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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반점 왕선생
김지윤 지음 / 문학사상사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미안하다, 말은 안 했지요
그저 당신 수저 위에
제일 큰 생선 살 한 점 발라
고이 올려놓았어요
괜찮다, 말은 없었지만
당신,
참 맛있게도 먹어주었지요.
오래 익어가는 포도주 빛깔로
우리 두 사람 함께 노을 져 물드는
어느 저녁.
<사과>
말은 없었지만 포도주 빛깔로 물드는 아름다운 저녁의 시다.
말이 없이 TV앞에 앉아 채널을 돌리는 남편이 서운해 싫은 소리 하다 그만 두었다.
그리고 말이 없이 내 할 일 하는 저녁 시간이 흘러간다.
불을 발명했다는 중국 황제 수인씨의 이름을 딴 수인반점에서 점심을 먹는다.
한국에 온 후 칠 년 동안 이 식당에서 내내 주방장을 했다는 왕선생,
그의 손끝에서 불꽃이 떨어진다. 냄비마다 타오르는 불꽃은 봉화(烽火).
워짜이쩌얼 wo zai zher 我在??(나 여기 있다) 하고 알리는 봉화를
날마다 저 흐릿한 주방 유리창 너머로 피워올리는 왕선생.
무심히 밥을 먹는 손님들은 그릇 속의 탕수육 깐풍기 칠리새우를 튀겨낸 불꽃이
왕선생이 보낸 신호인지도 모르고 바삐 식사만 하는데,
옛 고향 앞뜰에서 설날에 놀던 폭죽의 그 불꽃, 지금 왕선생 냄비에 와 붙는다
늙은 아비 두고 떠나기 전 마지막 밥상 차려 올리던 날, 그 냄비 밑의 불, 다시 타오른다
놓고 온 여자의 눈 속에 위태롭게 일렁이던 그 작은 불꽃, 바람을 등지고 되살아난다
그러나 왕선생의 고향도 아버지도 여자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 그릇의 요리 위로
머리를 숙여 미처 보지 못하는 사이, 왕선생의 봉화는 칠 년째 꺼지지 않는 불씨를 피워
오늘도 혀를 날름대며 왕선생의 고향도 아버지도 여자도 불꽃 속에 다 삼켜버리고
사라진 자리, 까맣게 타들어가 흔적도 없는 재 속에서 나는 보았다,
그 안에서 걸어나오는, 불 속에서 새로 태어나는 봉황새 한 마리.
我在??, 이라고 깃털마다 새겨놓은 봉황새 날개를 펴고
― 〈수인반점 왕선생〉
수인반점에 가면 그를 잘 보리라 눈여겨 보리라
아니 우리가 먹는 짜장면이라도 잘 먹으리라
우리 삶의 봉화는 어디에 있을까
알아보지 못하고 우리는 봉황새도 지키지 못하고 사는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