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나날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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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끊임없이 분위기를 띄우려 하고, 다른 사람들이 웃는 모습을 보며 안심하는 걸까.





살다보면 여러 번 바뀌는 날씨를 보기 마련이다. 어떤 날은 내가 버젓이 있는데 은근슬쩍 내 옆에 섰다가 슬슬슬 새치기하는 엑스엑스를 보기도 하고, 어떤 날은 마트 냉장고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그 앞으로 쓱 지나가는 사람이 '실례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거대한 사건을 제외하면, 사람의 일생은 작은 습관과 그가 제어할 수 없는 타인들의 예측할 수 없는 날씨로 이루어졌다. 




어떤 순간의 서늘함과 후덥지근함,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작은 날씨. 어떤 구름 뒤에 해가 있을지는 모르니까 그런다는 것을 깨달은 다음부터 나는 더 가만해졌던 것 같다. 예측할 수 없는 날씨를 생각하는 순간, 그냥 그렇게 물 밑으로 가라앉아버렸을 사건이 수면 위로 떠 오르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가만한 나날'은 보여준다. 




오랜만에 소설을 읽는 재미와 소설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마음을 느끼게 해준 소설집. 




1987년 목포 출생, 국어국문학과, 서사창작, 제 9회 젊은작가상, 이런 글귀가 책날개에 적혀있다. 그리고 넘기면 지하철을 갈아타고 약속 장소로 가는 연승의 초조한 기색, 그런 그를 바라보는 여자친구 진아의 얼굴 가득한 물음표가 보인다. 그들은 연승이 몹시 존경하는 선배를 만나러 가는데, 연승은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이제 막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 몇편의 작품, 공모전 출품, 그러다 들어간 대형 할인점 체인의 유통 분야, 그러다 그는 이제 영화를 만들려고 하고, 그보다 먼저 다큐 작업을 하는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려 한다. 

작가의 시선은 이들이 곧 만나게 되는 이상하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딱히 예상했다고 말하기도 힘든 선배 부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연승의 여자친구 진아도, 중한 선배를 좋아하는 연승도 예견하지 못했던 모습이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앉을 곳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조그만 공간, 너무나도 작고 천장마저 낮은데 그곳에서 태어난 아기 이야기에서부터 산부인과 이야기 같은 것, 요컨대 제각기 모두가 처음부터 과녁을 맞출 생각이라고는 없이 던져진 화살들같이 같은 지점을 통과하는 상황, 혹은 마음속에서는 알레르기가 올라오는데 하필 마지막으로 다녀온 곳이 뷔페여서 대체 무슨 음식에 내가 이러나, 말하기도 뭣한 상황. 친구와 약속을 잡아놓고서도 내심 '이 친구가 오늘 일이 있어서 못만난다고 문자 한 통 보내줬으면'하고 생각하며 외출 준비를 하는 순간.





 이런 순간의 물밑 흐름을 김세희는 잡아낸다. 그리고 이 작가의 단편을 읽다 보면, 세상에 소설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잡아채거나 가르치거나 막아서지 않는 글씨들. 그런 다행스러움은 표제작 '가만한 나날들'에서 담담하고 조용하게 드러난다. 





첫 출근을 앞둔 일요일, 나는 대학로에서 우연히 재화 언니를 만났다. 구름 끼고 쌀쌀한 바람이 불던 오후였다. 그때 스물여섯이던 나는 출근을 앞두고 마음의 준비를 한답시고 종일 원룸에 혼자 있다가, 괜히 잡생각만 가득해지고 점점 압박감이 들어서 집 밖으로 나갔다. 마로니에 공원 쪽으로 좀 걷다가 아이쇼핑을 할까 싶었다. 밤에는 엄마와 통화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지.




이 스물여섯의 '나'는 블로그 마케팅으로 제품 홍보를 하는 회사에 입사하여 가상의 인물 '채털리 부인'을 만들어 블로그를 꾸민다. 첫 출근을 하며 마음 속으로 재화 언니가 말해준 것처럼 '나는 프로다'라는 말을 주술처럼 되내이던 '나'는 가상의 채털리 부인이 되어 열심히 성과를 자기 눈으로 확인해간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개인 경험은 아주 생생하게 구체적인데, 이러한 구체성은 김세희 작가의 모든 단편 전반에 나타나 있다. 





주민등록번호도 있고, 금요일 밤이면 편의점에서 맥주 몇 캔을 사와 영화를 보며 마시고, 누군가의 집을 방문할 때면 딸기와 롤 케이크를 사서 가는 그런 사람들. 김세희의 소설 속에는 멀리 있는 엄마의 잔소리에 넌더리를 내는 원희(현기증)가 있고, 저 아이가 저런 모습이었나 싶어 남자친구를 바라보는 진아(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거야)가 있다. 첫직장에서 사수로부터 폴더를 만드는 법, 다이어리에 그날그날의 업무를 기록하는 법까지 배우던 선화(드림팀)가 있고, 처음 가본 동네에서 거대한 전기장판을 옆에 놓고 낮에 맥주를 마시는 루미(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 때)가 있다. 



 

이 여자들은 자기가 직접 화자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타인의 눈을 통해 수면 위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는 이 여자들의 공통된 모습은 버거운 공기에 숨을 참다가도 가볍게 숨을 틔울 줄 아는, 이제 막 자라 어미 새의 둥지를 떠나는 어른의 모습이다. 거울을 바라보며 자기가 보는 것이 거울 표면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사람의 모습, 한마디로 부끄러움을 배워나가고 이별을 예감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할 줄 아는 여자의 모습. 이렇게 말하면 별거 아닌 거 같지만 사실 오랜 시간 한국 소설 속의 여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그려졌던가를 생각하면, 조경란과 정이현의 인물들을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신선함이 다시금 느껴진다. 





어떤 종류의 경험은 소설로밖에 말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신선함이 순간의 경쾌함으로 그치지 않는 동시에 개인의 경험을 넘어 보편적인 묵직한 잔향을 만들어내는 것은 작가의 균형 감각이다. 한 세계에서 일어난 어떤 거대한 사건 앞에서, 그 사건과 개인의 경험을 이야기할 때의 예리한 날 선 감각, 균형을 잡는 힘. 브레이크를 적절히 사용하면서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놓치지 않는 흐름을 보노라면 소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만한 나날' 속의 경진과 채털리 부인의 목소리 같은 것이.





채털리 부인은 신생아부터 6세까지 사용가능한 '3단계로 변형되는 프리미엄 토들러 침대'에 아기를 재우고, 토요일 밤에는 일본에서 수입한 '개 샴푸계의 샤넬' 제품으로 개를 목욕시켰다.

...

리뷰 업무를 하느라 하루를 다 보낸 날에는 저녁을 먹고 사무실에 남아 일상 게시글을 작성했다. 개인 블로그로 보이기 위해 일상적인 내용을 담은 글을 올려야 했고, 직원들은 가족과 친척들, 그 반려동물들 사진까지 활용했다. 이웃 수를 유지하려면 이웃을 맺은 블로그를 방문해 댓글도 남겨야 했다. 




라식수술, 치아교정 광고를 교묘히 허위로 만든 블로그에 거짓으로 작성하며 경진은 잠시 이래도 될지 망설이기도 하지만 이내 그는 자신의 결과물에 만족하고, 성취감을 느끼고, 나아가서는 일을 못 해서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나가는 예린을 살짝 깔보기도 한다. 한 사람을 만들어나가고 채우는 작은 계단들이 있다면, 경진의 걸음은 계단 어느 즈음에서 층계참을 지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던 순간 이런 브레이크가 걸린다.




블로그 이웃이라는 여자였는데, 그 여자는 자신을 B기업의 뿌리는 살균제 피해자라고 소개했다. 두 아이 중 갓난아기를 잃었고, 다섯 살 아이는 폐가 손상돼 평생 산소 호스를 끼고 살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이것이 B기업의 뿌리는 살균제 '뽀송이' 때문이라는, 그 안에 포함된 독성 물질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채털리 부인님이 올린 후기를 보고 구매해서 쓰기 시작했거든요. 날마다 사용한다고 했는데 괜찮으신지......아무 일 없으시길 바라지만 혹시나 무슨 일이 있었다면 이쪽으로 연락 주세요.





경진의 엑셀러레이터가 잠시 멈추고 브레이크를 밟게 되는 순간, 그 멈춤에 스스로 답하는 순간, 그리고 내린 첫눈의 대목은 소설을 읽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사건이 일어나고, 그 시간을 통과하고, 그것을 인정한 다음 느끼는 죄책감과 부끄러움. 이러한 부끄러움이 사회의 경험과 개인의 이야기로 겹쳐질 때, 오르한 파묵이 말한 '서로 어긋나는 것을 동시에 바라보는 능력'이 빚어내는 소설 읽기가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나의 첫 직장, 나는 그곳에서 26개월간 일했다. 스물여섯 봄부터 스물여덟 여름 무렵까지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얼굴에 확 와 닿던 건조한 공기며 흰 책상들이 놓여 있던 모습이 선명하다. 하지만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은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 어쩌다 첫 회사가 화제에 오를 때면, 작은 광고대행사에 다녔다고만 대답한다.

 하지 않는 말들은 그것 말고도 또 있다. 별것 아니지만, 이를테면 이런 것. 그곳을 나온 이후 나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책장에 꽂혀 있으나 어쩐지 펼쳐 볼 마음이 일지 않는책. 나는 어디에서도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그런 사람. 0과 1 이후의 진심을 보았던 사람. 엄중한 회초리의 사설이 아닌 경진 개인의 경험으로 회자하는 어떤 사건을 바라보는 독자. 날씨는 내 옆 사람 탓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버스 정류장에서, 마트나 백화점 앞에서, 예측할 수 없었던 날씨 때문에 공기가 후덥지근하네, 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아주 준엄하게 모든 사건의 시비를 가릴거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김세희의 단편 묶음은 독자에게 어떠한 결심을 하게 만들지 않고 그 자체의 구조 안에서 의문을 가지게끔 만든다. 비슷한 얼굴들 속 다른 얼굴이 보이게끔 하는 작품집이다. 




-따옴표 글은 책속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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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9-03-23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셨어요. 좀 더 자주 볼 수 있기를... 쟌느님의 페이퍼때문에라도 이 책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맞아요. 말씀처럼 ˝어떤 경험은 소설로밖에˝ 말할 수 없는 그런 게 읽어서 비로소 정리되고 이해되는 순간들이 있더라고요.

Jeanne_Hebuterne 2019-03-24 06:04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너무 오랜만에 알라딘 서재에 와서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기분이었는데 블랑카 님 이미지를 보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너무너무 반가워서요!!
이 책은 뭔가 쎄하고 꽁기한데 말하면 내가 소인배같아보이고..근데 기분은 또 그게 아니고 그런 포인트를 너무 잘 짚어내서 읽다가 그 생생함에 놀랐어요. 결국, 시인과 소설가는 더 잘 느끼는 사람들인 것 같아요. 읽다가 정이현의 삼풍 백화점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잘 지내시지요? 새해엔 서재에서더 자주 보아요, 반가운 블랑카님^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