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9. 14.
1. 마르크스주의와 가부장제
1.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관계
먼저 레닌의 저서를 전제로, 자본주의가 전통적이고 자연적인 가부장제를 해체한다는 지점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이는 현대에도 가부장제가 단순히 사라지는 요소가 아니라, 가족 기반의 직접적 통제에서 자본주의 경제 구조로부터 이동하는 과정 속에서 간접적 통제로 그 형태가 변형된다. 특히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이점을 많이 놓치고 말았다.
2. 여성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의 한계
여성주의는 일부 성별 갈등 속 특수한 갈등(젠더와 성소수자 등)의 문제를 다루며 가부장제가 사회 불평등의 핵심 원인으로 본다. 그 중에는 여성의 경험에 집중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놓칠 수 있는 부분을 조명하자면, 특히 여성주의의 그 한계는 일부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에서 보여지는 경제적, 통계적 분석이 취약하다는 문제와 사회 비평이나 철학적 담론으로만 다루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여성 노동자의 착취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간과하고, 자본주의 논의를 가리면서 오히려 현실과 동떨어지게 만들 수 있다.
3.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의 유효성
여성주의가 가진 그 한계 때문에,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이 더 유효하다는 결론이다.
구조적 모순 진단: 마르크스주의는 여성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윤리나 문화적 편견이 아닌, 극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에서 찾는다. 이는 여성의 임금 격차, 경력 단절, 무급 가사 노동 등이 모두 자본주의의 노동력 착취 및 이윤 극대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파열음'에 대한 통찰: 자본주의가 가부장제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남성의 역할 상실, 여성의 이중 부담과 같은 '파열음'은 단순히 성별 갈등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사회 관계를 재편하면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형태의 억압이라는 점을 파악하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시각이 분명히 필수적이다.
4. 계급적 시각의 필요성
궁극적으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보는 일은 모순적이지만,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여성주의가 제기하는 문제를 바라볼 때 비로소 그 문제의 본질에 가닿을 수 있다고 정리한다. 이는 여성이기 때문에 반드시 여성주의적 시각을 공유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며, 진정으로 여성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추상적인 담론을 넘어 경제적, 구조적 분석의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결혼 제도
오늘날 혼인 제도의 의미
일부 시각에서는 혼인 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앞서기 보다는 너무 나간 견해라고 본다. 오히려 결혼식 문화는 거기에 들어가는 혼수 비용과 서비스를 더 요구하기 때문이다. 특히 상견례에서 가족 간의 결합을 강조하는 나머지, 매력이 반감되어 패스트푸드 같이 손 쉽게 신부의 날을 망치기도 한다. 신혼 생활도 그리 오래가지 않는 듯이 보인다. 신혼 생활에서는 정(情)에 너무 많은 신경을 쏟기 때문에 주위에 더 많은 것을 놓치고 만다. 특히 결혼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은 양측 모두 가지게 되며, 자본의 유무에 따라 측정된다. 비교적 안정적인 쪽이 추가로 부담하는 구조에서도 보이지만, 결혼식은 하루 동안의 짧은 식을 거행하고자 동반되는 너무 많은 대가를 치른다. 반면, 가수 하림 씨나 해외에서는 배우 호아킨 피닉스 씨의 단조로운 연주회나 전시회 감상으로 대신하는 파격적인 사례도 있다. 따라서 결혼식이란 서로에 대한 계약에 따른 종속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약속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이혼 가정에서는 번거로운 재혼을 하고 다시 가정을 이루려는 강박적인 삶의 모습이 지금의 소비 생활에서 한 축을 이룬다. 그러나 결혼식은 생각보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기념의 의미보다는 축하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족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는 성소수자나 한 부모 가정에도 해당한다.
그들만의 특수한 결혼식
물론 차이고 나면 그만이다. 흔히 연애와 결혼은 매우 다르다고 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어떤 매력을 느껴 속궁합을 이루더라도, 그 경험의 시간이 오래가지는 않는다. 이후로는 각자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뒷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애를 하면서 느끼는 감정에 매몰된 태도가 오히려 인간을 더 저급하게 만들기도 한다. 오히려 연애를 했을 때 인간의 본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혼수 비용을 더해 여기에 신혼 여행까지 고려한다면, 소수의 결혼식은 더욱 화려해지고, 꾸며지고자 보여질 뿐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청혼 비용과 훗날의 세금 비용도 같이 들어간다. 어떤 선택이든 만족하면 그만이지만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질 때, 그 결과가 잘 이뤄지는 경우는 드물다. 단순히 매력을 넘어 호의에서 시작된 결과의 끝도 썩 좋지는 않았다. 특히 정치인들과 언론에서 출산율과 청년들을 운운하기 이전에 이런 경제적 사고를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 반문해볼 때가 많다. 그렇다면 청년들은 결혼보다 왜 연애를 더 선호할까.
여기에는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어떤 사람은 피임 도구가 발달했기 때문에 연애를 더 선호한다는 그럴 듯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순히 피임 도구 때문에 출산율이 낮아진다면, 그건 한 예방일 뿐이지 결혼의 이유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사회적 인식을 갖췄어도, 경제적 사고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매력을 즐기는 문화라면 철이 많이 지났다. 상대방의 외모와 재력에 더 끌리는 현상도 충분히 이해는 간다. 그러나 이마저도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한 억대 기업가의 이혼을 둘러싼 몇 천억 대의 상속 문제를 보지만, 그들에게는 아마 껌값 같은 비용들이 날라갔을 뿐이며, 또 다시 막대한 부(富)로 채워진다. 그들의 세월 묻은 호주머니에 비하면 가난한 청년들은 그들만의 연애를 경험하고, 연예를 즐기고자 하지만 겨우살이로 번 지갑의 잔고를 더욱 비도록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사람과 접촉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마저 사라지고 마는 자본의 선순환이 아니면 무엇일까.
성인물
예전에 허전한 마음이 자주 들었을 때는 성인물을 틀어놓고 혼밥을 하고는 했다. 소리는 낮추고 조용히 감상했다. 바지를 내리지는 않았다. 가끔 살인에 대한 영화를 보면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처럼, 강간하는 장면을 보면서 식사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유도 없는 죄책감과 자괴감에 빠지고는 했다. 이후로는 잘 틀어놓지는 않고, 검색의 빈도를 줄이게 됐지만 말이다. 알게 된 사실로는, 성인물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결혼한 배우자를 가로채거나, 자신의 노예로 복종시키면서 관계를 맺는 과정은 과연 성인물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고는 했다. 아무리 배우라지만 그러한 일은 되도록 근절될 필요는 있어 보인다. 화면으로 비춰지는 영상의 반영일 뿐이지만, 실제로는 더 한 일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거장 영화 감독들은 현실이 가상보다 더 하다는 말을 자주 내뱉고는 했다. 맞는 말이다. 특히 성관계 기술에 있어 때때로 무작정 돌진하는 남녀의 관계보다는 여성 둘이나, 여성 동성애자들이 관계 맺는 장면을 보는 게 전희를 더 잘 보여준다. 어쨌든 연애든, 결혼이든 몸을 잘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몸을 해치는 장면이라면 수 없이 본 터였다. 논란도 많았던 성인물 잡지를 몇 번 구독하거나, 관련된 성인 장난감을 수집했을 때도, 기계를 활용한 중독보다는 오히려 손을 사용하는 게 더 낫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성인물과 선정적인 영화는 여러 비슷한 점이 있는 듯 하다. 성인물이나 폭력적인 영화를 단순히 금지시키는 일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부르는지는 충분히 인간의 성욕을 고려해보면 예상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성욕마저 나쁘고 해롭다고만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마저도 자신의 성욕을 오히려 인정하지 않은 결과에서 나타나 더 큰 문제를 일으키고는 만다. 이러한 쪽에는 본능적으로 관심 없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성욕자들은 자신의 성욕을 인정하지만, 때로 큰 불편을 겪는다고도 말한다. 반대로, 너무 많은 성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걸 해소하지 못하면 버티지를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성욕의 문제도 있지만, 이상 성욕은 그 본능을 차단하기만 한다고 해서 해소되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이 사람들은 스스로 적절한 공간에서 잘 해소할 수 있어야, 개인의 욕구를 잘 풀고 비교적 건전하게 생활한다. 하지만 특히 젊기 때문에 자신의 본능을 주체하지 못해 타인에게 더욱 해를 가하는 여러 사례들은 단순히 범죄 그 자체 때문이라면, 과거에는 단순히 치마가 짧거나, 노래 가사가 저속하다는 이유만으로도 경찰 단속이 이뤄지기도 했다. 오히려 현대에는 금품을 매수해서 인간마저 사유화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들이 더 크다. 사내에서도 계급이나 지위로부터 붉어지는 문제들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도 건강한 성생활마저 아무리 교육을 하더라도, 그 문제가 더 크다는 점을 보게 된다.
부르주아식 여성 해방 운동 비판
여성이라는 수식어
여성 노동자의 언어로 말해보자면, 현대 여러 기관에는 '여성'이라는 주어도 수식어가 붙는다. 여성 가족부, 여성 신문, 여성 영화제, 여성 운동가, 여성 상담소 등 심지어 여성 대학도 있다. 이처럼 여성에게 붙는 단체 이름도 매우 많다는 걸 실감한다. 부르주아 국가에서는 그런 식으로, 여성을 쉽게 길들일 수 있고, 자신의 권리를 표현하도록 믿게 만든다. 그러나 일부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때는 계급적인 인식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젠더라는 말을 번역할 수 없어서다.「여성 신문」의 존재를 알게 됐다. 주요 주장에는 기업 아래에서 인센티브를 내세운다. 그러나 봉건제 아래에서 '인센티브'가 다름 아닌 지주에게 '봉사하는' 고역 노동이었다는 걸 충분히 상기해본다. 성 착취로 보자면, 남녀 공용 화장실이 분명히 있음에도, 성중립 화장실을 요구하는 등, 꼭 여성의 요구는 여성만의 특권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러나 이 화장실이 분리된 건, 다름 아닌 정확한 성별 분리로부터 차별적인 역할로 나누고자 함이 아니라, 성에 대한 배려에도 있기 때문에, 남녀 화장실은 분리될 수밖에 없다. 꼭 화장실이 차별을 조장할 수 있다는 건 문제 의식일 뿐이지, 전제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물론 흑인이라는 인종 때문에 화장실을 못 쓰게 만든 역사적인 일도 있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여성 흑인이 더 부당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삼가게 된다. 주위로는 특히 젠더를 읽을 줄 아는 여성들 덕분에, 온갖 로맨스와 문학 작품들, 그리고 소비할 수 있는 차고 넘치고도 대상화되는 상품들도 또 다르게 널리 퍼진다. 매우 우려를 표했음에도, 그들은 심지어 그것을 똑같이 즐긴다. 그래서 가급적 성차별·성폭력적인 표현도 피하고 다녔다. 거름망처럼 걸러 들어야 하는 말들도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는 보편성을 위해 또한 그 인권을 위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기관들은 여성을 특수성에 따른 대상으로 도배시킨다. 덕분에 여성 혐오를 남성들에게 더욱 조장하고, 남녀 구분에 있어서도 성희롱까지 서슴치지도 않는다. 단순히 범죄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어린 생각을 가졌기 때문일까. 충분히 젠더 관련 책들을 많이 탐독해봐도, 공감대를 이뤄내지도 못하고, 결국에는 여성의 연대에 호소하는 동맹이 남성들에게는 더욱 멀어진 분열로 끝나고 말았을 때, 앞으로는 잡담으로 마무리되는 시간들도 참 많아진다. 자유로운 성관계의 만족은 잠깐의 희열을 줄 수 있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언젠가 육체의 책임은 생각보다 무거워진다. 여성은 단순히 가족을 이루게 될 때,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자아인, 자녀를 낳으며 알게 될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돌봄이라는 보육이란 단지 머리로만 알 뿐이다. 자꾸만 원인을 딴 곳에서 찾고 말아 문제는 생겨난다. 그리고 일이 일어나면 아이를 탓한다. 특히 <노동자 연대>에서 기고한 여성에게 있어 임신 중절권은 그 자신이 단순히 쾌락을 위함인지, 자녀를 위함인지를 묻지 않는다. 그 선택의 결정이 여성에게 온전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사자의 책임이 분명 존재할지라도 쉬쉬하고, 그걸 무시한 채로 자신의 권리만이 남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격한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의 신체는 온전한가. 그동안 의도된 투약과 노동의 탈진, 그리고 성폭력으로 인한 훼손된 신체에 있어서는 법적으로 더 온전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 주장은 잘못됐다. 이외에도 더 거론하고 싶지만, 젠더에 있어서도, 그동안 여성의 신체를 성관계에만 의존했다는 점에서 여론에 휩쓸린 결과를 따라 <노동자 연대>는 여성 해방에 대한 그릇된 시각을 잘 보여주고 만다.
전역모 논증
남성들에게는 철 없다고, 또 무식하다고 여기던 버릇이 남는다. 그들은 첫 사회로 나와 또 다른 희생을 요구하는 폐쇄된 회로와 같은 체제로부터 통제하는 법을 먼저 배운다. 청년들은 군대로 끌려가다시피 해서, 훈련장에서 전역모의 추억을 맛본다. 자신보다 아래인 사람들에게 하대해서 돈을 걷으면 전역모를 마음껏 꾸밀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만, 그 사람이 부조리한 어떤 힘을 가지는지, 전역모는 치장에 있어 화려하게 꾸며지기도 하고, 평범한 모자가 되기도 한다. 헌금을 얼마나 투자했는지에 따라 좌우된다는 점에서도 얼마나 놀라운 모자의 변신인가. 군대에서 안보 교육을 받는다면, 매체의 통제를 더욱 잘 볼 수 있다. 그곳에서는 좌우, 남북을 가리지 않고 합작해서 적을 섬멸하고, 전쟁에 있어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훈련이 강제된다. TV와 인터넷이 생긴 이유로, 수 많은 정보는 여성의 매력적인 특수성을 말한다. 그러나 성별에 따라 생겨나는 분명한 보편적 요구를 말하지도 않는다. 덕분에 더욱 난해할 수밖에는 없는 복잡하고, 특수한 개념들이 만들어진다.
전에 잠깐 거론했었던, 로자 룩셈부르크 갤러리에서도 일부 마르크스주의를 이용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수법으로 그러한 변장을 했지만, 논쟁에 있어서는 반론을 더 이상 제기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다. 이마저도 일부로 드러난 모습이다. 노동 계급에 있어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노동 현장에서 당하는 준강간과 같은 범죄의 우려와 부르주아지가 가진 자본의 힘을 가진 자들에게 맞서지 못하는 무력감으로 합쳐져 있다. 따라서 노동에 관련된 요구마저 정당하게 맞서지도 못해보고, 다른 쪽으로는 피하고 마는 셈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그들은 젠더주의 페미니스트의 퀴어 이론이 여성 노동 계급의 자본주의 노동 해방에 대한 요구를 대신들어 줄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말로 그러한가.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노동 현장에 있던 마르크스주의자는 계급 착취에 따른 폭력만 두 눈으로 보게 된다. 그런 태도가 모여,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이 부르주아지를 위해서라면 충분히 자발적으로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여성만의 기관
따라서 같은 반대라도 이유는 다르다. 유익한 남성은 자신의 힘을 기르고자, 어떤 사람에게는 치우친 생각에 빠져서, 거울처럼 혐오를 이용하다가도, 또 쉽게 잘못된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지고 말아서 범죄를 낳는다. 바로 악순환의 탄생이다. 그리고 남성도 군대를 가니, 여성도 군대에 가서, '평등하게' 인센티브를 받자는 식으로 걱정을 앞세우고, 논란을 더욱 부추기도록 만든다. 극우 남성이든, 극좌 여성이든 각자의 특수성이라는 함정에 빠져서, 공통적으로는 보편성을 잃는다. 그들의 요구는 차이에 있어서도 계급적인 인식과 더욱 멀어진다. 또 다른 프레임이라는 감옥에 갇히고 마는 꼴이다. 물론 심각할 수는 있지만, 꼭 출산율의 문제만은 아니다. 출산률이 낮아졌다는 건 국가에 있어서지, 국방력이 낮아졌다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주아 국가에 있어서는 자유 한국과 <조선일보>만큼이나 기괴하게 기관화되어 통폐합된 여성 가족부의 폐지는 요구여야만 하고, <여성 신문>도 분명 폐간이 언젠가는 필요하다고 보더라도, 그건 남성의 요구가 아니라, 여성의 전적인 필요에 따른 요구로부터 나온다. 단순히 여성이 더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앞서 노동자인가, 자본가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재산 유무라는 구분에서 강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에 따른 성별의 특수성도 더욱 문턱이 낮아지고,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자본주의 아래에서 가정은 이미 무너졌다. 당신들이 홍위병만큼 파괴하신 걸 보신다면, 온갖 낭만적인 연애에서 시작된 자신만의 '특수한' 결혼과 이혼으로 뒤범벅된 사랑의 변증법 아래에서는 제도가 낡아질 뿐이다.
그렇다면 독자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으로, 어떤 선택을 내릴 수 있을까. 여성의 특수성은 자신만의 언어다. 자신의 계급 아래에서 마르크스주의 언어로 분명하게 번역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당했던 온갖 수모를 가지고도, 복수에 찬 나머지 눈이 멀어 부르주아지라는 지배 계급이 되고자 노력하게 된다. 나중에는 똑같이 부조리한 힘을 가진 권력자의 시녀로 남고자 갈망한다. 그런 여성들이 더 세월이 흘러, 안락 의자에서 편안하게 앉아,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서 남편의 불평으로 남은 독서 토론을 하고, 뜨개질을 배우면서, 다시금 남편의 종노릇을 자처한다. 여기에는 자녀란 이미 떠나고 없다. 자본주의 앞에서는 똑같이 소비되는 이론의 말에 현혹되어 아이 없이 깨어난 여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목욕물에 물을 버리는 게 아니라, 다음 차례가 오는 자신의 아기를 버리고 마는 일과도 같이. 제대로 말뚝을 박아버린다. 그리고 밤낮으로 아이를 탓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