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미국은 중간 선거를 앞두고 있으며, 그 결과와 무관하게 유럽 전역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중동 전쟁의 여파가 각국 민중의 삶에 깊은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의회주의가 사실상 제국주의적 통치 기능으로 변질된 프랑스의 시위 역시 단순한 생태적·기술적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번져나가는 사회주의 운동의 물결과 맞닿아 있다. 선진국 대도시에서 분출되는 이러한 투쟁은 급속히 확산하며 전 유럽을 물가 폭등에 맞선 강력한 투쟁의 장으로 전환하고 있다.

 

반면 아시아가 조용하다는 학계 일각의 진단과 달리, 이 대륙은 사회주의 체제 이행기에 수반되는 혁명적 질서의 재편을 심층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이는 오히려 지금까지 축적된 부분적 투쟁의 성과들이 집약된 혁명적 결과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한국 상황에 대해 장기적 전망 아래 발발할 혁명의 발아를 진단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경우 분단 체제와 맞물린 정치 질서 전반에서, 향후 급격한 경제 악화가 결정적 변수로 대두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국민 개개인의 ‘피신’이 아니라, 대의에 동참하는 노동자 계급의 대규모 결의와 투쟁 참가다. 이러한 민중의 요구는 결코 기존의 의회 제도 내에서 만족하여 수렴되기란 극히 어렵다.

 

혁명의 전개 과정에서 포착되는 전 세계적 전조는, 지금까지의 ‘전쟁의 세계’를 이끌어온 구질서와 지배 체제에 대한 깊은 불신과 반발을 담고 있다. 이 거대한 격류 속에서 노후화나 청년 인구 감소 같은 세대 갈등 요소는 상쇄되며, 당면한 현실은 계급 투쟁이라는 단 하나의 지름길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우리 당은 이 혁명의 전조를 양분 삼아 차차 전진할 것이다. 구시대의 유물인 국가와 의회 제도가 부르주아 질서를 옹호하는 반동 집단과 결탁해 있는 지금, 한국에서도 혁명의 조건은 이미 충분히 무르익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국가의 본질이란 인민의 계약으로 성립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혁명은 단순한 ‘표심의 이동’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대다수 인민이 직면한 참담한 현실에 대한 거부이자, 혁명적 질서에 대한 동의로 표출된다. 이 지점은 국가의 성립 기반과 국가 내 인민들 사이에 내재된 계급적 모순과 암묵적으로 충돌해 왔으며, 그것이 가시화될 때 거대한 연속적 사건이자 역사적 현상으로 발현한다.

 

결국 자본주의의 ‘제국적 기생성’이야말로 현대 사회 체제의 본질을 규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파생된 누적된 제도와 법적 문서들은 그 효력이 다하는 순간, 자본의 내적 모순을 증폭시킬 수밖에 없는 필연적 구조의 산물에 불과하다. 이 모순이 극에 달하는 시점을 두고, 한국 사회만은 무사히 넘어갈 것이라 여긴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착각이자 과오다.

 

이 혁명적 국면은 우리 당의 목적에 있어 중요한 역사적 계기가 될 것이다. 부르주아 지식인 집단과 그 일파는 그동안 혁명적 공산당의 존재를 간과하며 관습적인 제도권 정치에 안주하는 패착을 저질렀다. 또한 부르주아 언론은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노동 인민의 자본 노동 피로도를 외면한 채, 사태를 자극적으로 보도하며 자본의 편을 들었다. 이러한 부르주아적 선동 매체야말로 민중을 압박하고 투쟁을 방해하는 반동적 세력이다.

 

저들은 도시의 약탈과 방화를 우려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기존 정부와 체제가 전체 인민이 아닌 독점 자본만을 위해 작동해 왔음을 상기할 때, 기존의 정부와 현 집권 세력의 정당성과 발언권은 이미 효력을 다했다. 노동 인민의 피를 수혈받으며 기생해 온 자본이 그제서야 현실에 놓인 프롤레타리아의 ‘살인’이라는 생존 위기를 목격할 때, 매체를 앞세워 논란의 불씨만 지피는 궤변만을 늘어놓고 있다.

 

인민의 각성은 이제 더 이상 관제 언론이나 함량 미달의 시민 언론 따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피억압의 식민지 역사에서부터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으로 국호만 바뀐 채 집권 세력의 반동적 질서가 반복되어 온 이 탄압의 굴레를 우리는 뼈 깊이 새기고 있다. 이 시퍼런 사슬에 묶여 눈이 멀어 버린 자들, 부르주아의 영속성에 기대어 우리 당을 향한 적의를 부추기는 이 무지한 반동 세력에 맞서, 우리는 계급적 단죄와 혁명의 불길을 완성해 나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도시 재개발이 가린 자본

 

강남 부근 계룡 마을 일대가 화염에 휩싸였다. 화재 직후 주민들 사이에서는 도시 재개발을 겨냥한 의도적 사고가 아니냐는 무성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진위여부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나, 분명한 사실은 이번 참사가 주거지를 잃은 가난한 주민들에게 가혹한 생존의 압박을 안겼으며, 부실한 정부의 지원 속에서 이들이 삶의 터전을 복구하기란 요원하다는 점이다. 그것이 자연 발화이든 의도적 방하이든, 화재가 남긴 잔해 위로 인근 토지 점유권을 둘러싼 투기적 경쟁이 불씨처럼 번져나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러한 참사를 단순한 우연적 재난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자본과 공공 권력이 주도하는 도시 재개발의 진행을 가속화하는 ‘입지 마련의 방편’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도시 재개발은 자본주의적 ‘강탈에 기반을 둔 축적’의 현대판 판본이다. 주민들에게 집과 땅은 생존을 지탱하는 ‘사용 가치’이지만, 국가와 자본가에게는 오직 시세 차익을 안겨줄 ‘교환 가치’의 상품일 뿐이다. 화재는 주민들의 삶이라는 사용 가치를 순식간에 잿더미로 소멸시켜, 자본이 토지를 완전한 교환 가치의 공간으로 전환하도록 돕는 가장 야만적인 촉매제로 작동한다.

 

발화의 원인이 자연 발화이든 투기 세력의 횡포이든, 그 결과는 언제나 토지주택공사(LH·SH)의 방관 속에 자본의 이익으로 귀속된다. 화재가 노후된 시설로 인한 자연 발화였다 하더라도, 공공 기관은 소방 기반 시설이 취약한 이 지역을 “어차피 철거할 땅”이라며 방치해 왔다는 점에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나아가 화재로 주거지가 전소되면 공공 기관은 복구를 지연하고 ‘안전’을 명목으로 철거 속도를 오히려 가속화한다. 반대로 화재가 투기 세력의 소행이라면, 이는 저항력을 지닌 세입자들의 물리적 조직력과 점유의 증거를 하룻밤 사이에 지워버리고 명도 소송과 철거 비용을 극단적으로 단축하는 잔혹한 수단이 된다.


실제로 토지주택공사(LH·SH)는 공공의 가면을 쓰고 있으나, 실상은 자본을 위해 토지를 정비하고 지대를 창출하는 ‘공공 개발자’로 기능한다. 법적 수용권을 동원해 원주민의 땅을 강제 매수하고, 용도지역 변경 (종 상향)과 인허가로 막대한 개발 지대를 창출하지만 그 이익은 공공으로 환수되지 않는다. 대기업 건설사는 ‘책임준공’과 고액의 공사비를 독식하며 ‘상표 가치 이익’을 챙기고, 지주와 투기 세력은 지분 다툼을 벌인다. 따라서 수년간의 갈등과 화재를 거쳐 완성된 신축 대단지에 다시 돌아와 살 수 있는 원주민의 재정착률은 고작 10%~20%에 불과하며, 대다수의 빈민은 도시 외곽으로 축출된다.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의 화재는 단순한 ‘사고’의 범주를 넘어선다. 위험과 주거 상실이라는 사회적 비용은 전적으로 가난한 세입자와 원주민에게 전가되는 반면, 그들이 밀려난 자리의 막대한 지대 상승분과 분양 이익은 정부의 행정적 묵인 속에서 대기업 자본과 투기 세력이 독점한다. 따라서 계룡 마을의 화재 참사는 자본주의 도시가 공간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주거 빈곤층을 지워버리는 구조적 폭력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민중’이 중심이 아닌 ‘자본의 지대’가 지배하는 도시 계획이 근본적으로 철회되지 않는 한, 개발의 그늘 속에서 터전을 잃는 비극은 반복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사형제를 둘러싼 도덕적·윤리적 논란은 혁명의 본질을 가리는 구실에 불과하다. 우리는 혁명적 형벌로서 사형제 도입의 당위성을 적극 주장한다. 부르주아 법체계는 무고한 민중을 억압해 온 반면, 정작 처발받아야 할 자들에게는 심판을 유예하며 민중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혁명기의 사형제는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트의 억압 기구가 아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를 단죄하는 민중의 혁명적 재판이어야 한다. 한국의 신흥 부르주아지가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 사유 재산을 사수하려 할 때, 생산 수단을 전유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전 세계 부르주아지를 청산하기 위해 혁명적 사형제를 단호히 결정하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다. 

 

제국주의와 대자본이 야기한 사회·경제적 해악은 명백하다. 단순히 감옥에 가두어 방치하는 온건한 처벌 방식으로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진정한 단죄가 될 수 없다. 자본의 결탁과 인적·물적 영향력을 보존한 채 감금되는 것은 반혁명적 복권의 여지를 남겨둘 뿐이며, 이는 민중의 피해와 계급적 수탈을 근본적으로 청산하지 못한다. 혁명적 사형제는 과거의 무차별적 숙청이 아니며, 단순한 경제 성장 가속화 수단도 아니다. 이는 지배 계급의 반혁명적 유산을 청산하고 역사를 진전시키기 위한 단계적이고 결정적인 단죄이다. 평화적 해법이라는 소시민적 착각은 대자본의 생산 수단 독점을 눈감아주는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법적 기준은 주로 하층민이 저지르는 ‘거리 범죄’를 집중 처벌하지만, 실제 사회적·경제저 피해 규모는 부르주아지 (기업 및 대자본가)가 저지르는 범죄가 월등히 크다.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임금 체불 역시 중대한 범죄 행위임에도, 형사 처벌보다는 민사상 합의나 과태료 처분 정도로 유야무야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사법 체계가 계급에 따라 다르게 작동한다는 사실은 통계적으로도 증명된다. 소액 절도나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하층민의 구속 및 실형 선고율은 매우 높은 반면, 수천억 원대 배임·횡령을 자행한 대기업 총수나 자본가에게는 집행유예, 보석, 사면이라는 특혜가 압도적인 비율로 부여된다. 전 세계 교도소 수감자의 80~90% 이상이 하층 계급 및 소외 계급 출신이라는 구조적 통계는 자본주의 형법 기구의 본질을 폭로한다. 결국 현행 법 체계는 자본가의 범죄를 ‘경영상 실수’나 ‘비폭력 범죄’로 포장하여 보장하는 반면, 소외 계급의 범죄만을 선별적으로 단속하고 진압하는 계급적 도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부르주아 정부의 법집행이 무능과 범죄에 불과함을 입증한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직접 집행하는 혁명 재판만이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켜 온 부르주아 '평화 정치'의 허구를 폭로하고, 역사적 정의를 바로 세우는 유일한 길임을 선언한다. 부르주아지의 위선은 분야를 막론하고 점차 노골적이고 해악적인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맞서는 우리의 과제는 더 이상 일방적 순종이 아니라, 자본의 계급적 수탈 방식에 대한 역사적 소명을 다하는 단호한 투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최근 OTT나 AI 등 기술 매체가 기획·개발 단계부터 ‘유료화’를 전제로 삼는 현상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는 기술 발전이 어떻게 공공재를 사적 소유물로 취급하는지를 보여준다. 본래 이러한 매체와 기술은 사회적 생산 수단이자 공공재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특히 AI·AGI (인공일반지능) 등의 유료화는 거대 자본의 사적 이윤 창출과 독점을 위한 민영화 기제 및 투자 수단으로 손쉽게 변질될 위험을 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기술 매체의 사용 자체를 단순히 거부하는 방식만으로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는 데 한계가 존재한다. 기술주의자들이 제기하는 거부론이나 비판은 때로 공허한 ‘종말론’을 부추기는 데 그치거나, 모순적으로 자본이 형성한 상품성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기술 사용을 거부하는 소극적 태도는 공공재를 부분적으로 유료화하며 사적 이윤을 정당화하려는 자본의 점유 시도에 제대로 맞서지 못한다는 점에서 명확한 한계를 지닌다. 

 

오늘날 대기업이 주도하는 AI 기술 등은 정치적·법적 권리를 바탕으로 자본가가 그 소유권을 독점하고 있는 구조에서 비롯된다. 노동자나 대중의 통제권이 부재한 상황에서, 자본 기업은 공공적 가치를 지닌 기술마저도 부분적 유료화로 이윤 창출의 도구로 전환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 내부의 개별 노동자나 대중이 이러한 유료화 공세에 맞서 반대 목소리를 내기는 결코 쉽지 않다. 기업 경영진이 지닌 법적 권한과 거대한 법률 조직, 그리고 투자 유치를 명분으로 기술 발전과 공공재의 상품화를 정당화해 왔기 때문이다. 나아가 기술의 유료화는 자본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급만이 첨단 기술을 활용해 생산성을 독점하는 ‘기술적 소외’를 정착시킨다. 이는 지식과 생산 수단에 대한 접근 권한을 자산 규모에 따라 제한하여 사회적 격차를 구조적으로 고착화한다. 자본 기업이 아무리 ‘할인율 적용’이나 ‘구독 방식의 정당성’을 포장하더라도, 유료화 전략의 본질은 개인적 자본 수탈에서 사적 이윤 추구를 정당화하는 기제에 불과하다. 

 

따라서 개별적 수준에서 유료화 제약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공공재의 사적 점유에 동의해서는 안 되며 기술 발전에 따른 결실이 사회 전체에 분배될 수 있도록 구조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기술의 이점은 개인이 비싼 비용을 치르고 사서 쓰는 상품이 아니라, 만인이 누릴 수 있는 공공의 자유여야 한다. 이는 현대 예술계에서도 저작권을 둘러사고 벌어지는 법적·정치적 분쟁의 사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기술 발전이 가속화될수록 사용자에 대한 기술적 제약을 강화할 것이 아니라, 이를 독점하려는 자본에 맞서 공공재로부터 사적 이윤을 취득하지 못하도록 사회적 통제와 제한을 강화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취업 지도 제도와 노동 시장의 구조적 모순


한국의 대표적인 취업 지원 제도인 국민취업지원제도와 공공 고용 서비스는 청년과 구직자들에게 경제적 유인을 제공하는 사회적 측면에도, 실질적 취업 연계의 부족과 형식적 운영이라는 구조적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감사원 검사 결과》와 《한국고용정보원》 등의 실태 조사에 따르면, 참여자의 30%~40% 이상이 고용복지플러스센터 등의 상담 프로그램이 단순 수당 수급 조건을 채우기 위한 형식적 절차에 그치며 실질적인 구직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수당 지원 등 경제적 만족도는 높은 반면, 일자리 프로그램이나 알선 서비스에 대해서는 희망 직종과 무관한 단순 사무 및 행정 알선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평가가 지배적이다. 실제로 제도 종료 후 6개월 이내 취업률은 50%대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며, 취업에 성공하더라도 1년 이상 고용 유지율은 50% 안팎으로 떨어져 단기 및 전전형 취업이 반복되고 있다. 아울러 국비 지원 직업 훈련 수료자 중 훈련 분야와 실제 취업 직종이 일치하는 직무 연계율은 30%에서 40%대에 불과해, 양적 확대에 비해 질적 불균형이 심각한 상황이다.

 

이러한 형식적 한계는 단순한 행정적 미숙함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 체제와 고용 제도가 결합하는 방식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이며, 전 세대에 걸친 노동자 박탈 현상으로 고착화되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취업 지원 제도는 개별 노동자의 장기적 역량 개발보다 ‘몇 명을 시장에 재배치했는가’라는 수치적 실적에 집중하며, 구직자를 저임금 및 단기 노동력을 공급하는 상품화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또한 수당 지급에 엄격한 구직 활동 조건을 걸어두어 구직자를 주체적인 노동자가 아닌 행정 절차의 통제 대상으로 취급한다. 이로 인해 청년층은 양질의 노동 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채 단순 보조직을 전전하며 역량 축적 기회를 박탈당하고, 중장년층은 평생 쌓아온 경력과 존엄성을 부정당한 채 하위 노동 시장으로 강제 이동하는 이중 하향 취업을 겪으며, 노년층은 죽을 때까지 저임금 노동을 지속해야만 하는 생존형 노동 박탈로 이어지는 전 세대적 고용 불안정을 겪게 된다.

 

제도가 형식적이고 관료적인 양상을 띠는 원인은 운용하는 행정 체계의 내적 구조와 자본주의적 시장 질서 속에서 목표가 왜곡된 결과에 기인한다.

 

첫째, 고용센터와 민간 위탁 기관의 성과 평가가 단기적 취업률 숫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상담원과 기관은 구직자의 작성이나 일자리의 질을 고민하기보다 채용이 쉽고 퇴사율이 높은 일자리에 우선 알선하게 된다.

 

둘째, 신공공관리론에 따라 고용 서비스를 민간에 대거 위탁하면서 최저가 입찰과 영리성 추구가 도입되었고, 이로 인해 개별 맞춤 상담 대신 서류 양식 채우기나 형식적 전화 상담 등 최소한의 요식 행위가 구조화되었다.

 

셋째, 상담원 1인이 수십에서 백여 명의 구직자를 담당하는 과중한 업무로드 속에서, 상담원들은 진정성 있는 진로 설계를 포기하고 수당 지급 기준 검토나 부정수급 방지 서류 확인 같은 형식적 행정 처리자로 전락했다.

 

넷째, “구직자가 수당만 받고 일하지 않을 것”이라는 도덕적 해이가 작동하면서, 제도의 중심축이 역량 강화 지원이 아닌 구직 활동 증명을 요구하는 감시 및 통제 행정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관료화와 형식화는 단기적 행정 예산 낭비만이 아니라 노동 시장 전체에 심각한 장기적 해악을 끼치고 있다. 우선 구직자들이 하위 노동 시장에 갇히는 고착화 현상이 발생하여 사회 전반의 소득 양극화가 심화된다. 특히 급변하는 고용 조건 속에서 기업들은 신입에게마저 ‘즉시 전력감이 되는 중고 신입’이나 다름없는 연차별 실무 경력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으나, 형식적 취업 지원 제도는 이러한 현실을 외면한 채 구직자들을 단기 알선과 부실한 훈련에 머물게 하여 심각한 경력 단절을 유발하고 있다.

 

이처럼 체계적인 경력 형성이 차단된 노동자들이 다시 노동 시장에 유입될 때, 기업들은 오히려 이들에게 더욱 까다롭고 과도한 경력직 수준의 ‘스펙과 요건’을 들이밀며 진입 장벽을 높이고 있어, 구직자들은 일자리를 구할수록 오히려 더 깊은 미숙련화와 고용 불안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또한 높은 퇴직률과 재실업의 무한 반복 속에서 국가 전체의 노동력과 노동 생산성이 저하되며, 청년층의 경우 제도에 대한 불신이 학습된 무력감으로 이어져 구직을 포기하고 비경제 활동 인구로 돌아서는 역효과를 낳는다. 자본 기업 입장에서는 정부 보조금과 제도를 활용한 저비용 노동력 돌려막기에 안주하게 만들어 근로 조건 개선과 기술 혁신 등 체질 개선 유인을 완전히 상쇄시키며, 결과적으로 현행 취업 지원 제도는 노동자의 삶과 숙련을 보장하지 못한 채 자본의 유연화 요구만을 나타내면서 노동 시장의 양극화와 노동 생산성 하락을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