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이름들 - 제3회 박상륭상 수상작
안윤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산다는 건 참 곤란한 노릇이지 뭐예요"/60쪽



굳이 누군가 말해주지 않아도 산다는 것이 고통이란 사실은 알고 있다.그런데 부러 힘겨운 소설을 나는 왜 찾아 읽게 되는 걸까...<남겨진 이름들> 덕분에 그 사실(?)을 알았다. 발견해 낸 것처럼 기쁨이 느껴져서, 앞으로도 계속 찾아 읽을 생각이다. 현실에서 마주한 고통은 힘겹지만, 이야기 속 고통은 단단하다. 그 고통을 어떤 식으로든 극복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으로,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고통은 끝난다.물론 해피앤딩은 아닐수도 있다. 너무 당연하다. 어차피 우리가 마지막으로 마주하게 될 앤딩은 '죽음'이니까. <남겨진 이름들>을 따라가면서 순간 순간 울컥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슬픔의 깊이가,마냥 우울한 블루가 아니어서, 좋았다. 상실과 이별을 마주할 때마다 무너지기만 할 수 없을 테니까.


"모두는 우리가 정확히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떠나게 되는지도 알지 못하지 언젠가 내가 너를 아니면 네가 나를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우리 인간은 떠나기 위해 살고 있는 거라고도 했다"/204쪽


김광석 노래를 듣다가 울컥했던 건, 우리가 매일 죽음으로 향한다는 사실이 뭔가 피부에 확 와닿는 순간이 있을 때이다. 다행인건 매일 그 생각 속에 함몰되지 않아서라고 해야 할까.. 누군가의 일기를 엮어낸 듯한 형식으로 써내려간 글이라,누군가의 회고록을 읽은 기분이 들었다..소설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는 뜻이다. 해서 죽음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현재의 집중하는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살아가는 일은 죽음과 삶의 밀도 당기기 같은 것, 나는 죽는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사라질 것이 예정되어 있다.때문에 우리에게는 이 삶을 선명하게 해줄 무엇,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줄 무엇이 절실하다"/20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귀를 쫑긋 세우고 세음(세상의 모든 음악) 오프닝을 듣는다. 유난히 더 가슴으로 들려올 때가 있는데,마침 안윤의 소설 <남겨진 이름들>을 읽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9월 어느날 오프닝 글은 자신에 관한 이야기였다.나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건 나 자신이 아닐까..그런데 그것 보다 상처도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제일 많이 주는 건 아닐까.. 라는 문장이었던 것 같다. 안윤의 소설에서는 여전히 자신을 제대로 바라 볼 수 없음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제대로 나를 볼 수 있다면, 나는 지금 보다 덜 힘들 것 같지만..더 많이 힘들수도 있다...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어서가 아니라, 보고 싶지 않은 이유를 매일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지고 말았다.










"사람은 일평생 거울이나 사진을 통해서만 자기 얼굴을 볼 수 있으니 영영 제 얼굴을 제대로 한번 바라보지 못한 채로 세상을 등지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기는 한 걸까"/10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읽다가 멈춘 스트루가츠기 형제의 <신이 되기는 어렵다>를 다시 시작해야 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삶의 신비는 사람인 우리가 결코 엄밀하고 어긋남 없는 수준의 객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끊임없이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비추어 볼 수밖에 없다는 것.그것은 세상과 동떨어진 외로운 사람들,적요와 고독 속에 파묻혀 오롯이 혼자라고 확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그러니까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신이 있다면 그 존재는 타인이라는 거울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반사하는 빛이 아닐까/5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든 결핍은 아름다울 자격이 있지.누가 뭐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21쪽

그러나 근 구가 알맞은 정도의 희망을 논할 수 있을까.희망은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때때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건 체념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 일상에 푸른 잎을 내보이는 희망이다.나는 그런 희망이 나쁘거나 틀린 것,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4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화들이 말해주는 그림 속 드레스 이야기
이정아 지음 / 제이앤제이제이 / 2018년 12월
평점 :
품절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와 '골든 에이지' 그리고 <슈테판 츠바이크의 메리스튜어트>를 연이어 보고 읽은 덕분(?)이었을 게다.'명화들이 말해주는 그림 속 드레스 이야기' 제목에 시선이 가게 된 것은..공교롭게 펼쳐본 페이지는 엘리자베스 1세에 관한 부분.'권력을 입은 패션'이란 주제가 호기심을 자극할 수 밖에.츠바이크의 책을 통해 엘리자베스를 만났지만 영화 속 여왕의 패션과 화장은 조금 지나친(?)건 아니였나 싶었는데 그럴수 밖에 없었던 사연(?)이 숨어 있었다.시간이 흘를수록 화려함을 더 강렬하게 즐기게 된 것인지,처음부터 그런 취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는 학자에 따라 해석에 차이가 있을수 있겠으나 영화 골든 에이지에서 화려함을 벗은 뒤의 모습을 보았을때의 느낌은 여왕이 조금 안쓰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관복을 입은 엘리자베스 1세'그림은 작자미상이다.자신의 이름을 밝힐수 없었던 것은 여왕을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그렸다는사실에 대한 두려움이였을까..아니면 상상이 가미된 그림이라 차마 이름을 밝힐수 없었던 것일까 무튼 이 그림을 소개하면서 만나게 된 엘리자베스 1세의 이야기는 이렇다."재위 초기 왕좌는 불안했다.여왕을 인정하지 않는 의회는 하루가 멀다 하고 결혼을 종용했다.남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조용히 물러나라는 의미였다.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상황을 바꾸고 강력한  왕권을 획득하기 위해 은밀한 작업에 들어갔다.그것은 패션을 통해 스스로를 신격화 하는 것이었다(...)역사상 가장 빛나고 화려하지만 또한 가장 무겁고 불편한 엘리자베스 1세의 기하학 패션은 이렇게 탄생했다.(...)작가 미상의 영국 화가가 그린 <대관복을 입은 엘리자베스 1세>는 전설로 길이 남은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보여준다.(...)엘리자베스를 본 런던 시민들은 환호했다."/286~288 쪽 여왕의 패션이,작자미상의 그림이 당시 시민들에게 어떤 희망을 품게 만든건 사실인 듯 하다.영화 속에서는 마냥 화려함을 좋아하는 여왕이이라 생각했었는데,화려함 속에는 여왕의 취향과 함께 또다른 비밀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그래서..나는 소(小) 마르쿠스 헤라르츠의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이 조금은 슬프게 느껴지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권려과 취향이 여왕 스스로를 강인하게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죽음으로 이르는 이유도 되였으니 말이다.

 

 "재위31년이 되던 해 그려진 이 작품은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한 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작품 중 하나다.각종 보석을 정교하게 장식된 은백색의 옷을 입은 엘리자베스1세가 지도 위에 당당하게 서 있다.발 밑의 세계지도는 스페인을 굴복시키고 신대륙으로 뻗어나간 여왕의 권력을 상징한다.여왕이 입고 있는 흰색의 드레스는 예수의 영광과 함께 처녀 여왕의 순결함을 칭송하는 장치다.(...)"/293쪽 영화 골든 에이지를 보면 스페인과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그러나 그림 속 모습과 영화 속 모습은 또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무튼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얼굴을 유난히 하얗게 만들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천연두 자국을 감추기 위함이였다는 사실에 놀랐고,그로 인해 수은과 납중독에 걸리기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하얀얼굴을 고집했다는 점도,죽을 때까지 호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다이어트 까지,권력이란 자리를 누구나 누릴수 있는 것이 아님을 온몸으로 보여준 여왕이였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권력이란 것이 도대체 뭐길래..라는 생각도 해 보게 만든 그림이였다.(자신의 어머니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왕에게는 권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테지만 말이다..)

 

책의 구성은,탐미의 시대,기묘하고 매혹적인 패션,갖고 싶은 것들의 역사,패션 아이콘 시대를 앞서가다 로 구성되어 있다. 드레스에 깊은 관심이 없어서 이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다가,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 덕분에 읽게 되었다.패션 아이콘..그 중에서도 권력을 입은 패션을 가장 재미나게 읽은 것 같다.마담 퐁파두르의 로코코시대의 모든 것과 함께...시대의 경향이란 것도 있겠지만,권력을 어디에 두고 있는 가에 따라 이렇게 분위기가 다를수도 있는 걸까? 의도하지 않게 엘리자베스 1세와 마담 퐁파두르의 그림을 비교하며 보는 재미도 있었던 것 같다.권력의 정점에 있어야 하는 자와 그렇지(?)않을수도 혹은 조금 거리를 두고 있는 이의 차이가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마냥 아름답게만 그린듯 해서 그다지 집중해 보지 않았던  그림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엘리자베스 1세의 그림과 함께 본 덕분이다.

 

 모리스 캉탱 드 라 투르가 그린 '마담 퐁파두르' 그림을 볼때면 그녀보다 소품처럼 등장하는 책들이 궁금했었다.그리고 이제 궁금증 해결 "그림 속 서른 네 살의 퐁파두르는 아름답고 완숙미로 가득하다.피부는 흰 도자기처럼 깨끗하고 코르셋으로 끌어 올린 가슴은 여전한 그녀의 여성미를 보여준다.꽃과 각종 식물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는 크림색 드레스는 은은한 광택과 차분한 색감으로 기품과 우아함을 더하고 손에 펼쳐진 악보를 비롯한 배경의 지적인 물건들은 예술과 과학에 대한 그녀의 열정과 학식을 보여준다.화가는 섬세하고 화사한 파스텔의 색조로 밝고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며 그녀의 미와 지성을 동시에 드러내고자 했다.워낙 세밀하게 묘사한 덕에<법의 정신><백과사전><자연의 역사> 같은 책의 제목까지 확인할 수 있는데 몽테스키외 달랑베르 볼테르 그녀가 후원한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출판한 책들이다"./310쪽  권력의 주체가 국민들에게 있다는 주장을 편<법의 정신>을 유난히 좋아했다는 저자의 설명과 함께,사치로 비난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그러나 이런 평가는 시선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달랐게다.마담 퐁파두르 정도면 화려한 드레스 정도는 입어줘야 된다고 생각했던 건 아닐지...이 책을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던 건,그림 속 주인공들에 대해 객관적 시선으로 보고자 함을 조금 덜어냈기 때문이였다.내가 궁금했던 만큼의 호기심을 채워 주었다는사실에 만족한다. (덕분에)저자가 의도한 것이든 아니였든 독자는 마음대로 마담 퐁파두르와 엘리자베스 1세의 권력에 대한 표현을 비교해 볼 수도 있었다.드레스를 통해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를 만나게 될 줄 몰랐다.



(2019년에 쓴 리뷰를 다시 꺼내 보게 되었다. '권력과 취향' 이란 표현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권력을 취향처럼 누리려 한 이의 말로를 뉴스를 통해 연일 보고 있어서 인듯 하다. 엘리자베스는 감히..누구와 비교를 하는 건가..하고 따져 물을 테지만,취향에 권력이 더해지는건 화려할 수록 뭔가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소소함으로 감추는 권력도 무섭겠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