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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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가족 간의 첨예한 갈등으로 시작하여 그렇게 끝난다. 그 갈등은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가족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갈등의 골은 깊고 날카롭지만, 아무도 가족이라는 난간을 부수는 데까지 자신을 몰아가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유머를 찾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에, 보통은 중재자로 설정되기 마련인 어머니마저 갈등의 큰 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읽은 유진 오닐의 또다른 작품, "느릅나무 밑의 욕정"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에, 어머니(젊은 새어머니)는 그 갈등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끄는 계기로 그려졌었다. 희곡 작품은 아니지만 엘리아 카잔에 의해 영화화된 존 스타인 벡의 "에덴의 동쪽"에서도 아버지-아들, 그리고 어머니가 갈등구조를 이룬다. 그러나 그 작품에서는 상처를 치유하는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유진 오닐의 이 작품은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낼 뿐 치유책을 모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정직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그러하듯 극에서도 숨 쉴 곳이 없다. 꽉 막혔다. 그런가? 아니, 그렇지 않다. 그날 밤 가족들은 모두 술과 마약에 쩔어 있다. 모든 갈등의 단초를 제공한 구두쇠 아버지는 폐병 걸린 아들을 위해 싸구려 영세민 요양소를 예약함으로써 마지막 연민마저 박살내 버린다. 그런데 바로 그 장면에서 가족들은 입을 열어 시를 읊는다. 사실주의의 절정에서 피어오른 시는 날카로운 갈등의 모서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현실에서는 마약에 취한 노파일 뿐인 메리마저 마치 그리스 신화의 여신처럼 알듯 모를 듯한 자신만의 시를 노래한다. 그렇게 막이 내린다. 

긴 하루의 끝에 걸린 밤. 밤이란 잠이란 꿈이란 무엇일까... 전도유망했던 셰익스피어 전문 배우였던 아버지 제임스는 분명 햄릿의 대사를 읖조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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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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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페이지가 끝나고 책장을 덮는 순가 코 끝에 신 바람이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감동. 극장에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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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아우또노미아총서 20
브뤼노 라투르 지음, 홍철기 옮김 / 갈무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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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관념적이며 인위적이며 난해하다. 나로서는 그 난해함이 주제의 난해함에 상응하는 것인지 이 책의 관념성과 인위성을 은폐하기 위한 것인지 판단하기 힘들다. 이 책은 재치 있는 문장과 심오한 통찰이라는 좋은 요소들을 담고 있고 독자를 책을 읽기 전 상태에 머물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그 진리성에 있어서는 판단을 유보할 수 밖에 없지만 문제작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 책의 부제목은 "대칭적 인류학을 위하여"다. 저자에 따르면 기존 인류학은 서구 세계를 연구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고 한다. 서구 세계는 근대 세계인데 근대 세계에 대한 인류학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서구 세계는 근대 세계인 적이 없었고, 그러므로 서구 세계에 대한 인류학, 즉 서구와 비서구 세계에 똑같은 방법론을 적용하는 대칭적인 인류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문제 설정이 지나치게 인위적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저자가 근대성에 대한 논의의 장에 뛰어들기 위해 다소 무리를 했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겠다. 그보다는 저자의 파격적인 주장, 즉 서구 세계가 결코 근대 세계였던 적이 없다는 주장이 귀에 더 솔깃하기 때문이다. 사실 귀에 솔깃하다는 정도의 말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참으로 전복적인 주장이다. 그동안 근대성을 둘러 싸고 벌어진 무수한 담론들을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가 벌어지는 공간으로 일거에 몰아넣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주장에는 서구인의 자의식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말자. 나는 서구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저자 자신의 새로운 근대성 정의를 들어봐야 할 차례이다. 그런데 라투르는 근대성과 "인본주의의 발명이나 과학의 등장, 사회의 세속화, 혹은 세계의 기계화"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관념적인, 근대성이라는 헌법 도식을 제시한다.

그러나 먼저 나의 편견을 밝혀 두겠다. 나는 이런 관념적 방법론에 혐오감을 갖고 있다. 의식 존재란 사물 존재를 항상 초월하는 것으로 정의되듯이 현실이란 도식을 항상 초월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도식이 깔끔할수록 도식의 현실 포착가능성은 낮아진다. 나는 이것을 선험적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겠다.

저자 라투르는 17세기에 보일과 홉스가 벌인, 자연에 진공이 존재하느냐에 대한 실험 과학 논쟁을 끌어들여 근대성의 헌법이 구성되는 과정을 재현해 준다. 물론 이런 헌법이 실재하였던 것은 아니고 저자가 근대성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관념적으로 구성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 대목이 이 책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라투르의 설명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나의 방식대로 재구성하여 설명하도록 하겠다. 그렇더라도 라투르의 설명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라투르를 오해하지 않았다면.

전근대 세계는 통일이라는 말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전근대 세계는 어떤 무엇(예컨대 신)에 의해 통일성을 유지한다. 말하자면 "자연-사회-나"가 하나의 총체성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근대 세계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통일이 깨진다. 자연은 그저 거기에 그렇게 놓여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것을 자연의 초월성이라고 하자. 사회는 인간이 편의에 따라 만들어 낸 것으로 인식된다. 이를 사회의 내재성이라고 부르자.

그런데 자연의 초월성만을 인정한다면 인간은 자연 안의 무력한 동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을 이해하고 통제하고 실험하고 생산할 수 있다. 이런 가능성을 자연의 내재성이라고 하자.

또, 사회가 내재적일 뿐이라면 인간은 사회를 임의로 해체하여 자연 안의 무력한 동물로 복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는 견고한 실체이며 사물들을 그 안에 유입하여 각종 물질적 토대들과 제도들을 만들어 견고성을 강화한다. 이것을 사회의 초월성이라고 하자.

그런데 잘 보면 자연의 내재성과 사회의 초월성에서는 사물과 인간 사이의 연합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대포의 생산에 있어서 대포는 인간에 의해 "번역된" 혹은 "매개된" 자연이다. 역으로 그 대포는 사물에 의해 "번역된" 혹은 "매개된" 인간의 의지이다. 이러한 번역 혹은 매개의 실천이 이루어지는 영역을 번역 공간, 혹은 매개 공간, 혹은 혼성화 공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초월적 자연, 내재적 사회는 혼성되지 않은 공간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이런 공간을 순수화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순수화 공간 안에서 자연과 사회는 명확히 분리된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근대인들은 자연과 사회를 순수화 공간 안에서는 명확히 분리하지만 혼성화 공간 안에서는 계속 섞는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자연의 무력한 존재로 살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혼성화 공간을 순수화 공간에서 명확히 분리해내지 않으면 순수화 공간이 침범당해 자연과 사회에 대한 명확한 구분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근대 세계의 기본틀 역시 사라지고 만다.

(예를 들어 자연과 사회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세계의 사람은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떨어지는 것은 물레방아를 돌려 쌀을 빻고 그래서 인간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인들은 순수화 공간 안에서 자연과 사회를 명확히 구분하고, 또 순수화 공간과 혼성화 공간 사이도 명확히 구분해야만 한다. 그런데 순수화 공간과 혼성화 공간을 나누는 방법은 혼성화 공간의 존재자들에게서 그 존재론적 지위를 박탈하는 것 뿐이다. 즉, 근대인들에게 그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중세 공간에서 망원경은 실용성, 사회적 안정성, 윤리성 등의 총체적 망 안에 놓이며 그에 따라 가치를 부여받고 통제를 받는다. 그러나 근대 공간에서 망원경은 단지 망원경일 뿐이다. 그것은 단지 사물일 뿐으로 그 이상의 범주는 지니지 못한다. 근대 공간은 혼성화 공간의 존재자들, 즉 하이브리드들이 왕성하게 증식할 조건들을 구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신이 갈 곳은 어디인가? 신은 자연의 장인도 아니고 사회의 입법자도 아니게 되었다. 신은 이제 근대인 개인의 영성을 위한 공간에 위치한다. 이것이 신의 내재성이다. 그러나 신이 아주 제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은 자연과 사회가 그 영역을 다툴 때 정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어 중재자로 나설 수 있다. 이것이 신의 초월성이다. 즉, 근대인은 신을 내재적으로 이해하지만 초월적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예를 들어 스피노자는 세계의 필연성을 설명하기 위해 신을 잠깐 써먹고는 소거해 버리고(자연), 개인의 존재 권리를 설명하기 위해 신을 잠깐 써먹고는 소거해 버린다(사회). 스피노자의 신이 평소에 거주하는 곳은 에티카 제5부 안에 마련해 놓은 영적 공간으로, 그 안에서 신은 스피노자의 개인 소장품 역할을 한다.)

이상이 라투르가 근대성이라는 헌법의 규정들로 제시한 것들을 내 나름대로 다시 풀어본 것이다. 즉, 근대성의 틀은 1).자연의 초월성(그리고 내재성), 2).사회의 내재성(그리고 초월성), 3).순수화 공간 안에서 자연과 사회를 분리하고 순수화 공간과 혼성화 공간을 다시 분리하는 이중의 분리, 4).개인의 영성 공간 안으로 후퇴한 신(그러나 초월성을 포기하지 않은) 이라는 4가지 규정으로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라투르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근대성이 이와 같은데 서구인들은 저런 근대성의 기획을 한번도 실천해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서구인들은 결코 근대인인 적이 없었다!

위가 쓰릴 정도로 풍성한 관념의 성찬이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일단 비서구인으로서 나는 서구인들의 근대화를 합리성이나 인본주의의 승리 따위로 받아들일 마음이 결코 없었다는 걸 말해두자. 나는 또 부시의 미국이 인간 줄기 세포 실험을 금지한 것을 두고 부시가 하이브리드를 개념화하고 통제하였다고 말할 생각도 없고, 부시의 미국이 기후 협약에 머뭇거린 것을 두고 부시가 하이브리드를 개념화하는데 실패했다고 말할 생각도 없다. 더 간단하게 말하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서구 문명 밖에서 서구 문명을 인류학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믿을 수 없다. 나는 최근에 프랑스 역사학자들이 쓴 "나는 왜 역사학자가 되었는가"라는 책을 읽었다. 그 학자들은 엄밀한 객관성을 유지해야 할 자신들이 그런 주관적인 글을 쓴다는 사실에 마음 불편해 했다. 어떤 학자는 원고 청탁을 거절했다고도 한다. 그런 서구 학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학자적 태도에 존경을 표하는 사람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솔직히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이 아닌가 말이다. 서구 세계 밖에서 서구 세계가 말하는 그 객관성을 서구 세계의 이념 과잉으로 해석하여 바라보는 시각도 있을 것이다. 서구 세계가 비근대 사회여야 인류학적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구 세계는 지금 있는 그대로 이미 인류학적 연구 대상이라는 말이다. -그런 연구가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르지만...

내가 보건대 서구 세계는 탁월하게 이념적인 사회다. 서구 문명 말고는 빅뱅 이론과 진화론이 그토록 논쟁의 대상이 된 사회는 없었다. 동양 사회는 별 갈등없이 그 이론들을 수용했다. 심지어는 절대-유일-인격신이라는 이념을 갖고 있는 이슬람 사회도 별 갈등없이 수용했다. 최근에 터키에서 진화론으로 난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군불을 땐 것은 아니나 다를까 미국 유학파 학자들이었다고 한다! (첨언하면 이슬람 세계에서도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직접 진화했다는 표현은 금기란다.)

라투르의 작업은 서구 세계가 갖고 있는 우월적 감정을 해체하려는 것일 테지만 서구 세계에 아무런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볼 때는 그것처럼 심심하고 무의미한 일도 없다. 더구나 서구인들이 근대성의 이념을 지키지 못했다는 우회를 통한 해체이라니! 어떤 문명도, 어떤 국가도 자신의 헌법을 지키지 못한다.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다. 단위를 좁혀 개인의 수준에서도 스스로의 이념을 지켜내는 사람은 드물다. 만일 있다면 그 사람은 광인 취급을 받을 만 할 것이다.
 

추) 글을 다시 읽어보니 내가 좀 감정적이었던 것 같다.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그 당혹의 원천을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인 듯 하다. 물론이다. 당혹의 원천을 안다면 내가 당혹스러워 할 리가 없다. 한 밤 자고 나니 사태가 그런 대로 명확해 지는 것 같다. 내가 왜 당혹스러워 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1. 나는 서구의 근대성에 대해 우월적 위치를 부여할 마음이 전혀 없다. 그러나 라투르는 서구의 근대성에 우월한 위치를 부여한다. 그리고 나서 근대성 자체를 무화시킨다. 내게는 그 과정이 불만스러울 수 밖에 없다.

2. 라투르는 자연, 사회, 신에 대해 초월적이고 내재적인 특성을 갖다 붙인다. 나의 직감은 내 귀에 끊임없이 저건 말장난이라고 속삭인다. 라투르는 근대인들의 비판 기능을 일종의 말장난으로 만든다. 라투르가 근대인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지만 나는 그 비판이 라투르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3. 라투르가 근대성의 헌법을 제시한 후 역사를 통해 그것을 증명하려 하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검토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라투르는 근대성의 헌법을 제시한 후 그 헌법이 시행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는 이상한 상태에 빠진다. 라투르의 주장을 검토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기껏해야, 현실에서 시행되지도 않은 헌법을 당신은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었는가를 물을 수 있을 뿐이다. 라투르는 반칙을 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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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는호두 2011-11-14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댓글을 달려고보니 10년 3월에 쓰신 글이네요. 즐겨찾는(을) 서재로 등록했습니다. 글을 잘 쓰시네요 ^^

weekly 2011-11-14 19:58   좋아요 0 | URL
^^ 말씀 감사합니다. 다시 읽어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눈에 걸리는 것이 제가 너무 감정적이었다는 것이네요...-.- 책 반납 기일때문에 중반부 이후는 눈으로 빠르게 읽고 말아서 근대성을 주제로 라투르가 최종적으로 무슨 말을 하려 한 것인지 정리를 하지 못하고 넘어간 것도 아쉽구요. 다시 한번 읽어 보고 싶은 책입니다. 암튼 좋은 하루 되세요~
 
자연의 원리들
토마스 아퀴나스 지음, 김율 옮김 / 철학과현실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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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라틴어 대역으로 되어 있고 본문보다 긴 역자해제가 있다. 그러므로 역자 부분과 저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봄이 좋을 듯 하다.

역자 부분. 번역도 좋고 해제도 좋다. 특히 해제는, 마치 대학 강의실에 앉아 강의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본문의 압축된 서술을 풀어주고, 확장해 주고,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고, 저자가 범한 오류나 오해의 여지가 있는 부분들을 바로 잡아주고, 철학적인 또는 신학적 맥락을 환기시켜 주고 등등. 나는 이보다 좋은 해제를 읽어 본 적이 없다.

저자 부분. 실제 저자는 물론 토마스 아퀴나스이지만 내용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해설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굳이 둘의 사상을 변별하여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에 그냥 아리스토텔레스를 목적어로 이야기를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한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나도 그 정도의 아량은 갖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여준 신선함은 내가 기대했던 것의 최소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나마 마지막 제6장 정도만이 신선했던 것 같다.

본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자연의 원리들은 곧 생성의 원리들을 말한다. 이는 생성의 가능성을 부정한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반박으로 구상된 것일 테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기획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의 원리들은 단 하나의 관념, 즉 목적이라는 관념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을 전제하고서야 질료인이나 형상인 등도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바로 이 관념, 즉 자연에는 목적이 있다는 관념은 받아들이기 심히 곤란한 것이다. 우리의 철학자(나의 블로그에서 "우리의"라는 정관사는 스피노자의 것이다)가 에티카에서 거의 이성을 잃다시피 하면서 비판하는 것도 이러한 관념이다. -스피노자는 목적에 대한 관념을 철저히 거부했기 때문에 그의 우주에는 의지가 자리할 곳도 없게 된다.

암튼 상황이 이러하므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파르메니데스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그려 볼 수 있겠다.

파르메니데스: 젊은이, 내 비밀 하나 일러 주네만 우주에 목적 따위는 없다네.
아리스토텔레스: 장로님, 무슨 터무니없는 말씀이십니까? 목적이 없다면 생성도 운동도 있을 수 없습니다.
파르메니데스: 내 말이 바로 그것이라네.

전대의 거의 모든 철학자들에게 자연 철학은 하나의 무덤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 철학에서 실족하였다고 그의 철학 전체가 모래 아래로 빠져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와 그의 학파에 대한 탐구는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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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과 예술가
알렉상드르 라크루아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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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알코올과 예술가라... 이런 제목의 책에서 새로운 뭔가가 나올 수 있을까? 충분히 의심할 만 하다. 그러나 프롤로그의 첫 몇 페이지를 읽어보면 바로 작가의 통찰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첫 몇 페이지를 읽고나서 책날개에 박혀 있는 작가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 보았다. 잘 생기기까지 하였다.

작가는 이 얇고 읽기 쉬운 책에다 굉장한 숙고를 요하는 주제를 담아놓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작가가 근원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여러 예술가들의 에피소드는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과 그가 실제로 한 말 사이에 혼란이 빚어지기도 하는 것 같다. 나는 작가가 이런 주제를 이야기하는데 "술과 예술가"라는 테마를 빌려온 것은 상업적 의도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주제에 맞춰(그것이 술이었다면) 예술가들의 에피소드는 작은 테마로만 이용되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이 얇은 책에 대해 굉장히 긴 발췌를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막상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니 너무 많은 수렴되지 않은 주제가 떠오른다. 나는 이것을 작가의 악덕 탓이라고 핑계를 대겠다. 작가 자신이 이것 저것을 찔러보기만 한 채 그것들을 하나로 통일시켜 놓지 못하였다. 작가가 그럴 수 있었다면 철학자가 되었을 것이리라.

그래도 굳이 하나의 줄기를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 19세기 중엽부터 술과 인간과의 관계가 달라졌다. 1858년에 알코올 중독이라는 표제가 백과사전에 처음 오르게 되었는데 주로 공장 노동자들과 관련된 현상으로 기술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해 보들레르가 "인공낙원"의 초판을 내었다.

자, 이제 19세기 중엽 이전과 이후의 술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 말해보자.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하나는 내면과 외면에 대한 것, 즉 고립과 통합에 대한 것이다. 19세기 중엽 이전에 술은 신과 자연과 공동체와의 일체감을 경험하기 위한 매개였다. 예술가는 그렇게 영감을 얻었고 민중들은 그렇게 고향과의 일치감을 맛보았다. 19세기 중엽 이후가 되자 예술가들과 노동자들은 고립을 인정하고자 술을 마신다. 예술가들은 술과 퇴폐로 부르주아적 도덕에 도전하고 고독을 자초하며 그 속에서 피어난 광기로 작품을 쓴다. 노동자들은 술로써 이미 확립된 고립(즉, 소외된 자아)을 지우려 한다. 즉, 술 마시는 행위로써 그 고립을, 그 패배를 인정한다.

다른 하나는 술은 신이되 어떤 신이냐 하는 것이다. 19세기 중엽 이전의 술은 유기물의 신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발로 빚은 포도주를 마시고 그것에 취한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피가 따뜻해지고 몸이 가벼워지고 정신이 고양된다고 말한다. 19세기 중엽 이후의 술은 무기물의 신이다. 사람들은 술의 근원이 연기를 내뿜는 공장인 것을 본다. 그것을 마시면 신체가 마비된다. 돌로 변한다. 무기물이 된다. 사람들은 무기물이 되기 위해 술을 마신다.  -서구 사회에서 이것은 신의 죽음 이후라는 테제로 다루어질 만한 얘기가 될 것이다. 신이 더 이상 영적인 것이 아닌 한 그것은 광물적인 것이 될 터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는 결국 같은 말이다. 그리고 그 배후엔 도시가 있고 산업 사회가 있고 자본주의가 있고 합리주의가 있고 관료주의가 있고 고립된 자아들이 있고 서구 사회의 역동적 역사가 있다. 술을 통해서든, 예술가들의 펜끝을 통해서든 그것들은 그렇게 드러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예를 들어 19세기의 시인들은 부루주아 계급의 위선적 도덕에 도전하기 위해 스스로 위악에 빠져들었다. 유용함의 인간상에 도전하기 위해 스스로 철저하게 무용한 인간이 되었다. 그러면서 부르주아 계급 사람들이 대경실색할 작품들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면 지금도 그런 반항이 가능한가? 당연히 아니다. 고흐도 게바라도 다 상품이다. 시대는 반항을 어떻게 다루는지 그 완벽한 해법을 찾아내었다. 상품으로 다루면 된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우주를 설명할 수 있는 완벽한 체계가 있다. 그러므로 보들레르는 환자로 다루면 된다.

근원적 반항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 반항의 대상이 부재하거나 편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성모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현실력 있는 신이 존재해야 한다. 어쨌거나 그런 것들은 지난 세기에 다 사라졌다고들 한다. 어쨌든 좋다. 문제는 지금이고 여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 시대의 고전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문제를 받아안고 그것을 다룰 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하자. 여기서부터는 긴 침묵이 이어질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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