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과 예술가
알렉상드르 라크루아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2년 11월
평점 :
품절


알코올과 예술가라... 이런 제목의 책에서 새로운 뭔가가 나올 수 있을까? 충분히 의심할 만 하다. 그러나 프롤로그의 첫 몇 페이지를 읽어보면 바로 작가의 통찰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첫 몇 페이지를 읽고나서 책날개에 박혀 있는 작가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 보았다. 잘 생기기까지 하였다.

작가는 이 얇고 읽기 쉬운 책에다 굉장한 숙고를 요하는 주제를 담아놓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작가가 근원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여러 예술가들의 에피소드는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과 그가 실제로 한 말 사이에 혼란이 빚어지기도 하는 것 같다. 나는 작가가 이런 주제를 이야기하는데 "술과 예술가"라는 테마를 빌려온 것은 상업적 의도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주제에 맞춰(그것이 술이었다면) 예술가들의 에피소드는 작은 테마로만 이용되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이 얇은 책에 대해 굉장히 긴 발췌를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막상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니 너무 많은 수렴되지 않은 주제가 떠오른다. 나는 이것을 작가의 악덕 탓이라고 핑계를 대겠다. 작가 자신이 이것 저것을 찔러보기만 한 채 그것들을 하나로 통일시켜 놓지 못하였다. 작가가 그럴 수 있었다면 철학자가 되었을 것이리라.

그래도 굳이 하나의 줄기를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 19세기 중엽부터 술과 인간과의 관계가 달라졌다. 1858년에 알코올 중독이라는 표제가 백과사전에 처음 오르게 되었는데 주로 공장 노동자들과 관련된 현상으로 기술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해 보들레르가 "인공낙원"의 초판을 내었다.

자, 이제 19세기 중엽 이전과 이후의 술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 말해보자.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하나는 내면과 외면에 대한 것, 즉 고립과 통합에 대한 것이다. 19세기 중엽 이전에 술은 신과 자연과 공동체와의 일체감을 경험하기 위한 매개였다. 예술가는 그렇게 영감을 얻었고 민중들은 그렇게 고향과의 일치감을 맛보았다. 19세기 중엽 이후가 되자 예술가들과 노동자들은 고립을 인정하고자 술을 마신다. 예술가들은 술과 퇴폐로 부르주아적 도덕에 도전하고 고독을 자초하며 그 속에서 피어난 광기로 작품을 쓴다. 노동자들은 술로써 이미 확립된 고립(즉, 소외된 자아)을 지우려 한다. 즉, 술 마시는 행위로써 그 고립을, 그 패배를 인정한다.

다른 하나는 술은 신이되 어떤 신이냐 하는 것이다. 19세기 중엽 이전의 술은 유기물의 신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발로 빚은 포도주를 마시고 그것에 취한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피가 따뜻해지고 몸이 가벼워지고 정신이 고양된다고 말한다. 19세기 중엽 이후의 술은 무기물의 신이다. 사람들은 술의 근원이 연기를 내뿜는 공장인 것을 본다. 그것을 마시면 신체가 마비된다. 돌로 변한다. 무기물이 된다. 사람들은 무기물이 되기 위해 술을 마신다.  -서구 사회에서 이것은 신의 죽음 이후라는 테제로 다루어질 만한 얘기가 될 것이다. 신이 더 이상 영적인 것이 아닌 한 그것은 광물적인 것이 될 터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는 결국 같은 말이다. 그리고 그 배후엔 도시가 있고 산업 사회가 있고 자본주의가 있고 합리주의가 있고 관료주의가 있고 고립된 자아들이 있고 서구 사회의 역동적 역사가 있다. 술을 통해서든, 예술가들의 펜끝을 통해서든 그것들은 그렇게 드러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예를 들어 19세기의 시인들은 부루주아 계급의 위선적 도덕에 도전하기 위해 스스로 위악에 빠져들었다. 유용함의 인간상에 도전하기 위해 스스로 철저하게 무용한 인간이 되었다. 그러면서 부르주아 계급 사람들이 대경실색할 작품들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면 지금도 그런 반항이 가능한가? 당연히 아니다. 고흐도 게바라도 다 상품이다. 시대는 반항을 어떻게 다루는지 그 완벽한 해법을 찾아내었다. 상품으로 다루면 된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우주를 설명할 수 있는 완벽한 체계가 있다. 그러므로 보들레르는 환자로 다루면 된다.

근원적 반항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 반항의 대상이 부재하거나 편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성모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현실력 있는 신이 존재해야 한다. 어쨌거나 그런 것들은 지난 세기에 다 사라졌다고들 한다. 어쨌든 좋다. 문제는 지금이고 여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 시대의 고전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문제를 받아안고 그것을 다룰 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하자. 여기서부터는 긴 침묵이 이어질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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