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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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이란 작가 <내 심장을 쏴라>에서부터 그랬다. 딱, 을 제외한 주변인들을 형용사로 대신하는 거. 그래서 고유하지 않게 생성된 이름은 번잡한 해석을 피하게 만들고, 소설은 명료해지며 뚜렷하게 각색되고, 나는 인식했다. 여느 소설과 달리, 정유정 작가는 섣부른 이해를 불식시킨다. 사람 사는 게, 세상 돌아가는 게 다 이해되느냐?, 고 한다. 그냥 진실을 읽으라고 한다. 사실이 아니라... 

 

7년의 밤을 지나온 소년이 있다. 최서원이기 전에, 아내를 죽이고, 세령호의 수문을 열어 숱한 영혼을 하늘로 되돌려 보낸  살인마의 아들로서의 7년. 유령이 봉인한 상자의 뚜껑이 열리며, 사실과 진실의 쫓고 쫓기는 시간들이 전개된다.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실을 짜깁기하면 진실이 되는 걸까? 반복되는 질문에 아랑곳하지 않는 7년이, 안승환의 손에서 음흉하게 빠져나온다.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서원에게 함구하는 승환은, 사실을 쫓는 오영제의 집착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주먹으로 딸을 사랑한" 아버지의 복수와 "소설의 결말"을 유도하는 승환의 침묵이 교묘하게 줄을 대고 있다. 소실점이 되는 '서원'을 끝까지 붙잡으려는 두 남자의 이기(利己)가 결코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승환은 방관적 간섭자다. 기다린다. 간섭한다. 소실점을 붙든다. 그리고 또 멀어진다. 사건을 둘러싸고 모여 든 우리의 눈과 귀가 되어 주면서, 인간의 밑바닥에 감춰진 악의적 호기심을 수면밖으로는 안개처럼 선하게 흩어 놓는다. 승환이 '소년의 아저씨'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내내 미끼를 물고 있는, 아귀의 주둥이가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한다. "의도의 목적" 때문이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의 의도와 도사린 목적.어떤 이유로든 그가 소설을 들먹이지 않았다면, 그의 의도는 진실을 지키려는 자 편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가 동원한 "얄팍한 안도감"으로 인해 닫혀진 진실의 수문은, "불공평한 술래"로의 서원을 7년동안이나 가두고 있었던 건 아닐까.  

   

영제, 사실을 쫓는 자의 분명한 의도는 복수다. 이유있는 복수에도 불구하고, 딸을 잃은 아버지의 모습이 하나도 애처롭지 않게 함으로써, 정유정 작가는 영제를 극적인'악'으로 구축한다. 세령의 마지막 "아빠"는 결코 영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실수...사람을 죽이고 할 수 있는 변명이 아니다. 현수의 어린 시절 상처들, 양양거리면서도 미더운, 그래서 고마운 아내와 "자신을 닮지 않은 아들에 대한 자부심"이 깃든 시간들의 연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죽이고 사실을 은폐한 것에는 변명의 여지없이 영제의 이유있는 복수에 손을 들어줘야 마땅하다. 그런데 영제만 계속해서 죽일 놈으로 치닫는다. 인간이 언제부터 자유를 갈망했을까? 난, 태초부터일거라고 생각한다. 최초의 인간이라고 부연(敷衍)된 아담과 하와 때부터. 안락과 평온, 영원일지라도 신의 손안이 아닌, 비록의 자유를 꿈꾸지 않았던가. 태초부터 전해져 온 자유의 부름은, 그래서 집착을 증오한다. 진저리를 친다. 영제의 집착과 시도때도 없이 이뤄지는 '교정'으로부터 현수와 서원을 놓아주려는 작가의 의도는 여기에 부합(符合)되고, 우리는 수긍하게된다. 

 

7년의 세월은 현수가 고통을 저울질 하는 시간들이다. 어릴 적 우물에 빠져 죽은 아버지, 용팔이는 현수에게 계속되는 환상과 꿈의 공포를 전달한다. 세령의 마지막 시선과 "아빠"의 부름은 현실인 동시에, 한동안 잠자던 환상을 깨운다. 거기로부터 현수는 "현실과 환상과 꿈이 중첩되는 동심원"에 갇히게 된다. 그 안으로 자신의 아들만은 절대 끌어들일 수 없다는 아버지로서의 절박함이 진실을 차마 드러내지 못하게 만든다. 인간의 고통은 희석되어 전가되지 않는다. 더욱 치밀해지고 촘촘해지고 단단하게 전해진다. 그래서 "나는 내 아이한테 우리 아버지처럼 하지 않겠다는" 현수의 결심은 한낱에 불과하다. 인간은 나약하다. 익히 알고있다. 안다는 것이 더 치명적이다. 나약하기에 스스로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무기력하고 불성실한 인간, 현수를 만들어냈다. "눈에 어린 회한을, 불안한 삶의 끝에 서 있는 한 남자의 위태로움을, 울음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고통을" 남에게 들켜가면서 사는 남자. 감춰지거나 혹은 동질적으로 드러내는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는 현수를 애정으로 품게된다. 연민이라고 하자.

 

극적인 연민의 시작과 끝은 '보귀대령의 행진곡', 그 휘파람 소리에 있다. <콰이강의 다리>란 영화에서 보귀대령의 행진곡을 휘파람 불며 들어오는 영국군의 행군은, 서원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두려움 때문에 미칠 것 같은 기분"일 때 현수는 휘파람을 분다.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끈이다. 서로를 인식하게 하는 표시며 둘 만의 교감이다. 그러나 '보귀대령의 행진곡' 휘파람 소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의 운명을 예고한다.  영제의 '포로'가 될, 확연한 두려움으로 작별하게 될 두 사람의 운명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화해할 수 밖에 없는 관계적 운명도 그 휘파람을 통해 드러낸다. 원망과 분노가 그리움과 회환의 눈길에 닿았을 때 이뤄지는  화해에서 발견되는 진실들, 7년의 밤이 단절시켰던 진실에 대한 이해와 화해가 휘파람 소리처럼 잔잔하게 울린다. 아들을 지키고 싶어했던 아버지,"삶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진" 아버지를 향해 던지는 서원의 한 마디에선, 지난 7년간의 분노와 절망이 빠져나가고 있다. "해피 버스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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