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유정이란 작가 <내 심장을 쏴라>에서부터 그랬다. 딱, 을 제외한 주변인들을 형용사로 대신하는 거. 그래서 고유하지 않게 생성된 이름은 번잡한 해석을 피하게 만들고, 소설은 명료해지며 뚜렷하게 각색되고, 나는 인식했다. 여느 소설과 달리, 정유정 작가는 섣부른 이해를 불식시킨다. 사람 사는 게, 세상 돌아가는 게 다 이해되느냐?, 고 한다. 그냥 진실을 읽으라고 한다. 사실이 아니라... 

 

7년의 밤을 지나온 소년이 있다. 최서원이기 전에, 아내를 죽이고, 세령호의 수문을 열어 숱한 영혼을 하늘로 되돌려 보낸  살인마의 아들로서의 7년. 유령이 봉인한 상자의 뚜껑이 열리며, 사실과 진실의 쫓고 쫓기는 시간들이 전개된다.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실을 짜깁기하면 진실이 되는 걸까? 반복되는 질문에 아랑곳하지 않는 7년이, 안승환의 손에서 음흉하게 빠져나온다.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서원에게 함구하는 승환은, 사실을 쫓는 오영제의 집착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주먹으로 딸을 사랑한" 아버지의 복수와 "소설의 결말"을 유도하는 승환의 침묵이 교묘하게 줄을 대고 있다. 소실점이 되는 '서원'을 끝까지 붙잡으려는 두 남자의 이기(利己)가 결코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승환은 방관적 간섭자다. 기다린다. 간섭한다. 소실점을 붙든다. 그리고 또 멀어진다. 사건을 둘러싸고 모여 든 우리의 눈과 귀가 되어 주면서, 인간의 밑바닥에 감춰진 악의적 호기심을 수면밖으로는 안개처럼 선하게 흩어 놓는다. 승환이 '소년의 아저씨'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내내 미끼를 물고 있는, 아귀의 주둥이가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한다. "의도의 목적" 때문이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의 의도와 도사린 목적.어떤 이유로든 그가 소설을 들먹이지 않았다면, 그의 의도는 진실을 지키려는 자 편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가 동원한 "얄팍한 안도감"으로 인해 닫혀진 진실의 수문은, "불공평한 술래"로의 서원을 7년동안이나 가두고 있었던 건 아닐까.  

   

영제, 사실을 쫓는 자의 분명한 의도는 복수다. 이유있는 복수에도 불구하고, 딸을 잃은 아버지의 모습이 하나도 애처롭지 않게 함으로써, 정유정 작가는 영제를 극적인'악'으로 구축한다. 세령의 마지막 "아빠"는 결코 영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실수...사람을 죽이고 할 수 있는 변명이 아니다. 현수의 어린 시절 상처들, 양양거리면서도 미더운, 그래서 고마운 아내와 "자신을 닮지 않은 아들에 대한 자부심"이 깃든 시간들의 연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죽이고 사실을 은폐한 것에는 변명의 여지없이 영제의 이유있는 복수에 손을 들어줘야 마땅하다. 그런데 영제만 계속해서 죽일 놈으로 치닫는다. 인간이 언제부터 자유를 갈망했을까? 난, 태초부터일거라고 생각한다. 최초의 인간이라고 부연(敷衍)된 아담과 하와 때부터. 안락과 평온, 영원일지라도 신의 손안이 아닌, 비록의 자유를 꿈꾸지 않았던가. 태초부터 전해져 온 자유의 부름은, 그래서 집착을 증오한다. 진저리를 친다. 영제의 집착과 시도때도 없이 이뤄지는 '교정'으로부터 현수와 서원을 놓아주려는 작가의 의도는 여기에 부합(符合)되고, 우리는 수긍하게된다. 

 

7년의 세월은 현수가 고통을 저울질 하는 시간들이다. 어릴 적 우물에 빠져 죽은 아버지, 용팔이는 현수에게 계속되는 환상과 꿈의 공포를 전달한다. 세령의 마지막 시선과 "아빠"의 부름은 현실인 동시에, 한동안 잠자던 환상을 깨운다. 거기로부터 현수는 "현실과 환상과 꿈이 중첩되는 동심원"에 갇히게 된다. 그 안으로 자신의 아들만은 절대 끌어들일 수 없다는 아버지로서의 절박함이 진실을 차마 드러내지 못하게 만든다. 인간의 고통은 희석되어 전가되지 않는다. 더욱 치밀해지고 촘촘해지고 단단하게 전해진다. 그래서 "나는 내 아이한테 우리 아버지처럼 하지 않겠다는" 현수의 결심은 한낱에 불과하다. 인간은 나약하다. 익히 알고있다. 안다는 것이 더 치명적이다. 나약하기에 스스로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무기력하고 불성실한 인간, 현수를 만들어냈다. "눈에 어린 회한을, 불안한 삶의 끝에 서 있는 한 남자의 위태로움을, 울음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고통을" 남에게 들켜가면서 사는 남자. 감춰지거나 혹은 동질적으로 드러내는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는 현수를 애정으로 품게된다. 연민이라고 하자.

 

극적인 연민의 시작과 끝은 '보귀대령의 행진곡', 그 휘파람 소리에 있다. <콰이강의 다리>란 영화에서 보귀대령의 행진곡을 휘파람 불며 들어오는 영국군의 행군은, 서원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두려움 때문에 미칠 것 같은 기분"일 때 현수는 휘파람을 분다.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끈이다. 서로를 인식하게 하는 표시며 둘 만의 교감이다. 그러나 '보귀대령의 행진곡' 휘파람 소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의 운명을 예고한다.  영제의 '포로'가 될, 확연한 두려움으로 작별하게 될 두 사람의 운명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화해할 수 밖에 없는 관계적 운명도 그 휘파람을 통해 드러낸다. 원망과 분노가 그리움과 회환의 눈길에 닿았을 때 이뤄지는  화해에서 발견되는 진실들, 7년의 밤이 단절시켰던 진실에 대한 이해와 화해가 휘파람 소리처럼 잔잔하게 울린다. 아들을 지키고 싶어했던 아버지,"삶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진" 아버지를 향해 던지는 서원의 한 마디에선, 지난 7년간의 분노와 절망이 빠져나가고 있다. "해피 버스데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면의 고백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인간이 태어나면서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부모도 선택할 수 없으며 자신의 성(性)도 물론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게 대개의 사람들이다. 따라서 성(性)을, 변하지 않는 존재적 본질로서 깨닫는 것에 깊은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 정체성에 대해 극심한 혼란을 겪는 사람들도 있다. 그 혼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하고 표현해야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통받는다.  그 중, 한 남자의 고백이다. 가면속에서나 고백해야하는, 드러내지 못하는 고통에 관한 이야기다.  

  구이도 레니 <성 세바스티아누스>

이 세바스티아누스 순교의 그림은 오히려 이교적인 향기를 짙게 풍기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안티노우스와도 견줄 만한 이 육체에는 다른 성자들에게서 보이는 포교의 쓰디쓴 고통이나 노후의 흔적은 전혀 없고, 오로지 청춘과 광채와 아름다움과 즐거움만이 있었기 때문이다....불룩 튀어나온 가슴에도, 팽팽한 복부에도, 약간 비틀린 허리 주위에도 감돌고 있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어딘가 음악과도 같은 나른한 일락(逸樂)의 술렁거림이었다. (47쪽)

'나'는 분뇨 수거인과 오를레앙의 소녀와 병사의 땀냄새로부터 "야만스러운 영혼"을 동경하고 덴카쓰와 클레오파트라 분장 놀이를 통해 "여성"을 분출한다. 전반부에 드러난 고백과 가벼운 일탈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나'의 짓궂은 운명에 끼어들 수 없었다. 왜냐하면, 대개의 미성숙한 여자와 남자아이들은, 이성적 호기심 전에 자신이 갖고 있지 않는 극적이고 근원적인 성(性)적 매력을 동성에게서 발견하곤 하기 때문이다. '코짱'의 놀이는, 비단의 놀이처럼 가볍게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알지 못한다. 성정체성의 혼란이 시작되는 그 싯점과 본인 스스로 키우고 늘려가고 확장시키는 -내부로부터는 단절을 요구하지만- 그 고통의 과정, 그래서 끝도 알 수 없다. 그가 '오미'를 알고, 보고, 느끼는 시작에서 '나'의 잠재적 고통을 여실히 보게된다. 그리고 소노코, 즉 이성에게서는 "관념적 사랑" 이상을 가질 수 없으면서도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로밖에 머물수 없는 것들과 정상정이고자 하는 관습화되고 집요해지는 욕구.  세상에는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것도 있다. 그는 지속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 수 없는 고통에 가담한다. "무감각이라는 것이 강렬한 아픔과 비슷하다는 것"을, 소노코에게서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상상이나 느낌으로 얻을 수 없는 사랑을 시각으로 채워나간다. 아름다움과 힘, 피와 고통을... 시각으로 채워나가게 되는 것이다. 

 

고백이다. 가면의 고백.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다. 자신안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질문을 더이상 회피할 수 없음을, 도망칠 수 없음을 '나'는 깨닫게 된걸까. 작가 자신의 일부이기도 한 이 고백은 논리적이고 관념적이고 사실적이며, 사상적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런 이유로 육체적 욕망에서 비롯한 것보다 더 비릿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육체적 사랑과 탐닉이 뚫지 못하는 고통의 냄새인 것이다. 관습과 허용할 수 있는 이해의 범위밖일 수 없기에, 고백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을 각각으로 도망가게 한다. 나는 <성 세바스티아누스 순교>에서 고통을 볼 수 없는 '나'의 시선에 동조한다. 저 표정 때문에...그 그림은 '나'에게 너무나 사실적이지 못한 게 분명하다. 그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살아가야 하는 자신을 발견한 게 틀림없다. 성 정체성의 혼란으로 찢기고 갈라진 속을, '세바스티아누스'화 하고 있는 것이리라. 아름답고 매혹적인 외적 실체로 가려진 자신의 고통과 죽음과 피를 '나'는 보았을 것이다.

아니다.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곧 자신이다. 자신의 운명에 장난을 친 신을 향해 짐짓의 빼앗을 수 없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미소를 흘린다. 나...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리라. 당신을 향해 흘릴 피는 내게 남아있지 않다. 나를 위한 고통의 눈물도 말라버렸다. 당신에게...이렇게 나를 돌려보내리라...고 가면속에서 절규하는 듯하다. 

커밍아웃. 이 고백이 주는 충격은 자신은 물론 주변에서 쉽게 흡수할 수 없다. 갑작스럽고 느닷없고 또 갑작스럽다. 그러나 본인이 겪었을 시간들을에 비하면, 앞으로의 시간들에 비하면 우리가 걱정하는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이며 타인의 시선에 의한 단순한 고통인지 단번에 깨닫게된다. 성관념에 관한 고민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철학적이고 사유적으로 광활하고 자유로워서일까. 인간이 지닌 원초적이며 원론적인 고통을 체감했다. 이해와 허락, 요구들에게 거절당한 절망의 근거들... 다소의 불편한 동성애적 관점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의 관점으로 끌어들이며 철학적 사색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야 치유 식당 - 당신, 문제는 너무 열심히 산다는 것이다 심야 치유 식당 1
하지현 지음 / 푸른숲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분류는 심리치료 사례, 라고 되어 있다. 이런 류의 책이 처음은 아니다. 정신과 의사들이 잊을만하면 한 번씩 사례들을 엮어, '당신의 정신 건강을 체크'해 보라고 하신다. 그러면 모두 내 얘기인 것 같고, 당장 정신과 치료를 서두르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상태에 직면할 것 같다. 자체가 불안이고 위축이고 스트레스다. 간접 광고에 유린 당한 기분이 든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자막이 깔리면서 '어서 빨리 전문의를 찾으세요. 저는 저자인 동시에 의사랍니다. 찾아 오시는 길은 저자 약력을 참조하세요.'라는 벌건 글씨가 깜빡거리는 것 같단 말씀. 그래서 내 나름대로 현명한 처방전을, 민간요법 비스무레하지만 내렸다. 그런 책을 멀리하는 게 오히려 정신 건강에 유익하다는 결론을 말이다. 잘 난 사람 잘 난대로, 못 난 사람 못 난대로, 경중의 고민을 안고 있고 더우기 현대사회에서 스트레스는 이미 공기처럼 익숙한 것이 아니던가. 적당한 계발서로 마음을 추스리고 심리서를 몇 권 읽으면서 자구책을 강구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심야 치유 식당]에서 '식당'이란 단어가 아니었다면 지나쳤을 법한데, '식당'이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호기심과 스스럼 없는 유혹에 끌려 일없이 책장을 넘기다가 끝내는 '식당'을 집으로 가져오고 말았다.   

 

현대 사회가 다양화되면 될 수록 스트레스와 강박도 세분화 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겠지만 이미 즐길 기분도, 상황도 안 되는 걸 우린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경범죄'처럼 무심하게 지나치는 심리적 억압들은 '털어놓기는 뭐하고, 담고 있자니 찜찜한' 것들이 더 많고, 때론 더 심각한지도 모르겠다. 철주네 식당을 찾는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고민은 적잖이 나를 닮았고, 그 치유는 내게로 이어진다. 소림사 주방장이 우습게도 생각난다. 양파를 썰고 요리를 하고 물을 길어 나르는 일련의 과정들도 수련이라 하지 않던가. 요거, 딱 그렇다. 무심하게 읽힌 단편들이 내공으로 쌓이는 것과 같이 위로가 응어리를 주무르는 것만 같단 말씀.

 

"정신분석적 정신치료를 하면 자칫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어. 치료자가 만든 프레임에 환자를 집어넣는 거야. 애초에 이 사람은 이럴 것이다, 라고 가설을 만들지... 그 프레임에 환자를 가둬놓고 조지는 거지." (103쪽)

의사적 사명감보다는 직업의식을 앞세우거나  때론 자신의 아집으로 환자를 환장하게 만들지 말라는 말처럼 들린다. 이 책의 핵심이 이것이다. 틀 밖에서 환자를 만나고 자연스런 신뢰를 바탕으로 한 유대. 특별한 병명이 나오지 않는 환자중 대다수는 심리적 병이 크고, 따라서 잘 들어주는 것으로도 거 반의 치료가 된다고한다. 심리적인만큼, 의사에 대한 신뢰가 깊으면 설탕물만 타서 줘도 실질적으로 병세가 호전된다고도 한다지 않던가.  환자도 섣불리 토 달지 못하게 하는 의사 선생님들에게 경종처럼 들려주는 철주의 이 말이, 나 보다 거칠게 생긴 애한테 한 대 맞고 대들지도 못하고 있을 때 달려와 "너, 내 동생 괴롭히면 가만두지 않겠쓰", 라고 편들어 주는 형님같다. 메롱이다. 정신과 의사들이 이 부분을 잊지 말았으면, 나도 좋겠다.  정신과 치료에 음악이라. 익숙한 곡들이 잘 끼워맞춘 단추덕에 옷 매무새를 가지런하게 하듯, 그렇게 드문드문 소개된다. 식당 분위기를 위해, 그날의 기분에 따라 철주가 선곡한 이 곡들은 그냥 양념처럼 곁들어진 게 아니다. 요리의 핵심 소스처럼 단편들의 저변에 깔려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가 연상된다. 키득거리면서 읽었었는데, 기발한 참여 정신을 바탕으로, 비타민 주사 한 방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이라부를 보는 것만으로도 유쾌하게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었다. 철주가 딱, 이라부를 닮았다. 이라부처럼 코믹하거나 오버 센스를 발휘하는 건 아니지만, 전직 정신과 의사로서의 기질과 역량을, 식당 주인의 편안한 익숙함으로 드러낸다. 우선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고민을 털어놓게하고 처방은, 이라부처럼 실험적이며 근본적으로 내놓는다. 여기 있는 사례들을 그냥의 사례집으로 엮었다면 충분히 따분했을 터인데, 마치 단편 소설처럼 이야기로 풀어가는 점이 흥미롭다. 심리치료 사례, 라고 장르 구분을 하지 않았다면, 아니 그렇더라도 충분히 [공중그네]를 닮은 소설이라고 해도 좋겠다. 어떻게 믿던 이 책, 참 괜찮다. 누구나 힘들 때가 있고 지나치다싶게 침울해지거나 만사 귀찮을 때가있다. 가끔이라도... 그럴 때면 '심야 치유 식당'에 들러 봄도 괜찮지않을까.  '뭘 하라는 게 아니라, 그냥 술이나 한 잔 하시라구요.', 라고 철주가 말하 듯, 그냥 한 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세계문학의 숲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명한 작가치고 자신의 자전적 글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조금 연배가 있으신 분들은 한결같이 이런 말씀을 하시곤 한다. "내 살아온 얘기를 글로 쓰자면 책 서 너 권은 족히 될거야" 라고. 나만해도 글 주변머리가 없어 그렇지 아마도 엮기 시작하면 몇 타래의 사연이 줄줄 이어질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파란만장한 삶이냐면 딱히 그렇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하니 글 줄 깨나 쓰는 양반들이 재주도 좋으니 하고싶은 말이 넘쳐도 날 게다. 토머스 드 퀸시의 일부도 그랬던 것같다.


"정신적 반역을 유도하는 고통에도 위안을 가져다주는 아편"으로  토머스 드 퀸시는 낙원을 잃었다. 그가 배고품으로부터 혹은 이르지 못한 도달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잠깐의 위안은 신기루처럼 잡히지 않던 낙원의 일부마저도 흩어놓는다.  앤을 찾기위해 도심을 떠도는, 그리고 아내의 지극한 애정을 그리워하는 그의 외적 방랑, 충만한 사유를 유영하고 싶은 내적 방황은 잃어버린 낙원을 향해 꿈틀거리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세계에 대한 깊은 향수를 달래려는 그의 안간힘이 아편의 위안을 필요로 했던 건 아닐까.  작가는 자신의 고백가운데 많은 부분은 에드워드나 밀턴 등으로부터 나온 표현을 인용하고 있다. 그래서 다분히 시적이고 유려한 말의 유희가 넘쳐났던 것같다. 하지만 본래 그가 지닌 詩性 또한 풍부한 것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상당 부분 자신의 고백을 담는 그릇으로 택했던 건 밀턴의 <실낙원> 이다. 표현을 위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가 낙원을 잃어버린 영혼을 감추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중반부 이후에, 그러니까 아편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일련의 과정속에서 <복낙원>을 인용하는 것으로, 그가 낙원에 대한 구체적 환상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에 영감을 얻어 보들레르가 <인공낙원>을 썼다고 하는데, 그 작품을 읽지는 못했어도 영국인 아편쟁이의 ’낙원’에 대한 환상과 그리 동떨어진 것은 아닐거란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아편쟁이로서 오랜 시간 아편에 의지했던 삶과 그로 인한 폐해, 고통 그리고 아편을 줄이려고 애쓰던 흔적까지 가감없는 솔직으로 써내려가는 작가 자신의 반성이다. 책 제목의 고백이란 단어를 통해 짐작하고 기대했던 성찰과 내면의 구도求道,  "홀로 참회의 쓸쓸함을 겸허하게 표현한" 고백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거기다가 아편이 주는 순간적 쾌락이나 중독의 수렁, 그리고 그곳에서 빠져나오려는 발버둥에 대해 그의 글을 읽는다고해서 언뜻 이상의 이해는 당연히 어렵다. 그가 느끼는 육체적 고통이 다가오지 않는 대신, 그의 정신적 갈등과 고뇌, 혼란스런 고백들은 아편 연기처럼 폐부를 파고 들었다. 

작가가 내려놓은 고백은 "도덕적 결함과 정신적 고통이 반드시 죄를 의미하지는" 않기에 그다지 자숙적이라고는 할 수 없고, 오히려 변명에 가깝다. 어쩔 수 없었다는 당위성까지 내세운 변명에 조금은 시큼한 불편을 감수해야 했지만, 행태적 흐름의 동의와는 상관없이  나는 그저 그의 고백으로 도구화된 일련의 표현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무서운 얼굴들과 불타는 팔들이 혼잡하게 모여" 있는 그의 고통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애써 외면하고 싶다.  마치 공익광고협의회에서 제작된 듯한, 아편에 대한 경각심을 부르는 이 책의 시작으로부터 나는  다른 것으로 빠져들어갔다. 작가가 뿌리는 유려하고도 섬세한 시적 표현들 속으로.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은 소리내어 생각하는 것" (p.132)

멋지다. 한 번이라도 이런 멋진 표현이 나로 비롯한다면 나는 낙원을 영원히 찾지 못한다해도 행복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바닥난 詩性이 부끄러울 뿐이다.들었다 놓기를 여러 번 하면서도 아직까지 끝을 못 본 <실낙원>을 꼭 읽고싶다. 토머스 드 퀸시가 내뿜는 유려한 낭만의 일부를 찾을 수 있을거란 기대가 크다. 어떤 작품을 읽었다고해서 꼭 뭔가를 깨닫거나 답을 찾아야만 한다는 강박은 내게 없다. 그래서 이 책을 덮을 때까지 어떤 식으로든 작품에 몰입되거나 하지는 않았을 뿐더러 "숭배의 대상이었고 제물"이었던 그의 여타 작품을 도발하고 싶다는 생각 뿐이다.  일정한 목적으로 꾸깃거리는 그의 고백들 마지막으로 짧게 안도할 수 있는 이유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1-04-29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편 하면 중국인만 떠오르는데 영국 아편쟁이의 고백이군요.^^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은 소리내어 생각하는 것'
음미할수록 딱 들어맞는 멋진 말이네요~~~~~ ^^

모름지기 2011-05-03 23:48   좋아요 0 | URL
중국인들에 전략적으로 아편을 퍼나른게 누군데요.ㅋㅋ
암튼 수사어구는 유려한데 주제가 좀 그랬어요.

마녀고양이 2011-04-30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편이란게 워낙 무섭잖아요. 주어진 황홀경이라
정답이 없는 세상에서 뿌리치기가 쉽지만은 않을것 같아요.
흥미가 가는 책인데요. 거기다 유려하고 섬세한 시적 표현이란 말이죠.

그런데 별은 셋이라,,, 아편 이야기 자체가 공감대 형성이 어려워서 그런걸까요?

모름지기 2011-05-03 23:50   좋아요 0 | URL
맞아요. 몰입이 안된다고나 할까..
자꾸만 몽롱해져 들어가는 게,,^^
그래도 그의 글은 참 멋졌어요. 그래서 그의 다른 작품을 꼭 읽어보려구요.
실낙원이랑..

sslmo 2011-04-30 0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편은 잘 모르고, 이 책도 잘 모르지만...
양귀비는 알아요.
오즈의 마법사에서 사자를 잠들게 한 그 양귀비밭이요~^^

비가 엄청 내려요, 잘 지내시죠?

모름지기 2011-05-03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슷한 효능?을 발휘하는거잖아요? 그런데 아편은 불량해 보이고
양귀비는 슬프게 고혹적이란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생각한건데 이름은 역시 중요한가봐요.^^

담주에는 계속해서 비가 온다죠? 이 화창함을 맘껏 누려야겠어요.
양철댁님도 나른한 오후엔 모자를 잠시 벗어두시고..하하
 
지금, 경계선에서 - 오래된 믿음에 대한 낯선 통찰
레베카 코스타 지음, 장세현 옮김 / 쌤앤파커스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인간의 한계는 없다.
이 오래된 믿음에 대해 의심할 여지도 주지 않고 숨가쁘게 문명이 진화한다. 눈을 뜨면 새로운 가전제품이나 상품들이 쉴새없이 쏟아지고 내가 사용하는 제품들에 대해 미처 이용 메뉴얼을 익히기도 전에 그것들은 또 발빠르게 진화한다.  가장 늦게 진화하거나  거의 진화를 멈춘게 있다면 내 몸이 아닐까싶을 정도다. 인간의 한계가 없다는 것은 다년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진화를 전제하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한계가 없는게 아니라 인간 기술의 한계가 없는 것이다. 최첨단 기술이 상상을 뛰어 넘고, 수많은 질병 치료제를 발견해내고, 우주를 날라다니는 현재의 문명 시스템을 향해 저자가 제기하려는 문제가 그것이다. 
인간 기술이 아닌 인간 자체의 한계와 정체성에 관해서다.


방대한 산술자료가 아니더라도 간단한 셈까지도 계산기의 도움을 받는 일상, 필요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미디어의 진화속에서 정작 인간의 사고는 퇴보하고 있다. 이것은 "통찰을 억압"하는 일련의 장벽들이다.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이해가 결핍됨으로써 인간은 더이상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영화 <아이 로봇>을 잠깐 기억해보자. 말로 전자 기기들을 움직이는데 익숙해진 수잔 캘빈 박사는 델 스프너 형사의 집에서 지 멋대로 작동하는 기기들이 음성인식을 거부하는 것에 당황한다. 반복해서 음성 명령을 내리지만 기기는 말을 듣지 않고 그녀는 어쩔줄 몰라한다. 이때 델 스프너 형사는 가볍게 손을 가져가 기기의 정지 버튼을 누른다. 

문명은 발전시키면서 스스로는 문명에 함몰되어가는 인간의 딜레마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문제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통찰이 일어나는 순간에는 우리 머릿속에서 복잡한 일련의 연결 현상이 발생한다. 이 연결에는 우리의 정신적 자원을 강화하고 변화에 대한 뇌의 저항을 극복할 잠재력이 내재되어 있다." 고 말하는 슈워츠의 표현을 눈여겨 봐야 한다. 문명을 진화시키는 건 인간의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통찰이어야만 하고 그것이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인 것이다. 또한 우리가 넘어야 할 장벽이기도 하다.

    
저자가 다루고 있는 장벽은 크게 다섯 가지다.
불합리한 반대, 책임의 개인 전가, 거짓 상관관계, 사일로식 사고, 극단의 경제학이 그것이다.  
단락적으로 살펴보면 극명한 차이가 보이는 것같지만 사실 유사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 강요된 사고에 대한 무저항에서 비롯하는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진보와 보수를 주축으로 하는 반대를 위한 반대, 즉 ’불합리한 반대’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미 이 부분에 대한 경각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아주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는 문제지만 알고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개선 여지가 있기에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작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는 따로 있다.  

내가 이 다섯 가지 장벽중에서 가장 주의깊게 살펴 본 것은 ’거짓 상관관계’ 부분이다. 최근 거짓 상관관계에 대하여 저작물 여러 곳에서 다뤄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학자들간에도 분분한 의견이다. ’지구 온난화가 권총 판매량 증가의 원인이 되는가?’ 라는 것에 대하여 개인적 견해를 묻는다면 전문적 연구지식이 없는 것의 감안과  단순한 논리로도 ’아니요’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게 진실이다. 그런데 내 대답이 틀렸다고 말하며 들이대는 증명에 처음에는 고개가 갸웃해지지만 반복적으로 그것에 대해 계획적으로 성립시킨 인과관계를 들려주면 어느 새 그 현상들의 상관관계가 진실인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온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거짓 상관관계가 필요한 것일까. 문제 해결 능력의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지구 온난화와 권총 판매량 증가라는 문제에 대한 원인을 규명하지 못할 때, 거짓 개연성을 이유로 상관 관계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상당히 심각한 통찰의 억압이다. 누구나 ’아니요’라고 말하는 어떤 명제에 대하여 거짓 상관관계를 형성해 반드시 일어나게 될 인과로 묶어 보도매체나 정보자료등에 퍼 나르면 우리는 꼼짝없이 思考를 유린 당한다. 사고는 정체되고 퇴보하고 통찰력은 정지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입에 넣어주는 것만 먹게되고 그 먹이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사고와 판단을 유보하고 동조에 휨쓸리고 마는 것이다.   전염병이 돌고, 가뭄과 재앙등 설명할 수도 해결의 실마리도 없는 문제를 모두 마녀에게 떠넘긴 중세유럽과 마녀사냥에 동조한 사람들, 지금의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그런데 이러한 사고의 유린에 자주 노출되는데서 오는 심각한 문제는 다른 곳으로 파생된다는 데 있다. 개인적으로 겪는 대다수의 설명할 수 없는 문제들을 너무나 손쉽게 거짓 상관관계화 한다는 것이다.  문제에 대한 해결이나 원인, 이유를 찾으려는 노력보다 변명이나 거짓을 쉽게 구사하게 된다는 것이고 자신 스스로도 그런 혼란을 점차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거짓이 사실을 밀어내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책임의 개인 전가, 사일로식 사고, 극단의 경제학이 절묘하게 버무려져서 인간의 사고 진화에 발목을 붙들고 사멸을 조장하게 된다.      


단순하게 살라는 말, 요즘 참 많이 듣는다. 복잡성을 피해 정보, 생활 심지어 마음까지도 단순을 지향한다. 그러다보니 단순 명료한 것들은 쉽게 받아들이면서 복잡하거나 깊은 생각을 필요로 하는 것은 물론이고, 통찰력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움찔하게 된다.   이 책은 처음부터 읽어야 할 분명한 이유를 들고 시작했음에도 같은 페이지를 여러 번 오고 갔다. 눈으로 읽혀지는 부분이 상당량 판단과 이해를 구했지만 나의 뇌는 그것들을 자꾸만 유보하려 들었다. 인식하지 못하는 어느 순간부터 비롯한 복잡성과 이해에 대한 나태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문명의 몰락을 막아보겠다는 무모하고도 거대한 기대가, 아쉽게도 나에겐 없다. 끊어진 전선을 잇듯, 이런 저작물에 기인해서라도 통찰력을 깨워야겠다는 의지가 꿈틀댄다.  자꾸 통찰, 통찰 하니까 굉장히 어렵게 느껴지지만 간단히 말하면 "생각 좀 하고 살자"는 게 결론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1-04-30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시는 요지 알겠어요.
거짓 상관 관계화의 원인은 간단하지 않겠는데요?
회피도 있을 것이고, 조장도 있을 것이고... 저는 가끔 이런 것에 대해서 이런 해결 방식을 써야해 라고 생각하다가 다른 논점을 만나면 헛갈리는 때가 있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면, 화려한 말 장난이었는데 그 논점을 꿰뜷어보지 못 한거지요. 요즘처럼 정보가 너무 많은 세상에는, 더욱 힘든것 같아요.

단순하지만 생각 좀 하고 살자라는 것은, 기본과 본질을 지키자 라고 저는 해석하고 살려구요. ^^

모름지기 2011-05-03 23:47   좋아요 0 | URL
마고님이 던지는 핵심에..전 언제나 혀를 내둘러요.
기본과 본질이란 단어를 생각과 연계시키지를 못한다는 거..그게 저의 한계죠.^^
암튼 책은 좋은데 이런 책 열심히 읽고나도 뒤는 왜이리 허전한지 모르겠어요.
꼭 해야하는 뭔가를 안하고 있는 느낌,
화장실 갔다가 뒷처리 안하고 나온 느낌이랄까? 흐흐흐

마녀고양이 2011-05-04 08:27   좋아요 0 | URL
아, 저두요...........
진짜 화장실 갔다가 뒷처리 안하고 나온 느낌이란 말씀, 여실히 공감해요.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