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금, 경계선에서 - 오래된 믿음에 대한 낯선 통찰
레베카 코스타 지음, 장세현 옮김 / 쌤앤파커스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인간의 한계는 없다.
이 오래된 믿음에 대해 의심할 여지도 주지 않고 숨가쁘게 문명이 진화한다. 눈을 뜨면 새로운 가전제품이나 상품들이 쉴새없이 쏟아지고 내가 사용하는 제품들에 대해 미처 이용 메뉴얼을 익히기도 전에 그것들은 또 발빠르게 진화한다. 가장 늦게 진화하거나 거의 진화를 멈춘게 있다면 내 몸이 아닐까싶을 정도다. 인간의 한계가 없다는 것은 다년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진화를 전제하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한계가 없는게 아니라 인간 기술의 한계가 없는 것이다. 최첨단 기술이 상상을 뛰어 넘고, 수많은 질병 치료제를 발견해내고, 우주를 날라다니는 현재의 문명 시스템을 향해 저자가 제기하려는 문제가 그것이다.
인간 기술이 아닌 인간 자체의 한계와 정체성에 관해서다.
방대한 산술자료가 아니더라도 간단한 셈까지도 계산기의 도움을 받는 일상, 필요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미디어의 진화속에서 정작 인간의 사고는 퇴보하고 있다. 이것은 "통찰을 억압"하는 일련의 장벽들이다.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이해가 결핍됨으로써 인간은 더이상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영화 <아이 로봇>을 잠깐 기억해보자. 말로 전자 기기들을 움직이는데 익숙해진 수잔 캘빈 박사는 델 스프너 형사의 집에서 지 멋대로 작동하는 기기들이 음성인식을 거부하는 것에 당황한다. 반복해서 음성 명령을 내리지만 기기는 말을 듣지 않고 그녀는 어쩔줄 몰라한다. 이때 델 스프너 형사는 가볍게 손을 가져가 기기의 정지 버튼을 누른다.
문명은 발전시키면서 스스로는 문명에 함몰되어가는 인간의 딜레마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문제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통찰이 일어나는 순간에는 우리 머릿속에서 복잡한 일련의 연결 현상이 발생한다. 이 연결에는 우리의 정신적 자원을 강화하고 변화에 대한 뇌의 저항을 극복할 잠재력이 내재되어 있다." 고 말하는 슈워츠의 표현을 눈여겨 봐야 한다. 문명을 진화시키는 건 인간의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통찰이어야만 하고 그것이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인 것이다. 또한 우리가 넘어야 할 장벽이기도 하다.
저자가 다루고 있는 장벽은 크게 다섯 가지다.
불합리한 반대, 책임의 개인 전가, 거짓 상관관계, 사일로식 사고, 극단의 경제학이 그것이다.
단락적으로 살펴보면 극명한 차이가 보이는 것같지만 사실 유사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 강요된 사고에 대한 무저항에서 비롯하는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진보와 보수를 주축으로 하는 반대를 위한 반대, 즉 ’불합리한 반대’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미 이 부분에 대한 경각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아주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는 문제지만 알고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개선 여지가 있기에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작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는 따로 있다.
내가 이 다섯 가지 장벽중에서 가장 주의깊게 살펴 본 것은 ’거짓 상관관계’ 부분이다. 최근 거짓 상관관계에 대하여 저작물 여러 곳에서 다뤄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학자들간에도 분분한 의견이다. ’지구 온난화가 권총 판매량 증가의 원인이 되는가?’ 라는 것에 대하여 개인적 견해를 묻는다면 전문적 연구지식이 없는 것의 감안과 단순한 논리로도 ’아니요’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게 진실이다. 그런데 내 대답이 틀렸다고 말하며 들이대는 증명에 처음에는 고개가 갸웃해지지만 반복적으로 그것에 대해 계획적으로 성립시킨 인과관계를 들려주면 어느 새 그 현상들의 상관관계가 진실인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온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거짓 상관관계가 필요한 것일까. 문제 해결 능력의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지구 온난화와 권총 판매량 증가라는 문제에 대한 원인을 규명하지 못할 때, 거짓 개연성을 이유로 상관 관계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상당히 심각한 통찰의 억압이다. 누구나 ’아니요’라고 말하는 어떤 명제에 대하여 거짓 상관관계를 형성해 반드시 일어나게 될 인과로 묶어 보도매체나 정보자료등에 퍼 나르면 우리는 꼼짝없이 思考를 유린 당한다. 사고는 정체되고 퇴보하고 통찰력은 정지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입에 넣어주는 것만 먹게되고 그 먹이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사고와 판단을 유보하고 동조에 휨쓸리고 마는 것이다. 전염병이 돌고, 가뭄과 재앙등 설명할 수도 해결의 실마리도 없는 문제를 모두 마녀에게 떠넘긴 중세유럽과 마녀사냥에 동조한 사람들, 지금의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그런데 이러한 사고의 유린에 자주 노출되는데서 오는 심각한 문제는 다른 곳으로 파생된다는 데 있다. 개인적으로 겪는 대다수의 설명할 수 없는 문제들을 너무나 손쉽게 거짓 상관관계화 한다는 것이다. 문제에 대한 해결이나 원인, 이유를 찾으려는 노력보다 변명이나 거짓을 쉽게 구사하게 된다는 것이고 자신 스스로도 그런 혼란을 점차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거짓이 사실을 밀어내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책임의 개인 전가, 사일로식 사고, 극단의 경제학이 절묘하게 버무려져서 인간의 사고 진화에 발목을 붙들고 사멸을 조장하게 된다.
단순하게 살라는 말, 요즘 참 많이 듣는다. 복잡성을 피해 정보, 생활 심지어 마음까지도 단순을 지향한다. 그러다보니 단순 명료한 것들은 쉽게 받아들이면서 복잡하거나 깊은 생각을 필요로 하는 것은 물론이고, 통찰력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움찔하게 된다. 이 책은 처음부터 읽어야 할 분명한 이유를 들고 시작했음에도 같은 페이지를 여러 번 오고 갔다. 눈으로 읽혀지는 부분이 상당량 판단과 이해를 구했지만 나의 뇌는 그것들을 자꾸만 유보하려 들었다. 인식하지 못하는 어느 순간부터 비롯한 복잡성과 이해에 대한 나태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문명의 몰락을 막아보겠다는 무모하고도 거대한 기대가, 아쉽게도 나에겐 없다. 끊어진 전선을 잇듯, 이런 저작물에 기인해서라도 통찰력을 깨워야겠다는 의지가 꿈틀댄다. 자꾸 통찰, 통찰 하니까 굉장히 어렵게 느껴지지만 간단히 말하면 "생각 좀 하고 살자"는 게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