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의 딸들, 한국 여성의 반쪽짜리 계보학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3
백문임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문고본이 많이 출판되었으면 좋겠다. 책의 규격이 그 내용까지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문고본 하면 가벼운 읽을거리 정도로 생각하는 관습이 여전하다. 실제로 과거 문고본을 살펴봐도 그 내용만큼 가벼웠던 것은 아니다. 범우 문고판이나 삼중당 문고판은 주로 10대 청소년 층에서 값싸게 지식과 감성을 얻을 수 있었다지만 그 내용은 그리 가벼운 게 아니었다. 다만 철학이나 사회과학의 문고판화는 익히 알려진 고전에만 적용되었다.

최근 들어 시공 디스커버리 시리즈를 비롯 여러 출판사에서 문고본 교양 서적을 출판하고 있지만 거기에도 그 나름의 한계가 있다. 외국의 저명한 출판사가 발간한 시리즈를 번역해서 출판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여기서 좀 더 나아간 것이 책세상 문고 시리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생산한 지식을 문고판 형태로 출간된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지금까지 그럴 수 없었던 데는 우리 자신에 대한 비하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본다. 우리가 하면 얼마나 잘 하겠는가 라는 자조는 우리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비하로 이어진다. 이런 비하와 자조를 넘어서 젊은 학자들의 참신한 목소리를 접할 수 있게 됨은 우리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책세상 문고 43권으로 출판된 젊은 국문학자 백문임씨의 <춘향의 딸들>은 <춘향전>을 기원으로 한 20세기 대중문화 속의 여성 주인공들에 대한 한 여성주의적 읽기이다. <사랑에 속고 돈에 속고>같은 신파극, <무정>같은 근대소설, 영화화된 <춘향전>들, 60년대 유행한 <월하의 공동묘지>같은 여귀 영화들이 그 대상이다.

이와 같이 대중문화를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읽어내려는 노력은 주로 영화학에 종사하는 연구자들에 의해 대중화되어 있지만, 백문임씨처럼 국문학자가 장르를 뛰어넘어 그것도 주로 영화에 상당수 분량을 할애하여 연구결과를 내놓은 것은 다소 이례적인 일이다. 물론 대학원의 일부 여자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이런 식의 접근 방식을 취한 연구들이 시도된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낯섬으로 인해 보수적인 학계에 쉽사리 수용되지 못한 게 사실이다.

한 세기에 걸친 근대 대중문화의 궤적을 훑어 그 맥을 짚어내려는 시도는 그 자체만으로 참신하고 이후 여러 가지 연구의 시발점으로 충분히 그 가치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맥을 짚어내는 원천으로 <춘향전>이라는 단선적 코드에만 의존한 것은 다소 위험해 보인다. <춘향전>은 수세기 동안 기층민의 삶의 코드의 하나로서 지속적으로 읽혀지고 삶에서 반추된 자양분이겠지만, 그것은 필자 자신도 느낄 테지만, 본격적인 근대화의 시작과 더불어 급속도로 해체된 것이다.

그것은 최근 영화화된 임권택의 <춘향전>이 별 반향을 얻지 못하고 조용히 퇴장한 사실을 보아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필자의 논의에서 결락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춘향전>을 논의의 핵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이다. 왜 유독 <춘향전>인가 그리고 필자의 논의 내용이 사실 영역에 속한다 하더라도 <춘향전>의 여성주의적 코드가 과연 <장화홍련전>이나 <심청전>의 그것보다 지금 시점에서 비판적 생산성이 있을까.

젊은 연구자들의 산뜻한 목소리를 접할 수 있는 문고본을 내고 있는 책세상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문고본의 확대야말로 지식 문화의 대중화를 이룰 수 있는 지름길이다. 그 길에 많은 출판사들의 참가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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