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또 이따위 레시피라니 - 줄리언 반스의 부엌 사색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4월
평점 :
Jesus Christ Mother Mary and Joseph!
우리, 그러니까 조이스와 나는 간단히 뭔가를 만들어 먹고 전시를 보러 가기로 했다. 이것저것 준비하길래 도와줄 것이 없냐고 물은 게 화근이었다. Can you do these onions? 양파 손질 좀 해줄 수 있어? 라길래 뭔지도 모르고 양파를 썰었다. 나는 사과를 깎을 때 감자 껍질 벗기는 칼이 필요한 사람이어서, 하필이면 그날 아침 호박과 새우, 양파를 넣은 된장찌개를 먹은 날이어서.
내 머릿속에 있는 된장찌개 속의 양파 모양으로 양파 하나를 손질했다. 이윽고 조리대를 본 조이스가 한 말이었고 난 잠깐 이 인간과 절교할까 망설였다. 햄버거를 만들 거란 걸 나한테 말도 안해줬는데 내가 궁예도 아니고 어찌 알았겠는가. 된장찌개 속 양파도 잘 넣으면 되지, 넌 그럼 양파 없이 먹든가! 속 좁고 뒤끝 있고 기억력 좋은 데다 양파 앞에서 망연자실해 본 이가 나 혼자만은 아니란 걸 줄리언 반스의 책은 까칠하게 이야기한다.
양파와 관련해서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용어로는 slice와 chop이 있는데, 이 단어들은 논리상 서로 다른 방식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slice는 절반으로 자른 양파를 다시 가로로 얇게 자른다는 말이다. 그러면 반원형 양파가 어수선하게 흩어진다. chop은 절반으로 자른 양파를 세로로, 즉 꼭지에서 뿌리쪽으로 여러 겹 흩어지지 않게 벤 다음 가로로 자른다는 말이다. 그러면 잘게 잘린 양파가 수북이 쌓인다. slice는 finely로, chop은 finely와 roughly로 수식할 수 있다. 따라서 '썰다'라는 말은 다섯 갈래로 나뉘는데, 어느 쪽을 택할까 고민하느라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지 못한다. 물론 거꾸로 생각해서 이런 합리적인 자문을 해볼 수 있다. 즉 "내가 식탁에 음식을 받아놓고 '이 음식은 양파를 다르게 잘랐으면 좋았을 텐데'또는 '그랬어야만 하는데'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던가?"라고 물으면 물론 대답은, "그런 적은 한 번도 없다"이다. 그러나 부엌의 현학자가 내리는 결론은, 양파 자르기가 실패할 수 없는 작업이라기보다는 레시피를 열심히 잘 따랐기에 결과가 좋았으리라는 것이다.
양파 손질은 채썰기인가 다지기인가 세로 썰기인가 어슷썰기, 깍둑썰기, 혹은.... 이런 생각이 들게 하다가 결국, 책에 나온 조리법을 읽고 그대로 순서대로 따르되 단어 하나하나를 까칠하게 짚고 넘어가는 사람, 바로 줄리언 반스다.
1946년생, 영국 중부, 옥스퍼드 대학, 사전 증보판 편찬, 평론가, 작가, 메디치상, 구텐베르크상, 페미나상, 세 번의 슈발리에 훈장, 이외 다수 수상, 그러나 내게는 언제나 '팻에게'라는 헌사와 함께 책을 내는 작가. 이번 책은 '그가 요리를 해주는 그녀에게'라는 헌사가 있다. 책의 첫 번째 속지에는 2003이라는 숫자가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의 아내이자 영국의 전설적인 문학 에이전트, 팻 카바나가 뇌종양으로 쓰러져 숨진 시기는 2008년. 그러니 이 책 출판 당시 줄리언 반스는 주방에서 팻 카바나를 위해 요리하고 팻이 초대한 작가들과 식탁에 앉았을 것이다.
그 후 그는 모든 인터뷰를 거절하고 'Levels of Love'를 출간했으니, 시간은 이렇게 사무치고 과거는 이렇게 다르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그곳에서 우리는 모두 다르게 행동한다.
그 과거의 주방에서 줄리언 반스는 한 사람의 pedant가 된다. 이 책에서는 현학자라고 불리지만 실제 의미도 다르거니와 부엌에서 움직이는 반스의 느낌도 현학자라기보다는.....요리책 사진과 단어 하나하나에 편집자처럼 집착하면서도 좀 그대로 따라 해 보려고 노력하는 깐깐한 조리사에 가깝다. 이 단어에 대한 역자 주도 책 안에 있고, 조리법도 간혹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번역도 간간이 보인다. 마음에 걸리지 않는 부분이 전혀 없는 역작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손이 가고, 궁금해서 책장을 넘기고, '맞아, 나도 이랬어'라고 생각하게 된다.
주방에서 요리책을 들추어보는 사람의 마음을 이야기하되 여전히 까칠하게 1, 2, 4 항으로 구성된 요리책을 보면 '내 요점은 출판사의 실수로 3번이 누락된 게 아니냐는 거고, 그렇다면 그 누락된 내용이 뭐냐는 거에요. 3번이 4번으로 잘못 인쇄된 건지도 모르지만요.'라고 저자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보는 깐깐함을 보인다. 즉, 줄리언 반스의 글에는 요리하는 사람들이 많이들 겪는 상황이 보편적으로 녹아있다.
바질 페스토를 만들기 위해 말린 바질을 쓰는 경우(조리법 오독), 어쩐지 요리책에 사진이 실린 요리부터 해 보고 싶어 하는 경우(나는 제이미 올리버가 아니다), 어쩐지 자애로운 안주인이 여전히 어디선가 린넨 수건을 표백하고 집안을 어루만질 것 같은 환상(비턴 여사의 살림 교본), 감정이 부엌을 압도하는 경우(줄리언 반스가 요리하는 동안 팻에게 연정을 드러내는 제독의 목소리가 들려버렸다), 'fresh'란 낱말이 들어간 재료가 더 좋을 것 같은 착각(프레쉬 파스타와 슈퍼마켓에 파는 건면 파스타가 용도에 따라 다를 뿐, 어느 한쪽이 낫다는 게 아니다)......이런 환상, 착각, 경우의 수, 오독의 바다를 지나 독자가 마주치는 저녁 식탁의 한 장면.
...그리고 언제든 포미안의 암시대로 애피타이저나 디저트, 또는 둘 다 케이터링 서비스나 제과점에서 쓰면 된다. 프랑스에서는 그런 걸 예사로 여긴다. 이제는 영국에서도 다양한 애피타이저와 그럴듯한 과일 타르트를 사는 게 비교적 용이하므로, 그렇게 안 할 이유가 없다. 이 문제를 이렇게도 논할 수 있다. 손님들이 오기 직전까지 노예처럼 일해서 지친 주인, 그리고 지극히 분별있는 지름길을 택하고 생기 넘치는 주인. 당신이라면 그중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물론 그러려면 우리는 잔존하는 청교도 정신을 극복해야 한다. 상점에서 산 것을 우리가 만든 것처럼 보이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속임수라는 생각을 억제해야 한다. 한편 그걸 우리가 만든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그건 그저 속임수일 뿐이다.
이쯤 되면 인용과 샘플링의 차이가 주방에서 크로스오버하는 상황이 떠오르는데, 언젠가 생업으로 타르트를 만들던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케이터링 주문을 받았는데, 너무 예쁘게 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고. 열 명 분량의 디저트로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제철 과일로 적당히 못생기되 성의 있어 보이는 타르트를 주문하는 마음이 바로 저런 것이리라. 샘플링과 인용을 살짝 접어 나빌레라....줄리언 반스도 그러했다. 그는 직접 애피타이저, 디저트를 만들고 메인 요리는 델리에서 포리치니 라자냐를 본인의 집 식기를 가져다주고 당일 그 식기에 받아온다. 요리사의 스트레스 없는 좋은 저녁을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첫 번째 코스를 두고 뭐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좀 분하다). 디저트도 마찬가지였다(괘씸한 것들). 그러나 라자냐를 말할 때는 모두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이 라자냐 맛이 기가 막힌데!"
"다행이군." 내 대답에 흔들림은 없었다. 그것으로 무사히 넘어간 듯했다.
그러고는 초대로 왔던 한 손님이 그에게 조리법을 묻고는, '실제 해보았는데 자네가 만든 것보다 훨씬 맛이 없더군'이라고 소식을 전한다. 우리 인생의 엑스 팩터는 이런 게 아닐까. 실상과 다른 요리, 디너 파티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저녁 초대, 요리책들이 보여주는 환상, 레스토랑은 집이 될 수 없다는 사실 같은 것.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은 오늘도 맛집을 찾겠지만, 우리 중 일부는 요리책을 '판타지' 장르로 분류하지 않고 '라이프, 리빙' 장르라고 생각하며 영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 도움을 받기 위해서 뒤적이고, 장을 보고, 주방의 조리대 앞에 설 것이다.
그리고는 요리책의 사진과 내가 만든 요리가 런웨이 모델이 입은 옷과 내가 입은 옷 태 만큼이나 다르다 해도 또 요리책을 뒤적일 것이다. 살다보면 자기만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몇가지 요리법 정도는 숙지하고 있는 것, 그리고 주방이 열악하다 해도(난 내 오븐이 마음에 안 들어서 내다버리고 싶다) 그 또한 아래 같은 마음으로 대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줄리언 반스의 'hand to mouth'.
꿈이란 원래 다 그렇다. 나는 아마 코르뉘 가스레인지는 커녕 내게 확실히 필요한 보조 오븐도 갖지 못할 것이다. 그가 요리를 해주는 그녀 역시 가끔 열망하는 장작 오븐을 갖지 못할 것이다. 부엌에서는 또 무언가 소소한 문제가 계속 생길 것이다. 싱크대 배수구가 막히고, 그 아주 기발한 듯해도 바보 같은 구석 찬장의 문이 빙 돌아 열릴 때 뒤쪽에 놓인 갖가지 물건들이-다행히 주로 과일 티백이-여전히 계속 떨어져도 몇 달 지나도록 사라진 것도 모를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점들을 요리에 들이는 노력에 대한 넓은 의미의 은유로 여기도록 해보겠다. 요리는 있는 것(주방 설비, 재료, 솜씨 수준)을 가지고 때우는 것이다. 그것은 작은 성공 하나하나가 가급적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고 실수도 할 수 있는 하나의 절차다. 만일 실제로 꿈의 부엌을 갖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보자. 우리가 하는 요리는 그런 부엌에 걸맞아야 할 테니, 그 가중되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하겠는가. 요리를 망쳐도 예의 그 모든 확실한 변명거리에 의지할 길이 없는 것이다. 최소한 지금 이 상태라면, 데이비드 여사 덕분에 새로 발견한 변명거리를 활용할 수 있다. "요리가 생각대로 안 나와서 이거 참 어떡하지. 어떤 멍청한 인간이 냉장고를 가스레인지에 딱 붙여놔서 말이야."
자, 이제 이 책을 다 읽었으니 난 오늘도 텃밭의 토마토, 바질, 딸기, 호박, 당근, 옥수수, 양파에 물과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을 것이다. 그러고는 일찍 수확한 꼬마 딸기와 벌꿀 향이 나는 밀맥주를 마시며 저녁 메뉴를 생각해 볼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언젠가 마주했던 쉐프의 어느 레스토랑을 떠올리며 내 부엌에 요리책과 함께 서 보기. 적절한 작업지시가 없어 양파로 하느님을 찾게 만든 사람도 모름지기 먹어야 하니까.
이 책은 줄리언 반스가 요리의 신에게 보내는 조그만 쪽지, 요리책을 읽는 독자에게 띄우는 메시지. 다 읽고 나면 부엌의 요리책을 다시 들춰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수필이다.
그날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