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존재인 신이 창조한 완전한 인간 아담이 어떻게 신의 명령을 어길 수 있었나? 이런 질문에 (넓은 의미의) 기독교인들은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물론, 이런 답변에는, 그럼 너가 말하는 자유의지가 도대체 뭔데? 라는 질문이 따라 붙어야 한다. 그러나 신학이나 철학 논쟁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질문은 굉장히 현학적일 수 있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현학적인 질문을 피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윤리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복잡하다. 에덴 동산이 있었고, 그 가운데 선악과가 있었고, 신은 아담에게 그걸 먹지 말라고 했다는 걸로 이야기가 끝나는 게 아니다. 신의 피조물인 뱀이 있었고, 신이 아담에게 반려로 만들어 준 이브가 있었고, 유혹(!)이 있었다. 그래서 문제는 이렇게 전화한다. 유혹이 있었더라도(혹은 시험이 있었더라도) 아담은 자유의지가 있으니 그걸 이겨내어야 했다. 아담이 이겨내지 못했다면, 아담은 자유의지가 있으니 그건 아담의 잘못인 것이다. (세상에 죄를 끌고 들어온 건 아담인 것이다. 신이 아니라.)

똑같은 이야기가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에게도 적용된다. 카인은 신이 아벨의 제사만 받아주고 자신의 제사는 받아주지 않는 데 질투를 느껴 아벨을 살해한다. 신이 카인의 제사를 받아주지 않은 이유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사람들은 카인의 제사가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그건 너의 추측일 뿐이다.) 신이 카인의 제사를 받아주지 않은 것이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게 된 직접 원인은 아니다. 신이 제사를 받아주건 말건 카인은 아벨을 죽이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카인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니까.

보다시피 자유의지 이론은 어떤 그릇된 일의 원인을 전적으로 개인에게 돌리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다. 신이 아담을 유혹했지만 아담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니 그 유혹에 굴복하고 만 것은 전적으로 아담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신이 이유를 대지 않고(신은 이유를 댈 의무가 없다) 카인의 제사만 받지 않았지만 카인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니 살의를 다스릴 수 있어야 했다. 그러니 살인은 카인의 책임이다. 틀렸나? 한편으론 맞고 다른 한편으론 틀렸다. 아담이나 카인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는 맞다. 그러나 그것이 신을 면책하지는 않는다. 

카드 발급 기준을 대폭 완화하면 신용불량자가 많이 나오게 마련이다. 물론, 이렇게 양산된 신용불량자 개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고 물어야 한다. 그들은 자산을 합리적으로 운용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정책 당국이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정책적 이유에서든) 카드 발급 기준에 대한 감독 관리를 느슨하게 하면 신용 불량자가 양산되리라는 것은 거의 자연 법칙과 같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예전 직장 동료네 아이가 성적이 안좋아서 내가 공부를 좀 봐 준 적이 있었다. 내가 놀랐던 것은, 아이 방에 텔레비젼이 있더라는 것. 부모들은 거실에 누워 테레비젼을 보다가 가끔 아이가 공부방에서 테레비젼을 보는지, 공부를 하는지 감시하더라는 것. 공부방에 테레비젼이 있더라도 아이가 (자유) 의지를 갖고 그것을 이겨내야 하지 않나? 기독교의 신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소리다.

스피노자적으로 이야기해 보자. 공부를 하는데는 많은 에너지가 투여된다. 비탈 위로 돌을 밀어올리는 것과 같다. 테레비젼을 보는 것은 비탈 아래로 돌을 굴리는 것과 같다. 돌을 어디로 굴리겠나? 이것은 거의 자연 법칙과 같다. 여기서 자유의지가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스피노자적 해법을 말해보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감시를 안해도) 아이가 집중해서 공부를 할까? 단순하다. 아이를 공부하는 환경에 넣어주면 된다. 엄마든 아빠든 거실에서든 침실에서든 책을 읽고 공부하고 그에 대해 토론하는 환경이 되어주면 된다. 그러한 환경에서는 비탈의 기울기가 상대적으로 낮아진다. 할게 공부 밖에 없을 테니(아이는 이 환경에서, 자신이 공부를 하는 관념과 부모가 옆에서 공부를 하는 관념을 비교하게 될 것이다. 부모가 거실에 누워 테레비젼을 보는 관념 대신! 닥터 후의 말대로 휴먼 싸이콜로지란!). 그리고 스피노자에 따르면 가치가 있고 (같은 말이지만) 부하가 걸리는 일을 하고 나면 우리는 뿌듯함을 느끼게 된다. 그 뿌듯함이란 자신의 힘의 증진(그것이 학력이든 지식이든 육체적 강인함이든)에 대한 자각일 뿐이다. 반면 테레비젼을 보면서 소비한 시간 앞에서 우리는 우울해진다. (그것은 우리의 약해짐에 대한 자각이다.)

그러므로 내게 자유의지란, 신이, 정책 당국자들이, 부모들이 면책을 하려는 뻔한 술수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교육이란 우리의 의지를 기르는 과정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텔레비젼과 물리학 논문이 놓여 있을 때 물리학 논문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텔레비젼이 훨씬 부하가 적게 걸리는 일임에도. 그러나 그 사람은 아마 텔레비젼에서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물리학 논문에서 더 큰 재미를, 그러니까 자신의 힘의 증진을 느끼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자유의지 따위는 논외가 된다. 내가 물리학 논문을 앞에 놓고 공부하는 것은 (1등을 하겠다는 명예욕 등에 동기화되어서든 뭐든) 단순히 그게 더 재미있기 때문인 것이다(그 사람을 고문하려면 테레비젼 하나 달랑 놓인 방에 가둬두면 된다.). 재미를 느끼는 것이 자신의 힘의 증진을 느끼는 것이고 그것이 행복이다. 스피노자에게 신이란 스스로 동기화되어 스스로 작용하며 스스로의 힘을 표현하는 것이다(물론 다 똑같은 말이다). 우리가 가능한 한 스스로 동기화되어 스스로 작용하며 스스로의 힘을  표현할 때 우리는 이것을 신을 사랑한다고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신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란 이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물론, 똑같은 이야기다) 아무 쓸 데가 없다. 이론적으로 자유의지란 원인에 대한 무지의 결과다. 그리고 실천적으로 자유의지는 외적 원인과 내적 원인을 혼동하는 징후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외적 원인을 내적 원인이라 선동하는 것이다. 어떤 광고. 귀하가 이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글쎄... 과연 그럴까? (궁극적으로는 "나"란 어떤 개체, 어떤 본질은 존재치 않는다. "나"가 없음에 자유의지의 공간이란 도대체 어디이겠는가? 이 역시 스피노자의 이론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스피노자에게 배웠다고 믿는다. 그가 틀리지 않았기를. 내가 잘못 배우지 않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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