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을 다시 겪는 열쇠는 시간이 지난 다음의 복기에 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우리는 그 사건이 어떻게 사라졌고, 무엇이 남았으며, 무엇이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는지를 알게 된다.
음악에도 같은 경우가 있는데, 쇼팽을 이해하는 중요한 포인트는 '무엇을 느꼈는가'가 아니라 '그 감정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남아있는가'를 되짚어 보는 데에 있다.
내가, 혹은 누군가가 느꼈을 사랑, 아쉬움, 애닯음, 아슬아슬함. 천가지의 흔들림, 만 걸음의 발자국. 맑고 푸른 가을의 아침 조용히 흔들리는 나뭇가지,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손끝, 커피를 마시던 순간의 움직임.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이제 사랑은 지나갔고 기억이 남았다. 흔들렸으나 동경했고 사랑했지만 말하지 못한 순간도 있었다. 아주 멀리, 또 멀리 각자의 실크로드를 발견하던 순간. 그 먼 시간을 찰나의 거리로 바꾸는 젊음, 그것이 사라진 지금.
겨울이 긴 곳에 살아요. 그래서 눈이 많이 내리죠. 커피를 더는 마시지 않고 많이 걸어요. 어떻게 남거나 사라졌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쇼팽을 듣게 되는 순간이 왔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남았고 무엇이 사라졌는지, 사라졌다 생각한 것마저 내가 어떻게 다시 돌아오는지, 그렇게 사라지고 남고 되돌아오는 시간이 쇼팽에게는 있다. 낙엽처럼 떨어지고 눈송이처럼 쌓이는 시간.
쇼팽의 음악은 직접화법을 쓰지 않는다. 감정을 '바로 이것입니다'라고 지목하지 않고 그것이 시간 속에서 남고 변형될 여지를 남기는 음악.
무릇 고전음악의 많은 경우가 그렇겠으나 유달리 쇼팽이 연주자에 따라 다른 색채를 띠는 듯한 인상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리히터의 아르페지오는 강력한 물성을 만들어내지만 지금 이야기하고픈 임윤찬의 아르페지오는 계속 흐르는 흐름을 이끌어낸다. 즉, 연주자는 글로 쓰여진 음악을 읽는 자가 아니라 시간과 기억의 거리를 이끌어내는 사람이다.
그 시간과 기억의 거리는, 리히터의 손끝에서는 강력한 물성이 된다. 특히 겨울바람. Op. 25. No.11 연주를 듣자면...... 어떤 청음자(=나)에게는 꽤 강력한 기준점이 된 연주인데, 강력하고 무겁고 거칠다. 겨울폭풍이 인간을 덮쳐오듯 속수무책으로 리히터가 만들어낸 음은 양감을 가졌고, 양감이라기보다는 그 질감이 충돌하고, 부딪히고, 마침내 폭풍처럼 덮쳐오는 느낌.
소리가 얼마나 큰지, 아니면 세게 치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내게는 오히려 음을 툭 놓아버리는 듯한 감각으로 들린다. 한마디로 소리에게 어느 정도의 존재감을 가지게 할지, 그 음을 공간에 어떻게 놓아둘지를 결정하는 방식이 리히터가 골몰한 문제 중 하나 아니었을까. 음들의 연결이 점처럼 느껴지지 않고 거대한 덩어리처럼 다가오는 순간. 느리거나 빠름의 문제가 아니라 겨울바람의 도입부부터 아예 무언가가 건반을 빠르게 훑고 지나가, 음의 충돌이 이루어지는 느낌이다. 음과 음이 연결되어 서로 밀고 들어가는, 매끄럽지 않은 듯 하지만 역설적으로 물리적인 충돌 없이도 각 음을 가볍게 증발시키지 않는 느낌. 바로 이런 종류의 충돌이야말로 리히터의 겨울 바람의 특징 아닐까. 그의 피아노에서, 감정은 육체가 된다. 건반과 타격, 중량과 중력, 긴장과 충돌이 감정과 분리되지 않아 갖게 되는 물성.
오랜 기준점을 고수해 오다 들은 임윤찬의 겨울바람은, 듣는 순간 이 음악을 어떻게 들어야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된 지점이 왔음을 느꼈다. 물론 악보에 많은 정보가 있으나, 연주자가 결정해야 하는 영역 또한 많은데 이를테면 루바토, 프레이징, 템포와 탄력, 악센트, 시간의 흐름을 읽는 능력까지를 감안한다면 임윤찬의 연주는 리히터의 손수건까지 외우던 청자(역시 나)에게는 꽤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오류 아닐까. 이를테면 같은 곡을 연주한다 해서 모두 같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루빈슈타인의 겨울바람은 오히려 따뜻하지 않았던가. 흡사 김서린 창밖에는 바람이 모질게 불고, 눈폭풍이 내릴지라도 창 안의 공기는 습기를 먹은 따스함이 있고 마룻바닥은 차갑되 따뜻한 차와 스콘이 있는 듯한 풍경.
정작 내가 임윤찬의 연주에 당황한 것은, 임윤찬의 연주가 리히터와 달라서라기보다는 내가 오랫동안 안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낯설어 보여서였다. 오랫동안 리히터의 연주를 내가 아는 이 곡의 얼굴이라 여겼었다. 그러나 임윤찬의 피아노에서 같은 음악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허공에서 떠다닐 때.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그 얼굴은 쇼팽이었을까, 리히터였을까, 아니면 오랜시간 내 기억이 쌓아온 쇼팽이었을까.
임윤찬의 연주에는 종종 공중에서 음들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음이 움직이고, 그 움직임이 방향과 흐름을 만들어서 하나의 연주곡이 완결되는 지점에 이르르면 결국 알게 된다. 이 젊은 연주자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무슨 이야기를 이 곡을 통해 하려 했을지. 테크닉이 생각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게 한 흔적이 보인다. 이 고민의 자취는 겨울바람 한 곡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 곡이 수록된 데카 음반 전체를 아우르는 그 거리감과 집중력. 각 연습곡이 이어진다기 보다는 하나하나의 풍경 스냅처럼 보이는 음반.
쇼팽의 음악에서는 슬픔이 고통과 같지 않고 고통이라 하여 늘 슬픈 것은 아니다. 수천 개의 기억의 복기가 아닌, 그 기억 속에서 길잃기와도 같은 방향이다.
임윤찬의 연주가 다른 연주자들과 달랐던 점이 바로 내가 당황한 지점이었다. 곧, 거칠게 말하자면 처음에는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였다가 두 번 들었을 때엔 얕은 것이 아닌데...였었고 재차 또 들었을 때에는 중력에 덜 붙잡힌 느낌. 바로 이 느낌이 나의 개인적인 기준점에서 훅 떨어진 부분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본다. 하나의 악보, 다른 음악이라면 왜 이렇게 많은 인간의 시간이 개입할 수 있는 것인가. 연주자마다 해석이 다르다, 라고 한다면 너무 게으른 방식의 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연주자의 개별성과 보편성을 본다면 어떨까. 우리는 각자 다르지만 누구나 무언가를 사랑하고, 잃고, 후회하거나 기뻐하고 두려워한다. 그 제각각의 닮음이 주는 구조에는 동일한 지점이 있다. 글과 음악이 만나는 바로 이 체크포인트. 원본의 경험을 다른 인간의 보편성으로 밀고 나아가는 사건. 요컨대 연주자는 자신의 삶으로 음악을 읽지만, 그 음악이 자신의 삶만 말하게 두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바로 이 지점이 쇼팽이 자주 연주되는 이유 아닐까. 누구든지, 다른 연주자들의 이 음악을 여러번 들어보면 알게될 것 같다. 쇼팽을 듣는다는 것은 이 작곡가의 작품을 듣는 데에서 출발해 결국 듣는 사람 각자가 몸으로 밀고 나아간 시간의 흔적을 확인하는 사건이 된다는 것을.
덧1
겨울바람을 중점적으로 들었지만 아, butterfly는 그 아름다움의 간극이 너무나도 커서 아찔할 정도이다. 무중력의 오른손, 전체적인 단단함. 그 고민의 흔적들.
덧2
아직도 계속 들을수록 다르게 느껴져서, 임윤찬의 연주에 대한 생각은 또다시 바뀔지도. 그러므로 이 글은 리뷰라기보다는 개인적으로 이 연주가 어떻게 들렸나, 하는 감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