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면 뜻하지않게 그 책속에서 또다른 멋진 책을 만나게된다.
이런 만남을 나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고 해석한다.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이란 책을 읽으면서
박성현 저자의 스피드하고 간결하며 멋진 글솜씨에 반했다. 전체주의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지만
개인주의에서 비롯하는 수많은 오류를 경험하다보니
처음, 그가 표방하는 개인주의가 너무 과장된거 아닌가도 싶었지만
곧, ’떼’ 에 휘둘리며 정체성을 잃어가는 개인주의의 왜곡을 바로 잡을 수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 만남이 된 책들이 나는 더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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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성현은 니체로부터 개인주의 뿌리를 전해받고 있다.
니체는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에서, "떼에 속하고 싶은 욕심은 에고가 되고 싶은 욕심보다 훨씬 더 오래된 거야. ’떼’에 속할 때만 ’양심 바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식이라면 ’나,ego’가 될 때에는 ’양심 없는 놈’이 될 수밖에 없는" 업애야 할 존재에 대해 말한다. 단순히 옳고 그름의 판단이나 공리와는 별개로 이성적 판단에 기인한 양심을 따를 때, 인간은 비로소 존재의 이유와 가치를 지니는게 아닐까. 그런가하면 <각성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칸트는, "자연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의 명령이나 지시없이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금치산자 상태로 평생을 사는 이유는 게으름과 비겁함 때문이다" 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아직 칸트의 사상철학을 주의 깊게 읽어보지 못했지만, 내가 허투루 알던 그답지 않게 경쾌하고 명료한 글이다.
저자의 사상적 흡입구는 개방적이며 다원화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편협한 자료에, 편협한 사고로 늘어놓는 ’개인주의’가 아니란 점에서 이 책은 공감 이상으로 다가온다. 인민전선에 가담해 싸운좌파 미국 지식인에 대한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너무나 오싹하리만치 정곡을 찔렀던 영화, <뷰티풀 마인드>는 기존에 느끼던 문제와 주제를 폭넓게 재해석하기 위해서라도 꼭 다시봐야 하겠다. ’머리와 상관없는 양심, 진실과 상관없는 양심’에 대한 고찰을 필요로 한다.
어릴 적 동화로만 재밌게, 마냥 재미로만 읽었던 책 <걸리버 여행기>는 의외로 많은 인용을 통해, 사상과 문제의식을 고취시킨다. 간략하게 구성하고 번역된 것이 아닌, 진짜 걸리버 여행기를 읽어보기로 마음 먹게 된것은 ’후이넘’과 ’야후’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워낙 장편의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소인국, 거인국의 걸리버는 만나봤어도 후이넘 이야기는 처음이다. "자신의 양심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진실을 무시한 채 양심만 내세우는 태도를 얼마나 증오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지"의 스위프트의 사상적 토로를 경험하고 싶다.
세상에 책이 워낙 많이 쏟아지다보니 너무나 유명한 몇몇 책들은 어디가서 안 읽었다고 말하기 뭣하기도 하지만 그건 결코 창피해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읽고싶다와 읽어야겠어, 라는 의지가 동動했을 때 그때 읽으면 그만이라는 나의 생각은 예전처럼 지금도 동일하다. 그래서 책이 좋은건지도 모르겠다. 한 번 지어진 책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언제나 내가 읽어주거나 말거나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기다려주니까. 책은 사라지지 않는다. 품절은 될지라도.
지금은,
조지 오웰의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와 시간을 나누고 있다.
문득 내가 왜 이런 글감을 만들고, 쓰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나는 왜 쓰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