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기억에 이 책을 첫 번째로 읽은 것은, 지금이 두 번째이고, 중2때였던 것 같다. 무척 충격적인 책이었다. 루팽 대 홈즈 수준의 독서에서 넘어갔으니 그랬을 수도 있는데, 첫 문장의 장황함, 충격적일 정도로 적나라한 인간 실재에 대한 묘사, 그러다 후반부의, 전혀 다른 분위기의 사상범들, 늙은 현자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신약에 대한 강독까지... 이런 것이 소설이구나 하는 깨달음에서, 이런 것이 소설인가 하는 의구심 사이를 오가게 하는, 쉽게 갈피를 잡기 힘든 작품이었다. 


이번에 다시 읽었는데 충격은 여전했다. 톨스토이 개인의 주관이 불쑥불쑥 끼여드는 것에 대해서는 선호나 평가가 엇갈릴 수 있겠지만, 그 점을 제하고 보면 이 책은 시간의 풍화를 전혀 겪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19세기에 톨스토이가 이 책을 출간하여 중2인 내가 그 책을 읽으면서 느꼈을 시간적 괴리감과 현재의 내가 부활을 다시 읽으며 중2적 시대를 되돌아보았을 때 느끼게 되는 시간적 괴리감 중 어느 것이 더 클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말도 안되는 엉뚱한 이야기일까? 종종은 우리가 사는 지금의 시대는 참으로 노회한 시대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부활의 곳곳을 장식하는 이상주의적 귀절들은 때로는 참을 수 없는 위화감을 주지 않는가? 그러나 아이러니는 부활은 철저하게 사실주의적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상은 어디에서 배어나오는가? 그것은 도저한 사실주의와 노회함 속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부활이라는 작품은 이에 대해 긍정의 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확실성에 관하여 - 개정판 비트겐슈타인 선집 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 / 책세상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주 얄팍한 책이지만, 읽는 데 정말 정말 오래 걸렸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이 책이 난해하다든지 심오하다든지 해서라기보다는, 솔직히 말해서, 지루해서 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이런 지루함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비트겐슈타인이 죽기 직전까지 써내려간 철학적 단상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이 철학자의 최종적인 검수가 이루어지지 않은, 말 그대로 날 것의 노트 묶음이다. 하나의 주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집요하게 고찰하고 있다지만, 반복은 불가피하고, 그 집요한 고찰들에서 빼어난 영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는 읽는 내내 긴장감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철학하는 방식을 알게 해준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는 있다고 본다. 


책의 내용은, 무어라는 영국 철학자가 쓴 일련의 논문들에 대한 코멘트들로 구성되어 있다. 철학을 희화화할 수 있는 사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무어는 "나는 여기 내 손이 있다는 것을 알아"와 같은 명제에서 우리 의식 밖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명제를 도출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도 여타의 철학자들에 동조하여 무어의 증명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에게 독특한 것은 무어가 '알다' 라는 말을 오용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즉, 무어가 제시한 명제들은 '알다'라는 말과 의미롭게 어울릴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도, 그 확실성을 부정할 수 없는 그런 명제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예컨대, "여기 내 손이 있어"나 "지구가 존속하고 있어"와 같은 명제들. 


내 관점에서는 비트겐슈타인에 별로 동조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도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의미로움'에 대한 기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예컨대, 이른바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랭귀지 게임이라는 기준점을 도입하여, 예컨대 무어가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알다' 라는 말은 오용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 논고>에서도 기준점은 다르지만 똑같은 짓을 했다. 나는 사고에 자꾸 제한을 두려는 이런 검열관적 태도에 반감이 있다.) 그러나 오용을 말하려면 어떤 특정한 사용에 특권적 권위를 주어야 한다. 이 경우 비트겐슈타인에게 그것은, 참 혹은 거짓이 될 수 있는 진술이라는 의미에서의 명제와 어우러져 사용될 수 있는 한에서의 '알다'의 용법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러한 용법의 '알다'에 특권을 주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예컨대 비트겐슈타인은 "나는 여기 내 손이 있다는 것을 알아"와 "나는 지구가 존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를 동일한 기준에 의해 '알다'라는 말을 오용한 것이라고 판단하지만, 이 두 문장의 기이함은 각각 다른 이유에서 연유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의의가 사태의 구체성에 우리의 주의를 돌리게 한 것이라 한다면, 그 사태의 구체성은 더욱 구체적인 구체성이어야 할 것이다. (이 책에는 재판정의 비유가 허다하게 나온다. 비트겐슈타인은 판사의 역할을 한다. 반면 나는 피고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본다. "말은 그렇지만, 법에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세상에나!")


(인간 비극. 소년이 얼마나 빨리 늙는가에 대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증법적 이성비판 1 - 실천적 총체들의 이론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65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자 외 옮김 / 나남출판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 다녀오신다는 분이 책 부탁할 거 있으면 부탁하라고 하셔서 알라딘에서 검색해 보다가 우연찮게 발견한 책. 한국어판 제1권이 오랫 동안 품절 상태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었다. 출판사에 감사!

사르트르 생전 발간된 제1권, 그리고 사후 발간된 제2권, 합하여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또, 한도 끝도 없이 이어져서 독자들이 따라가다가 기어이 길을 잃게 하고 마는 심란하고 난해한 논증들. 게다가, 예컨대 "비판"의 서론 격인 "방법의 문제"의 가장 유명한 문장인 "마르크스주의는 우리 시대의 뛰어넘을 수 없는 철학이다"가 보여주듯이 너무도 사르트르 당대적인, 그 마저도 푸코가 한껏 조롱했듯이 그의 시대에 이미 시대 착오적이라 비판받은 주제들... 이 모든 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역자들의 노고다. 아무도 사르트르의 철학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지금 시대에 사르트르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저작을 권당 600 페이지가 넘어가는 3권의 책으로 번역해 내신 역자분들의 노고에 존경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존재와 무"와 "비판" 사이에서 단절을 읽어내는 것이 한때 유행이었던 것 같은데, 이러한 단절론은 이제 의미도 없고 지지될 수도 없다고 본다. "비판"이 마르크스주의적 저작이냐에 대해 사르트르 자신의 의견도 계속 왔다 갔다 했지만, "존재와 무"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비판"에 "존재와 무"의 저자의 논리 회로가 그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놓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수행한 기획을 따라하려 했다. 즉, 존재론-인식론-심리학-윤리학을 하나의 체계 안에서 종합하려 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심리학까지의 단계를 마쳤고 후속하는 저작에서, '이어서' 윤리학을 다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윤리학에 관한 저작을 써내는데 최종적으로 실패했다. 그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윤리학을 존재론에 기반해서 설립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심리학, 윤리학이 그 자체로 사회, 역사적인 차원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에 사회, 역사적 차원을 도입하려는 노력이 바로 "비판"이고, 예컨대 마르크스주의는 사르트르가 "방법의 문제"에서 말한 것과는 정반대로 사르트르의 철학(실존주의라 부르든 어떻든)의 체계에 부속하게되는 학문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이러한 결론에 별 이견이 없을 것 같다. 

그러면 "비판"에서 사르트르가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역사의 가지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역사에 하나의 의미가 있는가, 혹은 역사의 (대문자) 진리가 있는가 하는 문제. 이러한 문제 설정, 혹은 문제 설정에 대한 표현 방식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한 것처럼 작위적인 것처럼 보인다. 푸코가 비꼰 것처럼 사르트르는 헤겔의 유령일 뿐인가?

이렇게 생각해 보자. 한국 프로 야구에 어떤 감독이 있다. 사람들은 그 감독이 선수를 혹사시킨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 감독은 선수가 성장하려면 한계를 넘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투수를 벌투시켰다고 비판한다. 그러면 그 감독은 그 투수가 길게 던지면서 밸런스를 잡기를 바랬다고 말한다. 지친 선수들을 특타로 벌을 준다고 비판한다. 그러면 그 감독은 스포츠에서 위기를 타개하는 길은 연습 뿐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 감독의 말이 앞뒤가 안맞고 모순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 감독의 말은 모순되는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모순은 없다. 그 감독의 논리는 두 가지 보호막 아래서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하나는 관점의 다수성이다. 이런 저런 다양한 관점들이 있는데, 어떤 관점이 다수를 이룬다고 해서 그것이 현장의 감독의 관점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근거가 있는가? 다른 하나는 상황성이다. 똑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날 수는 없다. 모든 사건은 다 최초이며 고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반적인 기준(보통은 경험적으로 귀납된 것)을 가지고 어떤 특수한 상황을 평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비판하고 싶어하지만 그 노감독은 빠져나갈 수 있다. 이 노감독과 똑같은 비판을 받는 인간 과학의 영역 하나를 대라면 바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현상이든 다 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서 "억지다", "아전인수적인 논리다"라는 느낌을 받는다. 다시 말하면 거기에 가지성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비슷한 경우는 많다. 서구의 인류학자가 브라질에 가서 현장 조사하고 발간한 보고서, 그 자신 역사 안에 있는 역사가가 써낸 역사학 저술... 이런 텍스트들이 소설이라는 쟝르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인가? 차라리 인간학적 텍스트들의 과학성을 선험적으로 규정하지 말고, 소설 등과 함께 하나의 담론의 공간 안에 넣고 그 안에서의 다이나믹을 관찰하는 것이 더 나은 일 아닐까? 아마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방법이 더 세련되고 현대적인 방법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을 취할 때 우리가 포기하게 되는 것이 바로 "진리"라는 개념이다. 진리란 담론들에 위계를 도입하는 폭력에 불과한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그런 개념을 포기할 때가 되었는가? 사르트르는 바로 이 입장에 반대한다. 그러므로 현대에 반대한다. 만약 우리가 현대적인 사고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느낀다면, 내 생각에, 제일 먼저 참고해 보아야 할 철학자 중 하나가 바로 사르트르일 것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어떤 답을 내놓았는가? 안타까운 소식 두 가지를 알려야 하겠다. 첫째는, 사르트르가 자신의 기획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역사의 가지성을 본격적으로 다룰 것으로 광고된 "비판" 2권은 미완성의 상태로 유고로 출간되었다. 둘째는, 사르트르의 철학이 사상의 역사의 지층 아래 파묻혀져 아무도 그것을 거들떠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 후자는 좀 과장된 이야기일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비판"이 사회 철학에 관한 저작이지만 사회학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고 단언하는 책을 하나 읽었다. 그러나 이를 반박하는 증거들은 많다. 또 이렇게 물어보자. 68 혁명에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했고, 68을 예견했으며 68 직후 이를 분석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적 틀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받았던 철학자와 그의 저작은 무엇인가? 답은 사르트르와 "비판"이다. 사르트르나 "비판"이 위대하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것의 현대성이 매몰되고, '구태여' 외면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나는 주체성과 타자성의 관점에서 프랑스 현대 철학사를 총괄하는 책을 하나 읽었다. 놀랍게도 거기에 사르트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왜 놀라운가? 현대 철학에 주체성과 타자성을 주제로 들여온 철학자가 바로 사르트르이기 때문이다. 메를로-퐁티의 철학을 현상학과 구조주의의 긴장 안에서 규명한 책을 하나 읽었다. 메를로-퐁티에게 후설 다음 가는 유령은 사르트르다.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역사에는 의미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고, "지각의 현상학"에서 메를로-퐁티는 피상적인 논리로나마 이를 반박했다. 그리고 이후 이 문제를 꾸준히 거론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메를로-퐁티가 준 힌트를 사르트르가 "비판"에서 수행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뿔싸, 그 책은 "비판"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넘어갔다! 이 모든 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비판"은 현재 '맹목적'으로 잊혀진 저작이라는 것이다. "비판"은 적절한 이론적 평가를 받고 철학사의 적당한 선반 위에 놓여진 것이 아니라, 마치 부정타는 물건인 것처럼 긴 서가의 바닥에 내팽겨져 있다는 것이다. 왜일까? 방대하고 난해하다. 구 세대의 철학하는 방식을 대표한다. 이론적 성패와 상관없이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사르트르의 그림자가 후대 사상가들에게 너무 길고 진하게 느껴진다... 다 맞는 말들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다른 데 있다. 푸코는 학창 시절 사르트르를 읽었느냐는 질문에, 자신이나 주변 학생들은 사르트르보다는 메를로-퐁티를 주로 읽었다고 말했다. 메를로-퐁티가 학적으로 더 치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르트르의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가 싫다는 것이다. 아마 사르트르의 철학에 혐오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존재와 무"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르트르의 이러한 총체화하려는 태도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자들이 철학자들을 싫어하는 이유와 똑같다. 그러나 혹 우리 시대의 파편화 경향에 질려서 뭔가 종합적인 이해 방식을, 그러나 관점의 다수성과 사건의 고유성을 포기하지 않은 채, 그 우연성, 우발성, 만남의 방식에 주의한 채 도모하려 한다면 최고의 참조점은 바로 사르트르일 것이다. 그리고 사르트르에 대한 그 독해는 사르트르에 대한 최초의 독해일 것이다. 이 점은 여러가지 관점에서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르트르의 "비판"을 사자. 그리고 읽자. 난해하다고 느낀다면, 그리하여 좌절을 느낀다면 이렇게 생각하자. 나는 "비판"의 최초의 주석가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차이와 타자 현대의 지성 108
서동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알라딘 리뷰들을 참고하여 한국 다녀오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산 책이다. 보통 긍정적인 리뷰들을 잘 믿지 않는데, 이 책의 경우엔 달랐다. 궁시렁 없이 내내 즐겁게 읽었다. 그리고 그동안 한국인 저자의 철학 저술들을 외면해 온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저자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이 책은 프랑스 출신 철학자들이 주로 주제화한 현대 철학의 커다란, 아마 가장 커다란 문제인 주체성과 타자성에 대해 들뢰즈를 중심으로 레비나스, 사르트르 등등의 철학자들을 호명하며 명료하고 신뢰성 있게 서술하고 있다. 이 '명료성'과 '신뢰성'이라는 말이 아마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을 지시할 것이다. 즉, 저자가 정직하다는 것이다. 철학 저술들이 이러 저러한 온갖 종류의 해석가들의 이름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경우는 아주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저자가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고 그것에 대해 자신의 언어로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료성과 신뢰성은 저자의 이러한 정직한 노고와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물론, 이 책의 한계를 언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라딘에 리뷰를 쓴 다른 어떤 분이 지적한 것처럼, 각 철학자들의 관계가 어느 정도는 병렬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적은 항상 구체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이 책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예를 하나만 들기로 하겠다. 저자는 레비나스의 타자론이 사르트르에게 크게 빚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전혀 비밀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슷한 사상을 표명하고 있는, 두 철학자의 문장들을 병렬적으로 비교하는 것 이상의 작업에 대한 요구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저자는 이런 종합적 검토의 계기를 계속 놓치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사르트르는 타자의 시선에 대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대상적으로 파악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수치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때 수치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대자와 하나의 통일을 이루고 있는 가치에 대한 의식이다. 그러므로 수치란 본질적으로 윤리적 의식인 것이다. 조금 더 말해 보자. 저자는 레비나스와 사르트르의 형이상학에 대한 견해가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형이상학에 대한 사르트르의 견해는 칸트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형이상학의 긍정성을 인정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 즉, 존재론의 성과들에 종합적 전망을 제시해 주는 한에서 형이상학도 의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타자 이론에 대해 이러한 형이상학적 종합을 적용한 결과는, 사르트르 자신에게도 놀랍고 우리에게도 놀라운 것으로, 타자성은 나와 타자들이 하나를 이룬 전체의 일종의 모험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상의 서술을 더 상세하게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컨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내가 선택한다는 것은 인류에 대해 선택한다는 것이다" 라고 쓰면서 사르트르가 상정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타자와 내가 하나를 이룬 전체에 대한 이론일 것이라는 점이다. 즉, 레비나스에서 특히 분명한 것처럼 윤리성은 타자성에서 오고, 사르트르의 경우 그것은 좀 더 복잡한 양상을 갖지만, 어쨌든 타자성과 윤리성의 관계에서 두 철학자의 이론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저자는 이러한 부분을 어느 정도는 기계적이고 병렬적으로 처리한 감이 있다. 그래서, 예컨대 주체라는 개념을 고수한 레비나스와 주체를 소거한 들뢰즈의 입장을 단순히 병렬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금 여기를 반영하여 저자의 특권적 입장에서 종합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점이 저자의 한계를 뜻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저자에게 있어 어떤 단계를 지시할 것이다. 이 책이 출판된 것은 2000년이므로,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저자의 다음 책들을 입수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하나 더 꼭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저자는 프랑스 철학 연구자로 보이고, 프랑스 철학은 특히나 지역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현대 프랑스 철학은 무엇보다도 유럽의 역사성 속에서의 유럽인의 자기 의식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 사는 한국인 철학자로서 일종의 분열 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분열 의식은 국내 프랑스 철학 써클 안에서 종종 매우 병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곤 한다. 제삼자에게는 분명 밥그롯 싸움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저질 논쟁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에게는 그런 자학적 자기 표출의 어떠한 징후도 없다. 즉, 이 책의 저자는 건강하다. 예컨대, 나는 저자의 우찬제에 대한 짤막한 평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다. 문학계가 철학적 개념을 끌어다 쓰는 것은 시비거리가 될 수 있다. 문학계의, 말하자면 외연 확장에 대해 철학계는 엄밀성에 주의할 것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개념의 인생 살이 아닐까? 사상의 경찰관이 되는 것은 사상의 연구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천박한 직업 아닐까? 나는 저자 서동욱이 "이제 우리는 우찬제의 상처론과 타자론의 조우가 만들어낼 풍요로운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132페이지) 라고 쓴 부분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문학자(가)들을 존경하고 격려하고 들볶는 것은 편집장 이상으로 철학자의 일이기도 하다. 문학은 철학자의 소중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외래적인 것에 대한 분열적 의식을 치료해 주는 것은 철학적 저술들 밖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어떤 사고, 지금 여기의 바탕 위에서 직접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어떤 사고에 주의하는 것 뿐이리라. 그것은 오로지 지금 펼쳐지고 있는 삶에 대한 주의, 곧 존경, 곧 사랑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리라. 나는 <차이와 타자>의 저자 서동욱이 이런 길 위에 있음을 깨닫는다. 이러한 건강한 저자들이 더 있겠지? 찾아 볼 일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weekly 2016-06-10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동욱의 책을 검색해 보았는데 <차이와 타자>에 후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 책은, 어떤 독자(리뷰를 쓴 사람)의 말을 따르자면, 레비나스나 들뢰즈의 것이 아닌 서동욱의 철학이라 말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은 아직 출간되지 않은 것 같다. <차이와 타자>에서 보여준 서동욱의 명민함에 사람들은 그런 기대들을 많이 가졌었나 보다. 벌써 십여년도 더 된 이야기를 지금에서야 하는 것도 우습긴 한데... 어쨌든 우리의 기대가 타인의 야망을 규정할 방법은 전혀 없을 터이다. 세상이 우발적이고 만남적인 것이라면, 분명 기대라는 것에 할당된 자리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때에...
 
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영국 맨 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기에, 예전에 읽다 만 것을 다시 꺼내 읽어 보았다.

 

<채식주의자>는 세 편의 중편으로 이루어진 연작 소설이다. 어느날 갑자기 고기를 먹기를 거부하고 나무가 되기를 원하는 영혜라는 인물을 중심에 설정하고 있다.

 

즉각적으로 이 소설은 타자성, 육체성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현대적 고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이 소설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고기로서의 자신의 육체를 거부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나무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반항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 그것은 삶의 어느 자락의 어느 한편에 어떤 빛을 비추어 줄까?

 

미리 말하자면 이에 대한 답은 없다. 아마 작가는 이런 문제 의식 자체를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작가는 단지 고기를 먹기를 거부하고 자신을 식물적인 삶으로 향하게 하는 한 인물에 대한 간단한 아이디어밖에는 갖고 있지 않은 듯 하다.

 

작가에게 정신분석학자나 심리학자가 되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작가는 더 깊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소설적 완성도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그 깊이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세 편의 중편들은 허다한 결점과 아쉬운 점들을 남기고 있다. 그것들을 세세하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러한 것들은 작가가 작품의 깊이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주제에 이런 허술한 이야기는 꽤나 실망스러운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weekly 2016-05-21 0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영국의 맨 부커상 국제 부문을 수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이 포스팅을 한 것도 한강이 수상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얼마 전에 런던 시내의 가장 커다란 서점인 호일스 서점에 갔을 때 입구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한강의 책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았었다. 뿐만 아니라 3층 벽면에 광고 패널이 여러 장 붙어 있기도 했다. 거기에는 ...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는 구절이 있었다. 지금 ...가 누구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를테면 젊은 비평가들이라든지 그런 것이었을 것 같다.

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한강을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 오늘의 한국 작가에 대해 묻는다면, 나의 빈곤한 독서와 안목에도 불구하고 누구 한 두 명을 반드시 지목해야 한다면, 나는 한강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 말은, 적어도 내 생각에는 오늘의 한국을 이야기할 줄 아는 젊은 한국 작가가 그만큼 희소하다는 뜻이다. 누군가 용기를 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