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니콜라스 카 지음, 최지향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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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읽은 기간: 3/26 ~ 3/28
번역 상태: 나쁘다

한 마디로 평가하자면 이 책은 맥루한의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명제에 대한 각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중적인 의미에서 그렇다. 첫째는, 말 그대로 맥루한의 저 명제에 대한 확장 부연이 이 책의 내용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러므로(혹은 그러나) 이 책은 맥루한의 통찰 이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맥루한의 명제는 미디어가 단순히 콘텐츠를 전해 나르는 도구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콘텐츠임을, 즉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임을, 그리고 그 영향은 암시적임을 뜻한다.

저자는 타자기를 사용하게 된 니체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니체에게 벌어진 일이나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하게 된 한국의 작가들에게 벌어진 일이나 똑같다. 즉, 문체가 간결하고 명료하게 변했다는 것. 그러므로 사고도.

저자는 우리 시대, 즉 인터넷의 시대를 조망하기 위해 신경 과학, 미디어의 역사, 심리학 등등의 영역으로 독자들을 끌고 다닌다. 다소 산만하고 피상적이란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가장 읽을 만 했다.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책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저자의 무모한 문명 비판적 관점과 비교하면, 적어도 읽으면서 헛웃음을 짓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후반부의 농담들 하나 하나를 들어 비판하는 것은 그만 두기로 하자. 소모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터넷 안에서 집중을 유지하는 것이 극히 힘들다는 것을 잘 안다. 아니 이 말에는 어폐가 있다. 우리가 인터넷 안에서 하는 일이란 "집중"이 아니라 "서핑"이기 때문이다. 전자책이 책을 대체할까?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건 신문이나 잡지는 그렇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서핑"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오디오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은 전자책으로도 만들어 질 수 있으리라. 요점은 "집중"의 공간은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다작의 작가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글을 쓰려거든 전화기부터 끊어 놓으라고 했다. 역시 다작의 철학자이자 놀랍도록 분주한 인간이었던 사르뜨르는 하루 일과 중 자신만의 시간을 일생에 걸쳐 관철해 내었다. 또, 오만가지 일을 해낸 한 명의 인간 크누스는 자신의 생산성의 비결을 "한번에 한가지 일만 하기"라고 요약해 주었다. 따지고 보면  멀티태스킹이란 것도 동시에 여러가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에 하나의 일만 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를 깊게 만들고, 우리를 생산성 있게 만드는 것은 홀로인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것을 견뎌내는 지성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는, 아주 평범한 상식을 재확인하게 된다. 저자는 바보같이 미래의 프로그래머들에게 인간의 두뇌를 과도하게 기계에 의존케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지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 나는 반대로 얘기하겠다. 아이폰의 텍스트 자동 완성 기능을 좀 더 똑똑하게 만들어 다오, 무척 짜증이 난다오! 인터넷의 빠름은 우리 문명의 빠름을 반영한다. 나는 그것을 거역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에 휩쓸리고 싶지도 않다. 모두가 그 빠름에 허우적댈 때도 자기 중심을 잡고 차곡 차곡 성과를 뽑아낸 사람들이 있었지 않은가? 나는 그 사람들을 본받고 싶다. 가장 효율적인 미디어를 이용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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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의 이해 대우학술총서 구간 - 문학/인문(논저) 40
한전숙 / 민음사 / 198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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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날: 2011/1/17 ~ 2011/2/26 너무 오래 걸렸다!

책 제목은 "현상학"이지만 후설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고 있다. 알기 쉽고 자상하게 쓰여졌다는 장점과, 그것의 이면인 반복적이고 내용이 풍부하지 못하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현상학은 일종의 프로그램, 혹은 방법론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책은 바로 그 프로그램, 즉 제일 철학의 정초를 위한 노력 하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결과는, 책의 내용을 요약하기가 극히 쉽다는 것이다. A4 한장이면 충분할 정도로.

후설은 모든 학의 궁극적 토대가 되어줄 제일 철학을 설립하고자 하는 데카르트적 야망을 갖는다. 그 방법으로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만을 노리고 파헤쳐 들어간다. 작업 결과 밝혀진 것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바대로 의식의 철저한 능동성이다. -이것이 후설 철학의 한 극이다.

그런데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은 의식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질서를 갖춘 채로 의식에 제시된 것들이었다. 즉, 의식은 그것들에 있어 수동적이다. 이러한 의식의 수동성을 후설은 생활세계라는 개념으로 포착한다. -이것이 후설 철학의 다른 한 극이다.

이상이 이 책의 내용에 대한 요약이다. 그럼 후설이 애초 기획한 대로 절대적 주관이나 생활세계적 관념이 제일철학의 토대로 기능할 수 있을까? 이 책만 갖고 이에 대답하는 건 불가능하다. 후설이 발굴해 낸 관념 위에서 기존의 학문이 어떻게 재정립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이야기가 이 책에는 전무하기 때문이다.

저자 한전숙은 후설의 생활세계적 현상학이 이성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낳는 "위대한 감성이 아닐까?" 하며 자신없는 긍정으로 책을 마친다. 그러나 그에 근거를 제시하려는 노력은 전혀 없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값싼, 혹은 게으른 긍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값싼 비판을 떠올리게도 된다.

예를 들면 후설의 현상학은 결국 감각론이나 신체론으로 흐르는 것 같은데, 이러한 기반 위에 물리학을 정립하는 것이 가능할까? 물리학의 역사가 가르쳐 주는 것은 후설식의 내성적 탐구나 감성론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버리라는 것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예를 들어 뉴턴의 질량 개념을 보자. 뉴턴의 이론은 아인쉬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경험에서 너무 직접적으로 길어온 직관에 의존하고 있다(물론 뉴턴의 이론은 이전의 이론에 비하면 충분히 추상적이다). 아인쉬타인의, 예컨대 특수 상대성 이론은 물리 법칙의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에서 나온 것이고 그를 위해, 우리의 경험과는 배치되게도 광속 불변의 원리가 채택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부산물로 질량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따라 나왔다. 여기서 나의 요점은 물리학자들이 따른 길은 후설의 방법론이 아니라 플라톤식의 방법론, 즉 경험이 건네주는 직관에서 가능한 탈피하라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빗나간 화살이기가 쉽상일 것이다. 현상학적 분석의 실질을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일 철학의 설립이란 분명 시대착오적 야망일 것이며 자기소여성에서 명증성을 찾는다는 방법론은 분명 부질없는 기획일 것이다. 그리고 후설의 감성론은 현대인의 강박증을 반영하는 징후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것들이 후설의, 그리고 그의 후계자들의 원 저작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갖고 있는 편견들이다. 모쪼록 편견은 깨어지기를!

(내가 갖고 있는 책은 대우학술총서 인문사회과학 88로 나온 1998년도판 민음사 간 "현상학"이다. 그런데 알라딘에 이 책이 등록되어 있지 않다. 놀라운 일이다! "현상학의 이해"와 같은 책일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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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랩
스튜어트 브랜드 지음, 김창현.전범수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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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88년도에 처음 출판되었고 내가 읽기로 인터넷이라는 단어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비디오 규격 문제 등 낡아빠진 이야기도 많고, 좀 더 냉철한, 다시 말하면 좀 더 통찰력 있는 시각이 요구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들은 이 책이 떠맡고 있는 과업의 무게에서 직접 도출될 수 있는 쉬운 비판일 뿐이다. 이 책은 진행되고 있는 현대, 또는 가까운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 가까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또 얼마나 무모한 일이냐! 그러나 작자 스튜어트 브랜드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물의 전체를 이해하게 되는 시기는 그것이 변화하고 있을 때이다" 브랜드가 천진한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스튜어트 브랜드가 이 책에서 한 일은 기본적으로 기성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으니까. 앨런 케이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이 분명한 이 책의 부제, "Inventing the future at MIT"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이 책은 실제보다 더 낡아 보인다.

예를 들면, "스포츠와 선거중계는 아마도 종전과 같이 생중계로 전달될 것이다. 그 외의 것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와 같은 문장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태를 수사없이 묘사하는 말로 들린다. "독백도 대화가 될 것이고, 비개인적인 것도 개인적인 것으로 되고, 전통적인 매스 미디어도 본질적으로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라는 말도 그렇다.

이 책에서 말하는 모든 사태들의 저변에는 "TV, 음반, 영화, 신문, 잡지, 도서, 그리고 컴퓨터 등 모든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융합 현상"이 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융합 현상의 저변에는 모든 미디어 컨텐츠가 디지털화될 수 있다는 간단한 사실이 놓여 있다. 그리고 디지털화의 실제적인 의미는 정보가 값싸게 운송되고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심층적인 의미는 모든 것이 개인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사람의 입술은 정보를 전달하는 하나의 미디어이다. 그리고 그것은 디지털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입술 모양을 읽고 반응하는 기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흥분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그것은 기성의 것이거나 진행되고 있는 현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정보화기기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점도 바로 그것이다. 즉, "극도로 인격화된 친근한 기술들을 모든 다양한 주문에 맞춰 만드는 것"이다. 이쯤되면 CES에서 스티브 발머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얘기한 것들이나 삼성이 말한 것들에 하등의 신선함을 부여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만다. 낡은 것은 현대인가?

디지털화는 기술적 인민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개인에게 새로운 자유를 부여한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은, 혹은 자유는 새로운 종속을 낳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수신자가 특정 컨텐츠를 선택하고 그것을 재창조할 수 있다는 브로드캐취라는 개념은, 철저하게 대중성만을 위해 설계된 컨텐츠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할 수도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태는 이 문장에 긍정적으로 답하고 있을까, 부정적으로 답하고 있을까?

브랜드의 이 책에서 맡을 수 있는 고전적 품격은 바로 이러한 정치 사회적인 문제를 한 책에 아우르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 같다. 비록 그 문제가 저자 자신의 통찰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그 깊이에 있어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누군들 이러한 문제에서 깊이를 과시할 수 있을 것인가? 예를 들어 최신 스마트폰의 기술에 놀라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기술은 진보된 것이라기보다는 개인화된 것일 뿐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냉철한 사람도 하나의 아이디어가, 하나의 프로토타입이 실험실의 벽을 넘어 대중화되는 사태에 이르러서는 그 흐름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에 대해 쉽게 말문을 열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에 냉철함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브랜드가 천진한 것은 아닐까 의심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사물의 전체를 이해하게 되는 시기는 그것이 변화하고 있을 때인가? 현대의 학문들이 가르쳐 주는 바에 따르면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진정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최종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란, "We've made this world!" ("닥터 후"에서)일 뿐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할 수 있는 말이란, 어쨌든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가 아닐런지. 하나마나한 말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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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한글 사전
가톨릭대학교 라틴어연구소 엮음 / 가톨릭대학교출판부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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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문헌을 읽고 싶어 하면서도 라틴어 문법서를 공부하기보다는 전화번호부를 외우는 것이 덜 고통스럽겠다고 투덜대는 게으른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요령 부리기를 좋아하여 문법서 없이 사전만 가지고 라틴어 문헌을 뜯어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궁리하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 가톨릭대학교 고전라틴어연구소가 편찬한 라틴-한글 사전이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벽돌색으로 양장된 아담한 사전이 좋은 냄새를 풍기고 있다. quousque를 찾아본다. "어느 정도까지"라고 되어 있다. 다음은 tandem이다. 표제 아래에 "quousque tandem ~ ...?(C.) 결국 어디까지"라고 적혀 있는 부분이 보인다. C는 키케로를 의미한다. 키케로의 카틸리나에 대한 연설 첫 부분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내가 바로 키케로의 저 연설을 가지고 라틴어를 공부하고 있으니까!

나는 이 사전이 좋아졌다. 개별적인 단어들은 온라인 라틴어 사전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 어형 변화까지 다 분석해 주는 소프트웨어도 공짜로 웹에서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전들은 관용어나 숙어까지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키케로의 연설에 있는 "Quem ad finem"의 경우 quem, ad, finem을 나열해 줄 뿐이다. 그러나 라틴-한글 사전은 "Quem ad finem?(C.) 언제까지, 얼마동안?"이라고 친절하게 해설해 준다. 자기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텍스트에 대한 해설을 사전에서 읽으니 행복해지더라.

그러나 이 사전은 나같은 완전 초보를 위한 사전은 아니다. finem을 사전에서 찾으려면 원형을 알아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그런 걸 전혀 모른다. 사전이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도 않다. 사전 찾는 법은 고작 문장 몇 줄에 불과하다. 부록으로 동사 변화표 같은 것을 담고 있지도 않다. 물론, 사전을 직접 뒤적여 보면 finis가 그 원형이라는 것을 알 수도 있다. 덩달아 주변 단어들에도 눈길을 한번씩 주게 된다. 그러나 어떻든 이 사전은 초보용은 아니다.

내가 갖고 공부하는 키케로 영어 대역판이 꽤나 상세하여 아직 이 사전을 많이 참조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단어를 찾아볼 때마다 행복한 경험을 할 때가 많다. 좋은 사전이라는 뜻이리라. 예를 들어 볼까? 키케로 연설에 "furor iste"라는 말이 나온다. 영어로 그대로 번역하면 "that madness"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that 정도의 뜻을 갖고 있다고 알고 있는 iste를 이 사전에서 찾아보면 "가끔 경멸의 뜻이 있음"이라는 해설이 보인다. "canis iste 저 놈의 개"라는 부분을 읽고나면 만사가 분명해 진다. 오, 나는 키케로 연설의 뉘앙스까지 파악하고 있다! 눈물이 주룩 주룩^^

내가 다른 라틴어 사전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고, 라틴어에 완전 초보라서 단언할 자격은 안되지만, 적어도 내게는 훌륭한 사전임이 분명해 보인다고 말하고 싶다. 하나씩 장만하여 집안에 들여 놓을 것을 추천한다!

[부록: 혹시 도움이 될까 하여 words라는 라틴어 사전 프로그램을 소개한다.
words는 웹에서 쉽게 구할 수 있으며 공짜이다(google을 이용하라). words를 이용하면 finem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emacs에서 불러들여 사용한다.

=>finem

fin.em               N      3 3 ACC S C                
finis, finis  N (3rd) C   [XXXAX] 
boundary, end, limit, goal; (pl.) country, territory, la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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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 여가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3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오세곤 옮김 / 민음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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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학교 축제때 "대머리 여가수"라는 연극을 한다기에 친구들 따라 극장에 갔었다. 언제 대머리 가수가 등장할 것인지만을 기다리고 있는 관객들에게 무대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참으로 참기 힘든 것이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극장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고 대머리 여가수는 결코 등장하지 않으리라는 걸 확신한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열심히 준비한 배우들과 스탭들은 텅 비어 가는 객석에 결코 실망하지 않았으리라. 예술을 이해 못하는 대중이라는, 그들의 미래, 즉 그들의 잔혹한 현실을 미리 맛보며 의지를 단련할 계기로 삼았으리라. 

그리고 나는 이제야 이오네스코의 희곡 "대머리 여가수"를 읽게 되었다. 아, 그때 연극에 조예가 있는 친구가 있었더라면 저 연극을 보고나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을 것인가? 얼마나 많은 소주병을 까게 되었을 것인가? 인류의 머리 위에 올라 서서 얼마나 많은 부조리를 찾아내며, 그것들을 얼마나 많이 비웃어 댔을 것인가?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리고 우리는 휴머니스트로서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모랄리스트로 비-모랄에 대해 분개하는 것으로 양식을 삼고 스스로의 살아 있음을 확인할 뿐인 것이다. 아, 도대체 인간이란! 

그러나 인간이란 한계를 알아야 한다. 데카르트의 말대로 무한은 신에게 보류해 두고 논리의 난간에서는 인간의 유한성으로 신의 무한성을 측정할 수 없다는 명제를 들어 올리면 되는 것이다. 나의 한계는 인간의 한계이며 그것은 신의 무한한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잘 숨을 수 있었고 잘 살 수 있었다. 반면 한계를 알지 못했던 이오네스코의 그 여학생은 교수의 칼끝에서 피와 장기의 분출을 피할 수 없었다. 인간은 한계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 섬 안으로 피신한 인간이란 스스로에게 가련한 존재다. 대륙이 그의 꿈이라면 언제건 꿈이 현실에 침윤하여 알코올이 물에 섞여들듯 그렇게 섞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섞인 것은 더 이상 물이 아니다. 그는 그동안 잘 숨었고 잘 살았다. 이제 그의 삶에 궁극의 가치를 부여할, 그가 각고의 연구로 완성한 메시지를 공개하자. 그는 성인이 되고 인류는 구원받을 것이다. 

모쪼록 그대의 한계를 알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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