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4. 16.


짐을 살짝 정리했다. 내게도 여유 있는 자금이 있더라면, 아마 조용하게 방에서 안빈낙도를 즐겼겠다. 그러나 그러한 여유란 좀 더 가진 사람들에게 누리는 혜택과도 같다. 정리를 하다가, 힘들어서 <자본론>을 읽었다. 다시 읽어보니, 마르크스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여러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는 오랫동안, 계속할 수 있는 동력이라는 운동하는 힘으로 작동하고, 또 발전한다고 봤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러한 자본주의 운동마저 여러 한계를 보인다고 지적한다.

 

대체로는 국내에서는 공황 이론을 전개하거나, 또 많이 다뤘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내적인 경제 법칙보다는 외부 자본들로부터 많이 의존해왔기 때문에, 국내 총 생산량으로는 해외와 비교해봐도 택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공황 이론에서는 노동 생산량만이 아닌 무역으로부터 거래할 수 있는 장기적인 경제 호황기를 내세우기도 했으므로, 실제로는 경제적인 안정기로 돌입하고 있다는 경제학자들의 지적들도 많다.

 

그러나 한 가지, 덧붙이고 싶다. 노동력이 실제로 줄어들고 있는데도, 과연 그러한 진단들도 옳을까. 아무리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도 서로 정치관은 달랐어도 하나는 통일된 의견으로 모아졌던 것 같다. 특히 만델, 그로스만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도 겉으로는 많아도, 지출이나 부채들도 상당하다는 지적들을 해왔다. 정치경제학파는 해외 시장으로부터, 은행들은 비교적 규모 면에서도 넓고, 안전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미스, 리카도, 케인스도 빼먹은 사실이 있으니, 바로 자본은 파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국 생산량에 비해 수입 의존도가 매우 높은 국가들일수록, 외세 의존도도 매우 크다. 혁명 국가로는 반비례하지만, 우리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을 다루므로, 실제로 노동자들에게 온 타격이 매우 컸다는 해석이기도 하다. 그리고 국내 기업인 '현대'에서도 임금 문제로 투쟁한 사건도 있었다.

 

더는 읽을 수 없는 미련이라는 쇠사슬이라는 짐도 풀고, 이제는 더욱 새롭게 증명하겠다.

 

파산하는 자본 앞에서도, 더 나은 삶과 '일용할 양식'을 감사가 아니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노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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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8. 30. 


소비에트를 기리며

 

소비에트를 선언한지 100년이 또 흘러갔다. 언젠가 여유가 생겨 자유롭게 이동한다면 독일과 러시아를 한 번은 꼭 방문해보고 싶다. 다른 시간대였다면, 대학교를 바로 졸업하고, 대학원도 다녀보거나, 교수가 되어 전공을 심화한 연구원으로 가르치는 일도 했겠다. 그래도 한 헤겔주의자 교수에게 논리를 배울 수 있었던 건 제법 큰 영광이었지만, 전직은 소수 공산주의자로 인도됐다. 지도 교수는 무정부주의자였다. 인생이란 참 희한한 일이다. 인생의 스승이란 늘 언제나 열려 있지만, 진리 앞에서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슷한 또래에서 쉽게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만나볼 수 있다. 서로 잡지에도 기고할 정도로, 주로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한다고 익히 들었다. 어느덧 작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독특하게도, 시골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 마르크스주의라는 비판의 길을 결심했다. 그저 역사를 가르치는 일이라면 또 어떤 사람일지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전공을 잇기에는 독일 관념론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알아버렸다.4월 테제이후 반동이라는 단어의 결과로 찾아오는 충격이라는 변화로부터도, 깨진 구슬로 산산조각난 운명 같은 소비에트의 유산을 마지못해 잇고 있다.

 

체제 아래에 묶여버린 한 서민주의자는 공산주의를 마무리하고 싶은 갈망 때문에 우리를 저버렸다. 한 여성주의자는 분명 함께하겠다고 말했지만 등을 돌렸다. 한 경제주의자는 하다못해 아는 척하면서 탁상에 앉아 소비에트를 추억만 했다. 그래도 크게 신경 쓰지 말자고 말했다. 잘못된 선택은 돌이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동지에게는 가야 할 길이 멀고도 험한 미지의 길이라 미리 조언했다. 우리를 포기시키는 게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선택을 진정으로 포기할 때, 비로소 변증법이라는 눈으로 유물론 앞에 서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렇다. 정답이란 자신의 길로 가더라도 신경을 끄는 일이다. 우리는 각자 해낸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 최후의 발악을 얌전히 지켜보는 중이다. 그리고 조직한다.

 

레닌주의라는 또 다른 기억으로,

 

위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를 위한 해방을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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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2. 29.


트로츠키주의와 그 한계



국제주의 경향과 연속성 비판

 

트로츠키주의 이전에 트로츠키는 그의 생애와 함께 굵직한 족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의문의 죽음을 둘러싼 해명의 여부는 충분히 설명되었기 때문에, 단순히 역사적 고찰은 더 이상 논의에 있어 그 진행을 비극으로만 몰고 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한 가지 제기해야 할 사안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당사자들이 해명할 부분이란 바로 트로츠키의 생애와는 별개로, 그의 사상이 결과적으로 구 소련 내에서도 충분한 영향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그의 최후 저작으로 잘 알려진 스탈린 전기파시스트 투쟁과 관련된 많은 논쟁을 담은 역사 서적을 그는 꾸준하게 출판했다. 소련의 치열한 내부 투쟁에서 밀려났기 때문에 트로츠키는 멕시코로 이주하면서, 그곳에서 혁명적인 성향의 부르주아지들과 교제했다는 점은 사실이다. 중요한 점은, 멕시코에서 활동하면서 그가 아메리카, 특히 미국의 혁명을 기대하여 주도했다는 점인데, 그는 국제 혁명의 연속 선상에서 여러 민족들과의 민주적 결합을 기대했다. 트로츠키에게는 이와 관련된 대표적 저작이 두 권 존재한다. 첫째는, 연속 혁명과 전략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고, 둘째는, 배반 당한 혁명으로 잘 알려진 트로츠키의 소련 내 경제 문제를 비판한 중요한 문건이다. 물론 이는 당시의 소련 사회와 비교했을 때를 전제해야 하므로, 트로츠키 자신이 소련 사회에 대한 주관이 깃든 서술상의 한계를 보인다. 또한 그의 행적에서 교제와 관련된 인물을 고려했을 때 충분히 오해 삼을 행동을 보였다.  

 

물론 당시의 레닌 사후로 일어난 소련 당내의 내부 투쟁를 둘러싼 해석이란 실질적으로 그당시의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함부로 다룰 수는 없다. 당대 역사의 정황은 독일이 파시스트의 힘을 빌려 진격 중이었다는 사실이고, 파시스트가 유럽 전역을 광범위하게 휩쓸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역시 제국주의와의 전쟁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트로츠키는 무려 초기에 소련 국방부 장관 정도의 지위를 이르게 역임했기 때문에 인민 권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실적은 이미 소련 당내에서도 충분히 인정받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는 도피하고 말았다. 소련 내 대숙청 과정에서 오해를 부른 여러 논쟁을 남겼기 때문에 단편적인 정치적 판단이 실수라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겠지만, 소련 역사의 정립이 이 사안에서 중요한 점은 아니다. 또 다른 이유란 바로 트로츠키주의의 영향력과 국제주의의 결합, 그리고 후대의 토니 클리프, 크리스 하먼, 알렉스 캘리니코스 등 영국사관에 여전히 고취된 범유럽적 사고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일부 부르주아적 추종 태도를 과감하게 버리지 못한 자들이 혼재된 자유주의에 대한 의식을 더욱 고취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들만의 수정된 세계관으로 자리잡은 칸트주의에 대한 옹호를 숨긴다. 이것이야말로 부르주아적 경향이라 부른다

 

그들은 범민주적인 토대를 건설하기 위해 사회주의 운동을 곧바로 국제 민주주의 경향으로 흡수시켰으며, 기회에 따라 현재에 발생하고 있는 여러 정치적 사안들에 대한 날 선 비판을 가하고 있음에도, 실질적으로 정책적 타협주의를 옹호하는 성향만 내비칠 따름이다. 전반적으로, 맑스주의에 대한 재해석을 중시하는 신경향을 추구하여 오히려 배타적인 국내 인식을 더욱 강화시켰다. 트로츠키 역시 실제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와 같다는 카우츠키의 오래된 정치적 편견과 의견을 답습한 부분 역시 존재한다. 이러한 연속관들이 모여 칸트주의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점 역시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우리가 정당을 건설함에 있어 이것이 실질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정당 내의 구성원들은 비로소 어떠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합당한 강령마저 생략하고는, 그저 소모적인 연대 의식 고취나 시민 단체에 대한 호소로만 그치고 말거나, 공식 석상 전반의 회의론이 자리잡은 지금의 경향에 대해서도 이질적인 추종 세력을 낳게 했다는 점에서 그 위세에 비하면, 일부는 동의할 수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 역시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경과를 지켜볼 수 있는 기회는 물론 영광이지만, 그 결과는 더욱 처참하다. 이 경과란 바로 레닌의 계승자를 둘러싼 존재가 다름아닌 트로츠키였다는 식의 논리에 편승하고, 현재 발부되는스탈린주의와의 투쟁에 대한 편역 역시 큰 오류를 안고 있다. 이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듯이, 두 사이의 문제는 당내의 정립 과정에 있어서는 새로운 문제 의식을 일으켰지만, 그것이 경향으로 자리잡은 한 그러한 오류야말로 바로잡고 검토해야 함을 전제하며, 그리고 앞선 시도와 기초적 학습 구조의 재생산만을 반복하는 현재의 자본주의 구조 내에 뚜렷한 한계를 보이는 조직 구성에 대해서도, 지금의 정당 건설에 대한 중요성을 심화하는 것 역시, 자본논의에서도 중요한 지점이다그러나 그러한 지적마저 생략하고는 곧바로 혁명적 연속선상의 일부가 자본주의적 지속성 내로 흡수될 수 있음을 배제하고 만다. 이를 두고 자본이 잘못됐다고 과연 지적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의 심각한 낙관론이 지니고 있는 기대의 오류를 내재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더욱 조악한 책임이라면, 19911226일 부로 구 소련의 역대 서기장들이 그 취지와는 반대로, 모두가 우려했던 소련을 결국 지켜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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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2. 29. 


물리주의 비판


과학적 상대주의와 경험론의 한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하 E=mc²)은 마하의 실증주의적 경험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 체계는 가속주의적 경향과 결합하여 우주의 실체적 근거를 형이상학적 수준으로 환원시켰다. 현대 물리주의 세력은 이러한 체계의 유효성을 근거로 물리적 법칙을 절대화하려 하나, 이는 본질적으로 현상 세계의 객관적 실재를 주관적 인식의 영역으로 제한하여 포섭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현대 물리주의의 기반이 되는 이러한 체계가 가진 과학적 세력들이 그 한계를 배제한 채 정치적으로 존재한다

 

과학적 상대주의는 현대 부르주아 과학 기구의 사상적 토대로 기능한다. 우주 공간에 대한 해석적 상이함을 두고 물리적 특수성으로 오인하면서 발생하는 오류들은 단순한 학문적 논쟁만이 아니라 정치적 지배의 도구로 전락했다. 사물을 오로지 현상과 인식의 수준에서만 판단하려는 경향과 전체 체계의 진행 과정이 아닌 수식적 분석에만 의존하는 실용주의적 태도는 부르주아 국가 장치가 과학을 자본 증식의 복무 도구로 선점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충돌은 실재하는 모순이 아니라, 실체 없는 가설들에 의존한 관념적 층위의 반영과 대립이다. 플랑크, 보어,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노이만 등이 제시한 역학적 운동 과정은 과학적 엄밀성보다는 부르주아 국가의 정치적 요구에 부응하는 기묘한 가정들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양자역학의 관찰자 중심주의는 주관에 따른 상대성을 절대화하며, 중첩과 결합이라는 논리로 접근하여 물질적 실재의 모순을 은폐한다

 

이러한 과학적 추상화의 문제는 오펜하이어의 원자 폭발성 연구에서 볼 수 있으며, 고도화된 무기 체계의 확장을 초래한다. 현대의 복잡한 물리주의와 기술 발전의 결합은 부르주아 과학관을 공고히 할 뿐이며, 더 높은 생산성을 강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극 활용된다. 아서 C. 클라크의 공상적 원자론과 양자역학의 초기 설정 역시 이 학문적 체계가 지닌 비현실성과 체계적 허구성을 증명한다

 

결론적으로, 양자역학을 비롯한 현대 물리주의 연구는 기존의 시공간 점유 형태를 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사상적 귀결에 가깝다. 주관적 상대성에 기초한 물리적 가설들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작업은 부르주아 과학 기구의 물신성을 타파하기 위한 필수적 공정이다. 본 보고서는 현대 과학 연구의 비판적 지점으로 물리주의적 상대주의의 한계를 명확히 규명하기를 제안하는 바이다. 더불어, 현대 양자역학 연구는 시·공간의 점유 형태에 대한 또 다른 귀결의 정당화일 뿐이라는 점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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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1. 17.


구조주의 비판

 

필자에게 구조주의 비판은 초기 연구 과제였으며, 이를 국내 문제로 풀어내고자 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 실천의 모순에 대한 고민은, 프랑스 구조주의 비판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실천으로의 구체적 이행으로부터 비판적 본질에 도달하는 경로를 확보한다. 비판적 대상은 마르크스주의 진영 내부에서도 충분한 논쟁의 여지를 남긴 인물들이다. 특히 헝가리 출신의 루카치와 코제크가 주목된다. 이들은 프랑스 공산당 내에서 진행된 마르쿠제와 알튀세르 간의 논쟁과 비슷하게, 마르크스주의적 구조주의 철학자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비판적 독해 문제가 야기된다. 벤야민 역시 이러한 독해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면, 영국 공산당 내 에릭 홉스봄의 역사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라면, 그들 모두의 작업이 구조주의적 동기를 내포했다는 점은 피할 수 없다. 더불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원전에 충실했는지에 대한 자기 비판적 의문을 제기한다.   

 

루카치 비판의 핵심은, 그가 반영론의 중심에서 자의적·경험적 해석을 중시했다는 인식에 기반한다. 필자가 이들의 저작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일부 습득했음을 인정하더라도, 철학적 마르크스주의가 비평적 함의로만 제한될 때, 본질적인 실천의 문제를 간과한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이러한 실천적 통일성의 측면에서 루카치의 한계는 명백하다. 이는 여러 국가의 공산당 내부 문제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업이다.  

 

알튀세르 이전의 마르쿠제 등도 경우에 따라, 수정주의 마르크스주의로 비칠 수 있는 만큼, 반영론자들에 대한 당내의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 이는 레닌이좌익 공산주의에서좌파주의적 소양이 특정 이념으로 퇴색됐다는지적과 함께 개시된다. 이 지적은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고찰하는 데 유효하다고 본다. 궁극적인 목적은 구조주의의 한계를 짚어내고, 그들이 놓친 마르크스주의 저작의 중심을 오히려 연구하는 데 있다. 이는 기존 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 지금도 시도하는 맑스와 엥겔스 간의 오해와는 매우 다르다는 점을 제기하고자 한다. 때에 따라, 이는 칸트주의의 편향된 인식적 모순과도 일치한다. 이 글의 핵심을 열면 이렇다

 

맑스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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