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창비시선 344
김선우 지음 / 창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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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뜻밖에도 설렌다. 처음 떠나는 모험처럼.


나는 여전히 시가
아름다움에의 기록의지라고 믿는 종족이다.
운명이라는 말이 위로가 된다.


이것은 처절하고 명랑한 연애시집이다,
라고 독자들이 말해주면 좋겠다.
사랑한,
사랑하는,
아름답고 아픈 세상에 이 시집을 바친다.

2012년 새봄 강원도에서

 

시가 아름다움을 기록하고자 하는 의지라고 믿는 시인이 있다.

그 말에 박수를 친다.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시인의 마음은 처절하면서도 명랑하다,

아픈 세상이지만 명랑하게 살아가는 생명을 아끼고 보자는 시인이 반갑다.

 

떡방앗간이 사라지지 않게 해 주세요

 

 

차가운 무쇠 기계에서

 

뜻밖의 선물 같은 김 오르는 따뜻한 살집 같은 다정한 언니의 매촘한 발목 같은 뜨거운 그리운 육두문자 같은 배를 만져주던 할머니 흰 그림자 같은 따스한 눈물의 모음 같은 너에게 연결되고 싶은 쫄깃한 꿈결 같은 졸음에 겨운 하얀 양 눈 속에 부드럽게 흰 느린 길 같은 노크하자 기다랗게 뽑아져 나오는 잃어버린 시간 같은

 

가래떡이 나오네

차갑고 딱딱한 무쇠 기계에서 나오는 것이 긴 칼이나 총알이 아니라 이렇게 말랑고소한 떡이라는 게 별안간 고마워서 두 손에 덥석 받아들고 아, 아, 목청 가다듬네 말랑하고 따뜻한 명랑한 웅변처럼 별안간 프러포즈를 하네

 

저기요......떡방앗간에ㅅ서 우리 만날까요

차가운 기계에서 막 빠져나온 뜨끈한 가래떡 한 줄 들고 빼빼로 먹기 하듯 양 끝에서 먹어들어가기 할까요

 

그러니까 우리, 한번쯤 만나도 좋은 때가지 말랑하고 명랑하게 한번 달려볼까요

 

 

떡방앗간으로 달려가고 싶다, 가래떡이 나오면 누구와 나누어 먹을까, 나누어 먹을 길동무가 없으면 쓸쓸해져 자꾸 두리번거린다. 길을 걷다가, 강연회장안에서 반가운 얼굴을 찾는 내 마음은 어디로 가는 건지. 그냥 지금 여기서 만나는 사람을 친구로 여기면 될 것을.

말랑하고 명랑하게 달려보자, 그리운 것들은 다 내 안에 있고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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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문예중앙시선 13
장석주 지음 / 문예중앙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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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

― 주역시편·805


야구 방망이로 사람을 패고

돈다발을 뿌린 자에게 모자란 건 선의가 아니다.

제 안에 너무 많은

짐승들이 있었던 거다.

지나치게 성공하는 것,

많은 돈을 갖고 사는 것,

거북에게 빠르지 않다고 비난하는 것,

강물에게 소금이 없다고 타박하는 것,

연민을 도덕이라고 우기는 것,

웃지 않는 것,

울지 않는 것,

그것은 얼마나 악덕인가!


세상의 악덕들에 대해 

벌을 내릴 수 있다면

하루에 한 편씩 좋은 시를 외우게 할 테다.

나쁜 놈들은 몸서리칠 게다.

아무리 나쁜 놈도

다시는 악덕을 생각조차

못하게 될 게다.

 

 

세상의 악덕들에게 한 방 먹이는 통쾌한 시다,

악덕들이 시를 외운다면 몸서리 쳐서 다시는 악덕을 생각하지 않게 될거라는 상상

허나 악덕들에게 시는 멀고 욕망만 보이겠지.

 

비자금을 몰래 모으는 재벌들에게, 골목 시장들이 죽건 말건 제 밥 그릇만 채우는 대형마트들에게, 애들이 죽건 말건 시험 점수만 챙기는 선생님들에게. 자기 생각과 다른 이들을 빨갱이라고 하는 이들에게 이 시를 보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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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반점 왕선생
김지윤 지음 / 문학사상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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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말은 안 했지요
그저 당신 수저 위에
제일 큰 생선 살 한 점 발라
고이 올려놓았어요

괜찮다, 말은 없었지만
당신,
참 맛있게도 먹어주었지요.

오래 익어가는 포도주 빛깔로
우리 두 사람 함께 노을 져 물드는
어느 저녁.

<사과>

 

말은 없었지만 포도주 빛깔로 물드는 아름다운 저녁의 시다.

말이 없이 TV앞에 앉아 채널을 돌리는 남편이 서운해 싫은 소리 하다 그만 두었다.

그리고 말이 없이 내 할 일 하는 저녁 시간이 흘러간다.

 

 

 

불을 발명했다는 중국 황제 수인씨의 이름을 딴 수인반점에서 점심을 먹는다.
한국에 온 후 칠 년 동안 이 식당에서 내내 주방장을 했다는 왕선생,
그의 손끝에서 불꽃이 떨어진다. 냄비마다 타오르는 불꽃은 봉화(烽火).
워짜이쩌얼 wo zai zher 我在??(나 여기 있다) 하고 알리는 봉화를
날마다 저 흐릿한 주방 유리창 너머로 피워올리는 왕선생.
무심히 밥을 먹는 손님들은 그릇 속의 탕수육 깐풍기 칠리새우를 튀겨낸 불꽃이
왕선생이 보낸 신호인지도 모르고 바삐 식사만 하는데,
옛 고향 앞뜰에서 설날에 놀던 폭죽의 그 불꽃, 지금 왕선생 냄비에 와 붙는다
늙은 아비 두고 떠나기 전 마지막 밥상 차려 올리던 날, 그 냄비 밑의 불, 다시 타오른다
놓고 온 여자의 눈 속에 위태롭게 일렁이던 그 작은 불꽃, 바람을 등지고 되살아난다
그러나 왕선생의 고향도 아버지도 여자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 그릇의 요리 위로
머리를 숙여 미처 보지 못하는 사이, 왕선생의 봉화는 칠 년째 꺼지지 않는 불씨를 피워
오늘도 혀를 날름대며 왕선생의 고향도 아버지도 여자도 불꽃 속에 다 삼켜버리고
사라진 자리, 까맣게 타들어가 흔적도 없는 재 속에서 나는 보았다,
그 안에서 걸어나오는, 불 속에서 새로 태어나는 봉황새 한 마리.
我在??, 이라고 깃털마다 새겨놓은 봉황새 날개를 펴고
― 〈수인반점 왕선생〉

수인반점에 가면 그를 잘 보리라 눈여겨 보리라

아니 우리가 먹는 짜장면이라도 잘 먹으리라

우리 삶의 봉화는 어디에 있을까

알아보지 못하고 우리는 봉황새도 지키지 못하고 사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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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 소리 창비시선 340
문인수 지음 / 창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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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맨발

 

 

달이 한참 뭉그적거리다가 저도

철교를 따라 어설프게 강 건너본다.


여기, 웬 운동화?


구름에 잠깐 어두운 달, 다시 맨발이다.

어떤 여자의 발 고린내가 차다.

달이 맨발로 강을 건너고 있다. 맨발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운동화를 본다.

운동화를 벗고 사라진 여자, 그녀가 남긴 차가운 발 냄새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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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무겁다 창비시선 339
고광헌 지음 / 창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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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달리기>

 

 

 어느 봄날

 앞집 굴뚝 밥 짓는 연기 오를 때

 방장산 장군봉 봄나물 따러 간

 어머니 기다리다

 붉은 해 지는 것 보았네

 

 달팽이처럼 

 무릎 턱밑까지 말아올리고

 마룻바닥에 쓰러져 

 잎 트기 시작한 탱자나무 사이로

 배고픈 해 지는 걸 보았네 

 

 노랗게 봄 독 오른 가시에 

 마알간 얼굴 긁히며 쓰러지는

 검은 한낮을 보았네 

 

 쌀 없는 저녁 밥상 차리러

 봄나물처럼 달려오던 어머니

 지금도 어머니의 싱싱한 달리기 이길 수가 없네

 

 

무거운 시간이 지나가서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으로 살아나는 때. 시는 나를 부른다.

배고프고 아프고 캄캄한 날이었어도 어머니의 싱싱한 달리기가 있어 우리는 살아왔다

그 싱싱한 달리기는 지금 누가 하고  있을까

우리는 잊지 말아야한다.

지금 캄캄하다고 해도 누군가 싱싱하게 살고 있어 우리는 숨을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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