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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 - 서울 문학산책
유진숙 지음 / 파라북스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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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 좋은 가을날 한 골목길에 옛날 국수가게를 만났다.
남아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
왜 간판도 없느냐 했더니 빨래 널듯 국수발 하얗게 널어놓은 게
그게 간판이라고 했다 백합꽃 같다고 했다.
주인은 편하게 웃었다.
꽃 피우고 있었다.
꽃밭은 공짜라고 했다.
정진규,「옛날 국수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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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규 시인의 「옛날 국수 가게」라는 시의 한 구절로 제목을 빌려다 삼은 유진숙 작가의 『남아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서울문화산책』. 이 책은 문학의 꿈을 꿨었지만 십여년간 국어교사로 학생을 지도해 온 작가가 서울거리를 7개의 테마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를 대표하는 작가 60여명이 서울 거리에 남긴 이야기들을 찾아나선다는 소개글을 읽고, 나는 막연히 지난 날 영화관에서 조우했던 정우성 주연의 『호우시절 好雨詩節』이라는 영화를 떠올렸다. 당나라 시절의 시인, 두보의 「천야희우春夜喜雨」의 첫 구절인 ‘호우지시절 好雨知时节-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비’에서 인용한 제목의 이 영화는 제목을 빌려온 시의 주인 ‘두보’가 주요 배경으로 나온다. 두보가 난리를 피해 잠시 성도에서 머물렀던 ‘두보초당’이 바로 여주인공인 고원원이 일을 하고 있는 곳으로 설정되어있었다. 실제로도 존재하는 두보초당과 시원하게 하늘로 죽죽 뻗어있던 그 곳의 대나무 숲. 나는 유진숙 작가의『남아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서울문화산책』을 읽기도 전에, 서울 어딘가에 숨어있을 ‘두보초당’같은 곳을 기대했다.
하지만 『남아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서울문화산책』은 그런 숨어있는, 자격 충만한 예비 문화관광지에 대한 소개를 하는 책이 아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인파를 이루어 이리로 저리고 오가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장소, 역사의 한 귀퉁이를 장식했으나 이제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유적지, 몇 차롄가 언론을 통해 소개되어 인파에 극심히 시달렸던 곳, 보편적이지만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 장소 등에 얽힌 문인의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수업지도 하듯이 서술해 나가는 책이 바로 『남아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서울문화산책』이다.
때문에 당초에 섣불리 예상했듯 특별한 장소를 찾아 관광지로 만들어내기 위해 써진 책이 아닌, 문인들의 숨겨진, 혹은 널리 알려지지는 않은 일화를 후손인 우리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써진 책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듯하다.
책을 읽다보면 내가 어느새 몇 년 전 여고생시절로 돌아가 문학수업에 앉아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아무래도 유진숙 작가의 전직이 국어교사였기 때문일까. 문인이 남긴 작품과 그 작품이 써진 시대배경, 작가의 당시 상황들을 연관시켜서 풀어나가고 이해시키려고 하는 작가의 서술방식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국어교사’의 모습이 보였고, 때문에 그러한 서술방식이 이질적이라기보다는 학창시절을 연상시켜 묘한 향수와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가깝게는 몇 해 전, 멀게는 수백 년 전에 쓰인 문학작품에 표현된 장소와 이야기를 통해서 그 시대를 읽어내고 세월이 많이 변했음을, 그리고 우리민족이 어떠한 삶을 살아 여기까지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이태준과 이상, 구본웅의 수연산방이 인연을 통해 인사동에서 천상병 시인을 만나고, 노천명과 김일연은 이화학당이라는 장소를 통해 하나의 인연으로 묶인다. 장소는 서로 관계없던 인물들을 한데 묶어주고, 인물은 서로 별개의 공간을 하나로 묶어준다.
정도전, 박경리, 법정스님, 이혜인 수녀님, 백범 김구, 황동규, 봉준호와 장기하까지, 시대와 장르를 어우르는. 그야말로 글과 이야기라는 공통분모밖에는 없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한권의 책 속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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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거리는
수많은 사람을 맞고 보내며
전차도 자동차도
이루 어디를 가고 어디서 오는지
심히 분주하다
임화,「다시 네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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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거리는 여전히 분주하고 바쁘다. 바쁜 걸음을 이끌고 제각기 방향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이 스쳐가는 길 위에 모든 것들이 그들만의 역사와 이야기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오늘, 내일 그리고 앞으로 내가 걸어 다니고 살아갈 터전인 서울 도시가 이전처럼 예사로이 느껴지질 않는다. 내가 다니는 그 길이 누군가의 역사이고 누군가의 이야기이다. 도처에 예사로운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