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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의 첼리스트
스티븐 갤러웨이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전쟁은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든다. 전쟁은 그가 가진 폭력성과 광기 그 자체로도 무섭지만, 지나간 후에도 모든 것을 황폐하고 무력화시키고 오랫동안 존재하기 때문에 더 무섭다. 때문에 사람들은 전쟁을,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악의 행위, 최악의 범죄라고도 한다.
내가 숨을 쉬고 자판을 두드리는 이 순간에도 지구의 어딘가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내편과 네편으로 서로 갈라서서 서로를 '적'으로 지칭하고, 누가 '적'에게 더 많은 피해를 입히는가, 누가 더 많은 '적군'을 죽이는가에만 골몰한다. 전쟁은 누구에게나 가혹하지만 특히나 선량하고 가진 것없는 이에게 더욱 그러하다. 전쟁이 일어나도 눈치빠르고 약삭빠른 이들은 배를 불리고 살아남는다.
하지만 가난하고 선량한 힘없는 사람들은 전쟁의 포탄에 목숨을 잃을까 떨면서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생존법을 터득해나간다. 스티븐 겔러웨이의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는 90년대 사라예보에서 일어났던 3년간의 전쟁에서 약한 목숨을 이어갔던 무명의 인들에 대한 소설이다. 비록 3년의 시간을 한 달정도로 축약하긴 하였지만, 그가 보여주는 끔찍한 전쟁의 참상과 목적도 모른 전쟁에 목숨을 빼앗기고 가족을 빼앗긴 평범한 사람들의 끔찍하고도 슬픈 모습은 실제보다 더 가슴아팠다.
가족을 위해 물을 긷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당당히 문을 나서지만, 문이 닫히면 그 문 앞에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했던 가장과 아내와 아들을 무사히 탈출시키고 혼자 전쟁통에 남아 위태로운 목숨을 이어가는 가장. 이 두 가장의 모습은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그들이 감내해야하는 고통과 공포가 얼마나 극심한지, 그리고 전쟁이 얼마나 사람을 이기적으로 만드는 지를 보여준다. 전과 같으면 얼마걸리지 않았을 거리를, 포탄과 전쟁의 파편으로 돌아돌아 가야하는 그들의 여정에서 우리는 전쟁이 만들어낸 말도 되지 않는 모습들을 본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는다. 건널목에서는 모르는 누군가를 모르모트로 삼아 저격수가 있는지 살펴야 한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목숨을 담보잡혀야 하는 비정한 상황. 전쟁은 모든 것을 그렇듯 비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전쟁은 촉망받던 사격선수를 비정한 저격수로 만들었다.
겔러웨이는 물 뜨러가는 아버지 '케난'과 베이커리로 출근하는 '드라간', 그리고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저격수 '애로'의 이야기를 통해 사라예보 전쟁터의 모습을 전한다. 그가 이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은 미디어를 통해 전세계로 전해지는 전쟁의 참상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180도 바꾸어버린 전쟁의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그는 좀 더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물을 먹기위해 걸음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람의 운명을, 육십이 넘어서 전쟁터로 끌려갈 뻔 했던 사람의 운명을, 누군가를 죽여야 했던 그 운명을 어떤 누가 이보다 더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케난'은 괴팍한 이웃의 물병을 챙겨서 죽음에 다를지도 모를 걸음을 재촉한다. 가끔은 그 괴팍한 이웃이 성가시고 그녀의 이유없는 팍팍함이 짐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그가 전쟁 직전에 그녀와 했던 약속을 포기하지 않는다. 손잡이 없는 물병을 양팔에 끼고 그는 묵묵히 걸어 집으로 간다. '드라간'은 베이커리로 가는 길목에서 전쟁 전 부인과 절친했던 '에미나'를 만난다. 그리고 전쟁과 자신을 둘러싼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전쟁이 일어나고 모두에게 말문을 닫아버렸던 그는 짧은 만남으로 '누군가'와 말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냉정한 여사수 '애로'는 무고하게 죽은 22인의 죽음을 추도하며 22일간 '아다지오'를 연주하겠다고 결심한 첼리스트를 지킨다. 빵을 사러 갔다가 떨어진 포탄에 맞아 목숨을 잃은 22인과 그들을 추모하며 포탄이 떨어져도 자신을 노리는 저격수가 있어도 연주를 멈추지 않는 첼리스트를 보면서 그녀 안에 미묘한 감정- 그녀답지 않은 감정-이 생겨나고, 그녀는 죽음 앞에서 저격수 '애로'가 아닌,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착하고 사랑스러운 딸 '알리사'로 당당히 맞선다.
이 책은 다루는 공간적 배경이 전쟁터이니만큼 우울하다. 하지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았던 것은, 그렇게나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전쟁의 참상에서도 우리가 희망을 가지는 것은 그 전쟁통 안에서도 꿈과 희망, 그리고 자신의 확고한 의지가 살아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