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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까치글방 114
에리히 프롬 지음, 차경아 옮김 / 까치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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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p.52 – 대부분의 일상적 독서 시간은 소비의 양식, 즉 소유 양식으로 읽는 일로 허송되고 있다… 결말을 알았을 때, 그들은 마치 자신의 경험에서 그 결말을 찾아낸 것처럼 현실적으로 전체 스토리를 ‘소유’하는 것이다.


p.80 – 바실리우스에게 있어서 모든 재물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 있다. 그의 특성을 말해 주는 이런 질문이 있다. ‘다른 사람의 옷을 가져가는 사람은 도둑이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을 주지 않는 사람은 도둑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가?’

p.109 – 소유의 또 다른 기능은 ‘생존적 소유의 기능’이다. 인간존재는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물건을 소유하고, 보전하고, 손질하여 사용하는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체, 음식, 주거, 옷, 일용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도구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런 형태의 소유는 인간존재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생존적 소유라고 할 수 있다. 


p.122 –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전반적인 비판과 사회주의의 이상이 기초로 삼고 있는 개념은 인간의 능동성 자체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마비되므로 생의 모든 분야에서의 능동성을 회복함으로써 완전한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p.193 – 그러나 마르크스의 사항은 곧 왜곡되어 버렸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1백 년은 일찍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 발달의 절정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내놓았다. 자본주의의 절정기에 번졌던 반자본주의자들의 생각은, 만약 그것이 성공하려면 자본주의 정신으로 완전히 변형되었어야만 했다. 그것은 역사적인 필연성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p.146 – 거의 모든 종류의 행동과는 대조적으로 발기만은 거짓으로 꾸밀 수가 없다. 정신분석학자의 한 사람인 조지 그로데크는 남자는 결국 단 몇 분 동안만 남자일 뿐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어린아이라고 말하곤 했다. 


p.183 – 시장적 성격의 소유자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또 자신에 대해서도 깊은 애착이 없기 때문에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그리고 타인에 대한 관계가 아주 약하기 때문이다. … 사실 어느 누구도 시장적 성격과는 친밀하지 않고, 또 시장적 성격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도 가깝지 않다. 


p.214 – 건강한 사람을 위한 건강한 경제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한 첫번째 중요한 조치는 생산이 ‘건전한 소비’를 위하여 행해지도록 이끄는 것이다. …. 자유시장경제하에서는 소비자가 그들이 바라는 바를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선택적’인 생산을 할 필요가 없다는 반론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소비자가 그들에게 유익한 것만을 원한다는 가정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가정은 누가 보든 분명히 잘못되어 있다. 이러한 주장이 명백히 무시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소비자의 욕구는 생산자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상품간의 경쟁은 있지만 광고가 낳는 전체적인 효과는 소비욕을 자극시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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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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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로하다! 번아웃!


하루의 대부분이 피로하다! 아침에 눈 뜨기는 너무나 힘들고 사무실 나가면 무조건 커피로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정신 좀 차리고 일 좀 하려고 하면 점심시간. 점심 먹은 뒤 식곤증에 결국은 엎드려 잔다. 엎드려 자서 피곤한 상태로 밤까지 일하고 집에 오면 피곤하다. 하루 중 피로가 없는 시간대가 점심시간 직전 뿐이고 그 외의 시간은 항상 피로하다! 




그런데 이런 피로는 나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주변의 내 친구들도 아침 커피는 필수라고 하고 늦잠에 허덕이는 이들도 많다. 주말엔 정오가 넘도록 자는 경우도 부지기수라 한다. 체력적으로 가장 좋을 20대들도 이러한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특히 10대 학생들은 살인적인 학업시간 때문에 피로가 너무 과다하여 에너지 드링크, 총명탕 같은 건강을 해치는 것들이 인기라고 한다. 어린아이들부터 어른까지 전국민이 피로하다. 과거 그 어느 시기보다 물질적으로 편안 시기에 사는 우리들인데 대체 왜 이런 것일까. 세탁기, 청소기, 컴퓨터, 인터넷의 발달은 별다른 효과가 없는 것인가.



2. 


저자는 그것을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설명한다. 근대까지 우리를 지배해온 것은 규율사회 였다. ‘~해서는 안 된다’가 지배하는 사회로 금지, 규율, 규칙, 법이 중점적이 사회이다. 여기서 개개인은 규칙을 가진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을 달성하면 해방될 수 있었다. 빵 1,000개 생산으로 규칙으로 한 사회가 있다고 치면 1,000개 생산을 달성하는 순간 더 생산해도 되지만 목적을 달성했기에 쉬어도 되는 시기였다. 여기서 도태되는 이들은 광인과 범죄자로 추락한다.



그러다가 현대에 이르러 성과사회가 도래했다. ‘~이든 할 수 있다’는 모토로 각종 규제가 없다. 누구든지 열심히만 하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고 더 성공할 수 있다. 여기서 피 말리는 자기 채찍이 시작된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모두가 앞만 보고 전력질주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무의식 속에는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 있다고 한다. 그 열망의 한계를 없애 버리자 모두가 열성적으로 달려드는 것이다. 성과사회에서는 누구도 성과의 목표를 고정하지 않는다. 항상 더 많이, 더 크게, 더 좋은이다. 경쟁지표가 없다. 옛날에는 경쟁자가 타인이었기에 어느정도 비교라도 가능했는데 성과사회에서의 경쟁자는 ‘어제의 나’ 다. 자기 자신을 뛰어 넘기 위해 자신을 소비한다. 자신을 뛰어넘지 못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낙오자로 여겨 우울증 환자로 도태되고, 낙오되지 않기 위해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고 링거를 맞으며 일을 한다. 일이 잘못되면 그것은 개인의 잘못이다. 사회는 모든 자유를 주었는데 개인이 그것을 활용을 못한 게 된다. 다들 숨이 턱턱 막히지만 낙오되지 않기 위해 외국어를 공부하고, 인맥을 만든다.


나 역시 이런 성과사회의 주체이다. 나는 일년 중 어느 시점이 되면 올해 나는 뭐를 했나, 무엇을 성취했나 돌아본다. 작년의 나의 비해 무엇이 발전했나 따져보는데 항상 자책으로 끝난다. 이거 밖에 못했나, 뭐 별로 한 게 없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다행히 그렇게 자책하고 나면 빠르게 까먹고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자책할 행동들만 해서 우울증으로 심화되지는 않지만 나와 같은 자책들이 매일 지속되면 아마 우울증에 걸리지 않을까 싶다. 끝없는 자유가 우리를 이렇게 옥죄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새삼 놀랍다. 읽으면서 숨이 턱턱 막힌다.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좋다고만 생각했는데 이 생각 자체가 틀려버린 것이다. ‘어제의 나’도 이미 ‘완벽한 나’라고 생각하면 됐었는데 굳이 뛰어넘으려고 했던 것이 잘못되었다. 어느 쪽으로 더 나아져야 한다는 것인가. 그동안 뭔지도 모를 성과를 위해 달려온 나의 과거들이 아쉽다. 고생했다. 



3.


성과사회에서의 해결책으로 저자는 심심함을 역설한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모든 것을 가만히 내려놓고 심심함을 느끼는 것. 거기서 인간관계가 태어나고 창의성이 발휘된다. 거기서 인간성이 회복된다. 그동안 전력질주 해온 우리의 몸과 마음에게 잠시 쉴 틈을 주자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좀 더 개방적이게 되고 다른 이들의 피로를 볼 수 있고 우애의 분위기를 띨 수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갉아먹은 자신을 무료함을 느끼며 회복할 수 있다니. 흥미로우면서도 놀랍다. 요즘 읽은 책들 역시 쓸모 없는 시간, 심심함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데 저자 역시 그 점을 꿰뚫고 있다. 현대 사회가 진짜 과잉시대이기는 한가보다. 



4. <인상깊은 구절>


p.32 –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는 바 있다. 


p.66 –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그것은 그러니까 우리의 피로가 아니었고,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꼴이었다. 이런 분열적인 피로는 인간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p.72 –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p.121 – 오늘의 주체는 오히려 무한한 자유의 무게에 짓눌려 소진되고 있는 것이다. 피로는 성과주체의 만성질환이다. 





출처

1.도시의 엎드린 여성분

https://unsplash.com/search/sleep?photo=kEFrAFKY6Sk

2.혼자 공부하는 여성분

https://unsplash.com/search/study?photo=ckrUhWyTd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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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이 아름답다 범우사상신서 35
E.F.슈마허 지음 / 범우사 / 198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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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1) 인간의 본성은 비인간적인 기술과 조직 속에서 질식하고 쇠약해져 가고 있다. 

(2)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생활환경이 파괴되어 절반쯤 붕괴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3) 인간 경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재생이 불가능한 자원, 특히 화석원료 자원의 고갈이 눈앞에 보이고 있다. 


위의 세 가지는 슈마허가 말하는 지금 우리 시대의 위기입니다. 1973년에 쓰여질 당시의 세계를 진단한 것인데 2016년 지금의 상태를 보면 단 하나도 개선된 것이 없이 세 가지 모두 악화되어 있습니다. 사실 슈마허가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쓴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리나라는 저 세 가지 문제에 얽혀서 겨우 버티고 있는 것 같습니다. 


(1)대기업 위주의 갑을관계, 군대식 조직, 비인간적인 방식이라도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식의 마인드

(2) 전세게에서 도시화율이 가장 높아 불과 10년전만해도 여름 기온이 34도만 되어도 신문에 대서특필되던 것이 이제는 36도, 체감온도 40도 이상이 몇날며칠 지속되는 상황. 

(3) 화석원료중 가장 큰 비중인 석유가 우리나라는 고갈이 아니라 아예 없는데도 선진국들 중에서도 상위권의 소비율을 보이고 있는 상황


슈마허가 혀를 끌끌차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사실 책이 쓰여질 당시만 하더라도 기존의 경제체계가 많은 문제점들을 보이고 있었고 그래서 슈마허의 책이 주는 파급력은 상당히 강력했습니다. 많은 나라에서 그를 불러 자문을 구했고, 미국에서의 마지막 대중연설에서는 6만 여명의 청중을 불러모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 뿐이었고 거의 모든 나라들이 기존의 자본주의적 이기주의를 유지, 이후의 경제는 위기가 오면 겨우겨우 막아내는 식의 역사로 이어졌습니다. 모두가 슈마허의 작은기술이 옳고 그것이 앞으로 공존하며 살기 위한 해답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누구도 먼저 나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진국 기술의 자본대비 효율과 양적 풍요를 거절하기란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에게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민간단체들이 나서서 작은 기술의 중요성과 인간의 공존에 대해 외치고 있지만 힘이 부족한 듯 보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저를 포함한 일반인들의 시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비인간적인 방식에 반대하고 공기가 탁해지는 것에 걱정은 하면서도 결코 생각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에어컨은 계속틀고, 이 좁은 땅에서 자동차는 커야 제맛이고, 회사 내의 체계에 시간이 지날수록 적응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체제가 좋은 거다, 이게 정답이다 라는 마인드가 계속된다면 변화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조금씩만 바꿔도 더 좋은 세상이 올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가성비만 따진 상품 구매보다는 지역 기반의 상품, 자연 친화적인 음식 구매 등이 있을 것 같습니다.


<동네시장에서의 구매도 한걸음이지 않을까요!>




2.


'원조를 받던 국가에서 원조를 주는 국가로 변한 유일한 국가', '한강의 기적을 보여준 개도국들의 모범' 우리나라는 이런 평가를 많이 받아서 사실 우리나라가 많은 개발도상국들을 도와주는 데 열심히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노하우를 전달하여 그들을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선진기술을 바탕으로 발전하게 한다면 세계가 공존하는데 분명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니 우리나라는 그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깨닫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작은기술, 적정기술의 시기를 거치지 못했습니다. 전쟁 이후 선진국의 기술을 그대로 베껴 선진 기술을 우리 사회에 우겨넣었습니다. 그 과정속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들은 발전의 이름 아래, 독재의 힘으로 모두 무시, 덮어졌습니다. 가발, 신발 밑창을 만들던 국가가 갑자기 조선업, 철강업, 화학업의 국가로 전환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 정도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건 어쩌면 3저 호황과 같은 시대적 천운과 전쟁 이후 물질적으로 잘 살고 싶다는 국민들의 호응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래성을 쌓아올리듯 중간기술 없이 선진기술을 도입하여 불안불안한 경제성장이 이어져 왔습니다.


<잘 지은 모래성도 모래성일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 모래성의 밑부분이 스르르 흘러 내리고 있습니다. 조선업의 붕괴, 내수가 너무 부족한 경제, 후진국보다도 못한 일부 국민지수. 우리나라는 타국에게 노하우를 전해줄 때가 아닌 작은 기술을 잘 활용한 국가들을 벤치마킹해야 할 때입니다. 





3.


일전에 저의 꿈이 도서관을 많이 세우는 것이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게 해서 조금은 더 배려와 이해가 많은 사회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생긴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을 위한 내 마음속 전제는 그럴만한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면 그만큼 도서관을 더 많이, 더 좋게 세울 수 있으니 효과가 크겠구나라는 생각. 이 책을 읽고 나니 나의 꿈에서 사람들의 배려심과 이해심이 높아지는 것은 부수적인 것이고 결국 최대한 많은 도서관을 세우는 업적이 꿈의 핵심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슈마허가 지적은 물론 거대산업과 같은 거시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개인에 불과한 저의 꿈에도 모든것을 수치화하고 계량화하는 자본주의적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한 명이라도 독서를 통해 삶이 바뀌는 것이 진정한 목표가 되어야 했을텐데 그동안 '멋진 별장을 사야지~'  라는 물질적인 꿈과 다를 바 없는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멋진 도서관을 지어야지라는 물질적인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슈마허는 교육을 받은 인간은 두 가지 이데올로기 중 하나를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교육이 특권을 위한 프리패스로 간주된다는 이데올로기와 교육은 다른 이를 위한 봉사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떠맡은 의무라는 이데올로기. 대학교 4학년 막바지에 다다른 저로서는 2번째 이데올로기가 훨씬 더 좋아 보입니다. 운좋게 큰 어려움 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는데 이 배운 것을 남들을 위해,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쓸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도서관 세우기'라는 목표도 그런 마음에서 생긴 것 같습니다. 이제는 그런 목표를 조금은 더 비물질적으로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게 하기' 같은 걸로 바꾸어야 겠습니다.


<길거리에서 책읽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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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8-14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봤습니다..윙헤드님께서는 멋진 목표를 가지고 계시네요.. 카네기처럼 한국에서 아름다운 꿈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윙헤드 2016-08-14 16:4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카네기와 비견될 정도는 아니지만...ㅜㅜ 열심히 꿈을 키워나가야지요!! 겨울호랑이님 즐거운 일요일 오후 되세요~^^
 
소유냐 존재냐 까치글방 114
에리히 프롬 지음, 차경아 옮김 / 까치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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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고 싶은 것들이 많습니다. 신발장 가득차서 있던 신발도 버려야 하는 마당에 운동화를 사고 싶고, 7장도 넘어서 하루에 두 장씩 입지 않는 한 충분한 티셔츠를 또 사고 싶고, 음질의 차이도 모르면서 좋은 이어폰을 사고 싶고, 밤에 책도 안읽고 바로 자는데 멋있는 스탠드를 사고 싶고, 노트북 지금 것도 쌩쌩하게 돌아가는데 맥북을 사고 싶고, 가지고 있는 시계들이 먼지가 쌓여가는데 시계를 사고 싶고....그닥 필요없는 것들인데도 다 가지고 싶습니다. 나는 그동안 평소에 돈도 많이 안쓰고, 명품도 안사니까 일반인들처럼 욕심이 많지 않다, 현명하다 라고 스스로에 최면을 걸고 있었습니다. 





2.

그런데 에디히 프롬의 이 책을 절반도 읽기 전에 내가 얼마나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이였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단지 지금 가지고 있지 않았을 뿐, 수 많은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 온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볼때도 그사람의 존재가 아닌 무엇을 소유하고 있나로 은연중에 판단을 하고 있었고, 외제차나 명품을 걸치고 있으면 그걸 통해 사람을 판단하고는 했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소유에 집착하지 말자, 돈 버는 걸 최우선으로 두지 말자 등을 항상 유의하며 산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습니다. 에디히 프롬은 책을 통해 우리의 산업사회 구조 자체가 소유의 양식에 알맞는 구조였고, 우리는 이에 맞춰서 우리 자체도 소유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원래는 존재로써 서로를 존중했던 인간이었지만 이제는 학점으로, 지역으로, 나이로, 대학교로, 회사로 서로가 어떤 스펙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판단합니다. 우리나라가 이런 인간의 수치화? 분야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급이죠. 거기에 더해 프롬은 우리가 하는 말의 대부분도 소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나의', '우리의', '가지고 있는' 등등의 말들이 우리의 소유의식을 강화시키고 있는겁니다. 





3. 

그리고 나서 프롬은 의식의 전환을 주문합니다. 무엇이 잘 사는 것이냐에 대한 논의도 하지 않은채 누군가 만들어놓은 체제에 이끌려온 우리는 이제 생각을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중앙집권체제에서 지방분권체제로 변화, 쓸데없는 소유욕을 자극하는 광고의 축소화 등 구조적인 문제와 함께 중요하게 거론하는 것이 우리 일반인들의 의식 전환입니다. 


사회로 나가서 일을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소유의 시대에 파묻혀 버리게 될 터인데 이 책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잃지 않고 계속 마음 속에 품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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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행복철학
팀 필립스 지음, 정미현 옮김 / 빅북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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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계발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이라는 책은 읽기가 참 쉽다고 한다. 행복이라는 쉬우면서도 어려운 철학은 쉽게 풀어내어 유명한 책인데, 아쉽게도 도서관에서 대출 상태이기에 이 책을 대신 빌렸다. 러셀의 행복이론을 현대에 맞게 풀어 써본 것이라나. 본문에서 저자는 자기계발서를 비판하며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나에게는 이 책마저도 자기계발서라는 느낌을 받았다. 무엇무엇을 해라 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느낌을 받는 책이었다. 그러면서 궁금했다. 자기계발서의 기준이라는 것이 명확히 있는지. 서점에 가면 자기계발 분야가 딱 있고 제목들도 비슷, 내용도 비슷한 책들이 많다. 원하는 대로 사는 방법, 시간을 정리하는 법, 발표를 잘하는 법 등등. 나는 자기 계발 분야의 책은 선호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최근 북플에서 나의 독서통계를 보다가 놀랐다. 통계에 따르면 내가 15권의 자기계발 관련 책을 읽었다고 한다. 면면을 살펴보니 ‘열정에 기름붓기’, ‘20대, 창업으로 세상에 뛰어들어라’, ‘시크릿’, ‘즐거워야 내 일이다’ 등등 다시 생각해보니 자기계발서라고 봐도 될 책들이 있었던 반면,   ‘혼,창,통’, ‘인비저블’, ‘앨런 머스크, 대담한 도전’ 등등 내가 자기계발서라고 생각하지 않고 읽었던 책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혼란스러웠다. 그러면서 나는 왜 자기계발서를 선호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싫어서라는 답이 나왔다. 그런데, 사실 책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 들어가기 마련이고, 거기에 동의하냐 아니냐는 읽는 이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 사실이다. 만약 사회과학책에서 저자가 사회의 불합리한 제도를 수치로 비판하고 해결책을 제시했을 때, 내가 거기에 동조하고 그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자기계발서를 읽은 것이 되는 것인가? 내 스스로 사상의 계발을 이루어냈으니까? 이렇게 쓰다 보니 자기계발서도 마냥 나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껏 책도 별로 읽지 않은 내가 뭘 따지고 있냐는 탄식도 나온다. 최근 교보문고 상위 0.1% 독자의 베스트100이라는 기사가 나돌았는데, 상위 10위 안에 자기계발로 분류된 책이 3권 포함되어 있는데(‘하버드 새벽 4시 반’, ‘그림의 힘’, ‘혼자 있는 시간의 힘’) 모두 읽어봐야겠다. 자기계발서를 통해 하나라도 나의 계발을 이루어 낼 수 있다면 이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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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1-29 2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기계발서를 읽고 조금이라도 내용을 실천으로 옮긴다면 정말 칭찬해야 할 점입니다. 그런데 책만 잔뜩 읽고 변화할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 차라라 자기계발서를 안 읽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저는 실천력이 딸려서 자기계발서를 읽지 않습니다. ^^;;

윙헤드 2016-01-30 00:01   좋아요 0 | URL
저 역시 그러한데...작심삼일이라도 여러번 시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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