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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주례사 -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남녀 마음 이야기
법륜스님 지음, 김점선 그림 / 휴(休)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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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몇 주 뒤에 결혼하는 한 아가씨가 있다. 그저 미적지근한 사이이기는 하지만 결혼이야기에 축하한다는 이야기를 건넬 정도의 사이는 된다. 그렇게 몇 주 뒤로 다가온 결혼 이야기를 하는 이 아가씨의 말이 그랬다.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 결혼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부터 결혼하기로 한 결론이 과연 잘한 결정인지까지. 곧 면사포를 쓸 예비 신부의 머릿속은 하루에도 수천 번, 비슷하고 또 같은 주제로 들썩거렸다고 한다. 비단 이 아가씨뿐 아니라 많은 예비신부가 결혼을 결심한 순간부터 비슷한 고민에 빠진다.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 결혼사진을 찍고, 양가의 어른들께 인사를 다니고, 청첩장을 돌린다. 더는 물러날 수 없는 선이랄까? 이미 소문이 나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결혼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눈을 질끈 감고 결혼을 감행한다.

 

 남과 여는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한다. 그리고 곧 후회한다. 그저 말하는 일반론이 아니다. 그냥 웃자고 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냥 많은 사람이 하는 경험과 그 경험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상대가 없으면 곧 죽을 것 같이 사랑했건, 그저 그런 민숭민숭한 사랑을 했건 간에 결혼을 결심하는 순간부터 남과 여는 이전보다 더 많은 갈등을 겪게 된다. 멀리 가지 않아도 내 옆의 이야기만 보아도 그렇다.

 

  100명의 신부가 있다면 그 100명 전부는 아니더라도 한 95~6명 정도는 비슷한 고민을 할 것이다. 결혼은 그만큼이나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이다. 바로 전날까지도 밤잠을 뒤척이며, 예식장 입장 직전까지도 고민하게 하는 큰 결정. 비단 여자의 경우만 그런 것은 아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행복하다 느끼는 순간보다는 다투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남자 역시 지치기 마련이다.

 

  '결혼? 될 수 있으면, 늦게 하는 게 좋지~' 라고 말하는 중년 남성들의 이야기가 가벼운 우스갯소리로만 넘길 수 없는 것은, 이러한 답이 비단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부담감에서 오는 것만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결혼 전 있었던 투닥거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작은 다툼이 연이어 일어나는 결혼생활, 매일매일 긁어대는 아내의 바가지. 남자만 그러할까? 여자도 똑같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현실에 스트레스를 받고,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어댄다. 끊임없는 악순환 속에서 부부는 지치고 힘들어한다.

 

  법륜 스님이 쓴 『스님의 주례사-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남녀 마음 이야기』는 그런 결혼생활을 하게 될 예비부부들을 위한 글이다. 실제로 법륜 스님이 결혼식장에서 예비부부들을 대상으로 설파한 좋은 말씀을 모은 책이다. 서로에게 받으려고만 하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오는 갈등, 상대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여 마음대로 쥐고 흔들려고 하는 이기심이 불러오는 불행한 모습들. 사랑으로 시작했다고 믿지만, 결국은 사랑이 아닌 이기심으로 변해버린, 사랑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의 아둔함. 스님은 이 모든 것을 경계하고 자신보다는 상대의 처지에서 생각하라고 조언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했다면, 내가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그 덕분에 행복하다면 받으려 하지 말아야 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하신다. 설혹 상대방이 외도라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배신행위를 저지르더라도, 헤어지지 않고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자신 스스로부터 참회하여야 한다고 하신다.

 

  스님이시라 그러하신가? 모든 사람에게 부처님 정도의 자비심을 가지라고 하시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이 아니다. 본인이 내린 결정이 확고하고 확실하다면, 그 결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노력하라는 말씀이시다. 남이 아닌 자신의 행복을 위해, 집착은 버리고 상대에게 좀 더 너그러워지는 것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길임을 말씀하신다.

 

  얼핏보면 그저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말씀이라고만 단정 지을 수 있는 이 스님의 주례사가 그저 그런 따분한 주례사, 고리타분한 어르신의 말씀으로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스님이 말씀하시는 그 방법이 인생에서도 행복해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상황만, 등장하는 인물의 관계만 조금만 바꾸어도 그 말씀이 내 인생이 행복해지기 위한 수행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으로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조금 더 노력하고 참회하는 것, 그 고단하고 따분해 보이는 수행의 길이 결국은 인생도, 결혼도 행복하게 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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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 - 서울 문학산책
유진숙 지음 / 파라북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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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햇볕 좋은 가을날 한 골목길에 옛날 국수가게를 만났다.
남아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
왜 간판도 없느냐 했더니 빨래 널듯 국수발 하얗게 널어놓은 게
그게 간판이라고 했다 백합꽃 같다고 했다.
주인은 편하게 웃었다.
꽃 피우고 있었다.
꽃밭은 공짜라고 했다.
 

정진규,「옛날 국수 가게」

 
   

  정진규 시인의 「옛날 국수 가게」라는 시의 한 구절로 제목을 빌려다 삼은 유진숙 작가의 『남아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서울문화산책』. 이 책은 문학의 꿈을 꿨었지만 십여년간 국어교사로 학생을 지도해 온 작가가 서울거리를 7개의 테마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를 대표하는 작가 60여명이 서울 거리에 남긴 이야기들을 찾아나선다는 소개글을 읽고, 나는 막연히 지난 날 영화관에서 조우했던 정우성 주연의 『호우시절 好雨詩節』이라는 영화를 떠올렸다. 당나라 시절의 시인, 두보의 「천야희우春夜喜雨」의 첫 구절인 ‘호우지시절 好雨知时节-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비’에서 인용한 제목의 이 영화는 제목을 빌려온 시의 주인 ‘두보’가 주요 배경으로 나온다. 두보가 난리를 피해 잠시 성도에서 머물렀던 ‘두보초당’이 바로 여주인공인 고원원이 일을 하고 있는 곳으로 설정되어있었다. 실제로도 존재하는 두보초당과 시원하게 하늘로 죽죽 뻗어있던 그 곳의 대나무 숲. 나는 유진숙 작가의『남아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서울문화산책』을 읽기도 전에, 서울 어딘가에 숨어있을 ‘두보초당’같은 곳을 기대했다.

  하지만 『남아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서울문화산책』은 그런 숨어있는, 자격 충만한 예비 문화관광지에 대한 소개를 하는 책이 아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인파를 이루어 이리로 저리고 오가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장소, 역사의 한 귀퉁이를 장식했으나 이제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유적지, 몇 차롄가 언론을 통해 소개되어 인파에 극심히 시달렸던 곳, 보편적이지만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 장소 등에 얽힌 문인의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수업지도 하듯이 서술해 나가는 책이 바로 『남아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서울문화산책』이다.

  때문에 당초에 섣불리 예상했듯 특별한 장소를 찾아 관광지로 만들어내기 위해 써진 책이 아닌, 문인들의 숨겨진, 혹은 널리 알려지지는 않은 일화를 후손인 우리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써진 책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듯하다.

  책을 읽다보면 내가 어느새 몇 년 전 여고생시절로 돌아가 문학수업에 앉아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아무래도 유진숙 작가의 전직이 국어교사였기 때문일까. 문인이 남긴 작품과 그 작품이 써진 시대배경, 작가의 당시 상황들을 연관시켜서 풀어나가고 이해시키려고 하는 작가의 서술방식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국어교사’의 모습이 보였고, 때문에 그러한 서술방식이 이질적이라기보다는 학창시절을 연상시켜 묘한 향수와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가깝게는 몇 해 전, 멀게는 수백 년 전에 쓰인 문학작품에 표현된 장소와 이야기를 통해서 그 시대를 읽어내고 세월이 많이 변했음을, 그리고 우리민족이 어떠한 삶을 살아 여기까지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이태준과 이상, 구본웅의 수연산방이 인연을 통해 인사동에서 천상병 시인을 만나고, 노천명과 김일연은 이화학당이라는 장소를 통해 하나의 인연으로 묶인다. 장소는 서로 관계없던 인물들을 한데 묶어주고, 인물은 서로 별개의 공간을 하나로 묶어준다.
정도전, 박경리, 법정스님, 이혜인 수녀님, 백범 김구, 황동규, 봉준호와 장기하까지, 시대와 장르를 어우르는. 그야말로 글과 이야기라는 공통분모밖에는 없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한권의 책 속에 담겨있다.  

   
 
지금도 거리는
수많은 사람을 맞고 보내며
전차도 자동차도
이루 어디를 가고 어디서 오는지
심히 분주하다

임화,「다시 네거리」
 
   
  

 서울 거리는 여전히 분주하고 바쁘다. 바쁜 걸음을 이끌고 제각기 방향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이 스쳐가는 길 위에 모든 것들이 그들만의 역사와 이야기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오늘, 내일 그리고 앞으로 내가 걸어 다니고 살아갈 터전인 서울 도시가 이전처럼 예사로이 느껴지질 않는다. 내가 다니는 그 길이 누군가의 역사이고 누군가의 이야기이다. 도처에 예사로운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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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못 잊을 어머니 손맛 - 구활의 77가지 고향음식 이야기
구활 글.그림 / 이숲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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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끔씩 머리 속에 떠오르는 '맛'과 '냄새'가 있다. 어떤 계기가 있어서 였던지, 아니면 아무 이유없이 그저 생각나는 것 만으로도 침 샘을 자극해 입 안 가득 침이 고인다. 칼바람이 부는 겨울 날 저녁에는 쿰쿰한 내가 나는 묵은지를 넣고 참치까지 넣어 팔팔 끓인 김치 참치찌개가 생각이 나고, 어느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벌겋게 달아오른 국자 안에서 금새 녹아내리던 설탕과 노랗게 섞여들어가던 소다가 연상이 된다.

 

  음식이란게 그런 것 같다. 무엇을 생각하던, 무엇을 기대하던 현재의 음식 맛은 과거의 그 맛을 따라가지 못한다. 어디서 봤더라? 군대시절 화장실에서 숨어 먹던 라면 맛이 그렇게나 좋아서 사회에 나온지 십 수년이 지나도 그 맛을 잊지 못했던 한 남자가 그 맛을 보기 위해 일부러 화장실에서 라면을 끓여먹어 보기도 했다던 우스갯 소리 같은 그 이야기가 그냥 장난으로만 지나쳐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아는 그 '추억의 맛'이란 것이 단순한 '맛'이 아니라 '추억' 바로 그 자체라는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죽어도 못 잊을 어머니 손맛]은 매일신문의 주간지인 [위클리 매일]에 '구활의 고향의 맛'이란 기획으로 연재되던 글을 엮은 것으로, 작가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에게는 추억을 불러 일으킨다. 앞집의 순이도 못 살고, 뒷 집에 영식이도 가난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다룬, 그 누구 하나도 뛰어나게 부자가 아니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젊은 사람들 보다는 약간은 나이가 있는,  그 시대의 감성을 공유한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책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나에게 있어서 작가가 글로 되살려내는 '우유빵'과 '보리개떡'은 여지껏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생소한 음식일 뿐이고, '꿀꿀이 죽'은 그 시대의 가난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매개체이다. 하지만 그 어둡고 살기 박했던 그 시기를 담담히 견디어 온 작가와 기성세대들은 그 음식들을 통해 과거를 추억한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마치 포토샵으로 블러 처리를 한 듯 한 결 부드럽게 기억되는 것인지, 글을 읽는 내내 가난이 준 시련 보다는 가난이 있었기에 즐길 수 있었던 이야기들이 담담히, 때론 즐겁게 서술되어진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내 추억의 맛은 무엇인가 생각해봤다. 하지만 퍼뜩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같은 레시피로 같은 재료를 써서 대량으로 쏟아지는 피자나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가 내 추억의 맛이 될 수는 없었다. 어쩌면 내가 살아온 삶이 짧기에 아직 그 추억의 맛을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작가가 가진 그 풍부한 경험과 그 풍부한 추억의 자원이 한 없이 부러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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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나이프 밀리언셀러 클럽 98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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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 한 건이 또 기사화되어 인터넷에 올랐다. 여자 친구를 감금하고 폭행하여 결국은 숨지게 만든 범인들에게 징역형이 선고되었다는. 슬프긴 하지만 뭐 하나 특별할 것은 없는 뉴스다. 치정이 얽힌 폭력과 살인,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몇 번이나 다루어진 이제는 특별하지 않은 소재다. 하지만 이 뉴스가 사람들의 시선을 끈 것은 바로 살인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 되었던 피고와 피해자의 나이였다. 만으로 15살, 아마도 정식 교육과정을 밟고 있었다면 중학교 3학년 또는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나이. 이렇게도 어린 아이들이 자기의 친구를 때려서 결국은 숨지게 만들고 그 시신을 유기한 것이다. 휴우.. 슬프고 무섭게도 이렇게 강력범죄를 일으키는 아이들의 연령은 점차 어려지고 있다. 강도, 성폭행, 살인 등, 아이들이 저질렀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자꾸만 벌어지고, 뉴스를 통해 국민들에게 알려진다.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요즘 애들 정말 무서워!”라는 말을 정말 많이도 듣고 많이도 하게 되는 것 같다.

 

  이렇게 범죄자들의 연령이 점차 낮아지는 것은 비단 한국만의 일은 아닌 듯하다. 러시아도 10대 네오나치주의자들이 유색인종에 대한 무자비한 테러를 자행하고 있어 문제가 된지 오래고, 영국도 10대 청소년들의 과격한 언사와 폭력적인 행동으로 말들이 꽤 많은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 일본도 이른바 ‘소년범’문제로 속앓이를 하고 있다. 1989년 십대남학생들이 길 가던 여학생을 납치해 고문하다 결국 사망하자 시신을 드럼통에 유기하고 콘크리트를 채워 은폐하려했던 이른바 ‘콘크리트 살인사건’은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유명해졌고, 그 이후로도 꽤 많은 ‘소년범’들이 언론에 등장했다. 그래서일까? 일본의 추리소설을 보면 이런 ‘소년범’에 관한 작품들이 꽤나 많은 듯하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등 한국에 번역된 ‘소년범’소재의 작품들도 다수다.

 

  야쿠마루 가쿠의 “천사의 나이프”또한 그런 ‘소년범’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3명의 중학생들에게 아내 쇼코를 잃은 뒤 갓난쟁이였던 마나미와 함께 하루하루 치유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히야마에게 어느 날 쇼코의 사건을 담당했던 사에구사 형사가 찾아온다. 3년 6개월, 갓난쟁이 딸과 함께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온 히야마의 상처를 다시 건들인 것은 바로, 히야마의 아내를 살해했던 삼인조 중 한 명인 소년B의 살해사건이었다. 하필이면 히야마의 카페 근처 공원에서 처참하게 살인을 당한 탓에 자연히 경찰들은 히야마를 용의선상에 올린 것이다.

  쇼코를 처참히 살해한 사람은 13세의 중학생, 고로 아직 갱생의 여지가 있기에 형사책임능력이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때문에 법에 저촉이 되는 행위를 해도 범행을 저질렀다 할 수 없다. 따라서 촉법소년으로 불러 보호 수속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일본의 소년법이다. 때문에 히마야는 쇼코를 죽인 범인의 이름도, 사건의 내용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히마야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취재하러 온 언론들에게 ‘그들을 국가가 처벌할 수 없다면, 나라도 그들을 벌하겠다’는 원망을 토해내는 것 뿐이었다. 사건이 있은 후 1년 반 뒤, 소년법이 개정되고 나서야, 히야마는 범인들의 이름과 사건 내용을 열람할 수 있었다. 그것도 소년범들의 인권을 위해 비밀을 준수하여야 한다는 단서를 붙인 채 말이다.

 

  이토록 원통한 사건이 또 있을까? 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사람을 겨우 잡았는데, 아직 어려서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살아갈 여지가 있기에 사람을 죽인 것을 안 죽인 것으로 해준단다. 대신에 한 몇 년 시설에 들어가 보호관찰만 받으면 된단다.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족은 가해자의 인권보호를 위해 철저히 무시된다. 그리고 가해자에게 일이 생기자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오른다. 뭔가 뒤바뀐 기분. 가해자의 인권을 위해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족의 인권은 기꺼이 무시되어도 되는 것이다. 가해자가 14세 미만의 연소자라면... 말이다. 이렇게나 말이 안 되는 법이 또 있을까? 히야마가 느꼈을 황당함과 황망함, 그리고 원통함을 조금은 같이 느끼며 공분하게 된다.

 

“천사의 나이프”는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 더 이상 청소년의 강력범죄가 뉴스로 보도되는 것이 어색하지 않아지고 있는 한국의 현실이 묘하게 “천사의 나이프”내용위로 겹쳐진다. 서두에 언급한 사건의 피고들은 징역 장기 10년 단기 5년을 선고 받았다고 보도되었다. 한 사람의 목숨을 잔악무도하게 뺏어가고 겨우 5년에서 10년만 형을 살면 된다니……. 전혀 상관없는 나도 이렇게 어이없는데 피해자의 가족들은 얼마나 원통하고 분통할까?

 

  아무튼 언론에 대고 그렇게 원망을 터뜨린 히야마는 사와구치 형사의 방문을 계기로 삼인조가 정말 갱생하여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에 나서게 된다. 소년B가 보호처분을 받았던 수용시설을 방문하고, 그에게 반감을 가지는 시설의 관리자와 부딪히기도 한다. 그러던 중에 소년 B의 여자친구가 히야마를 찾아오고, 소년 B가 사망하기 전 하고자 했다던 ‘진정한 속죄’란 무엇이었는지, 왜 소년 B가 살해당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나서게 된다. 그러던 중 다른 소년 A 또한 살해된 채 발견되고, 소년 C 또한 죽을 뻔한 위기에서 겨우 살아남는다. 과연 누가 이렇게 소년범들을 해치고 있는 것일까? 그 누구는 정말 히야마를 대신해 쇼코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이야기는 단순하지 않다. 계속해서 소년범들을 대상으로 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그 소년범들에게 개인적 원한이 있는 살인사건의 제 1용의자가 그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그것도 범인이 아니라 추적자, 형사, 탐정의 입장에서 말이다. 누가 소년범들을 해치고 있는가를 밝혀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단순한 이야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소년범과 피해자,피해자의 가족. 그리고 소년범을 헤치는 범인의 사정과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히게 만든다. 그리고 각각의 이야기가 너무 늘어지거나 너무 조여지지 않도록 적절히 조율해나가고 있다. 이러한 탄탄한 이야기와 사회 문제에 대한 깊은 고찰, 독자로 하여금 사회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저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천사의 나이프”에서 삼인조 소년범들의 변호인은 “이미 반성을 하고 있다.”, “눈물을 글썽거렸다”라고 언론에 말한다. 현실의 한국, 한 법정에서도 소년 범죄자들의 변호인은 “우발적인 사건이었으며, 아이들은 이미 반성하고 있다. 결손가정의 아이들인 점을 참작해 달라”고 말했다지? 뭐, 현실의 그 아이들이 어떤 갱생의 길을 걸어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소년 B처럼 진정한 사죄를 하고 싶어하며,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할지. 아니면 소년 A처럼 잘못된 길을 계속해서 가게될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분명 이 사회는 이 문제에 대한 많은 논의가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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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주문 신부
마크 칼레스니코 지음, 문형란 옮김 / 씨네21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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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고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비극적인 사건이 기억났다. 아직 소녀의 티를 채 벗지도 못한 여성이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건너왔다. 평생을 살아왔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가 살고 있는 베트남을 등지고 한국으로 건너온 그녀. 아마도 베트남에 두고 온 가족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두려움에 떨리던 마음을 간신히 다잡았을 것이다. 그랬던 그녀가 한국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줌의 재가 되어 비행기에 다시 올랐다. 한국으로 건너올 때에는 운명이라 생각했던 남자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한국을 떠나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가는 그녀가 담긴 유골함을 소중이 끌어안은 건 긴 세월의 고생이 얼굴에 고스란히 주름으로 내려앉은 깡마른 체구의 어머니였다.

  한국에서 제 짝을 찾지 못한 남성이 신붓감을 찾아 중개업체에 적잖은 대금을 치루고 비행기에 오르고, 적게는 열댓 명, 많게는 쉰 명 정도의 동남아 여성이 한국인 남자와 선을 본다. 그렇게 만남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짧은 순간에 상대방을 평가하고 입맛에 맞는 여성과 단시간에 부부의 연을 맺는다. 그리고 부부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온다. 대충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국제결혼의 모습은 이러하다. 아버지뻘의 남자의 손을 잡고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신부들은 한국에서 결코 쉽지 않은 결혼생활과 더불어 고향과는 다른 한국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자연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마련이고, 이들은 사회적인 문제가 되어버렸다. 앞서 언급한 어느 베트남 신부의 비극적인 결혼이 그 일례라고 할 수 있겠다.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섣불리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다는 것을 결코 쉽지 않다. 같은 말, 같은 국가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끼리도 이혼을 하네 마네 할 정도로 결코 쉽지 않은 것이 바로 결혼인데, 하물며 다른 말을 쓰고, 다른 문화에서 살아온 사람들끼리의 결혼은 어떠할까?

  고단했을 결혼생활에 비극적 종지부를 찍은 그 베트남 신부가 바람이 불면 산산이 흩어질 재가 되어 다시 고향땅을 밟은 후, 한동안 한국과 한국인들은 베트남인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자신들의 딸을, 자신들의 누이를 마치 물건처럼 대우하며 함부로 대했던 불특정의 한국인에 대한 증오가 한국인 전체에 대한 증오로 타올랐다. Ugly Korean...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인들은 정말로 추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어느새 잊고 있지만, 우리도 그들처럼 생계를 위해, 가족을 위해 외국으로 떠났던 과거가 있었다. 지금은 좀 덜한 것 같지만, 종종 미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현지인과 결혼한 동양여인이 영주권을 위해 위장결혼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을 받거나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편주문이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해외에서 신부를 수입해오는 나이 많은 남자가 나오는 장면도 볼 수 있다. 그렇게 미국으로 수입되는 여성은 아시아나 러시아 같은 못사는 나라의 국민들이다. 불과 이삼십년 전만해도 한국도 그런 나라 중 하나였다.

 마크 칼레스니코의 <우편주문 신부>는 바로 그런 우리의 과거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근면하고, 충실하고, 순종적이고, 귀엽고, 이색적이고, 가정적이고 순진한......’이라는 선전문구와 사진 한 장만으로 신부를 선택한, 오타쿠적인 취미와 취미의 연장선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39살의 캐나다 남자 ‘몬티’와 그 남자에게 선택되어 캐나다로 건너온 한국 여자 ‘경’. 단지 오리엔탈리즘의 환상에 젖어 순종적이며 신비한 동양여성과 결혼을 꿈 꾼 ‘몬티’와 다만 변화를 원해서 국제결혼을 선택한 ‘경’의 결혼생활이 조용하고 순탄할 리 만무했다. 
 

  결혼 초기,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조심스러워하던 때에는 좀 덜했지만 서로 붙어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 사이에 쌓이는 것은 사랑이나 정이 아닌 반목과 갈등뿐이었다. 멋대로 자기가 정해놓은 이미지에 상대방을 맞추려고 하고, 그 이미지에 그린 듯이 맞춰지지 않는 상대에게 실망하고 빈정거린다. 사랑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결혼은 그렇게 무거운 짐으로 상대방의 온몸에 들러붙어 온 마음을 땅으로 끌어내린다. 결국 위태롭게 이어져가던 결혼생활은 서로의 감정이 극에 달해 폭발해버리는 그 시기를 맞이한다. 서로를 비난하고 욕하고, 급기야 육탄전까지 벌인다. 그동안 감춰온 본심을 드러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결국은 언젠가는 터져야 했던 일이었다. 서로에 대해 바닥까지 드러냈을 때, 얼마나 상대방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그 후로의 결혼생활이 어떻게 될지를 결정하게 된다. 

  서로 다른 문화와 환경에서 자란 두 남녀. 그들의 결혼생활을 지켜보는 것이 결코 즐겁지 않았다. <우편주문 신부>에서의 결혼생활은 로맨틱 코미디나 순정만화에서처럼 서로에 대한 배려와 애정으로 넘쳐나지 않았다. 오히려 하드코어 적이었다. 바로 말하자면 현실적이었다고 할까? <우편주문 신부>는 국제결혼에 대한 현실적인 그래픽 노블 이다. 하지만 몇 가지 조건만을 약간 수정한다면, 그냥 결혼에 관한 그래픽 노블 이었다. 그냥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남녀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사랑 없이 결혼을 했을 때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그린 것이었다. 결국은 국제결혼도 결혼이다. 사랑과 이해에 기반을 두지 않고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성급히 이루어진 결혼은 갈등과 반목을 낳는다.

  한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많은 동남아 처녀들이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넘어오고 있다. 농촌지역에 가면 베트남, 스리랑카 같은 친근한 나라 뿐 아니라 발음도 하기 힘든, 전에는 지구상에 그런 나라가 존재했는지도 몰랐던 그런 나라에서 시집 온 여인들을 만날 수 있다. 아마도 그녀들도 경중은 다르지만 <우편주문 신부>의 ‘경’처럼 많은 혼란과 두려움, 그리고 갈등을 겪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 그녀의 남편을 ‘국제결혼’한 부부라고 따로 떼어놓고 보기 보다는 그냥 이웃의 부부로 봐주는 시선이 필요할 듯하다. 왜 어른들이 그러시지 않는가, 사람 사는 건 어디든 똑같다고. 국제결혼도 결국은 결혼이고, 외국인 신부도 그냥 신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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