5%~10% 남짓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국민의 약 77.9%가 외국어와 외래어를 훨씬 더 많이 접한다고 응답한다. 자본의 논리로 도배된 상업·홍보성 문구가 매체를 점령하면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언어의 폭이 극도로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검수할수록, 정치인들과 자칭 ‘자유 지식인’들이 만들어내는 수사가 얼마나 구차한 변명에 불과한지 알게 된다. 그들은 막대한 연봉을 누리면서 사회의 실질적 기둥인 노동자를 은연중에 폄하한다.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지지자들과 결탁해 선동을 일삼는다. 정작 자신들의 정당성에는 침묵한 채 오직 자신들만의 ‘정의’를 내세우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실체란 본디 속물적이고 지저분할 뿐이다. 우리가 ‘계급’이라는 개념을 처음 배울 때조차, 사회는 전문 용어와 외래어로 포장된 뜻 모를 기계어를 주입식으로 반복 학습시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들이 외치는 ‘순수한 우리말’이라는 구호조차 또 다른 구차한 변명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나만 잘 먹고 살면 되지’는 안일한 태도가 모여 사회를 이룰 때, 자유는 끝내 인간을 배신한다. 우리가 처한 현실은 자본의 언어가 주입한 극소수의 언어에 불과하며, 그것을 방관하는 사회의 일원들 역시 이러한 구차함이 묻어난 글과 말로 저마다의 상아탑 속에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이 방관에 대해 단순히 ‘심심함’이라 말하기에는 얼마나 유치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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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어쩌면 이들의 생애는 처음부터 비극을 내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순히 질병이나 낭만적인 연애와는 거리가 먼, 투쟁 속에서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극 때문에 공산주의자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언제나 사랑과의 이별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곤 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이는 공산주의자들의 사랑이 실패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르주아적 사랑이 제도와 결합하고, 결국 이별을 반복하여 사랑의 실패를 초래했음을 보여줄 뿐이다. 물론 사랑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사랑은 오직 서로 간의 깊은 우정 속에서 피어날 뿐이다. 이 지점에서 과거의 인연이란, 공산주의자들에게도 그저 스쳐 지나간 흔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여성이 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 벗어나 자신이 공산주의자임을 자각하고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자본 체제의 종식을 목도하는 때일 것이다. 계급적 위선으로 포장된 ‘가능한 사랑’은 노동자를 시혜적으로 바라보지만, 모순적이게도 진정한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인간을 체제에 안주하게 한다. 이는 인간의 나약함을 증폭시켜 개인의 사사로운 시각에 머물게 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사랑과 ‘이별’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과거의 시각과 폐단은 자연스럽게 소멸하지 않으며, 새로운 시각의 자리에는 짙은 부르주아적 독백만이 남을 뿐이다.

 

예전에 한 호텔에서 값비싼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곳은 무제한으로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지만, 막대한 낭비와 폐기물을 생각하면 집밥보다 무의미한 일이었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유지되어 온 가정과 가족의 존재에 반하여, 페미니스트들은 고독을 장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마주하는 ‘가능한 사랑’에 안주한 나머지 ‘불가능한 사랑’을 생각하기를 꺼렸던 태도는, 결국 그들에게 독약과도 같은 혹독한 시련을 안겨주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자유가 아니다. 빈약한 죽음을 담보로 소비된 사랑을 장려하는 시대에, ‘불가능한 사랑’은 영화 매체조차 담아낼 수 없는 현실의 투쟁 속에서 비로소 실현된다.

 

수많은 이들을 남몰래 만나며 타인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것만으로는 인간의 근원적 결핍을 채울 수 없음을 안다. 온갖 사적인 비밀로 도배된 불가능한 사랑의 끝에는 오직 고독한 인간만이 남을 뿐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가능한 사랑’이란 계급적 차이나 의식적 수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당신의 것을 내가 나눈다”는 실천 속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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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제적 파산은 단계상 충분히 예정된 것이지만, 그것을 대비한 중도 보수층의 집결 역시 몰락의 국면이 예고된다." 


자본이라는 구체제의 숨결이 지도자 개인을 거두어 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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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사회주의 문헌 자료의 부재성


북한을 사회주의 공화국이라 비판할 때 간과하기 쉬운 지점은, 이들 국가 내부에 작동하는 강력한 인민 통제 기반을 지적하는 것보다 사회·과학적 분석 자료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 스탈린주의 자료를 포함한 전집 발간의 의의가 수령제의 한계 속에서 평가되고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여기서 그러한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경솔한 일일 수 있다. 북한이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숱한 당내 투쟁을 거쳐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의 과학성에 대한 사회주의적 고찰을 담은 서적을 북한 도서관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반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남한 구조에서는 이러한 자료가 상업적으로 판매되는 출판물의 형태로만 허용된다. 물론 북한 내 자료 열람 방식 역시 언제나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정부 관할하에 통제되어 왔으므로, 이러한 개방성이 온라인으로 확장되었을지라도 그 한계는 명확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전에 남북한의 한국 마르크스주의 전통성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성으로 발전하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사회·과학적 분석은 기존의 인문주의적 혹은 관념적 철학 사고에 그치지 않고 유물론적 분석에 기반한 사회·정치 분석에서 출발했으며, 이는 곧 마르크스주의 입장을 지지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논의가 제대로 허용될 수 없음이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직접 서점을 방문하더라도 출판물의 비중이 온통 자본 경제학 관련 내용으로 도배되어 있는 현실은 매우 모순적이다.

 

반면 북한학 전공자들에게는 남한 서적 및 자료의 한계가 자본성과 미진한 상업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 명백히 보일 것이다. 남한 학계의 분석이 비체계적이고 비과학적이며 인민의 성격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은 《로동신문》만 조금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이전에도 북한 인민들은 비록 수령제하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대목에 미세한 차이를 보였으나, 그보다는 인민들이 주체적으로 남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분석을 수행해 왔다. 이러한 점에서 남한의 자본주의 교육은 갈수록 계급적 의식 수준이 미달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레닌 역시 《소비에트 교육부 서한》에서 “문맹을 탈피하는 계몽적 의식 수준보다 중요한 것은 계급적 의식을 갖춘 인민들의 무장”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지적이 타당하다면 남한의 교육 수준은 양적으로는 방대할지 몰라도 질적으로는 미달한 상태다. 북한 내부의 ‘인민대학당’만 보더라도 약 2,600만 부에 달하는 사회·과학 및 마르크스주의 관련 자료가 보관되어 있다. 이에 비하면 실패한 자본주의 분석을 여실히 보여주는 남한 사회의 역사적 발전성은 오히려 낙후된 상황에 놓여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물론, 경제적 수준 자체는 천차만별이지만 말이다.

 

학습 공간인 도서관이 점차 아동의 수준에 머무르는 민주주의적 교육관에 기대는 한, 마르크스주의 및 사회·과학 분석과 자본주의 경제학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남한에서 재출간되는 사회·과학의 비중이 경영학에 편중되는 현상은 막대한 자본을 불필요한 곳에 투여한 결과다. 이는 최근 재출간된 『공산당 선언』의 미약한 번역 수준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지점에서 남한 자본주의가 양적으로는 비대할지 몰라도 질적으로는 낙후되었다는 지적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이는 계급적 고찰의 시각이 부재한 남한 학계 전반의 오류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체제 내부의 대중이 이러한 한계를 스스로 파악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는 전적으로 한국 정부, 즉 남한 사회 체제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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