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시일 뿐이지만, 세상이 정말 확실히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언젠가 정치에서 여성 분들의 마음을 열면, 그 정치는 성공한 것이라는 말을 누군가에게 들은 적이 있다. 

오. 생각해보면, 이 논리라면 양쪽 모두에게 현실적인 실현의 여지도 충분히 있다.  


아무튼, 흥미로운 관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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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논리적 오류 


필자는 이념이 일부 맑스주의자임을 밝혔음에도, 상대방이 모호한 입장을 취하거나 심지어 위장된 파시스트와 관련될 여지도 배제할 수 없다. 이처럼, 사상적 배경이 이질적인 관계는 도저히 어울릴 수가 없다.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상대방의 성향을 알 수 없으므로, 때로는 사람의 성향을 판단이 아니라 검증하는 과정 역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경제적 재산과 더불어, 이념 역시 서로의 정체성을 솔직하게 공개할 수 있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 "저는 재산을 70만 원 소유한 맑시스트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진정한 국가의 주인입니다."  


· "저는 재산을 100만 원 소유한 파시스트입니다. 국력은 힘에 있습니다." 


· "저는 재산을 50만 원 소유한 아나키스트입니다. 국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 "저는 재산을 200만 원 소유한 페미니스트입니다. 여성이 세상의 전부입니다." 


여타의 조건에 따른 실제 재산 측정 방식을 배제했을 때, 이렇게 서로가 자신의 이념과 경제적 상황을 공개할 수 있다면, 비판을 전제로, 다양한 존재가 적어도 그 존재 자체로 인정받을 수 있다. 진정으로 계산된 공산주의 세계는, 오히려 이러한 이념의 다툼은 무의미해진다. 200만 원과 100만 원을 가진 사람이 동등할 수 없다. 그러나 70만 원과 50만 원을 가진 사람에게 부족한 부분을 공정하게 배분할 수 있다. 물론 예시일 뿐이다. 이처럼, 경제적 투쟁 과정에서는 우리의 정치적 투쟁 역시 중요해진다. 


적어도, 공산주의 제도가 도입된다면 편차는 있겠지만, 이들은 모두 100만 원의 재산을 소유하게 되거나, 화폐 가치가 없더라도 자신의 특정 이념을 밝힐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그 다양성이 자본과 함께 200만 원을 가진 사람의 관점과 기준에만 측정되어 오히려 서로에게 위험을 초래한다. 앞서 언급한 정치적 문제일 경우, 이 4명이 모두 가지지 못하고 힘 없는 사람을 상대로 위장하여 공격하거나, 단순한 사상적 이질성을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여 척결만을 주장할 뿐이다.


※ 물론 이것이 해소된 사회라면, 이 부분은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서재에 글을 쓸 정도로 자신의 불필요하고, 무가치한 시간을 보내지는 않아도 된다 (새로운 소식인 뉴스조차 과연 필요할까). 이처럼, 평을 남기는 대부분의 글이 자신에게만 쓰이지, 사회에서는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문제는, 비교적 가난한 사람들이 이러한 학습을 배우고, 목소리를 낼 기회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점에 있겠다. 진짜 서재라면, 본인이 여유가 지금은 없기 때문에, 이 문제에 정말로 관심이 생긴다고 표현할 테니 말이다.  


D-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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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란, 

 

잘 싸우지도 못하지만, 무술 영화『엽문』을 흥미롭게 본 것은 단순히 액션이 아닌 스승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비록 현재의 삶이 월급 받는 직업 혁명가와는 거리가 있지만, 언젠가 한 분야의 큰 스승이 되고 싶다는 뜻은 품는다. 이러한 염원은 스승을 중심으로 거쳐 간 수많은 제자들이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을 영화 장면에서 목격한 일이 계기였다. 인류의 스승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분야에서 적어도, 선생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뜻이다.  


지금은 맑스에 대한 시대적 필요성이 존재한다. 전문적인 과정을 밟는 대신 이 길을 필연이자 숙명으로 여긴다. 이는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 주지만, 한편으로는, 선생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호칭인 스승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되새기게 한다.  

 

가끔 스승의 날’을 떠올리며, 큰 뜻을 이룬 혁명가뿐 아니라 그 곁을 지킨 동반자의 중요성도 보게 된다. 그 비중은 단순한 내리사랑보다 크다. 때로는 날카로운 비판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제자들에 대한 깊은 염려를 가진 선생의 입장에서만 그러한 뜻을 온전히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분야에는 먼저 깨달은 이가 있듯, 이 분야도 마찬가지이며, 다만 아직 공론화되지는 않았을 뿐이다. 


혁명가들은 교육 기관 양성에 깊은 관심을 두며, 도서관의 비중을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한 교육 기관을 만들 수 있다면 제자들과 단체 사진을 남기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으나, 사진은 언제나 부담스럽게만 다가온다.  


러시아 혁명은 맑스 학습 기관에서 시작되었음에도, 우리는 그러한 기관조차 부재한 현실에 직면한다. 이 한계를 알면서도, 막연하지는 않은 참스승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과거에는 스승을 갈구했듯이, 그리고 수많은 인연이 오갔듯이, 앞으로 만날 동반자들은 더 이상 헤프거나 아픈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다짐도 든다. 극 중 인물이지만, 제자들이 모두 떠난 후에도 그 뜻이 재조명되는 스승처럼, 언젠가 진정한 맑스를 가르칠 날이 오지는 않을까. 때로는 권력이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것 같다. 


그러기에는 참 독한 인간이다. 


D-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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