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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의 긴 여로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평점 :
극은 가족 간의 첨예한 갈등으로 시작하여 그렇게 끝난다. 그 갈등은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가족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갈등의 골은 깊고 날카롭지만, 아무도 가족이라는 난간을 부수는 데까지 자신을 몰아가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유머를 찾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에, 보통은 중재자로 설정되기 마련인 어머니마저 갈등의 큰 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읽은 유진 오닐의 또다른 작품, "느릅나무 밑의 욕정"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에, 어머니(젊은 새어머니)는 그 갈등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끄는 계기로 그려졌었다. 희곡 작품은 아니지만 엘리아 카잔에 의해 영화화된 존 스타인 벡의 "에덴의 동쪽"에서도 아버지-아들, 그리고 어머니가 갈등구조를 이룬다. 그러나 그 작품에서는 상처를 치유하는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유진 오닐의 이 작품은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낼 뿐 치유책을 모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정직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그러하듯 극에서도 숨 쉴 곳이 없다. 꽉 막혔다. 그런가? 아니, 그렇지 않다. 그날 밤 가족들은 모두 술과 마약에 쩔어 있다. 모든 갈등의 단초를 제공한 구두쇠 아버지는 폐병 걸린 아들을 위해 싸구려 영세민 요양소를 예약함으로써 마지막 연민마저 박살내 버린다. 그런데 바로 그 장면에서 가족들은 입을 열어 시를 읊는다. 사실주의의 절정에서 피어오른 시는 날카로운 갈등의 모서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현실에서는 마약에 취한 노파일 뿐인 메리마저 마치 그리스 신화의 여신처럼 알듯 모를 듯한 자신만의 시를 노래한다. 그렇게 막이 내린다.
긴 하루의 끝에 걸린 밤. 밤이란 잠이란 꿈이란 무엇일까... 전도유망했던 셰익스피어 전문 배우였던 아버지 제임스는 분명 햄릿의 대사를 읖조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