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ㅣ 세계문학의 숲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유명한 작가치고 자신의 자전적 글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조금 연배가 있으신 분들은 한결같이 이런 말씀을 하시곤 한다. "내 살아온 얘기를 글로 쓰자면 책 서 너 권은 족히 될거야" 라고. 나만해도 글 주변머리가 없어 그렇지 아마도 엮기 시작하면 몇 타래의 사연이 줄줄 이어질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파란만장한 삶이냐면 딱히 그렇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하니 글 줄 깨나 쓰는 양반들이 재주도 좋으니 하고싶은 말이 넘쳐도 날 게다. 토머스 드 퀸시의 일부도 그랬던 것같다.
"정신적 반역을 유도하는 고통에도 위안을 가져다주는 아편"으로 토머스 드 퀸시는 낙원을 잃었다. 그가 배고품으로부터 혹은 이르지 못한 도달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잠깐의 위안은 신기루처럼 잡히지 않던 낙원의 일부마저도 흩어놓는다. 앤을 찾기위해 도심을 떠도는, 그리고 아내의 지극한 애정을 그리워하는 그의 외적 방랑, 충만한 사유를 유영하고 싶은 내적 방황은 잃어버린 낙원을 향해 꿈틀거리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세계에 대한 깊은 향수를 달래려는 그의 안간힘이 아편의 위안을 필요로 했던 건 아닐까. 작가는 자신의 고백가운데 많은 부분은 에드워드나 밀턴 등으로부터 나온 표현을 인용하고 있다. 그래서 다분히 시적이고 유려한 말의 유희가 넘쳐났던 것같다. 하지만 본래 그가 지닌 詩性 또한 풍부한 것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상당 부분 자신의 고백을 담는 그릇으로 택했던 건 밀턴의 <실낙원> 이다. 표현을 위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가 낙원을 잃어버린 영혼을 감추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중반부 이후에, 그러니까 아편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일련의 과정속에서 <복낙원>을 인용하는 것으로, 그가 낙원에 대한 구체적 환상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에 영감을 얻어 보들레르가 <인공낙원>을 썼다고 하는데, 그 작품을 읽지는 못했어도 영국인 아편쟁이의 ’낙원’에 대한 환상과 그리 동떨어진 것은 아닐거란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아편쟁이로서 오랜 시간 아편에 의지했던 삶과 그로 인한 폐해, 고통 그리고 아편을 줄이려고 애쓰던 흔적까지 가감없는 솔직으로 써내려가는 작가 자신의 반성이다. 책 제목의 고백이란 단어를 통해 짐작하고 기대했던 성찰과 내면의 구도求道, "홀로 참회의 쓸쓸함을 겸허하게 표현한" 고백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거기다가 아편이 주는 순간적 쾌락이나 중독의 수렁, 그리고 그곳에서 빠져나오려는 발버둥에 대해 그의 글을 읽는다고해서 언뜻 이상의 이해는 당연히 어렵다. 그가 느끼는 육체적 고통이 다가오지 않는 대신, 그의 정신적 갈등과 고뇌, 혼란스런 고백들은 아편 연기처럼 폐부를 파고 들었다.
작가가 내려놓은 고백은 "도덕적 결함과 정신적 고통이 반드시 죄를 의미하지는" 않기에 그다지 자숙적이라고는 할 수 없고, 오히려 변명에 가깝다. 어쩔 수 없었다는 당위성까지 내세운 변명에 조금은 시큼한 불편을 감수해야 했지만, 행태적 흐름의 동의와는 상관없이 나는 그저 그의 고백으로 도구화된 일련의 표현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무서운 얼굴들과 불타는 팔들이 혼잡하게 모여" 있는 그의 고통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애써 외면하고 싶다. 마치 공익광고협의회에서 제작된 듯한, 아편에 대한 경각심을 부르는 이 책의 시작으로부터 나는 다른 것으로 빠져들어갔다. 작가가 뿌리는 유려하고도 섬세한 시적 표현들 속으로.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은 소리내어 생각하는 것" (p.132)
멋지다. 한 번이라도 이런 멋진 표현이 나로 비롯한다면 나는 낙원을 영원히 찾지 못한다해도 행복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바닥난 詩性이 부끄러울 뿐이다.들었다 놓기를 여러 번 하면서도 아직까지 끝을 못 본 <실낙원>을 꼭 읽고싶다. 토머스 드 퀸시가 내뿜는 유려한 낭만의 일부를 찾을 수 있을거란 기대가 크다. 어떤 작품을 읽었다고해서 꼭 뭔가를 깨닫거나 답을 찾아야만 한다는 강박은 내게 없다. 그래서 이 책을 덮을 때까지 어떤 식으로든 작품에 몰입되거나 하지는 않았을 뿐더러 "숭배의 대상이었고 제물"이었던 그의 여타 작품을 도발하고 싶다는 생각 뿐이다. 일정한 목적으로 꾸깃거리는 그의 고백들 마지막으로 짧게 안도할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