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록들을 몇 개 읽어 보았다. 안달해 하는 모습들. 영국에 오기 전이나 그 후나...-.- 에세이 쓴다고 낑낑 매는 모습을 되돌아 보며 안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기고만장한 자신감. 뭘 몰랐을 시절. 나는 지금 엄청난 벽 앞에서 떨고 있는데... 언어의 벽, 너무 오래 학교를 떠나 있었다는 자각, 내가 주로 공장 노동자였으므로 필연적으로 느끼게 되고 마는 문화적 괴리감, 한국도 아니고. 얼마 전 런던에 있는 한 대학에서 철학 강연을 하나 들었다. 나 답지 않게(?) 강의실을 둘러 보며 나 같은 사람(검은 머리를 한 유색 인종)을 찾게 되더라. 없더라. 얼굴에서 스마트함이 풍겨지는 잘 생긴 백인들 틈에서 나는 고작 강사의 말을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을지를 걱정하며 앉아 있었다. (다행히 주제가 아주 낯선 것이 아니었고, 또 프리젠테이션 도구를 활용한 강의였기 때문에 대강은 파악할 수 있었다. 강의 끝무렵에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려 가며 사유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연회 끝나고 열린 다과회에 참석할 배짱은 없었다...)

기고만장했던 시절의 기록들 중 하나엔, 이제 테마를 잡았으니 1년 정도 후에는 엄청나게 진보해 있겠지! 하는 대목이 있다. 그로부터 7, 8 개월이 지난 지금의 사정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 그렇게 지난 버린 시간의 크기가 내게 충격을 준다. 나는 전혀 진보하지 못했다. 나의 테마에 대해서든 다른 무엇에 대해서든. 아직 4 달 정도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나는 또 안달이라는 익숙한 옷을 껴 입을 것 같다. (정확히 일년 전 이맘 때쯤 나는 공장 생활을 그만 두었었다. 삶의 단계를 특정할 수 있는 날짜를 갖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인 것 같다. 그걸 측정의 도구로 쓸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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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철학적 문제가 앞에 던져졌을 때 우리가 보여야 할 첫 번째 반응은 냉소여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철학함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과도한 진지함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철학함에 있어 으뜸의 윤리는, 그러므로 으뜸의 유혹은 "정직함"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비트겐쉬타인의 말대로). 다시 말해 무의미한 문제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진지함을 유지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진지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말해 철학적으로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해 버린다. 무의미한 문제에 진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진지한 "척" 할 수 있을 뿐. 우리는 어떤 문제에도 "척" 할 수 있다.

비트겐쉬타인은 철학적 문제 따위는 존재치 않는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주장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나로서도 나름의 기준이 있다. 나는 그것을 나의 출신 배경(작년 이맘때까지 나는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으로 포장한다. 그러나 그 기준이 어떤 배타성을 뜻하는 것일 수는 없다. 배타성은 어떤 확연한 경계선이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누구나 아다시피 그러한 경계선은 존재치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철학적 문제 앞에서 보이는 냉소는, 역으로 우리가 철학적으로 진지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어 버린다. 

그것이 진정한 문제인 한 그것은 나를 다시 그 앞으로 불러 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냉소와 더불어 경외를 불러 일으킨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냉소가 없으면 그것은 진정한 철학적 문제가 아니다. 기억하라, 경외만이 존재하는 문제는 진정한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답들로부터 탐구를 시작한다. 함정은 질문이 "이것이"가 아니라 "이것이란"으로 되어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일차적인 답변들은 모두 기각될 운명이다. 아다시피 플라톤이 그의 대화들에서 한 일이 이것이다. 일상적인 답변들을 물리치고, 그럼으로써 문제가 무엇을 묻는 것인지를 명확히 해나가는 것. 그러나 대화는 언제나 철학적 막장, 철학적 혼란, 철학적 경련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후대의 소심한 주석가들은 철학은 해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것이라고 철학에 지치고 실망한 사람들을 위로한다. 

비트겐쉬타인은 플라톤의 질문의 사기성에 주목한다. 플라톤이 한 일은 단어를 일차적(즉,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사용에서 떼어내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일상적인 노동의 고역에서 면제된 무료한 지성이 창조해낸 고상한 공허다. 비트겐쉬타인의 공격은 가혹하고 파괴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트겐쉬타인을 우리의 전제 중 하나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논리는 나의 밖에서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의 사유들 중 하나로 존재한다. 나는 사유를 선택할 자유가 없다. 사유가 나를 선택한다. 나는 사유를 선택할 자유가 없다. 그 사유에 눈길을 보내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느 때고 그 사유는 나를 내적으로 분열시킬 것이다. 그 사유는 언제나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내가 그걸 좋아하든 말든. 내가 그걸 선택했다고, 혹은 배척했다고 믿든 말든.)

플라톤의 대화는 하나의 패러다임을 창시한다. 그것은 새로운 질문 방법을 창시한다. 동시에 그 질문에 적합한 답변의 형태를 선험적으로 제시한다. 플라톤의 대화란 그러한 새로운 교과에 맞게 학생들을 훈련시키는 내용이 전부다. 그리고 후대 사람들은 그 교과에 철학이라는 이름(피타고라스에게서 빌려온?)을 붙이고 가장 보편적인 학문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플라톤의 패러다임이 얼마나 보편적인가, 하는 것이다. 비트겐쉬타인은 그것의 보편성을 완전히 부정한 것처럼 보인다. 반면, 하이데거는 플라톤 철학의 지역성을 드러내면서 (플라톤적인 의미에서가 아닌,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을 구상(혹은 복원)해 내고자 하는 것 같다. (물론,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철학은 "구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리라.) 

플라톤 철학, 그러므로 서양 철학사 전체의 지역성을 드러내는 작업은 대단히 의미있는 프로젝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묻는 것은 성급한 짓일 것이다(예를 들어 하이데거 자신이 예비적 사유자라면 본 사유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어쨌거나 그 작업들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는 없을 것 같다.

어제 런던에 가는 데 아이폰을 충전해 놓지 않아 밧데리가 얼마 남지 않았었다. 예비로 들고갈 종이책으로 고른 것이 하이데거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였다. 독영 대역으로 분량이 작았고 행간이 넓었다. 예전에 한번 읽고 가볍게 던져 버렸던 책이다. 어제의 두 번째 독서에서는 나를 꽉 붙잡아 버렸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다룬다. 그러나 보통 하듯 "철학"의 정의를 탐구하려 하지 않고 "무엇인가"라는 말을 천착해 들어간다. 그 "what"에 대한 천착을 통해(다시 말하면 질문에 대한 질문을 통해) 우리가 말하는 철학의 지역성을 드러낸다. 동시에 새로운 보편성을 암시한다. 

나는 늘 하이데거가 "진지한" 철학자인지 의심스러웠었다. 그러나 "철학이란 무엇인가"가 진지하고 거대한 작업의 계획서라는 것을 의심할 도리는 없을 것 같다. 그러므로 그것은 나의 사유의 한 요소로 파고들어올 것이다. 관념은 그것이 살아있는 관념인 한 경탄과 혐오("존재와 시간"을 처음 읽고 난 훗설의 반응)와 같은 모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사유란 동화와 이화의 변증법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거대한 철학자를 만났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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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2015-06-28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과도한 진지함 때문에 너무 상처를 많이 받았는데...
너무 딱딱하고 공격적인 사람 앞에서 그 문제가 왜 중요하지 설득시키려고 하다보면 갑자기 화가 나서 힘들어지더라고요.

철학이나 다른 학문이나 다 마찬가지로 소수의 사람들이 그 학문을 개척하고 있고...저는 그냥 제 인생시간 때우려고 공부하는 학생에 불과하고요., 공부하다가 비트겐슈타인 붙잡고 있다보면 또 흥분해서 뭔가 생각해 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스스로가 병신같다는 생각이 들고...

자꾸 주변에서 도덕적 해이가 어떻고 왜곡이고 뭐 이런 소리 듣다보면 그냥 돌아버릴 것 같네요.

weekly 2015-06-28 04:0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넘겨짚기로 말씀드리면... 우리 시대에 철학을 한다는 것의 의의에 대해 고민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모든 철학도들이 이런 고민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구요. 탈레스 시대부터 똑같은 고민이 있었으니 이 고민의 역사는 참으로 장대하네요.:)

답은 둘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경제적 여유와 철학적 재능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일생을 걸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면 귀명창으로 남으면 되고요. 진지한 작가와 사상가들을 찾아내서 그들을 격려해 주는 거죠. 진지한 분들은 외로우므로... 철학에 대해 과도한 진지함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이 외의 옵션이 있을까요?

아, 물론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고 있는 옵션이 있습니다. 철학을 통해 철학(에 대한 관심)을 끝장내는 것이죠. 제 경험을 곁들여 말씀 드리면 비트겐슈타인은 철학도들에게 매우 위험한 철학자인 것 같습니다. 항상 철학이냐 아니냐, 삶이냐 아니냐라는 절대적인 질문을 던지는 철학자이니까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철학에 대한, 삶에 대한 정의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관념론자가 아니기 때문에 철학의 현실은, 삶의 현실은 항상 철학과 삶에 대한 정의를 초월한다는 사실을 수용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철학을 비트겐슈타인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화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절대주의 화가들부터 시작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더 나아갈 곳이 없죠. 회화의, 혹은 철학의 가능성을 고민하는 것 말고는. 회화, 철학이 열정의 대상이라면 왜 선험적인 이유에서 그것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죠? 절대주의자들의 시선에 아랑곳 없이 색채와 형태를 마음껏 추구할 자유가 우리에게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진지한 질문은 항상 실질적인 질문으로 환원될 것입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느냐, 철학적 재능이 있느냐, 철학적 열정이 있느냐... 나머지는, 제 생각에는 다 거짓 고민들입니다.

이종호 2015-07-28 0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철학자들은 물음을 질병처럼 다룬다.-비트겐슈타인, PI 225

내가 선생님한테서 무엇인가 배우기 전에 나는 내 머릿속에 맴도는 수많은 생각들로 밤에 잠을 자기 어려웠다. 나는 정신과의사한테서 약을 받아 먹었다. 나는 물건을 던지고 부수었다. 입에서는 아무런 표현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소리 지를 줄만 알았다.

물음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나를 가르쳐 주신 한 선생님은 나를, 그 주제와 연관된 방식으로, 개인적으로 공격했다. 나는 화가 났다. 선생님은 내가 그 물음을 나의 질병으로 느끼도록 만들었다. 나는 그 질병으로 고통받았다. 내가 느낀 고통은 나에게 그것을 해결하도록 강하게 요구했다. 나는 글을 썼다. 선생님은 나에게 잘했다고 말했다. 나는 아직도 그 고통이 내가 한 발짝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게 끔된다. 그 때 나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약도 먹고 자해도 했다.

2. 내가 원하는 것

나는 오랫동안 많은 생각들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런 생각들 때문에 내가 성장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남들보다 더 성장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그런 두려움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자동적으로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치를 취한다. 나는 그런 두려움을 일으키는 사고가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이려고 노력하게 된다.

지금 떠오르는 생각:
만약 내가 분명한 태도로 고통을 느끼는 것을 멈추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내가 분명한 태도로 남들보다 더 성장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공부할 수 있다. 그렇게 공부하면 나는 고통받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물음을 질병처럼 다루고 싶지 않다. 나는 물음을 공처럼 다루고 싶다. 그런데 남들보다 뛰어나야 나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집착 때문에 계속해서 나는 고통으로 가야될 것만 같다. 나는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나는 또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어쨋든 나는 아직 주어진 대로 살아갈 용기가 없는 것같다. 더 많은 압박을 통해서 결국에 더 잘하겠다는 욕망이 나를 귀찮게 한다.

weekly 2015-07-29 14:0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댓글 감사합니다.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포트란이란 프로그래밍 언어를 설계한 배커스란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추상적인 분야(과학, 철학, 문학 등등)에 종사하는 사람은 일상의 번잡하고 지루한 일을 피하고자 그런 일을 직업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이런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심한 동기를 가리고자 이런 분야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어마 어마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것을 `허영`이라고 부릅니다. (비트겐슈타인이나 하이데거의 전기 자료를 보면 이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죠. 아니 허영 그 자체죠. 적어도 저는 그렇게 느낍니다.)

물론 허영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겁니다. 스피노자도 허영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구요. 허영은 긍정적인 맥락에서 열정, 비전, 진지함, 심오함 등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허영은 이러쿵 저러쿵 해도 결국은 허영인 것 같습니다. 철학적 문제들을 질병처럼 다룬다는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말을 하는 순간 허영 속에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이종호님의 말씀대로 철학적 문제들을 공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철학자들이 하는 작업의 본질에 더욱 가까워 보이니까요.

추상적 작업에서 허영을 피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러한 인식에서 끌어낼 수 있는 윤리는 허영에 압도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즉 스스로에 완전히 속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종호님도 저와 비슷한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우리를 노력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것, 스피노자에 따르면 그것이 곧 선의 절대적인 정의이지요. 건투를 빕니다.
 

The Spinoza Problem. 네덜란드 레인스브르크 스피노자거리 29번지에 있는 스피노자 하우스에 가보지 않았었다면 난 이 책을 사지 않았을 것 같다. 아이폰으로 샘플을 받아 첫 몇 문장을 읽었을 때는 그저 그런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어 살 생각이 전혀 안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읽어나가자 책에서 손을 놓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내가 스피노자 하우스에서 집지기 아저씨에게 들은 이야기가 소설에 그대로 옮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스피노자 하우스의 거의 모든 전시품들은 스피노자 자신의 것이 아니다, 책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책들도 어떤 사람이 스피노자 사후 작성된 물품 대장을 참고로 스피노자 당대의 판본으로 다시 사모아 놓은 것이다... 등등.

이 소설은 스피노자와 (나치의 이론가이며 뉘른베르크에서 교수형을 언도받고 처형된) 로젠베르크의 삶을 교차해서 그리고 있는데 그 접합점이 바로 스피노자의 장서다. 그런데 웃기게도 나는 여기서 로젠베르크와 동일시되고 만다. 내가 스피노자 하우스를 찾은 이유 중 하나는, 로젠베르크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의 장서 목록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니까. 나도 그도 스피노자 철학의 원천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나의 경우. 예를 들어 스피노자에게는 콘트롤 센터로서의 자아가 없다. 내 사유 안에 두 개의 경쟁적인 관념이 존재한다고 하자. "나"라는 자아가 있다면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철학에는 자아가 없다! 그러므로 관념은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싸워 이긴 관념이) 스스로를 선택하는 것이다. 도대체 스피노자는 이런 철학을 어디에서 베꼈는가? (이 책에 보니 아인쉬타인이, 독창성의 비결은 아이디어의 원천을 잘 숨기는 것이라고 했다더라.) 나는 그것이 알고 싶었지만, 로젠베르크와 동일한 이유로 시작부터 좌절을 겪어야 했다. 즉, 그 책들의 표지에 적혀 있는 라틴어, 히브리어 등을 알지 못한다는...-.- 물론, 로젠베르크가 스피노자의 철학의 원천을 알고 싶어한 까닭은 나와는 다르다.)

이 소설은 페이지의 절반 이상이 대화들로 채워져 있다. 주인공들이 직접 나서서 자신의 생각을 분명한 언어로 진술한다. 소설적 장치들이 많이 포기되고 있지만 덕분에 읽기에 부담이 없다. 스피노자의 철학에 접근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일 것이다. (스피노자의 대화 상당 부분은 그의 저술들에서 인용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철학이 약화된 형태로 소개되고 있다는 느낌은 피할 수 없었다. 약간 간지럽다는 느낌. 물론,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내게도, 그리고 아마 그 어떤 독자에게도.)

소설에서 로젠베르크는 자신이 숭배하는 위대한 독일인 괴테가 유태인 스피노자를 숭배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아마 저자가 책을 더 풍부하게 만들고 싶었다면 이 테마를 좀 더 발전시켜야 했을 것이다. 독일의 국가 철학자 헤겔, 헤겔의 적대자로 정반대편에 서 있는 쇼펜하우어, 그리고 누구보다도 니체, ( 그리고 스스로를 철학자라 칭하는 나치의 이론가 로젠베르크) 다시 말하면 나치의 위대한 철학적 계보의 가장 꼭대기에는 어김없이 스피노자가 놓여 있다는 사실이 로젠베르크의 탐험 중에 속속 드러나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면 참으로 장관이었을 것 같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것이 스피노자의 철학이 위험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럿셀은 그의 철학사에서 스피노자를 가장 사랑스럽고 윤리적으로도 으뜸인 철학자라 소개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스피노자는 가장 사악한 인간으로 비난받았다고 덧붙인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사랑스럽고 조용한 은자의 철학인가, 아니면 냉정하고 독단적인 강자의 철학인가? 누구보다도 스피노자 자신이 자신의 철학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검색을 해보니 이미 독일어판과 프랑스판이 나와 있는 것 같더라. (스피노자의 대중성에 더하여) 나치 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렇듯 빠르게 번역판이 나왔을 것 같다. 적어도 내게 이 책의 백미는 로젠베르크의 탄생과 종말을 다룬 부분이다. 뉘른베르크의 재판 과정을 (비소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마지막 장을 나는 긴장감 속에서 매우 천천히 읽었다. 그리고 로젠베르크의 탄생을 다룬 부분은 소설적 장치들이 매우 허술한 이 책에서 소설적으로 가장 빼어난 부분일 것 같다.

반유대주의 연설을 한 소년 로젠베르크를 학교 선생들이 불러다 꾸짖고, 괴테의 자서전에서 괴테가 스피노자에게 경외를 표현한 부분을 암기에 오도록 과제를 준다. 로젠베르크는 암기를 잘해오지만, 자신이 암기한 문장들의 의미를 묻는 선생들의 질문 앞에서는 멍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더하여 자신이 숭배하는 괴테가 그토록 존경했다는 스피노자라는 사람이 과연 누굴까, 하는 호기심은 그의 머리에서 결코 일지 않는다. 선생들은 낙담하면서도 안심한다. 로젠베르크가 치유불능임에 낙담하면서도, 그의 지적 능력으로 보아 유해한 인물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He has a lack of curiosity that is, most likely, incurable."
"This young man has neither the intelligence nor fortitude to cause mischief by swaying others to his way of thinking."

물론, 그는 나치의 이론가가 되었고, 그의 손으로는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음에도 그 이론에 대한 댓가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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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에 다녀 온 것이 계기가 되어 스피노자가 내 머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스피노자를 주제로 한 소설을 읽었고, 럿셀의 철학사를 스피노자 부분부터 읽기 시작했고, 듣고 있는 오디오북도 스피노자에 대한 것이고, 여호와 증인 분들과 토론을 벌이면서도 계속 스피노자를 의식하고 있었고... 물론, 영국에 오기 전부터 스피노자는 내 머리를, 그러므로 나의 삶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스피노자에 대한, 너무 유명해서 닳고 닳았지만 그럼에도 진리임에 틀림없는 두 개의 명언. 첫째, 헤겔. 당신이 스피노자주의자가 아니라면 철학자도 아니다(내 멋대로 버전이다). 둘째, 베르그손. 철학자는 두 개의 철학을 갖고 있다. 하나는 스피노자의 것, 다른 하나는 그 자신의 것. 그러니 만일 스피노자에게 감화를 받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철학의 원천을 찾아 스피노자를 연구하려 든다면 세상엔 단 하나의 철학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철학이라 선포하는 사람도 있단다. 아, 나 역시 그걸 부정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스피노자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정말로 거대한 사업이다. 나는 지금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에 와 있지만, 스피노자를 연구 테마로 삼을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나는 무모하기에는 이미 충분히 늙었기 때문이다. 나이들러의, 스피노자 사상의 원천을 연구하는 과제는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그저 불가능한 사업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을 뿐이다. (약이 오르는 것은 스피노자 전집의 양 자체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

그러함에도 스피노자의 철학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생각을 늘상 한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자신의 철학으로 받아들일 만한 거의 유일한 철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적으로 수정되어야 할 부분도 있고, 재고되어야 할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그의 철학의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리지는 못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다행히 스피노자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고전 철학자인 것 같다. 그의 저술들도 많이 번역되어 있고. 그러나 한편 스피노자 철학의 결정판이라 할 에티카에 대한 번역은...-.- 나는 이렇게 말해 두고 싶다. 한국에서라면 당신과 스피노자 사이에 서광사판 에티카라는 깊이 모를 계곡이 존재한다고. 서광사판 에티카 제1부를 읽고 난 결론은, 그 번역을 통해 스피노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백 퍼센트 불가능하다는 것. (검색을 해보니 에티카에 대한 새로운 번역이 나왔다고 하더라. 이북으로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안되는 거 같다. 책만 좋게 잘 되어 있으면 몇 날 몇 칠을 두고 그 책을 칭찬하면서 놀고 싶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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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존재인 신이 창조한 완전한 인간 아담이 어떻게 신의 명령을 어길 수 있었나? 이런 질문에 (넓은 의미의) 기독교인들은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물론, 이런 답변에는, 그럼 너가 말하는 자유의지가 도대체 뭔데? 라는 질문이 따라 붙어야 한다. 그러나 신학이나 철학 논쟁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질문은 굉장히 현학적일 수 있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현학적인 질문을 피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윤리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복잡하다. 에덴 동산이 있었고, 그 가운데 선악과가 있었고, 신은 아담에게 그걸 먹지 말라고 했다는 걸로 이야기가 끝나는 게 아니다. 신의 피조물인 뱀이 있었고, 신이 아담에게 반려로 만들어 준 이브가 있었고, 유혹(!)이 있었다. 그래서 문제는 이렇게 전화한다. 유혹이 있었더라도(혹은 시험이 있었더라도) 아담은 자유의지가 있으니 그걸 이겨내어야 했다. 아담이 이겨내지 못했다면, 아담은 자유의지가 있으니 그건 아담의 잘못인 것이다. (세상에 죄를 끌고 들어온 건 아담인 것이다. 신이 아니라.)

똑같은 이야기가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에게도 적용된다. 카인은 신이 아벨의 제사만 받아주고 자신의 제사는 받아주지 않는 데 질투를 느껴 아벨을 살해한다. 신이 카인의 제사를 받아주지 않은 이유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사람들은 카인의 제사가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그건 너의 추측일 뿐이다.) 신이 카인의 제사를 받아주지 않은 것이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게 된 직접 원인은 아니다. 신이 제사를 받아주건 말건 카인은 아벨을 죽이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카인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니까.

보다시피 자유의지 이론은 어떤 그릇된 일의 원인을 전적으로 개인에게 돌리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다. 신이 아담을 유혹했지만 아담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니 그 유혹에 굴복하고 만 것은 전적으로 아담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신이 이유를 대지 않고(신은 이유를 댈 의무가 없다) 카인의 제사만 받지 않았지만 카인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니 살의를 다스릴 수 있어야 했다. 그러니 살인은 카인의 책임이다. 틀렸나? 한편으론 맞고 다른 한편으론 틀렸다. 아담이나 카인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는 맞다. 그러나 그것이 신을 면책하지는 않는다. 

카드 발급 기준을 대폭 완화하면 신용불량자가 많이 나오게 마련이다. 물론, 이렇게 양산된 신용불량자 개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고 물어야 한다. 그들은 자산을 합리적으로 운용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정책 당국이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정책적 이유에서든) 카드 발급 기준에 대한 감독 관리를 느슨하게 하면 신용 불량자가 양산되리라는 것은 거의 자연 법칙과 같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예전 직장 동료네 아이가 성적이 안좋아서 내가 공부를 좀 봐 준 적이 있었다. 내가 놀랐던 것은, 아이 방에 텔레비젼이 있더라는 것. 부모들은 거실에 누워 테레비젼을 보다가 가끔 아이가 공부방에서 테레비젼을 보는지, 공부를 하는지 감시하더라는 것. 공부방에 테레비젼이 있더라도 아이가 (자유) 의지를 갖고 그것을 이겨내야 하지 않나? 기독교의 신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소리다.

스피노자적으로 이야기해 보자. 공부를 하는데는 많은 에너지가 투여된다. 비탈 위로 돌을 밀어올리는 것과 같다. 테레비젼을 보는 것은 비탈 아래로 돌을 굴리는 것과 같다. 돌을 어디로 굴리겠나? 이것은 거의 자연 법칙과 같다. 여기서 자유의지가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스피노자적 해법을 말해보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감시를 안해도) 아이가 집중해서 공부를 할까? 단순하다. 아이를 공부하는 환경에 넣어주면 된다. 엄마든 아빠든 거실에서든 침실에서든 책을 읽고 공부하고 그에 대해 토론하는 환경이 되어주면 된다. 그러한 환경에서는 비탈의 기울기가 상대적으로 낮아진다. 할게 공부 밖에 없을 테니(아이는 이 환경에서, 자신이 공부를 하는 관념과 부모가 옆에서 공부를 하는 관념을 비교하게 될 것이다. 부모가 거실에 누워 테레비젼을 보는 관념 대신! 닥터 후의 말대로 휴먼 싸이콜로지란!). 그리고 스피노자에 따르면 가치가 있고 (같은 말이지만) 부하가 걸리는 일을 하고 나면 우리는 뿌듯함을 느끼게 된다. 그 뿌듯함이란 자신의 힘의 증진(그것이 학력이든 지식이든 육체적 강인함이든)에 대한 자각일 뿐이다. 반면 테레비젼을 보면서 소비한 시간 앞에서 우리는 우울해진다. (그것은 우리의 약해짐에 대한 자각이다.)

그러므로 내게 자유의지란, 신이, 정책 당국자들이, 부모들이 면책을 하려는 뻔한 술수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교육이란 우리의 의지를 기르는 과정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텔레비젼과 물리학 논문이 놓여 있을 때 물리학 논문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텔레비젼이 훨씬 부하가 적게 걸리는 일임에도. 그러나 그 사람은 아마 텔레비젼에서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물리학 논문에서 더 큰 재미를, 그러니까 자신의 힘의 증진을 느끼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자유의지 따위는 논외가 된다. 내가 물리학 논문을 앞에 놓고 공부하는 것은 (1등을 하겠다는 명예욕 등에 동기화되어서든 뭐든) 단순히 그게 더 재미있기 때문인 것이다(그 사람을 고문하려면 테레비젼 하나 달랑 놓인 방에 가둬두면 된다.). 재미를 느끼는 것이 자신의 힘의 증진을 느끼는 것이고 그것이 행복이다. 스피노자에게 신이란 스스로 동기화되어 스스로 작용하며 스스로의 힘을 표현하는 것이다(물론 다 똑같은 말이다). 우리가 가능한 한 스스로 동기화되어 스스로 작용하며 스스로의 힘을  표현할 때 우리는 이것을 신을 사랑한다고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신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란 이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물론, 똑같은 이야기다) 아무 쓸 데가 없다. 이론적으로 자유의지란 원인에 대한 무지의 결과다. 그리고 실천적으로 자유의지는 외적 원인과 내적 원인을 혼동하는 징후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외적 원인을 내적 원인이라 선동하는 것이다. 어떤 광고. 귀하가 이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글쎄... 과연 그럴까? (궁극적으로는 "나"란 어떤 개체, 어떤 본질은 존재치 않는다. "나"가 없음에 자유의지의 공간이란 도대체 어디이겠는가? 이 역시 스피노자의 이론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스피노자에게 배웠다고 믿는다. 그가 틀리지 않았기를. 내가 잘못 배우지 않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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