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슐러 K. 르 귄의 말 - 상상의 세계를 쌓아 올리는 SF 거장의 글쓰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어슐러 K. 르 귄.데이비드 네이먼 지음, 이수현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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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삶에는 어떤 순간이 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줄도 몰랐는데 잃어버렸고, 그것을 찾아내는 과정은 의외의 도움으로 쉽게 이루어지는 때. 그것은 흡사 있는 줄도 몰랐는데 갑자기 찾아내어 서로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과정. 정반합의 정-반의 과정과도 같다. 마치 뒷마당에서 작물을 가꾸다가 산책 나온 고양이를 사뿐히 내려놓는 순간 평화로이 마찬가지로 산책하던 조그만 뱀을 보고, 뱀이 놀라고 고양이도 놀라고 나도 놀라 우리 셋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그런.....나도 알고 싶지 않았으나 겪었던 그런 일들.





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용에게 잡아먹힐 때가 많지요.

-어슐러 K. 르 귄


 



 서재의 다락방님이 보내주신 어슐러 K. 르 귄의 말은 깔끔하고 담백하다. 

 먼저 있었던 일과 일어난 일, 그 후의 반동을 겪어낸 후 글과 함께 살아갔던 작가의 마지막 대담집인데, 이 조용한 목소리를 읽노라면......일타강사의 빈틈없는 수학 풀이를 보는 느낌이랄까. 헤매지 않고 깔끔하다. 단정하고 올곧다. 적당히 기댈 만큼의 여지를 주는데 물론 한국어로 번역된 낱말들이지만 나는 그가 쓴 말들을 통해 아주 조금은 발돋움하는 느낌이 들곤 했다. 

 언어는 기이한 것이라든가 형식을 고민하고 문해력을 생각한다든지 포르투갈어로 글을 쓴 주제 사라마구에 대해 그건 일종의 지옥살이라는 말을 덧붙인다든지. 





 그 덧붙임 자체가 어쩌면 이 책의 정체성이 아닐까. 2019년 발간된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가 파드 이야기,미국 문학 시장, 동물을 먹는다는 것, 여성, 서사적 재능, 인종 문제를 다룬 범위가 넓은 책이었다면 이 책은 범위를 좁혀 글쓰기에 관한 데이비드 네이먼과의 대담집이다. 서로 마주하여 주고받는 말들. 이 대화 속에서 네이선의 목소리는 엇나가지 않는 길잡이처럼 어떤 방향을 제시하되 나서지 않고, 어슐러 K. 르 귄의 답은 열려있으되 자리배치를 두 번 하지 않아도 될만큼 정리된 생각을 담았다. 그리고 이 질문과 대답은 단 하나의 수식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대신 수많은 텍스트와 배경을 참조하는데, 이를테면 문학의 리듬감을 이야기할 때는 버지니아 울프와 톨킨을, 영어 사용에 있어서는 조지 오웰을, SF를 이야기할 때는 마거릿 애트우드가 그의 말 속에 떠올랐다 사라진다. 



  '산문에서 길고 섬세한 리듬을 사용하는 놀라운 실사례'라고 언급한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를 읽노라면 르 귄이 말하는 글의 소리, 올바른 리듬, 문장이 깔끔하게 이어지는 경험, 자신이 쓴 글에서 울리는 소리와 그 글의 작용이 어떤 것인가, 아스라이 손에 잡힐 것만 같다.

 그런데  '등대로'가 대체 어떤 소설이었던가. 3부 구성, 램지 가족이 등대로 가는 이야기, 줄거리를 거칠게 요약할 때마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게끔 했던, 그 흐름에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 펼쳤다가는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람?'하고 초조하게, 그러나 느리게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는 소설. 

 그러나 반대로, 어느 대목을 인용하여도 그 자체로 완전한 소설 또한 바로, 이 작품이다. 이 책 속에서 인용된 부분 또한 마치 하나의 완결된 산문처럼 산뜻하며, 프랙탈의 본보기로 삼아도 될 듯하다. '등대로'의 구석구석을 떠올려보다 다시금 돌아온 르 귄의 대담은 글쓰기를 넘어 글 읽기의 능력은 어떻게 쌓이는지를 보여주는 전문이다. 






 누군가가 쓰면 누군가는 읽는 법. 한때 나는 독자로서의 문해력을 폄하한 적이 있으나 어쩌면 이렇게나 출판물이 판촉물같이 나부끼고 모두가 많이 쓰는 시대에 최대한 적게 쓰는 삶을 경험 중이다. 일인칭과 현재시제와 부사어의 개미지옥을 넘나들다 읽게 되는 이 책은, 어쩌면 밋밋해 보일 수도 있다. 소설, 시, 논픽션에 대한 글. 글쓰기에 관한 생각.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 보면, 역사상 모든 개인이 이렇게 많은 글을 쓴 시대가 있었나 싶을만큼 개인저작이 많은 이 시대만큼 맞춤법과 단어의 용례, 적확한 사용이 이렇게도 무시당하는 시대가 또 있었던가. 이 대담집이 수상해 보이기까지 하는 것은, 이전 세대는 관객이 사진 작품을 감상할 때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작품을 받아들이는 오류인 푼크툼과 사회적으로 공통된 느낌을 갖는 것, 작가가 의도한 바를 관객이 작가와 동일하게 느끼는 스투디움 정도를 생각했다면 이제 우리는 뒤늦게나마 문해력을, 문장의 도해를 들추어 보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짧은 글 '사용 설명서'에서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문해력은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여겨집니다. 

 

 글쎄요, 어디 다른 나라라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이 나라에서는 아닙니다. 미국에서 상상력이란 보통 TV가 고장났을 때나 쓸모 있을지 모르는 뭔가로 간주되거든요. 시와 희곡은 실제 정치와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소설은 학생과 주부, 그리고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읽는 겁니다. 판타지는 어린 아이와 모자란 사람들이나 보는 것이고요. 문해력이란 사용 설명서를 읽을 수 있다는 거랍니다! 저는 상상력이 인류가 가진 가장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마주 보는 엄지의 유용성을 넘어설 정도죠. 저는 엄지손가락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지만, 상상력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동물과 SF가 아이들의 전유물이 된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마치 한 세기가 지난 듯하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특정 시기가 존재하는 행성에 관한 SF를 쓴 이 작가는, 파드의 묘생 일기라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고양이 파드의 눈으로 본 세계를 그린 적이 있지 않았던가. 이 대담집에서 그는 '제가 파드를 완전히 인간 취급했어요. 하지만 식민주의 같은 짓은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제가 파드를 그냥 마음대로 이용하는 게 아니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아, 이 짧은 대답에 얼마나 많은 것이 깔끔하게 담겨있는지. 




 일찍이 독일 낭만주의가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에서 꽃피었고 일본의 근대문학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계기로 시작되었다면(이 작품 당선을 시작으로 소세키의 작가 생활을 시작했으니 계기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슐러 K. 르 귄의 고양이 파드 자서전은 본인이 바라본 고양이의 감정이나 추측해볼 수 있는 부분을 타인과 함께 나누어보기 위한 것이었으니, 경로 이탈이 아닌 경로 재탐색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여담이지만  이 작가의 타계 당시 구글의 수많은 연관검색어가 '파드 입양', '고양이 파드는 어디로 갔나요', '파드 누가 키워요'(정답은 딸이 키운다, 입니다)였을 정도이니 실제 감정을 나눈다는 것은, 지구상에 종이라고는 인간밖에 없다는 듯한 이 행성에서 자신은 본 적도 없는 다른 종을 걱정하게 되는 도시 전설같은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다른 뭔가, 틀림없이 인간이고 감정적으로 대단히 이해할 만하지만 정말 다른 뭔가와 접촉했다는 감각이야말로 소설이 해주는 위대한 일 중 하나죠.

-책속에서


 

 

 이 다정한 대담집을 이토록 처음에는 가볍게,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묵직한 마음으로 읽게 되는 것은, 어쩌면 내 주변의 그 많은 활자들 중 쓸모 있는 것은 '마침내' 몇 가지 안 되지 않는가, 하는 자조적인 거울 보기 같은 마음이 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글을 읽는 사람이 되었으나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시궁창에서도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겨왔으나 어느 순간, 관성처럼 상상력을 깎아내리게 된 순간, 적절한 대담을 알맞은 때에 읽게 되어 다행이야, 라는 생각을 했다. 

 소설만 읽거나, 시만 읽거나 논픽션만 읽기란 얼마나 쉬운가. 그리고 어슐러 K. 르 귄이 한탄처럼 말했듯이 SF는 한 권도 읽지 않고 폄훼하기도 얼마나 쉬운가. 지금의 독자는 간행물이 쏟아지는 이 시기에 더 좋은 작품을 골라 읽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책장을 덮으며 다시금 떠올려 본다. 나도 모르게 잃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책 읽기의 의무감을 다시금 손에 쥐여준 책. 우연한 기회에 나는 잠시 잃어버렸던 줄도 몰랐던, 이야기를 경청하고 타인을 향해 상상력을 발휘하는 능력의 중요함을 일깨워준 따뜻한 대담집. 독서의 타성에 젖었다면 읽어볼 만한 책이다.  






덧붙이기 1

-제가 가장 좋아하는 SF 작가는 가스오 이시구로입니다. 


덧붙이기 2

-좋은 책을 보내주신 다락방님, 고마워요!


덧붙이기 3

 


-파드는 잘 지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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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1-3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쟌 님의 글도 반갑고, 뜻밖의 파드의 소식도 반갑네요.
:)

Jeanne_Hebuterne 2023-02-01 04:57   좋아요 0 | URL
3년만인가요? 비번에서부터 서재로 돌아오는 길이 멀었습니다. 아이패드 지문인식 없이 내가 뭘 했을까! 싶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