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세상을 산 사람을 믿었다가 오노를 따라잡을 수 없게 뒤쳐져버렸다. 오래산 사람은 아무래도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다. 오래 산 사람이 먼저 죽고 새로운 사람에게도 뒤처지면 오늘을 내일이라고 그날에 헤아리는 목숨은 상황도 분별이 안 될 만큼 위험하다/164~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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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소굴출판사가 기획한 페이지터너스 시리즈가 마음에 들어 한 권씩 읽어 나가고 있었는데,어느 순간 멈춘듯 하여 아쉬웠다.그리고 등장한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에밀졸라의 단편집 <방앗간 공격>을 읽으려고 하고 있는 찰나, 카프카의 성이 출간되었다. 당장 읽고 싶지만  한 번 이상 읽은 책은,나름 또 다른 이벤트를 만들어 읽는 것도 즐거움이라 생각하게 되어,2025년 5월에 읽을 생각이다.


카프카의 '성'을 마침내 끝냈다.도서관 대출과 반납을 꽤 여러 번 해야 할 만큼 '성'은 쉬이 속도가 나지 않았다.정말 성(城)을 오르고 있다는 기분이 들만큼 긴 호흡이 필요해였던 걸까? 요제프 k의 시선을 따라가기가 매번 버겁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은데,그 고비(?)를 넘기고 나니 재미도 있었을 뿐만 아니나 잘 읽혀서 놀랐다.그렇지만 지금까지 읽었던 고전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다.잘 읽힌다고 해서 속도도 그처럼 빠르게 흘러가지는 않았으니까.

 

카프카의 '성'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도 요제프의 직업과 그가 성으로 오게 된 이유는 대부분 알고 있을지 모른다.나 역시 그랬으니까.그리고 k 라는 인물을 통해 무언가 많은 일들이 벌어질(?)거라 예상했다.물론 어느 정도 맞는 부분이기도 하다.그런데 내 눈에는 k 라는 인물 보다 아말리아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크게 남았다.(물론 보이지 않는 권력의 상징들 클람이든가 소르티니 도 궁금하고 k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 보았던 소년 한스도 궁금했지만.) 어쩌면 그의 가족 이야기를 통해 k 라는 인물이 마주한 상황과 비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측량기사라라로 와 달라는 성의 요청을 받고 찾아왔으나 어쩐 일인지 성에서는 그에게 일을 주지 않는다 심지어 서류에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며 그가 다시 돌아가길 바란다고 말한다.이렇게 황당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권력의 횡포이고 공공기간의 무책임한 처사인데...실은 성에서의 이런 일은 아마도 비일비재한 듯 하다.성의 무책임한 행위에 항변하는 k를 사람들은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그런데 k 와 같은 상황에 처한 인물이 한명 아니 한 가족을 만나게 된다 k의 심부름꾼 바르나바스(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사도의 이름으로 '위로의 아들' 이란 뜻) 가족사다.소방수축제일에 성에서 내려온 관리의 부름을 아말리아가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의 아버지는 협회에서 추방당하고 일거리를 빼앗기고 심지어는 자신들이 살던 곳에서 추방당하게 된다.사람들은 모두 그 가족에게 등을 돌린다.그녀가 노리개감이 될 수 있었다는 것에 당당히 싸운 것이지만 사람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그의 가족을 무참히 외면한다. 그러니까 k 보다 더 치열하게 성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아말리아 가족이었다.k는 뭔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무언가로 부터 도망가고 싶어 하는 마음도 느껴지지만 아말리아는 현실을 분명하게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저 견고한 성을 무너뜨린다는것도 쉽지 않을 뿐더러 사람들의 소문과 관계들도 얼마나 무서운지를.세상에는 이겨야 하는 싸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나의 소신대로 살아가는것 역시 치열한 싸움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그래서 하게 된 것 같다.읽는 내내 머리가 아프면서도 성을 포기할 수 없었던 건  수많은 상징들에 격한 공감을 할 수 있어서였던 것 같다.'성'이 갖는 상징들.카프카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성'이 갖는 메타포가였다.(마치 그렇게 찾아내야 할 것 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고) 지금 시점에서 누군가 카프카의 성에 대해 묻는다면 '부조리'와 '권력'에 대한 이야기 라고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성 읽기를 마치면서 역자의 후기를 집중해서 읽게 된 것도 내가 얼마만큼 공감하며 읽었을까 에 대한 궁금함이 있어서 였는데 생각 보다 많아서 놀라웠다.그리고 동시에 읽을 때마다 조금은 또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그러나 '부조리'에 대한 느낌은 늘 따라오지 않을까? 우선 소설에 등장하는 이름들의 상징을 보면 '측량기사'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메시아'라는 뜻이 있다고 하던데 나는 k가 전혀 메시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미완성으로 끝났기 때문일까.다시 읽게 된다면....









16년에 했던 나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할까..궁금하다. 사회는 여전히 권력과 부조리로 소란스럽지만,분명 다른 느낌으로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표지도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다.알라딘 포인트 차곡차곡 모아 5월에는 '성'을 구입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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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은 부모가 가장 잘 안다고 한다.하지만 이는 틀린 말이다. 서로 엇갈리지 않은 세계의 일은 아무리 부모라고 해도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중국이나 인도처럼 이국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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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읽을 때는 다분히 철학적으로만 다가왔던 문장이었을 텐데..탄핵의 시간을 겪고 있는 지금.. '엇갈림' '자멸''사라짐'에 대해 묘한 기분이 든다.~ 생에 굉장한 엇갈림이 일어난다면..막을 내린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기꺼이 허락(?)된 오독에 잠깐의 위로를 받았다.)


한 사람의 일생에는 백가지 세계가 존재한다.어떤 때는 흙의 세계로 돌아가고, 어떤 때는 바람의 세계로 움직인다. 또 어떤 때는 피의 세계에서 비린내 나는 피를 뒤집어쓴다. 한 사람의 세계를 방촌에 모아놓은 경단과 선과 악을 섞어 놓은 경단을 층층이 일렬로 늘어놓아 천 명에게 천 개의 실세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121~122쪽

내 세계와 내 세계가 엇갈렸을 때 할복을 하는 일이 있다. 자멸하는 일이 있다. 내 세계와 다른 세계가 엇갈렸을 때 둘 다 무너지는 일이있다.부서져 날아가는 일이 있다. 혹은 길게 열기를 끌며 무한한 것 속으로 사라지는 일이 있다.생애에 한 번 굉장한 엇갈림이 일어난다면 나는 막을 내리는 무대에 서는 일 없이 스스로가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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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새입니까? - 브랑쿠시와 세기의 재판
아르노 네바슈 지음, 박재연 옮김 / 바람북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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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브랑쿠시의 작품을 만났지만, 예술가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 유명한 '새' 사건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니. 로댕 밑에서 작업을 했고, 발자크 동상을 만드는데 손을 거들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았다.-물론 '이것이 새입니까'에서 이 사실은 중요하지 않을수도 있다- 그런데 커다란 발자크 동상 자체보다, 이 작품이 협업(?)으로 이뤄졌다는 가정을 하게 된다면, 온전히 로댕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따라 올 수도 있겠다.


  뒤샹을 통해 미국 브루머갤러리에서 브랑쿠시의 작품이 전시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흥미롭다는 말을 하기에 다음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더 흥미진진하다. 작품이 배에서 내려지고, 세관원들이 왜 저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걸까 궁금했는데. 바로 '세금'이 문제였다. 예술작품이 아닌,산업용 물품이라고 규정해버린 탓이다. 어디에서도 '새'를 떠올릴 법한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한 것이 이유였다. 해서 이 작품으로 인해 재판이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누가 봐도 새를 떠올렸다면,애초에 이런 재판은 벌어지지 않았을 게다. 그러나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는 청동을 보면서,'공간 속의 새'를 어떻게 떠올릴 수 있을까.이제 질문은 이것은 예술인가, 산업용 물품인가..에서 예술작품인 이유를 밝혀야 한다. 우선 온전히 예술가의 손으로,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는가, 복제품이 있는가 없는가,그런데 청동을 주조하는 과정에서 예술가가 아닌 주조공이 했는가?연마기기가 사용되지는 않았는가를 따진다.브랑쿠시는 저들이 새에 대한 이해부터가 되어 있지 않음을 주장한다.



나무 한 그루가 마치 새처럼 보인건, 나의 기분탓일수도 있겠지만..예술이란 무엇이다.라고 정의 내릴수 없는 거라 생각한 입장에서, 새처럼 보이지 않아서, 새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코미디 같다는 생각을 했다.심지어 재판부가 아닌, 예술가 스스로 그것을 증명해 내야 한다는 아이러니 제목 자체보다 예술 작품에 집중했다면 저와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새다' 라는 명제를 사법부에서 온전히 받아들이진 못한듯 하다. 다만 예술가에 대한 개념(?)에 입각하여, 브랑쿠시의 작품을 예술작품으로 인정해 주었으니까 말이다  '이것은 새다' 라고 언급하기 보다 "본 법정은 이 물품이 면세 대상임을 판결합니다" 라고 집행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모든 마무리 작업은 제 손으로 했습니다.다른 모든 작업과 마찬가지로 연마 역시 제가 직접 했습니다. /연마기는 물론 그 어떤 기계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그냥 줄과 아주 고운 모래 종이로 청동을 닦았어요.점점 더 매끈해지도록 아주 오랫동안...아주 오랫동안요"/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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