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 다녀 온 것이 계기가 되어 스피노자가 내 머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스피노자를 주제로 한 소설을 읽었고, 럿셀의 철학사를 스피노자 부분부터 읽기 시작했고, 듣고 있는 오디오북도 스피노자에 대한 것이고, 여호와 증인 분들과 토론을 벌이면서도 계속 스피노자를 의식하고 있었고... 물론, 영국에 오기 전부터 스피노자는 내 머리를, 그러므로 나의 삶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스피노자에 대한, 너무 유명해서 닳고 닳았지만 그럼에도 진리임에 틀림없는 두 개의 명언. 첫째, 헤겔. 당신이 스피노자주의자가 아니라면 철학자도 아니다(내 멋대로 버전이다). 둘째, 베르그손. 철학자는 두 개의 철학을 갖고 있다. 하나는 스피노자의 것, 다른 하나는 그 자신의 것. 그러니 만일 스피노자에게 감화를 받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철학의 원천을 찾아 스피노자를 연구하려 든다면 세상엔 단 하나의 철학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철학이라 선포하는 사람도 있단다. 아, 나 역시 그걸 부정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스피노자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정말로 거대한 사업이다. 나는 지금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에 와 있지만, 스피노자를 연구 테마로 삼을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나는 무모하기에는 이미 충분히 늙었기 때문이다. 나이들러의, 스피노자 사상의 원천을 연구하는 과제는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그저 불가능한 사업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을 뿐이다. (약이 오르는 것은 스피노자 전집의 양 자체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

그러함에도 스피노자의 철학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생각을 늘상 한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자신의 철학으로 받아들일 만한 거의 유일한 철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적으로 수정되어야 할 부분도 있고, 재고되어야 할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그의 철학의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리지는 못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다행히 스피노자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고전 철학자인 것 같다. 그의 저술들도 많이 번역되어 있고. 그러나 한편 스피노자 철학의 결정판이라 할 에티카에 대한 번역은...-.- 나는 이렇게 말해 두고 싶다. 한국에서라면 당신과 스피노자 사이에 서광사판 에티카라는 깊이 모를 계곡이 존재한다고. 서광사판 에티카 제1부를 읽고 난 결론은, 그 번역을 통해 스피노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백 퍼센트 불가능하다는 것. (검색을 해보니 에티카에 대한 새로운 번역이 나왔다고 하더라. 이북으로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안되는 거 같다. 책만 좋게 잘 되어 있으면 몇 날 몇 칠을 두고 그 책을 칭찬하면서 놀고 싶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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